경혜공주는 왕실 여인들이 궁을 떠나 출가(出家)해서 모여 살던 정업원(淨業院)으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는 경혜공주의 올케이자 단종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출가해 있었다. 경혜공주는 27살이었고 정순왕후 송씨는 22살이었다. 동병상련의 처지인 시누이와 올케가 서로 의지하며 여생을 보냈으리라.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경혜공주의 유모였던 백어리니의 보호를 받으며 자을산군(성종)과 같이 자랐다. 하지만, 조선 궁궐에서 왕과 왕세자가 아닌 남자는 10살이 되면 궁 밖으로 나가야했다. 세조 11년(1465년) 4월1일, 경혜공주는 출가한지 4년 후, 아들 정미수가 10살이 되던 해에 아들과 함께 세조를 찾아가게 된다. 경혜공주로서는 자식들을 위해 원수와 담판을 짓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마도 세조의 지원으로 받은 집과 노비를 사용하면서, 속마음이야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세조의 세상임을 인정하게 되었으리라. 예종실록에는 "경혜공주가 정종의 아들(정미수)을 데리고 왕을 알현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예종)로 하여금 다시금 죄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혜공주가 35살되던 해, 갑작스럽게 예종이 죽고 자을산군이 왕(성종)이 되었다. 성종 즉위 후 15세이던 정미수는 돈녕부 벼슬을 하게 된다. 이때 정미수가 죄인 정종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맹렬한 반대 상소가 올라오지만, 성종은 세조의 뜻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무릅쓰고 정미수를 파직시키지 않았다. 경혜공주를 동정하고 세조의 피맺힌 업보를 씻고 싶어 하던 정희왕후(세조 비) 역시 정미수를 지원했다. 어린 아들이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모습을 보니 증오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놓였던 것인지, 정미수가 돈녕부 벼슬을 한지 약 7개월쯤 후 경혜공주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생을 마쳤다. 경혜공주가 죽은 다음 날 성종은 호조에 명해 장례에 필요한 물자를 내려주라는 명을 내렸다. 경혜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하고 있다. 공주의 묘 옆에 작은 봉분이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남편 정종의 가묘(假墓)이다. 정종은 능지처참 당한 뒤 뿔뿔이 흩어버렸기 때문에 시신이 없다. 그런데 이들 묘는 문화재나 기념물 등으로 지정되지 않아서 찾기가 매우 어렵다. 묘역 주변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나 안내판도 하나 없을 정도이고, 관리 상태도 엉망이다. 조선에서 가장 정통성을 가진 적장녀(嫡長女)임에도 10여 년 전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다루어지기 이전에는 전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끝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