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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부흥 운동의 전야
1906년 신년 부흥회를 통해 부흥 운동의 열기가 더욱더 저변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1906년 하반기에 접어들어 평양 선교사 사경회, 서울 선교사 사경회, 목포 부흥회, 그리고 장대현교회 준비기도회 등 네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네 가지 사건은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첫째가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평양 선교사 사경회입니다. 남∙녀, 장로교∙감리교 할 것 없이 평양 지역에 있는 모든 남녀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일주일간 사경회를 개최했습니다. 강사는 원산 부흥 운동의 주역 하디였습니다. 기도와 성경 공부로 1주일을 보내는 동안 성경 공부를 위해 택한 요한 1서는 참석자들에게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특히 하디는 평양 지역 선고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어떻게 자신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 그 후 어떻게 성령께서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셨는지 진솔하게 간증했습니다.
1. 장로교∙감리교 평양 선교사 사경회
성령께서는 그곳에 참석한 자들에게 승리하는 길은 “비통의 눈물과 상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뿐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번하이젤 선교사가 “원산의 하디 의사가 참석했고 우리 모두 커다란 축복을 받았다”라고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사경회 참석자들은 큰 도전과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1894년에 순교한 제임스 홀(James Hall) 선교사의 아내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과 그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도 그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셔우드 홀은 훗날 『닥터 홀의 조선 회상』에서 자신이 12살 때 어머니와 함께 하디의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셔우드 홀의 아버지 제임스 홀과 하디와는 인연이 깊었습니다. 제임스 홀이 처음 부산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왔던 사람이 하디였습니다. 이미 셔우드 홀의 아버지 제임스 홀은 청일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조선인들을 살리려다 1894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하디가 제임스 홀이 세운 평양 남산현감리교회에 와서 평양 선교사들을 위해 사경회를 인도한 것입니다. 셔우드 홀은 하디의 설교에 받은 은혜를 이렇게 담담하게 기록해 나갔습니다.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거나 격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기의 가슴을 열어 듣는 이들의 마음이 그의 마음과 맞닿게 직선적이고 성실하게 설교했습니다. 나는 그날의 설교에 감동했습니다.” 그런 후 그때 들었던 하디의 설교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인간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잘되겠다고 생각하는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체력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는 것 같이 우리의 영적인 강건함도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닥터 하디의 설교는 어린 셔우드 홀의 가슴에 큰 파문이 되어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때까지 셔우드 홀은 고국으로 돌아가 사업가가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예배 후 의료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셔우드 홀 역시 새해만 되면 언제나 새로운 설계를 세우곤 했지만, 작심삼일로 끝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결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홀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의 결심이 현실 속에 실현될 수 있었는가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 의지만으로는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은 이루어지지 못할 게 자명했습니다. 그러나 닥터 하디의 설교에서 영적인 힘을 얻어, 마음이 열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므로 나는 새 결심을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찼습니다. 닥터 하디는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1907년 그는 조선에 ‘대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은둔의 왕국’의 새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백인 소년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업가가 되려고 했던 셔우드 홀은 하디의 집회 때 큰 은혜를 받고 명문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료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해주에 결핵 요양원을 설립합니다. 그와 함께 입국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의 아내 역시 훌륭한 의료선교사였습니다. 이들 부부가 설립한 해주 결핵 요양원은 버림받는 한국의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최초의 결핵 요양원이었고, 수많은 폐결핵 환자들이 치료받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폐결핵 환자를 위한 ‘크리스마스 씰’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도 셔우드 홀입니다.
많은 동료 선교사들을 감동시킨 1906년 8월 하디의 평양 선교사 사경회는 한국의 선교사들을 먼저 영적으로 무장시켜 한국교회 부흥 운동을 예비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자기 마음에 임하셨는지 차분하고 조용하게 전하는 하디의 간증과 설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때 가장 큰 은혜를 받은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 선교사는 자신이 은혜를 받은 요한 1서를 가지고 장대현교회 제직들을 모아놓고 자체 사경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강한 임재 속에 자신의 죄악을 철저하게 통회하는 길만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1907년 1월에 열릴 겨울 사경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2. 서울 선교사 사경회와 존스턴
1906년 하반기에 있었던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은 서울 선교사 사경회였습니다. 이 사경회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위원이자 유명한 부흥사였던 존스턴(Howard Agnew Johnston)이 주 강사를 맡았습니다. 평양 선교사 사경회에 참석했던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 모두가 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존스턴의 집회 기간에 북장로교 연례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존스턴은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 소식을 전하며 한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부흥을 사모하던 선교사들은 같은 선교지 인도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욱더 큰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번하이젤이 자신의 일기에서 “우리 모두에게 매우 유익했다”라고 말한 역사적인 선교사 사경회였습니다.
존스턴의 설교는 한국에 파송 받은 선교사들의 시각을 바꾸어주었습니다. 1907년 6월 스왈른이 증언한 대로 1906년 중반까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이미 한국에서 경험한 이상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선교의 결실이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수확과 비교할 때 엄청나고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해 9월 서울에서 열린 선교사 연합사경회 때 존스턴으로부터 인도 부흥 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스왈른이 증언하는 것처럼 “그러나 1906년 9월, 우리들은 서울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뉴욕에서 온 존스턴 박사가 인도 카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부흥에 관해 우리들에게 말해주면서 1905~1906 두 해 동안에 8,200명이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평양주재 한국 선교사들은 존스턴으로부터 인도 부흥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들이 가졌던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이 땅에도 임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사경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 20여 명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인도 카시아 지방에서처럼 평양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축복이 임할 것을 믿고 정오기도회를 가진 것입니다.
존스턴은 서울 선교사 사경회를 마친 후 평양을 방문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주일예배 때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미 서울 사경회 때 선교사들에게 도전을 주었던 존스턴은 이날 장대현교회 교우들에게 웨일즈 부흥 운동과 인도 카시아 지방 부흥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참석자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그 같은 놀라운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날 존스턴은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인도 교회에 번져 부흥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음을 말하면서 “조선에서 누가 웨일즈 부흥 운동의 주역, 이반 로버츠처럼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겠느냐? 있으면 손을 들고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회중은 잠잠하였고 응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에 신학생이자 장로로서 장대현교회에서 봉사하던 조사인 길선주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손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이것을 본 존스턴 박사는 장차 조선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고, 길선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한 시간에 걸친 이 예배로 인하여 모든 청중들에게 은혜가 충만해졌고, 장대현교회를 비롯하여 전국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조짐을 내비치게 되었습니다.
이후 길선주 장로는 웨일즈 부흥 운동에서 이반 로버츠가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은 것처럼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원대로 그를 한국교회 부흥 운동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1906년 북장로교 연례보고서가 밝히는 것처럼 선교사들에게 행한 존스턴의 강의는 성령께서 듣는 자들의 심령과 삶을 감동해, 그들 가운데 점점 더 놀라운 사랑과 간절한 기도 열을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행한 그의 강의 역시 매우 유익했고 그의 방문은 한국교회 부흥 운동의 발흥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 선교사 사경회와 존스턴의 평양방문을 기점으로 평양 지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계속 가졌습니다. 한 달 동안 기도회를 한 후 한 남자 선교사가 한 달 동안 기도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며 각자 집에 돌아가 선교를 계속하면서 편리한 시간에 기도를 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계속 기도하기로 하고 좀 더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정오에서 오후 4시로 변경하고 저녁때까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그 후 4개월이나 교파를 초월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했던 것입니다.
길선주 장로는 존스턴의 집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한국교회 부흥 운동을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12월 16일부터 22일까지 황해도 재령에서 도사경회가 열렸을 때 길선주 장로가 그곳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재령 지역에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때 김익두가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은혜가 김익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밭 갈듯하는 성령의 맹렬한 보습에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쏟아 놓고 통회의 눈물을 걷잡을 수 없이 흘렸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불길은 용서 없이 각 사람의 마음의 죄를 파헤쳤습니다. 통회하던 이재선 장로는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교회를 위해 준비하여 두신 김익두 조사, 이원민 등 유력한 지도자들이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이 먼저 은혜를 받게 하시고 존스턴을 통해 장대현교회의 수석 장로인 길선주가 은혜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길선주의 뒤를 이을 김익두를 준비해두신 것입니다.
3. 놀라운 목포 부흥회
1906년 하반기에 일어난 세 번째 중요한 사건은 목포 부흥회였습니다. 1906년 가을 프레스톤(J. F. Preston)이 담당하고 있는 목포 지역에서 감리교 선교사인 저다인(J. L. Gerdine)을 강사로 부흥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프레스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저다인 집회에 대해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저다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고, 그의 설교에는 성령의 현시(顯示)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통해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고는 의를 논증해 내자 절제, 죄성의 심판, 죄사함의 필요성, 죽음 같은 정적이 모두에게 임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외과용 수술칼처럼 사람의 심령을 깊이 쪼개어 은밀한 죄악들과 영혼의 숨겨진 암세포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는 그것들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후 죄의 고백이 수십 명의 괴로워하는 영혼들에 임해 힘 있는 남자들도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성령께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암세포와 같은 그곳에 모인 이들의 온갖 사악한 죄악들을 다 도려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앞으로 있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예비하시려는 깊으신 섭리였습니다. 프레스톤이 보고한 것처럼 “이 부흥회의 영향은 전라남도에서 멀고 넓게” 감지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성결하고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부흥 운동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목포 부흥 운동의 소식은 평양 지역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강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평양 지역 선교사들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계속하고, 목포에서 놀라운 부흥 운동 소식이 들려오던 그즈음에 평양 지역에서도 강력한 영적 각성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스왈른이 블레어 선교사와 자신의 선교지역 시골교회 한 곳을 방문했을 때 예배 인도 중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스왈른은 청중을 휩쓸고 있는 강력한 감정을 억제하려고 찬송을 불렀지만, 청중들 가운데 통회의 역사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였습니다. 그는 그 같은 기이한 현상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다른 분이 임재하셔서 청중들을 압도하고 계신 것”을 확인한 스왈른은 그분에게 사회권을 양도하고 가능한 자신은 뒤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스왈른과 블레어는 평양으로 돌아와 이 소식을 다른 선교사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평양 지역에 곧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들은 1906년 가을부터 새벽 5시에 모여 새벽기도회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성령의 임재와 부으심을 간절히 간구한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 오후기도회를 가지며 다가오는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사경회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평양 지역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하나가 되어 부흥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1906년 12월 26일부터 일 주일간 평양시 내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은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를 주강사로 모시고 매일 저녁 기도회를 가지며 1907년 1월에 열리는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사경회 때 영적대각성운동이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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