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공 안지
출처: 한국현대서화가 사전 2011.11.28
삼국시대~195년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한 2,260명에 달하는 화가, 서예가, 화승의 약력
집필자: 김재룡(서예)
주요 작품: 금자법화경
시대: 조선 초기 |
출생-사망: 1377 ~ 1464 |
분야: 서예 |
직업: 문신, 서예가 |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자행(子行), 호는 고은(皐隱), 본관은 탐진(耽津; 康津)이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고은(皐隱)이라는 호는 김제의 평고(平皐)에서 은거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조의 명유(名儒) 안유(安裕)의 증손으로 탐진(耽津) 안씨 시조 문열공(文烈公) 안원린(安元璘)의 5 대손이다.
1414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였고, 1416년에는 중시대과에 등제하여 집현전 박사와 성균관 제조에 이어 수찬이 되었다.
세자문종의 부빈객이 되었고 1442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449년에는 예문관 대제학, 영중추원사와 봉조하를 역임하는 등 태종 · 세종 · 문종 · 단종 네 임금을 섬긴 중신이다.
빼어난 용모를 타고 났으며 일찌기 권우(權遇)의 문하생으로 주역에 대통하였고, 문예와 덕업(德業)이 출중하여 명성이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칭해졌다.
서화 또한 유명하였는데, 세종의 명으로 선왕태조 · 태종의 명복을 비는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최흥효(崔興孝)와 같이 썼다.
또한 신숙주 · 성삼문 · 박팽년 · 이현로 · 이개 등과 한글제정에도 동참하였고 정인지 · 권제와 더불어 「용비어천가」 125장을 지었으며 변계량과 같이 태조 · 태종 실록을 썼다.
매우 청백하여 비바람조차 피하기 어려운 집에 살았는데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종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안평대군이 자신의 자작시의 시평연(詩評宴)을 베풀고 여러 중신들을 불러 시평을 의뢰하였을 때 아첨하는 다른 중신들과 달리 잘 된 것은 못 된 것이라고 하고, 못 된 것은 잘 되었다고 하며 횡설수설하여 안평대군을 크게 노하게 하였다.
이 후 안평대군이 그를 상대를 하지 않았는데 이 덕분에 계유정난 때 화를 면하였다.
세조가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자 비분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강진에 은거하였다. 아우 안일(安逸)과 살다가 후에 친형 안기(安起)가 은거했던 김제군 용지면 평고리 안촌(安村)마을로 옮겼으며, 이 후 왕위에 오른 세조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1464년에 88세의 고령으로 천수를 다하고 별세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에 능하였다.
*한글 창제 참여자: 신숙주, 박팽년, 이현로, 이개, 권제, 안지
**세종대왕이 권제, 안지, 정인지에게 용비어천가 제작 지시한 것으로 이 분들이 핵심멤버.
*** 안지는 세자 문종의 스승으로 같이 음운연구를 했을 것으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