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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집 별집 제9권 / 부록(附錄) / 유사(遺事) 36조(條) [송시열(宋時烈)]
동춘당집 별집 제9권 / 부록(附錄) /또 23조 [황세정(黃世楨)]
선생의 용모는 정금 미옥(精金美玉)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웠으며, 안색은 서일 상운(瑞日祥雲)처럼 따뜻하고 포근하였으며, 형향(馨香 풍채(風采))은 지란(芝蘭)처럼 고고하고, 절조는 송죽처럼 굳세었으며, 수월(水月)처럼 청명하고 빙설처럼 결백하였다. 온후한 것으로 말하면 봄 햇살 같고, 엄숙한 것으로 말하면 가을 서리 같았으며, 충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이 사람을 대하는 사이에 온화하게 드러나고, 나를 버리고 남의 장점을 따르는 덕이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화목하게 드러났으며, 과격하거나 특이한 일을 하여 고상함을 자랑하지도 않고, 유속(流俗)을 따르거나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세속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선생이 본래 타고난 자품으로 공사(公私)의 문자 사이에 섞여 나오지만 두루 상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모아서 말하였다.
스승을 따르고 벗을 취하여 크게 문호(門戶 학파(學派))를 세우고, 마침내 빈사(賓師)의 자리에 올라, 세상을 삼대(三代)처럼 융성한 세상으로 만들기를 기약한 것은 문집과 연보에 이미 자세하니, 여기에는 단지 그 속에 빠진 것만을 골라 아래에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선생이 소싯적에 혹 존귀한 손님이 오면 나가서 대문 안에서 영접하였는데, 그 공경을 다해 접대하는 사이와 읍양(揖讓)하며 오르고 내릴 때의 행동이 하나하나 모두 법도에 맞고, 옷의 앞뒤자락이 방정하여 처지거나 올라가 가지런하지 않은 모습이 없었으니, 《논어(論語)》에 이른 바 ‘첨여(襜如)’에 오직 선생만이 가까웠다. 일찍이 후생에게 명하여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예를 익히도록 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선생이 조정에 계실 때 현묘(顯廟)가 온천욕을 떠나며 선생에게 명하여 서울에 남아 세자(世子)를 보양하게 하였으므로, 선생은 서연(書筵) 출입에 편의를 위하여 궐내의 자문감(紫門監 선공감(繕工監))에 주거하였으니, 이는 선생이 그때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를 겸임하였기 때문이다. 나 세정(世楨)이 선생에게 문후를 올리려고 자문감으로 가니, 마침 선생은 진강할 것을 익히고 있었는데, 단정히 팔짱을 끼고 꿇어앉아 《소학(小學)》 책을 책상 위에 펴 놓고서, 읽는 소리가 청아하고 해석하는 음성이 유창하니, 좌중이 옷섶을 여미고 경청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물러 나와서는 서로 칭찬하기를, “오늘 신선강관(神仙講官)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후생과 경사(經史)를 강론할 때는 반드시 양단을 다 들어 자세히 말씀해 주었기 때문에 듣는 자가 쉽게 이해하였다. 만약 다 이해하지 못하면 밖에 나가 사색하게 하고,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다른 책을 배우게 하였다.
남과 수작하실 때는 눈동자에 빛이 나고 흰 이를 드러내며 웃으니, 담소가 시작되면 온 좌중이 귀를 기울여 들으며 저도 모르게 그 무릎이 점점 앞으로 다가왔다.
하루는 《대학》 정심장(正心章)을 강독하시다가 소주(小註)에 “마음을 비우되 주재자가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을 바르게 하는 처방이다.〔中虛而有主宰者 其正心之藥方歟〕”라고 한 교봉 방씨(蛟峯方氏)의 말에 이르러 무릎을 치며 감탄하기를, “방씨의 이 말은 자신이 참으로 체험한 속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그 말이 정밀하면서도 간략함이 이와 같다.” 하였다.
《중용》 17장(章)의 “뿌리가 단단한 것은 북돋아 주고 뿌리가 기운 것은 엎어 버린다.〔栽者培之 傾者覆之〕”라는 말에 이르러 선생이 말씀하기를, “‘시냇가 풀에는 비가 내리고 돌 위의 솔은 바람이 흔드네.〔雨灑溪邊草 風搖石角松〕’라는 고시(古詩)가 바로 ‘재자배지 경자복지’의 뜻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논어》 술이편(述而篇)을 읽다가 “염유가 ‘부자께서 위군을 도우실까?’……‘부자께서는 돕지 않을 것이다.’〔冉有曰 夫子爲衛君乎……夫子不爲也〕”라고 한 장(章)에 이르러 주자의 주설(註說)까지 강론한 뒤에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군자가 그 나라에 머물면 그 나라 대부(大夫)도 비방하지 않는데, 하물며 그 임금이겠는가. 그러므로 자공(子貢)이 위군(衛君)을 지적하지 않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로써 물었던 것인데, 부자께서 이와 같이 대답하셨으니, 부자께서 위군을 돕지 않으실 것을 안 것이다. 이는 바로 자공의 뛰어난 총명으로 제자(諸子)가 감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 일을 숨기고서 성인께 물어 끝내 성인의 뜻을 알았으니, 질문을 잘했다고 이를 수 있고, 또 무한한 정신(精神 사유(思惟)의 활동)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호연장(浩然章)을 강독하다가 “반드시 일삼는 바를 두되 효과를 미리 기약하지 말아, 마음에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라는 말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예전에 고청(孤靑) 서기(徐起)가 말하기를, ‘여기에 물건이 있는데, 쥐면 깨지고 쥐지 않으면 잃는다.’ 한 것이 바로 이 뜻을 가리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조용히 고청의 말을 해석하기를, “물건은 계란(鷄卵)을 이르고, 여기는 손바닥 위를 이른다. 쥐면 깨진다는 것은 계란을 손바닥 위에 놓고서 힘을 쥐어 너무 급히 쥐면 계란이 압력에 눌려 반드시 깨진다는 말로, 속히 이루고자 하면 자연히 알묘조장(揠苗助長)할 우려가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쥐지 않으면 잃는다는 것은 계란을 손바닥 위에 놓고서 손바닥을 편 채 너무 느슨하게 얹어 두면 계란이 굴러 반드시 떨어진다는 말로, 항상 생각을 이에 두지 않으면 자연히 자신에 대해 너그러워 전혀 검속하지 않고 방종하여 잃을 우려가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대체로 학자는 매양 마음을 수양하는 공부에 항상 평평존재 약략수습(平平存在 略略收拾)하는 공력을 들여, 늦추지도 서둘지도 말고, 잊지도 조장하지도 말아야 할 뿐이다. 고청이 맹자의 뜻을 드러내 밝힌 것이 지극히 정밀하고 투철하니, 학자는 깊이 완미해야 한다.” 하였다.
선생이 명탄(鳴灘) - 부인을 처음 장사 지냈던 곳 - 에 계실 때 나 세정(世楨)이 가서 뵈었는데, 책상 가에 《진서(晉書)》 한 질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 내가 “진인(晉人)의 문장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선생이 말씀하기를, “문장은 매우 좋으나, 모두 청허(淸虛)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실지의 기미(氣味)가 전혀 없으니, 끝내 명교(名敎)에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선생은 때때로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근엄한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였다.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앉기도 하였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단지 옷과 이불을 거두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잠시 뒤에는 다시 취침하였다. 하루는 내가 모시고 잠을 자다가 가만히 엿보니, 선생이 노복을 불러 불을 밝히게 하고는 《연평문답(延平問答)》 중에 희로애락이 드러나기 이전의 기상을 논한 것을 가져다 보았다.
선생은 사우(師友) 사이에 성의가 지극히 돈독하여, 비록 음식과 같은 미세한 일에도 반드시 사우가 즐기던 것을 생각하여 다른 반찬보다 먼저 수저를 대었다.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였다. “송구봉(宋龜峯 송익필(宋翼弼))이 교하(交河)의 수막(水幕)에 계실 때, 나의 외종조(外從祖) 김황강(金黃岡 김계휘(金繼輝))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계셨다. 사계 선생께서 황강의 명을 받고 수막으로 가서 《근사록(近思錄)》을 배우며 몇 달을 머무셨는데, 보리밥에 조악(粗惡)한 찬(饌)을 자신 나머지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신기(神氣)가 크게 쇠약하셨다. 황강의 별실(別室)이 이를 보고 마음 아파하며, 드디어 비를 무릅쓰고 몸소 채소밭에 들어가 명아주를 뜯어 몸소 국을 끓여 드렸다. 그 별실이 죽은 뒤에 사계 선생은 명아주 국을 대할 때마다 흐느껴 울면서 그 국에 먼저 수저를 대셨으니, 이것이 어찌 진미이기 때문이겠는가. 선생께서 먼저 수저를 대신 것은 어찌 죽은 이를 슬퍼하고 옛일을 기억하신 지극한 정이 아니겠는가. 그 정경이 매우 애절했기 때문에 나도 명아주 국을 대하면 선생이 생각나서 매양 먼저 수저를 대었다. ○ 영보(英甫 송시열)는 여름철에 병을 잘 앓았는데, 무더위에 시달려 몸이 파리해짐을 면치 못하다가 첫가을이 되어 무가 나온 뒤에야 위기(胃氣 위의 작용)가 점차 되살아나서 병도 나았다. 그러므로 나도 무나물을 대하면 영보가 생각나서 먼저 먹는다. ○ 태지(泰之 이유태(李惟泰))는 유독 청각채(靑角菜)를 즐겨 먹었는데, 언젠가 말하기를, ‘내가 염병을 앓을 때 겨우 열은 물러갔으나 입맛이 없어 어떤 음식이고 모두 싫었는데, 베개 가에 청각채가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손으로 뜯어 입에 넣었다.’ 하였다. 그 식성이 우습지만 나도 혹 청각채를 대할 때면 태지가 생각나서 먼저 맛을 본다.”
왕년에 나 세정이 어떤 일로 운봉(雲峯)에 갔는데, 그때 벗 송규정(宋圭禎)이 그곳의 수령이었다. 나는 송우(宋友)를 끌고 함께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峯)에 올라 구경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송우가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천왕봉의 장관은 구경하였으나, 지금 이 길옆의 멀지 않은 곳에 또 102세의 노인이 있다. 나는 급한 공무가 있어 함께 갈 수 없으니, 그대 혼자 가서 만나 보라.” 하기에, 내가 그의 말대로 가서 만나 보고, 이어 소주와 과일 등의 물건으로 대접하며 한참 동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소싯적에 곰과 호랑이를 잡고 왜인을 죽인 일 등을 많이 들려주었으니, 그 장관이 천왕봉에 못지않았다. 내가 돌아와서 그의 말을 선생에게 아뢰었더니, 선생이 송우를 꾸짖으며 말씀하기를, “송규정이 내 선인(先人)께서 신유생(辛酉生)이라는 것을 듣지 못하지 않았을 것인데, 왕래하는 사이에 그 노인의 일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하고서, 드디어 여복을 불러 안에 전갈을 보내기를, “듣건대 나를 위해 새로 지은 명주옷이 있고, 또 아무 곳에서 보내온 약과와 소주와 말린 꿩고기 등의 물건이 있다고 하니, 즉시 하나하나 다 찾아내라.” 하였다. 그러고는 건장한 노복 한 사람을 정해 그 물건들을 지워 노인의 처소로 보내며 말씀하기를, “너는 노인의 처소로 가서 노인이 이 옷을 입고 이 음식을 먹는 것을 직접 보고 돌아오라.” 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보내었으니, 이 일에서도 효성을 미루어 남에게 베푼 선생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노인도 신유생이었는데, 그 뒤에도 3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민 상공(閔相公)이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장산(葬山 장사 지낼 산지(山地))을 구할 때 지나는 길에 선생을 찾아뵈니, 선생이 노봉 상공을 데리고 가서 옥천(沃川) 안읍(安邑)의 형세를 살펴보았는데, 그때 나도 따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내려 배를 타고 회인(懷仁) 경계에 이르니,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물길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므로 선생은 뭍으로 내려 말을 타고자 하였는데, 내가 선생에게 아뢰기를, “여기에서 숙소가 그리 멀지 않으니, 뭍으로 오를 필요가 뭐 있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은 그대로 배를 타고서 가자고 명하였다. 이때 물이 줄어 여울이 얕아져서 여울 가운데 사나운 돌들이 개 이빨처럼 솟아났으므로 이리저리 피해 가는 사이에 날이 어두웠다. 조금 내려가 장담(長潭)에 이르자 물빛은 칠흑 같고 양안(兩岸)에는 부엉이가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며 울어 대었다. 경색이 매우 좋지 못하니, 선생이 옷섶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술 한 잔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숙소 가까이에 이르자 선생이 나를 이끌며 말씀하기를, “너는 모험을 행하고 요행을 바란다〔行險僥倖〕는 훈계를 읽지 않았느냐? 앞으로는 부디 이런 짓을 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이 가르침을 받고 부끄러워 땀이 흘렀다. 그러고는 드디어 평생의 회한으로 여겼다.
선생은 거처하실 때 항상 청사(廳事) 가에 치우치게 앉지 않았는데, 이는 기울어져서 위태롭게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왕년에 선생이 제생을 데리고 가서 송촌(宋村) 뒤 응봉(鷹峯) 서쪽에 있는 비래암(飛來庵)의 수석(水石)을 구경하였는데, 돌 위에 푸른 이끼가 많았다. 선생이 “푸른 이끼는 바로 학의 먹이이니, 응봉을 확봉(鶴峯)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내가 소싯적에 감사(監司) 김징 원회(金澄元會)와 내포(內浦)에서 동행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평택(平澤)에 이르렀을 때 원회가 뒤에 떨어졌는데, 노복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내가 말을 세우고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물어보게 하였더니, 그 사람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원회가 노복이 오기를 기다려 그 노복에게 ‘너는 어째서 남의 밭에 익어 가는 콩을 노략질하였느냐?’라고 크게 꾸짖고서, 그 노복에게 그 콩을 본래의 밭에 도로 갖다 놓게 하고, 저녁에 숙소에 이르러 그 노복에게 장(杖)을 쳤다.” 하였다. 내가 후일에 그 일을 선생에게 아뢰었더니, 선생이 말씀하기를, “젊은 사람의 마음 씀과 일 처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하니, 너희들은 본보기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중에 있는 격언 수십 여 조항을 취해 좌석 옆에 써 붙여 놓고서 항상 눈을 그곳에 두었다. 선생은 《격몽요결》 가운데 독서차제(讀書次第)를 더욱 학자들이 수용할 중요한 법으로 여겨, 학도를 가르칠 때에도 그 제도를 따랐다.
선생이 도산(道山)의 분암(墳庵 묘소(墓所) 앞에 있는 집)에 계실 때 학도가 많이 모여들었는데, 선생이 학도로 하여금 주자의 백록동교조(白鹿洞敎條)와 율곡 선생의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와 문헌서원학규(文憲書院學規) 등의 문자를 등사해 문 위에 붙여 놓고서 조석으로 이를 보고 반성할 자료로 삼게 하며 “이것이 바로 사람을 만드는 양식(樣式)이니, 너희들은 항상 완미하여 본보기로 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 뒤 선생이 숭현서원(崇賢書院)의 원장(院長)이 되어서는, 서원의 유생들과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책을 강론하고는 율곡 선생의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하였다.
선생이 퇴계 선생의 〈어부사(漁父詞)〉를 등사해 책 속에 끼워 두었다. 검담(黔潭)으로 온 뒤에 이웃에 사는 노래 잘하는 홍주석(洪柱石)을 만나 그에게 〈어부사〉를 부르게 하며 “퇴계의 이 곡(曲)은 실로 뛰어난 가사(歌詞)이다. 정송강(鄭松江)의 〈관동별곡(關東別曲)〉도 뛰어난 가사인데, 너는 그 뜻을 아느냐?”라고 하고서, 그에게 송강의 〈관동별곡〉을 부르게 하였다. 조금 뒤에 어부가 와서 강에서 잡은 물고기 몇 마리를 올리자, 선생은 회를 치게 하시고, 홍주석을 돌아보며 “퇴계와 송강 때에도 이런 풍미(風味 맛난 음식)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재종종형(再從宗兄 종손(宗孫)인 재종형) 진사 송승길(宋承吉)이 빈궁하여 자력으로 생활할 수 없으므로, 대부분 종가의 제사 음식을 선생 댁에서 정하게 장만해 가지고 가서 몸소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또 송 진사를 위해 철철이 옷을 지어 보내고, 날마다 반드시 반찬을 나누어 보냈다. 그러므로 송 진사는 반드시 선생 댁에서 반찬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 집사람에게 “아무 집의 조석반(朝夕飯)은 항상 늦으니, 우리의 조석반도 일러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낸 정도응(鄭道應)은 바로 선생 부인의 조카이다. 정공이 상주(尙州)에서 선생을 뵙기 위해 와서 며칠 동안 모시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를 방문하였다. 이튿날 내가 가서 선생을 뵈니, 선생이 “어제 정생(鄭生)이 너를 방문하고서 갔다고 하니, 그 사람됨이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더냐?”라고 하기에, 내가 “매우 아름다운 선비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생이 “우복장(愚伏丈)께 이런 손자가 있으니 어찌 매우 다행이 아니겠는가만, 그 정신이 부족하니 나는 이 때문에 마음이 괴롭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 오래지 않아 정공이 과연 죽었으니, 이 일에서도 선생의 선견지명을 알 수 있다.
왕년에 내가 벗 송규정(宋圭楨)과 궁벽한 한 곳을 찾아 함께 《가례(家禮)》 및 《회성의절(會成儀節)》 등의 책을 볼 때 의심되는 곳마다 문목을 만들어 선생에게 여쭈었는데, 그때 선생은 도산의 분암(墳庵)에 계시면서 문목마다 편지로 답해 주었다. 전후에 문답한 것이 쌓여 한 권의 책이 되었는데, 그 책에 실린 것이 모두 110여 조목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서울로 가면서 그 책을 송우(宋友)에게 맡기며 《의례문해(疑禮問解)》의 규례를 모방해 정사(淨寫)하도록 부탁하였는데, 내가 시골로 내려와 들으니, 송우가 병환으로 누차 옮겨 다니는 사이에 그 책을 잃었다고 하였다. 옛날에 《주자가례》의 초본을 한 동행(童行 어린 중)이 훔쳐 갔다가 주자가 죽은 뒤에 그 책이 비로소 나타났는데, 아, 110여 조에 달하는 선생의 가르침은 실로 세간에 지극히 보배로운 문자이니, 이 또한 후일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만약 후일에 나타난다면 별집 아래에 추가해 간행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기록하여 후인이 취해 상고할 자료로 대비한다.
[주-D001] 평평존재 약략수습(平平存在 略略收拾) : 마음을 항상 보존하되 지나치게 힘을 쓰지 말고 간략하게 수습하라는 말이다.[주-D002] 청허(淸虛) : 마음을 깨끗이 하여 욕심이 없고 모든 사물을 허무로 보는 노장(老莊)의 사상을 이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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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이정(二貞)은 …… 합니다 | 이정은 황세정(黃世楨)과 송규정(宋奎禎)을 가리키는데, 모두 윤휴의 문하로 들어갔었다. 《宋子大全隨箚 卷3》 황세정은 평소 윤휴와 가까웠는데,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 복제(服制) 문제로 송시열과 송준길이 관직이 추삭(追削)되고 유배당하자 그 억울함을 알리고 반대파들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로 인해 곧바로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머리를 돌렸다는 말은 윤휴의 문하로 들어갔다가 다시 송시열 쪽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
5 | 제곡(霽谷) | 황세정(黃世楨, 1622~1705)으로, 본관은 회덕(懷德), 자는 주경(周卿), 호는 제곡이다.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연기(燕岐)로 돌아와 조그만 집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제곡유거(霽谷幽居)라는 네 글자를 보내오자, 그것으로 자신의 호로 삼았다. 《陶菴集 卷32 同知黃公墓碣》 | 제월당집(霽月堂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