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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식시인과 논산 *
글/사진 김경식
가난과 병마와의 싸움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늠름했던 시인이 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문학과 호기로 세상을 살다가 서른여섯 나이로 요절한 기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를 잘 알던 이들을 만나 들어보면, 매우 인간적이며 천재적인 시인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고 이름조차 잊어가고 있다.
그의 이름은 김관식(1934~1970) 시인이다. 짧았던 생애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저항으로 가득했다. 파행과 기인적인 삶의 행적들은 당시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독침이었는지 모른다. 만약 그가 사회적인 이중적 모순의 불만들을 문학적인 저항으로 표출하였다면 김지하 시인은 저리 가라였을 것이다.
이런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아 논산으로 떠난다.
2월 하순과 3월 초순의 날씨는 어색하다.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다가 눈발이 휘날리고 눈이 내리다 비로 변하기도 한다. 햇살이 퍼지면 완연한 봄날이었다가 다음날 아침에는 영하의 날씨로 오싹하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사람들이 옷 입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되는 때도 이즈막이다.
2월 마지막 날 한남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로를 달린다. 내일이면 3월, 길손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늘 3월의 하늘은 푸르른 자유를 떠올리게 했다. 3,1절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조국의 사람들에게 민족의 독립과 해방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부르짖어야 했던 절규였다. 일제의 헌병과 경찰들은 만세를 부르는 우리 동포들을 향해 칼로 찌르고 총알을 발사하여 7,500여명을 살상했다. 약 5만 명이 구금되거나 감옥을 살았다. 당시 방방곡곡이 만세소리로 요동쳤고 일제와 친일 앞잡이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3,1운동은 세계가 놀란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의 압제와 무단통치에서 해방되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던 이 날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3월에는 하늘을 자주 보게 된다. 3,1절 노랫말 때문이리라.
3월에는 푸르른 하늘을 자유와 동일한 언어로 받아들이곤 한다. 맑고 푸른 하늘 삽상한 바람이 남실거리는 날 이른 아침에 논산을 향해 떠난다.
떠남은 늘 미지의 땅에서 유적지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의 간접적인 만남과 시대를 뛰어 넘는 인연을 기대하게 한다.
오늘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 본다. 김관식 시인, 박용래 시인, 계백장군, 김장생 선생, 우암 송시열, 윤증 선생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모두 논산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논산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이었다. 유명한 황산벌 싸움이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계백장군의 오천결사대는 김유신 장군에게 패배하여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논산은 북으로 계룡산, 남으로 대둔산, 가운데는 넓은 평야지대이다. 많은 인물을 낳고 키워냈으며 그래서 또한 역사문화유산이 많은 지역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군대 갔다온 남자들에게 논산훈련소 이미지 때문에 이 고장을 보는 시각이 좋지 않게 왜곡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논산은 조선시대 4개현이 한 군으로 통합되어 오다가 지금은 시로 승격한 곳이기에 문화유산이 다른 지역보다 많다. 충청도의 안동으로 생각하면 옳을 것이다.
강경상고
먼저 김관식 시인과 박용래 시인의 어린 시절 추억이 살아 있는 강경읍으로 간다.
천안 논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연무IC로 나오면 강경읍과 연무읍에 쉽게 닿을 수 있다.
박용래 시인과 김관식 시인의 모교 강경초등학교의 운동장을 거닐어 본다. 그들의 발길과 숨길의 흔적은 아무 곳에도 남아 있지 않다.
강경고교를 강경상고로 잘못 알아 헤매기도 했다. 강경읍은 작은 읍인데 초등학교부터 한길가로 모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역시 강경상고의 교정은 정문입구부터 다른 학교와 구별된다. 먼저 자연석에 誠實이라고 새겨 넣은 큰 기념비가 반긴다.
그런데 학교 운동장 주변으로 온통 공사판이다. 이 학교는 1920년에 설립되어 한 때는 전국적인 명문고였다. 강경읍이 지금은 비록 퇴락한 소읍이지만 개화기에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대전에 버금가는 큰 도시였다. 그러나 뱃길의 교통량이 철도에 잠식당하면서 강경읍은 계속해서 축소되고 퇴락되어 왔다. 퇴락은 지금도 계속되어 지고 있는 모습이다. 곳곳에 강경읍이 쇠퇴되는 분위기를 볼 수 있다. 거리와 골목에는 이런 강경읍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 법원지청, 검찰지청, 경찰서 등 3개 청사 이전 결사반대 ”
주민들은 이곳에 있는 관공서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 강경읍이 더 왜소해 질것을 걱정한다. 일단 연무IC에서 강경읍을 진입하는 아스팔트 노면상태는 승차감을 불쾌하게 만든다. 그러나 강경읍에 여기 저기 보이는 일제시대의 건물들을 만나면, 오히려 이 도시가 미래에는 고 건축물로 각광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경상고의 김관식 시인 시비
강경상고 교정에는 김관식 시인의 시비가 반긴다.
정문을 통과하여 왼쪽에 작지만 정성으로 다듬은 시비를 만날 수 있다.
이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 중의 한 편인 ‘이 가을에’가 새겨져 있다.
창 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가을이던가.
녹차(鹿車)에 가구를 싣고
가랑잎 솔솔 내리는
이끼 낀 숲길
영각소릴 쩔렁쩔렁 울리며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도 없네.
반겨 맞아 줄 고향도 집도.
순채나물
노어회(鱸漁膾)
강동(江東)으로 갈거나
구양수(歐陽修)
글을 읽는
이 가을밤에
김관식시인은 한때 어떤 학교 소강당과 실습장을 짓는 공사를 맡았다. 고단한 몸에 지쳐 창밖을 보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고 한다. 마침 계절이 가을이라 그의 낭만적인 기질이 발동한다. 공사판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여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은 것은 현실이 절박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기어코 이 분위기를 담아 자신이 바라는 세상으로 만들었다. 이 시가 바로 ‘가을에’ 라는 시다.
소룡리 전경
이미 고향 마을 소룡리와 강경은 돌아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리운 고향을 두고도 가기가 서먹한 곳이 고향마을이 되어 버렸다. 이 시에는 그런 애잔함이 흐른다.
시비 뒷면에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생전에 문학적 성취를 기리기 위하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92년에 제38회 동창회 일동이 세웠는데 박용래 시인의 시비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김관식 시인은 강경상고 3학년 중퇴를 했다. 시비는 제38회 졸업생들이 세웠다. 이유가 궁금하여 학교 직원에게 물었는데 그도 알지 못한다. 이 시비 옆에 박용래 시인의 대표시 ‘겨울밤’이 함께 서 있으면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해본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가장 인상적인 상징물은 주판알을 형상화한 7개의 화강암 조각이다. 이 주판알이 이 학교를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이 학교의 상징은 박용래 시인과 김관식 시인을 배출한 시인의 학교라고 여긴다. 주판알로 장식된 개교 70주년 기념탑의 위치에 오히려 박용래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박용래 시인은 강경상고 졸업생이다. 그의 시비가 없는 것이 어째 좀 서운하다. 이 학교 출신들은 유독 성공한 분들이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장관이나 은행장보다 세월이 갈수록 시인들의 시는 살아남아 있어 이 학교를 빛낼 수 있으며, 문학기행의 답사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경상고는 1920년 이 지역의 거상들과 큰 부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아 만든 학교다. 거상들이 창립자이기에 상인의 정신을 살려 부자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개교 이래 90년간 2만 여명의 졸업생 중에서 약 1만명 정도가 금융계 출신들이다. 지방 상고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금융인을 배출한 학교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강경상고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던 김정렴 전 비서실장과 김우식 연세대 총장도 이 학교 출신이다. 강경의 쇠락과 함께 강경상고도 이제는 명문고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오늘날 강경은 강경포구의 몰락을 젓갈이라는 기발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강경읍을 한 바퀴 도는 것은 금방이다. 인구 1만명 정도의 소읍이 되어 버렸다.
김관식 시인 생가터
김관식 시인의 고향마을로 가는 길은 연무읍을 통과해야 한다. 연무읍을 통과하여 잠시 견훤왕릉을 탐방한다. 견훤(867~936)은 후백제의 시조이며 황간 견씨의 종조이다. 상주 출신 이자개의 아들이다.
그는 진성여왕 6년(892)에 신라에 반기를 들고 궐기하여 신라의 여러 성을 공격한다. 효공왕4년(900년)에 전주(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라 하였으며, 궁예와 왕건과 대결하게 된다. 경애왕을 자살에 이르게 하였으며, 허수아비 왕으로 경순왕을 세우기도 했다. 자신의 아들 가운데 넷째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신검이 쿠테타를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다. 이때 견훤은 이곳을 몰래 빠져나가 935년에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다.
왕건은 견훤에게 식읍으로 양주를 주었으며, 후백제를 멸망시킨다.
연무읍 금곡리 산18번지 정상에는 이런 견훤의 무덤이 있다. 내가 논산 연무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훈련생이 견훤의 묘소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 견훤의 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아직 확실하게 견훤의 것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묘소의 인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이곳이 견훤의 묘소라고 여기며 누대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견훤왕릉
견훤왕릉은 매우 단순하다. 석물들은 어디고 보이지 않고 단지 커다란 봉분 앞에는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후백제왕 견훤릉" 이라는 비석이 서 있을 뿐이다. 맑은 날 남쪽으로는 70리나 떨어진 전주의 모악산이 보인다. 지금은 아침에 맑던 하늘이 약간 흐려 모악산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이 지역은 광활한 평야지대다. 논산 제2훈련소가 이곳에서 지척이다. 4주간의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던 장소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견훤은 후백제의 도읍지인 완산(전주)이 보고파서 이곳에 무덤을 썼다고 전한다.
역사의 길을 따라 답사하다보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무지가 가슴을 아리게 할 때가 있다.
견훤역시 그런 인물이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본인이 직접 적국의 수장을 끌어 들여 망하게 했기 때문이다. 후백제가 그런 나라였다. 견훤왕릉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인 연무읍 금곡리 화석마을에는 서재필 박사가 한때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다. 그 집에는 김병락(90세)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고흥이 고향인 서재필 박사가 이곳에서 6년간 살았던 연유를 그분은 모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몇 년 째 서재필 박사의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번 기행답사에서 얻은 수확이다.
서재필 박사 마을
연무읍 소룡리에 있는 김관식 시인의 생가터와 묘소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의 이력과 문학작품에 관해서는 인터넷에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의 생가와 묘소에 관해서는 정보가 없었다. 연무읍을 경유하여 완주군으로 이어진 좁은 지방도 3번을 찾아 길을 달린다.
연무공고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논산훈련소의 장병숙소 건물들이 보인다.
소룡리로 다가 갈수록 높은 산들이 다가선다. 논산답지 않은 분위기다. 결국 김관식 시인의 시심을 자극한 것은 논산의 평야가 아니라 산이었다는 것을 그의 고향 마을을 방문하여 알게 된다. 소룡리는 현재 약 130여 가구가 산다. 주로 노인들이다. 그러나 농촌 마을치고는 큰 마을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두 분의 할머니들을 만났는데 김관식 시인을 알지 못한다.
자신들은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라며 가게로 찾아 가 보라고 한다. 소룡리 경로당에 가서야 김관식 시인에 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김관식 시인 고향 후배 이규정씨
이규정(71세)씨였다. 호남형의 그 분은 어린 시절에 김관식 시인을 따라 다니며 함께 놀았던 분이다. “ 저보다 5살 형님이지유, 천재였시유 어릴 때두 서글 서글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도 잘 하고 골목대장 노릇을 했지요. 국회의원 선거에 낙방하고 고향에 내려와 저와 함께 술도 많이 먹고 재미있게 놀았시유. 서울 아마 홍제동인가 산꼭대기에 판자집 짓고 살 때 그 집에 가서 며칠 자고 오기도 했고 대단한 분이었지유. 지금은 생가는 헐리고 당질이 새로 집 짓고 살아유. 이 마을에서 난 천재적인 시인이고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제대로 그분을 대접하지 못하고 있어 부끄럽지유. 그런데 이번에 논산 시장이 저기 있는 묘소를 오천만원 들여서 새로 단장한다고 하네유. 동네 사람들 이름과 쪼무래기들까지 이름을 모두 외운 분이지요. 이 관내에서는 천재났다고 야단이었시유.”
김관식 시인이 이곳에서 적어도 10세 때까지는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의 어떤 이력에는 이곳에서 3살 때 강경읍으로 이사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하긴 인터넷에서 김관식 시인을 검색해 보면 거의 99%는 그가 강경상고를 졸업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김관식 시인은 강경상고 3년 중퇴가 정확하다.
이규정 씨는 자전거를 직접 타고 그의 생가까지 나를 안내해 주었다.
김관식 시인 생가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 있다. 집은 깔끔했지만 결코 시인의 훈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김관식 시인의 당질이 살고 있다는 집, 그러나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빈집을 서성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의심의 눈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둘러 그의 산소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이런 싱거운 일도 있나. 바로 도로가에 인접한 곳에서 김관식 시인의 묘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관식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약 100m지점에 육신이 묻혀 있는 것이다.
김관식 시인은 충남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바로 이 마을에서 태어나 10살 때까지 이 마을에서 자랐다. 이후 강경읍을 이주하여 강경상고를 중퇴한다. 그는 위당 정인보 선생, 최남선 선생, 오세창 선생등 당대의 대가들에게 한학을 수학한다. 충남대학교,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를 다녔다고 하지만 모두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55년 현대문학지에 시 <자하문 근처> <연(蓮)> <계곡에서>로 추천을 받는다. 저서로는 이형기, 이응로와의 공저인 ‘해넘어가기 전의 기도’(1955)와 ‘김관식 시선’(1956), ‘다시 광야에서’(1976), 번역서 서경(書經) 등이 있다.
김관식 시인 묘
산소에는 작은 봉분 앞에 상석과 작은 검정색 비가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시비에는 ‘시인 김관식 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묘소는 소룡리 마을을 지키는 경비초소처럼 동네 입구를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문인들의 묘소를 찾아 다녔지만 이런 위치는 처음이다. 답사하기는 수월하지만 초라한 묘소는 그의 죽음만큼이나 서럽게 느껴진다.
시인을 이 지경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이 슬프게 한다. 산소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기분이라 산을 오른다. 이 산은 사천 김씨의 산이라 한다. 산 중턱에는 납골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양식도 아닌 묘한 묘비들이 많이 만들어져 있다. 봄이 오는 산 숲은 호젓하고 아름답다. 소룡리가 전부 내려다 보이고 논산 훈련소가 보인다. 바라건대 혹 김관식 시인의 묘소를 이 곳으로 이장한다면 적격인 장소이겠다.
이곳에서 그의 시 ‘거산호’를 읽으면 시적 분위기에 적당한 곳이다. 이 산의 분위기와 흡사한 시 거산호(居山好)-2를 읽어 본다.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壽)하는 데다가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그 품 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내음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 같은 산 정기(精氣)를 그리며 산다.
-- 김관식 시인의 시‘거산호2’ 전문
김관식 시인 시비
이 시는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70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였다. 탈세속적이며 자연친화적인 이 시에는 인간과 자연의 대조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는 산을 향해서 자신이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이제 죽음을 예비하고 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 품 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
김관식 시인 시비
김관식 시인의 시비가 박용래 시인의 시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정답다.
박용래 시인이 강경초등학교와 강경상고 9년 선배다. 아무리 기고만장했던 김관식 시인이었지만 아마도 박용래 시인에게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박용래 시인은 “아우 김관식이야” 하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는 사람에게 누가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두분의 시비를 강경읍이 아닌 논산시 공설운동장에서 만나는 것은 기이한 일이지만,
때로 민선 지방 자치장들의 민심을 보는 눈들은 대단할 때가 있다.
김관식 시인의 시비에는 <거산호1>이 새겨져 있다.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봄에 씨를 뿌린 만큼만 수확을 하고 질그릇을 구워 쓰고 시간이 허락하면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겠다고 한다. 이 표현이 그의 삶을 대변한다. 모질고 이중적이며 사나운 세상을 등지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과 벗하며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동양 선비의 안빈낙도의 삶이 담겨 있다.
김관식시인 묘지 선산에서
1960년 국회의원 선거 패배 이후 그는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가난뱅이가 되었다. 끼니마다 감자를 삶아 먹으며 살아야 했다. 단칸방에서 여러 명의 식구가 살아가야 했다.
이런 삶속에서도 그는 기죽지 않고 살았다. 유년시절부터 배웠던 동양학에서 오는 그 깊고 넓은 학문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안빈낙도의 삶을 알지 못하였다면 그는 높은 직위를 가진 이들에게 고개 숙였을 것이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당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축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술이 거나하게 취해 나타난 김관식 시인은 단상에서 축사를 하고 있던 장기영 장관을 밀어냈다. "자네는 이제 그만 하고 내가 할 말이 좀 있어서..."
이런 그를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김시습처럼 허울 좋은 직위와 벼슬살이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아마도 문인으로서 이런 모습은 그가 마지막이었다. 천상병 시인이 기인이라고 하지만 김관식 시인을 따라가기에는 미약하다.
그러나 그 역시 세상을 떠날 때는 고독했다. 어쩔 수 없는 생활인이 되어 슬픈 시를 남긴다. ‘병상록’ 이란 시다.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길은 없는 것이냐.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 찬 철모르는 어린 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 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憂患)에서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김관식 시인 시 ‘병상록’ 전문
시인 김관식은 1970년 8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36세였다.
김관식 시인 생가터
김관식은 부친 김낙희와 모친 정성녀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명하면서 서원의 전교와 향교의 제관을 하던 고을의 인텔리였다. 김관식 시인은 4세부터 그의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익혔다. 신동이었던 그는 그 때부터 시를 외우기 시작해 한시와 현대시를 포함하여 약 1,000수를 외웠다고 전한다. 아마도 국내 최다일 것이다.
이런 천재적인 머리로 사법시험을 보았다면 아마 그는 법조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옳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이 되었다. 한때나마 호기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정치인이 되려고 하였지만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다만 그가 고개를 숙인 사람이 있다. 사랑이었다. 서정주 시인의 처제 방옥례 여사이다.
그녀가 좋았지만 방옥례 여사는 김관식 시인을 피해 다녔다. 김관식 시인은 음독자살을 결행하였지만 실패하고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를 보다 못해 결혼 응락을 해주었다가 방옥례 여사는 평생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했다. 지금 만약 이런 일이 있다면 스토커라 신고하여 감옥에 가야 했을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세상의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욕만 퍼부으며 철저한 자존과 고독과 깡소주로만 살다가 완전히 폐가 녹아 사십도 못되어 스러져간 젊은 사내, 신동출신(神童出身)의 김관식이를 시인으로 추천한 것을 나는 한동안 후회했으나, 이제는 후회 안해도 되는가? 또다시 우리를 괴롭게 울리며 죽어갈 염려는 없어졌으니까…”
그러나 그는 정이 많고 속 깊고 마음 넓은 시인이었다. 시 한편이 이를 증명한다.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먼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 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지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 김관식 시인의 시 ‘석상의노래’
석상을 소재로 하여 한없는 그리움의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너무나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돌이 되었다는 이 시의 내용은 백제 가요 <정읍사>나 신라 시대에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 설화와 접맥되어 있다. 또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김소월의 <초혼>에서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그려져 있다.
이 시는 산문시이다. 행이나 연 구분은 물론, 구두점까지도 철저히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원인이 되어 석상이 되었다는 내용이 실감난다. 산문시이지만 3문장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문장에는 노을이 지고 밤이 깊을 때까지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보인다.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는 죽음의 세계로 떠난 임을 암시한다.
둘째 문장에서는 떠나는 임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심정이 묘사되어 있으며 ‘출렁이는 물결 소리’는 화자 자신은 어느 바닷가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정’은 한복 저고리 깃에 꿰매어 다는 헝겊이다. 보통 흰색이며 화자가 여성임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절망 때문에 화자가 석상이 되었음을 표현한다. 이 시에서 “머언 나라”는 ‘죽음의 나라’ 혹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다.
김관식 시인의 1957년도 작품이다. 석상은 한없는 그리움과 갈망의 상징적 표현이다. 이 시는 마치 백제가요인 정읍사나 신라시대에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화를 옮겨 놓은 듯 흡사하다. 그가 얼마나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인이었나를 보여주는 명시다. 김소월 시인의 초혼에 “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라는 표현보다 구체적이다.
김관식 시인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한문과 동양의 고전에 능통하였기 때문이다. 동양적 감성에 우리 가락을 가미하여 세련된 시어를 구사 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의 나이 26세에 장면 박사에게 도전하여 낙선한 후 죽는 날까지 10년을 병고와 가난과 씨름하며 살았다. 당시 남겨진 6남매가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