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광장] '위험문화'로의 전환이 필요한 때
이정윤 칼럼
2022.12.14
키워드 #원자력 #위험문화 #이정윤
이정윤 '원자력 안전과 미래' 대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안전 신화’가 주된 원인이었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지난 정부에서는 안전에 안심을 더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안전을 안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철저히 하자는 구호는 국민적 두려움을 달래는 말일 뿐 경각심을 무디게 하여 오히려 안전에 역행하는 개념이다. 이런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우리나라 원전 안전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많이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이 두 곳의 원자로는 모두 가압경수로와 가압중수로가 운영되고 있는 우리나라와 노형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고는 대부분 예상하지 못했거나 위험을 과소평가한 인적오류 측면이 주된 이유이므로 위험을 철저하게 인식하여 사전에 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 후 11년이 지났지만 반경 10~30km 지역은 지금도 일반인 피폭 허용치의 수 배~수십 배인 방사선 구역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주민 귀환 정책을 강행하여 대피했던 주민들이 일부 돌아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귀환하지 못한 가구는 폐허가 된 상태인데 귀환 주민들은 오염된 주변 농토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북쪽으로 불과 4km 떨어진 항구에는 많은 어선이 정박해 있어 조업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수확된 농수산물이 어떻게 유통되는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귀환 주민들은 언제든지 체내피폭이 우려됨에도 전신체내피폭측정(Whole Body Counting)은 시행하지 않는다. 필자는 2주 전 후쿠시마 지역을 방문하여 무색, 무미, 무취의 방사선 환경에서 강요된 생업으로 고생하는 주민 모습을 직접 확인했다.
원전을 가동하려면 일단 안전성이 확보되어야 하지만 100% 완벽한 안전은 불완전한 인간영역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안전을 우려하지만 사업자는 반복된 일상에서 위험성에 무뎌질 수밖에 없다. 경비를 줄이고 이윤을 추구하면서, 원전 사고로 인한 대규모 사고사례는 남의 일이며 우리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책임한 안전의식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따라서 독립적인 규제조직에 의해 원전 사고 위험 인식에 기반을 둔 철저한 사전대처가 필요하다.
일국의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지 않아서 주민들의 방사선 피해가 없다”고 했다. 또한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 사고를 버려라”고 언급했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금도 이 발언이 유효한지 되묻고 싶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2030년까지 원전 18개를 수명연장 신청할 수 있도록 원자력안전법시행령을 개정하였다. 다수호기 문제(특정 지역에 많은 원자로가 밀집된 상황), 테러위험, 후쿠시마 후속 조치 불투명, 최신 기술기준 적용 여부 등등 안전 현안은 미결 상태인 채 폐로하기로 한 원전까지 단지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수명연장을 추진하는 것은 모순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자력안전소통법’ 주무 부처이지만 공개토론을 요청해도 응하지 않는다. 올해 시행된 ‘원자력안전소통법’은 이 때문에 사업자 영업비밀보호법이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온다. 고리2호기 수명연장 주민청문회는 모두 사업자 몫이다. 안전을 우려하는 주민들은 사업자와 항의하지만 막상 소통 주관기관인 원자력안전위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오로지 사업자 요구와 정부 방침에만 충실하여 정권이 교체되자마자 모든 원전의 수명연장을 조기 신청할 수 있도록 원안법 시행령까지 개정하여 스스로 제3자적 독립성마저 내팽개치고 있다.
최근 원자력안전위는 수소제거장치를 승인하였는데, 시험하다가 불꽃이 튀어 시험장치에 화재까지 발생하였지만 화재 유발이 없는 발광입자라며 통과시켰다. 안전에 위해가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사전 조치하는 게 중요한데도 사업자 이익에 충실하며 국민적 우려는 외면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빛 4호기는 상부 돔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채 ‘선 조치 후 재가동’이라는 주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재가동을 승인하였다. 사업자 한수원은 수명연장을 위한 고리2호기 방사선 환경영향평가보고서를 부실하게 원자력안전위에 제출해 놓고 주민청문회는 강행한다. 지역 민심이 심상치 않은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향후 주민과 소통을 하겠다는 것인가. 국민 안전을 위한 원안위 무용론은 이미 오래전 일이며 해체 수준의 전면 개혁이 요구된다.
56개가 가동 중인 프랑스 원전은 최근 안전 주입 배관에 금(Crack)이 발생하자 규제기관이 일시적으로 12개 원전을 모두 가동 중단시키고 조사를 명하였다. 추운 겨울이 시작됨에도 이러한 문제는 전체 원전으로 확대되어 11월 말 평균 50%도 안 되는 이용률(Availability)을 보인다. 국가적인 전력공급 부족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원전 대국 프랑스 규제기관의 결정은 정치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다. 오로지 위험의 중대성에 기반하여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원전 사고가 가져올 가공할 위험성을 고려한다면 정권이나 정치에 치우친 결정보다는 철저한 위험 요소를 줄이는 위험 인식에 기반한 국민적 소통규제로 접근해야 한다. 정치나 정권의 요구에 따르는 편향되고 형식적인 안전 문화(Safety Culture) 보다 독립적으로 위험을 색출하여 사전에 제거하는 철저한 위험문화(Risk Culture)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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