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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논쟁점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넘은 오늘에 있어서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는 신학적으로 교리상 얼마나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또 얼마나 먼 위치에 있는가? 분명 오늘의 상황은 종교개혁 시대의 상황은 아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상호 적그리스도로 규정했던 심각한 갈등은 지금에 와서는 많이 완화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정말 그 갈등은 완화되어 있는가? 오늘에 있어서는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없는가? 분명히 옛날의 갈등은 완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갈등 중 일부는 종교개혁 시대에 없었던 것이 새로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오늘에 있어서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점은 무엇인가?
1. 베드로 수위권과 로마교황 수위권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고 모든 사도 중의 으뜸이 되는 사도이다. 그리스도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의 권한을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양도했다. 따라서 로마의 교황은 지상의 베드로의 후계자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그리고 이 교황에 의해 합법적으로 임명받은 각 지역의 주교들이 다스리는 교회가 진정한 사도적 교회이다. 이 사도적인 교회 속에 진정한 천국 열쇠가 존재한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사도권 계승 이론에 의하면 개신교회는 유감스럽게도 진정한 사도적인 교회가 되지 못한다. 개신교회는 진정한 사도적인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개신교회 성직자들 역시 진정한 성직자가 아니다. 진정한 성직자는 합법적인 주교에 의해 서품을 받은 신부들만이 진정한 성직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 유명한 사도권 계승 이론은 가톨릭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다. 가톨릭은 로마의 교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상명하복적인 구조를 교회의 중추로 생각하고 있고 이 사고방식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소위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념은 가톨릭에 의해 철저히 거부당하고 있다. 1980년대에 있었던 보프(L. Boff) 신부에 대한 교황청의 심문은 그의 해방신학이 가톨릭의 교황청과 갈등을 빚은 것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이긴 했지만 사실상 더 중요한 이유는 그의 유명한 교회론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 주장하는 「아래로부터의 교회론」을 교황청이 결코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베드로 수위권과 로마교황 수위권 및 사도권 계승 이론은 정당한 이론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 잘못된 이론 때문에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와의 진정한 에큐메니칼적 일치는 심각한 장애에 부딪히고 심지어는 일치 운동이 원천적으로 파괴되기도 한다. 가톨릭은 개신교회에서 받은 성례를 무효로 보기 때문에 개신교회의 세례도 무효이고 성찬도 무효이다. 이것은 개신교회의 성직자들이 성례를 집행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는, 개신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멸시가 그 근거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심각한 개신교회에 대한 멸시를 잉태하고 있는 베드로 수위권 및 교황 수위권과 사도권의 계승 이론의 신학적 정당성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는가? 먼저 베드로가 역사적 예수의 계승자라는 베드로 수위권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베드로가 역사적 예수의 계승자라는 신학적, 성서적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어디에 그 근거가 있는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마태복음 16장 16~19절이 바로 그것을 위한 성서적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위의 본문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틀림없고, 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긴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정말 예수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답은 달랐다. 루터(M. Luther)는 반석을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해석했고, 칼빈(J. Calvin)은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루터가 해석한 반석을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본 견해는 잘못된 해석이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을 보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말씀은 베드로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해석한 칼빈은 이 본문을 매우 훌륭하게 해석한 탁월한 해석이다. 그런데 이 탁월한 칼빈의 해석도 완벽한 것이 아닌 부분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 결함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말한 예수의 말씀이 문맥상 베드로라는 개인을 향하고 있지 신앙고백이라는 추상 명사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해석의 이러한 결함은 20C의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극복되었다. 쿨만(O. Cullmann)이나 래드(G. E. Ladd)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의 “너”를 「고백자 베드로」로 해석했고 이 해석은 이 본문에 대한 매우 적절한 해석이었다. 「고백자 베드로」라는 말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대표로서의 베드로라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신 것이고, 따라서 그 말씀은 그 순간 베드로라는 개인을 향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의 대표일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16장 16~19절에 대한 해석으로 칼빈에 의해 훌륭하게 해석되고 20C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진 「고백자 베드로」라는 해석이 이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이 본문을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굽히지 않고 있다. 엄밀하게 언급하면 이 본문은 가톨릭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완전히 막혀있는 본문은 아니다. 이 본문 한 구절만으로 생각하면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적용될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상황과 성서 전체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만일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본문이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 틀림없고 또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승자가 틀림없다면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는 당연히 베드로여야 한다. 그러면 베드로는 정말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수장이었는가?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이에 대한 답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의 대체적인 결론은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등장하는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의 수장은 베드로가 아닌 예수의 동생 야고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추정은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바울이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이 여기는 3명의 지도자를 언급하면서 「야고보, 게바, 요한」의 순으로 언급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왜 야고보라는 이름이 베드로라는 이름보다 먼저 언급되어 있을까? 이것은 우연일 수 있다. 갈라디아서를 주석한 가톨릭의 대표적 신학자 무스너(F. Mussner)는 이 문제가 갖는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이것은 결코 서열순서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물론 이 본문 하나만으로는 이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어떤 서열을 암시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밝혀낼 수 없다. 양쪽의 가능성이 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5장 6~21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도회의 장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도회의의 장면은 야고보가 이 회의의 의장이었다는 것을 상당 부분까지 암시하고 있다. 이 회의에 베드로도 참석하고 있지만 베드로의 발언은 참고 발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이고 이 회의를 주재하고 결론짓고 결정 사항을 공포하는 이가 야고보이다. 이 사도 회의의 장면은 100% 그러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야고보가 초대교회의 중심적인 지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당히 깊게 암시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 이하의 본문에는 이 문제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해 나오는 비겁한 행동이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왜 야고보가 보낸 사람을 두려워했을까? 만일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행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야고보가 보낸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베드로의 이 비겁한 행동을 보고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만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행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바울이 어떻게 베드로를 꾸짖을 수 있었을까? 바울은 단 한 번도 베드로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사도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바울은 언제나 베드로를 자신의 동역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의 모든 증거들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행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가톨릭의 주장이 허구임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 16장 16~19절의 본문은 「고백자 베드로」로 해석하는 것이 전체 성서와 초대교회의 역사에 상응하는 해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중심적 지도권을 일시적으로 베드로가 아닌 야고보가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은 베드로 수위권을 위한 반론을 위한 것이지 야고보 수위권이나 이와 유사한 계층의 질서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모두 민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예루살렘 공동체 속에서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예수의 동생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일시적으로 교회의 중심적 위치에서 일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도행전 15장 6~21절의 사도회의를 오늘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주교단 회의의 모체로 생각하고 교황은 베드로의 권한을 이어받고 주교들은 다른 사도들을 계승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 모체가 되는 사도행전 15장 6~21절의 사도회의의 의장이 야고보였다면 이 주교단 회의의 의장은 누구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승자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성서적으로나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승자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것은 더더욱 그 근거가 희박하다. 이것은 근거가 희박한 정도가 아니라 근거가 아예 없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후의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그 누구도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의 권한을 이어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암시하는 문서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철저히 허구이다. 그러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가? 가톨릭교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구원의 기관으로서의 지상 교회는 사도단의 단장인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 의해 사목 되며,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도 베드로가 사목하다 로마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사목을 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베드로는 과연 로마에서 순교했는가? 그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가능성은 상당히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클레멘스의 편지에 의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네로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것과 로마교황 수위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만일 죽은 장소가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죽으셨는데 그러면 예루살렘의 주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베드로가 죽을 때 자신의 권한을 로마의 주교에게 양도한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철저히 허구이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승자이고,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이며, 로마교황에 의해 합법적으로 임명된 주교만이 사도권을 계승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허구이다. 그러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계승한 분은 누구인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계승한 분은 죄가 많고 허약한 인간이 아니고 성령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오늘날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은 성령이시지 그 밖의 어떤 존재도 아니다. 예수께서 내가 가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고 바로 이 보혜사인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진정한 사도로 만드신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그리고 진정한 성직자도 바로 성령에 의해 부름받은 사람들이 진정한 성직자이다.
2. 마리아론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마리아론의 핵심적인 정신을 요약하면 다음의 5개 항목으로 요약될 수 있다.
①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
②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다.
③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④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고 교회의 어머니이다.
⑤ 구원 사역에서의 마리아의 중재성
첫째,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는가? 물론 아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 외에 아들과 딸들이 있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13:55~56). 위 마태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에게는 예수 외에 최소한 아들이 4명 있고, 딸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먼저 우리 주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 공경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명백한 오류이고 성서와 어긋난다. 그러나 가톨릭의 신학자들은 위의 마태의 본문에서 형제라는 개념을 사촌 형제와 그와 유사한 관계에서도 사용될 수 있으므로 마리아의 평생 동정녀 이론은 정당하다는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의 내용은 요셉과 마리아가 언급되고 또 아들들의 이름과 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이 마리아의 아들, 딸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마리아를 위해 성서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녀 이론은 수녀원 제도의 존속을 위해서는 유효할지 모르나 역사적 진실은 아니다. 사도신조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생시킬 때 동정녀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고, 이것이 성서의 증언과 일치한다.
둘째,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는가? 1854년 12월 8일 교황 피우스(Pius) 9세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는 교리를 선포했다. 소위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의 교리는 19C 중엽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시대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논쟁점이 아니고 오늘의 신학적 논쟁이 되고 있다. 13C의 가톨릭 신학의 교부이자 가톨릭 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as, 1225~1274)는 마리아의 무염시태의 교리를 부정했다. 1439년에 바젤(Basel)공의회는 무염시태의 교리를 신앙조항으로 선언했지만, 이 공의회는 당시 교황과 유대관계를 맺지 않아 합법적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트렌트공의회(1545~1563)에서도 이 문제는 반대자들의 주장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견해를 얻어낼 수 없었던 교리였다. 그런데 이 교리가 유감스럽게도 교황 피우스 9세에 의해 선포되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마침내 티 없이 깨끗한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라고 피우스 9세의 교의가 추인되었다.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천주의 성모는 마치 성신께 형성된 새로운 조물주같이 온전히 거룩하고 아무런 죄에도 물들지 않으셨다”라고도 선언했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죄 없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셨다.
셋째,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는가?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는 20C 중엽에 로마 가톨릭에 의해 선포된 교리이다. 1950년 11월 1일 교황 피우스 12세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나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의 생을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신앙의 진리이다”라고 선포했다. 이 해괴망측한 교리는 오늘의 가톨릭 정신을 대변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받으셨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연속적으로 추인하였다. 그런데 마리아의 무염시태 및 몽소승천의 교리는 마리아를 예수와 버금가는 천상천하의 모후로 추대하려는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신심의 발로(發露)로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매우 우려할만한 교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리아를 예수와 버금가는 존재로 만들려는 가톨릭의 의도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형론을 하와와 마리아 사이의 유형론으로 발전시킨 교리 속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가톨릭의 교회는 마리아를 둘째 하와로 규정하고 하와의 불순종이 묶어 놓았던 매듭을 마리아의 순종으로 풀었다고 주장하면서 “하와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형론을 하와와 마리아 사이의 유형론을 발전시킨 것은 성서에 그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를 제2의 그리스도로 승격시킬 위험이 있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인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4C 초부터 언급되기 시작하다가 431년 에베소(Ephesus)공의회에서 신조로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론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으로 오늘의 가톨릭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어머니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즉 마리아가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참된 어머니였다는 예수님의 참된 인성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교리인 동시에 이 마리아에게 출생하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셨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일치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교리였다. 그런데 이 교리를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형태로 이 교리를, 그 핵심을 변형시키면서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을 무겁게 추가시킨 채로 이 교리를 비약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엄밀하고 정확하게 언급하면 마리아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마리아의 예수님의 어머니 되심을 영원화시키면서, 마리아는 천상에서도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영원히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발전시키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는 영원히 하나님의 어머니이시고 또한 그 역할을 하도록 규정되신 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천상천하의 모후”이시고 마리아의 모성은 “천상에서도 계속된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면 천상에서도 계속되는 마리아의 모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에 언급될 마리아의 중보성과 관련된 것으로 마리아를 통한 기도의 유효성과 본질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그가 낳은 아들이 그 형제들인 많은 신도들의 맏아들이시므로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가 되고, 이 교회를 모성으로 돌보시는 교회의 참된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효심을 가지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공경해야 한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이나 교회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성서적인 표현이 아니다.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라는 개념은 성서에 결코 존재하지도 않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에베소공의회의 본래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쓰면 오해의 소지가 크므로 마리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였다는 표현으로 만족하는 것이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혼란을 피할 수 있는 훨씬 좋은 것으로 보인다. 성서 속에는 마리아의 영원한 하나님의 어머니 되심이 전혀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는 오히려 예수께서 마리아를 낳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신 분으로 파악하는 것이 성서의 정신에 가깝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영원한 모성에 대한 가톨릭의 주장은 성서의 정신을 크게 뒤집는 것이다.
다섯째, 마리아가 인류 구원 사역에서의 중재자일 수 있는가? 교황 베네딕트 15세(1914~1922)는 마리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은 그의 아들과 함께 고난을 겪었으며 예수와 함께 인류를 구속하였다는 사상을 발표했고 이러한 선언은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재가(再加) 되었다. 즉, 마리아는 예수의 구원 사역에서 예수와 협력했던 분이므로 예수의 구원 사역을 함께 이룩하신 분이고, 지금도 마리아는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있는 구원의 중재자라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트 15세는 1917년 “모든 은총은 성모 마리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맞는 시련의 기간에 그 어느 때보다 큰 고통을 받는 성모님의 자녀들의 생생한 신념을 가지고 위대하신 천주의 모친께 간절히 호소의 기도를 올리기를 바랍니다”라는 선언을 한 바 있다. 이 선언 속에서 우리는 로마 교황청이 마리아에 대한 기도를 장려하고 있고 또한 마리아가 은총의 결정적인 통로임을 선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에 의하면 마리아는 우리의 “변호자”이고 구원의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이다. 마리아는 모성애로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효성이 지극한 분이시기 때문에 마리아의 청을 가능한 한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모성애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마리아와 “깊이 결합하도록”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권고하고 있다.
물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의 중재자는 한 분뿐이시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가톨릭의 공적인 교리는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로”라는 기본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 즉 마리아께 기도하는 것은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를 갖는 중재자라는 뜻은 아니다. 마리아를 통해 전달되는 은총도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전달된 은총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은총의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은총을 받는 길은 두 길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직접 기도해서 은총을 받는 하나의 길과 마리아께 기도해서 마리아를 통해 은총을 받는 또 하나의 길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혹시 마리아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효한 은총을 받는 길이 아니냐는 간과할 수 없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것은 특히 가톨릭교회에 잘 알려진 리구리(Alfons von Liguori, 1787년경 사망)의 『마리아의 영광』이라는 책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심각한 의혹이다. 가톨릭교회 내에서 100판 이상 인쇄가 된 이 유명한 책에서 리구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오히려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욱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다”라는 언급과 “아들이 그 모친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가?” 등의 언급을 한 바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혹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두 길 중에 실제적으로 주로 사용되는 길은 마리아를 통하는 길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 가톨릭의 『중요교리, 전례용어 해설』이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성 알퐁스 리구리께서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공로에 의해 우리에게 은총과 구원을 얻어 주실 수 있는 중재자이시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아들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중재자가 되신다. 비록 성모님은 예수님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 기도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어내실 수 없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청하는 모든 은총은 성모님의 손을 거쳐서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어린 아기가 아닌 왕으로, 권력을 가진 장수로 오실 수 있었고, 또한 오심에 성모 마리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 주심에 성모님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모님을 통해서 당신의 은총을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이상의 언급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가톨릭교회 내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은총을 매개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중재자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 성서의 본질적인 정신이고, 그리스도 밖에 하늘의 여왕이 또 한 분 계셔서 은총을 중재한다는 것은 성서와 심각하게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