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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띤떵훈] 번역청 설립을 둘러싼 논의
2018. 8. 8. by 띤떵훈
by행간읽기Aug 08. 2018
번역청 설립을 둘러싼 논의
by 띤떵훈
1. 이슈 들어가기
띤떵훈: 올해 초 박상익 교수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번역청 설립을 주창했습니다. 그는 번역청 설립을 국민 청원에 올렸고 1만 여명이 그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번역청 설립 의의와 국내 번역가 처우, 외국 사례, 번역청의 역할 등을 한데 모아 읽고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여러 소스들을 통해 독자분들이 국내 번역청 설립에 동의, 반대할 수 있는 배경 지식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152쪽짜리 작은 문고판 책 한 권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1월 출간된 ‘번역청을 설립하라’(유유刊). 책 출간과 동시에 청와대 국민소통 광장에서는 책 제목과 같은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국민청원운동이 개시됐다. 2월 7일 종료된 이 청원에는 9417명이 동참했다.
책을 펴내고 번역청 설립 운동을 주창한 이는 박상익(64)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다. 그는 30년간 저술·번역 활동을 통해 ‘한글 콘텐츠’ 확충에 매진해 왔다. 그간 펴낸 저서와 역서는 총 26권에 달한다. 그는 ‘반체제’ 지식인으로 통한다. 타성에 젖어 틀 안에 안주하는 학계 풍토에 반기를 들어온 까닭이다.
[신동아/180304] ‘번역청을 설립하라’ 박상익 우석대 교수
2. 이슈 디테일
1) 번역청의 건립 근거
“번역을 시장에만 맡겨둬서는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출판 및 번역 시장은 죽었습니다. 일본의 출판 시장은 한국의 10 배 정도 됩니다. 책을 통한 지식 생산-재생산의 ‘선순환’ 구조가 확립돼 있습니다. 책에서 인용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이야기를 봅시다. 그와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하세가와 마리코(長谷川眞理子) 와세다대 교수가 교양서 두 권의 인세로 도쿄의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인 최 교수의 경우엔 인세가 지인들에게 밥을 한두 번 사면 없어지는 수준이라고 해요. 이런 상황이기에 출판·번역 분야에 정부가 개입해야 합니다. 철도, 도로, 항만처럼 번역도 사회간접자본(SOC)이라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한글 콘텐츠만 읽고서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학문적 수준에 도달한다는 원대한 비전을 가져야 해요. 일본은 19세기 말 메이지(明治)유신 무렵 번역국을 두고 정부 차원에서 서양 고전 수만 종을 번역했습니다. 유럽은 그보다 앞서 16,17세기 각국 정부 주도로 그리스어, 라틴어 문헌을 각국어로 옮겼어요.
한국은 이른바 고전 반열에 오른 책 중에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 부지기수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죠. 훗날 후손들에게 ‘못난 조상’이라 손가락질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라도 대오 각성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해 빨라야 한 세기가 지나 열매를 볼 수 있어요. 연구나 학문 활동은 모국어로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2008년 ‘세계 언어학자 대회’ 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모국어로 사고할 때 가장 창의적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일본 물리학자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를 예로 들었다.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그는 일본어 자료만으로 공부해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박 교수는 “번역은 헌법 제2장에서 명시한 ‘국민의 기본권’ 문제”라고도 했다.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국민도 한글 번역물을 통해 세계 각국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마땅히 보장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신동아/180304] ‘번역청을 설립하라’ 박상익 우석대 교수
제도적으로 번역가를 양성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번역을 시장의 문제로 내버려둘 수만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제도적으로 번역가를 양성하고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2001년부터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돼 번역가를 양성하는 번역아카데미를 운영하고 번역 지원, 출판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원하는 범위는 한국어로 된 콘텐츠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제한된다. 한국어 콘텐츠를 늘리고 기초를 다지는 데는 별다른 지원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최근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책을 펴낸 박상익 교수는 “번역청 같은 정부 기관이 됐든 번역위원회 같은 조직이 됐든 간에 돈 안 되는 번역과 번역학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주간조선/180514] 잇따른 오역 논란 번역청 설립을 許하라!
이 분야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고전번역원에 편성된 올해 사업예산은 80억 원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번역 인력 수급과 작업 진척에 어려움이 많다. 박헌순 수석연구원은 “내가 입사할 무렵에는 한학을 공부한 선배가 많았다. 이제는 대학에서 한문학, 국문학, 사학, 철학 등을 공부한 뒤 관련 분야 원전을 읽으려고 고전 공부를 시작한 이들을 중심으로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문제는 이들이 고전을 번역할 수 있는 수준의 전문성을 갖추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번역자들은 대부분 대학 졸업 후 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에서 5~7년간 추가 교육을 받고 번역을 시작한다. 지난해 고전번역연구원이 발간한 연감에 따르면, 2011년 번역 참여 인력 268명 가운데 40대가 96명(35.8%), 50대가 81명(30.2%)에 달했다. 20대는 2명(0.7%)에 불과했다. 학력도 박사학위 소지자가 136명(50.7%)으로 가장 많았고, 석사학위 소지자(36명, 13.4%), 박사 수료자(26명, 9.7%)가 뒤를 이었다. 이런 노력에 비해 보상은 크지 않다. 김진옥 실장은 “1998년 고전번역원 입사 당시 석사학위를 갖고 있었고 교육원에서 추가 교육도 받은 뒤였지만 월급이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며 “번역 자체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지 않고는 하기 힘든 일”이라고 소개했다.
2) 국내 번역 이슈
번역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오래된 문학계에서도 오역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지난 2016년 맨부커인터네셔널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영어 번역본에서 중대한 오역이 있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번역을 맡은 데보라 스미스가 일부 문장을 누락하거나 왜곡해 ‘완전히 다른 채식주의자’가 됐다는 강도 높은 비판이 여러 전문가를 통해 쏟아졌다. 고려대 불문과 조재룡 교수는 지난 3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어 문법, 통사, 구문, 어휘 등을 신경쓰기 보다 원문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에 맞도록 낱말을 배치하는데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며 스미스씨의 자의적인 해석이 개입됐다고 평가했다. 또한 주인공 영혜의 수동적이고 몽환적인 캐릭터가 번역 과정에서 능동적이고 이성적인 여성으로 그려졌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오역 문제는 최근 발표된 작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른바 고전의 반열에 올라 이미 수차례 번역됐던 작품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정서(본명 이대식) 번역가는 지난 2014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새롭게 번역하며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도발적인 홍보 문구를 내세웠다. 이 번역가는 자신의 번역서와 블로그를 통해 ‘카뮈 전문가’로 불리는 고려대 불문학과 김화영 교수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의 번역본이 ‘오류 투성이’라고 비판했다.
[투데이신문/180704] [더 나은 번역을 위하여①] 계속되는 오역 논란, 원인과 해법은?
4월 한 달 한국 영화계는 마블의 수퍼히어로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쏟아낸 이야기로 북적였다. 그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영화 자막 번역과 관련된 문제다. 영화 ‘어벤져스’의 자막을 맡은 번역가는 그동안 마블 영화 대다수를 번역해온 박지훈 번역가다. 이번 논란이 있기 전에도 마블 팬들은 그의 번역을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번역한 자막에 오류가 많았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 나온 대사다. 영화 주인공인 수퍼히어로 캡틴 아메리카가 가장 친한 친구 버키 반즈와의 옛 일을 회상할 때 장면에서 오역이 나왔다. 버키 반즈가 원래 했던 말은 “I was gonna ask…(내가 하려던 말은)”였는데 번역가는 이를 “그거 할래?”라고 완전히 다르게 번역했다. 단지 한두 문장의 오역 때문에 팬들이 그의 번역을 꺼려했던 것이 아니다. 팬들은 그가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자막을 번역한다고 여러 번 지적했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주간조선/180514] 잇따른 오역 논란 번역청 설립을 許하라!
띤떵훈: 마블은 국내에도 수많은 마니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영화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합니다. 뿐만아니라, 캐릭터의 성격과 탄생 배경, 그들이 쓰는 조크의 맥락까지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자랑합니다. 그들은 번역상의 오류를 족집게처럼 집어냅니다. 번역으로 인해 재미가 반감되는 상황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네티즌이 번역을 지적하는 분야는 영화만이 아닙니다. 소설, 게임, 상품 설명서 등 거의 모든 매체에서 번역이 문제가 되고 있죠. 수준 높은 무료 영어 교육 자료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대중은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공간, 시간의 제약 없이 외국어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죠. 그들은 원문으로 콘텐츠를 수요하며, 번역본과 비교해 오류를 집어낼 수 있습니다. 높아진 이용자들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선 전문성을 갖춘 번역가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카뮈의 이방인을 번역한 이정서 씨의 경우 학계에 많은 이슈를 몰고 왔습니다. 새 번역본을 출판할 때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이 오류로 가득한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비방을 했기 때문인데요. 뫼르소가 살인을 한 경위, 레몽의 정부와 아랍인의 관계를 근거로 들었습니다. 결국 한 네티즌이 카뮈 연구회에 문의를 했고, 이정서의 번역이 잘못됐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은 성공했습니다. 그와 별개로 학계에선 더 좋은 번역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외국 사례
중국과의 외교, 비즈니스, 학문 교류의 기초, 바로 번역이다. 그런데 이 기본 중의 기본 번역 때문에 피 본 사람이 적지 않다. 식당 메뉴판, 생산 매뉴얼서부터 관공서 홈페이지마저도 뜻을 알 수 없는 오역이 수두룩하다. 일단 이웃나라 중국만 봐도 번역 표준화 모델 수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중국은 일찍부터 공공번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해외 선진사례를 참조해 수립한 번역 표준을 통해 올바른 번역 방식을 안내하는 한편 이를 전담할 '민족어문번역국'을 신설 운영함으로써 업무 효율성과 효과를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정호정·임현경 <공공번역 표준화의 모델>
현대 중국은 다양한 소수민족을 통합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의 소수민족 언어들과 국가 표준어간의 번역 및 용어 통일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또 서구식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 국제무대에서의 부상 과정에서 영어를 비롯한 세계 중요 언어의 전문용어들을 수입해 토착화하는 일이 중요한 국가발전과제로 인식됐다.
이에 중국 정부는 국가적 번역 표준을 구축하고 국가 번역 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매년 전문용어 확대 및 확정을 위한 국가 위원회를 운영하고 여기에서 확정된 전문용어를 전국에 배포·사용하고 있다. 특히 '국가표준'까지 제정하면서 번역 수준 향상 및 서비스 개선을 유도하고 있다. 이 국가표준에는 일관성 있는 전문용어 사용, 핵심 키워드의 정확한 번역,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한 규정 등을 체계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도 번역청과 비슷한 기구가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은 '민족어문번역국'을 설립했고, 유럽연합(EU)은 EU 집행위원회 번역총국(DGT), EU 번역센터, EU이사회 총사무국 번역서비스국 같은 조직을 통해 공공번역 부문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캐나다는 1934년부터 캐나다 번역국(Bureau de la Traduction)을 운영해오고 있다. 호주의 경우 번역사 인증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공공번역 수준을 관리하고 있다. 국가에서 자격 있는 통번역사를 관리해 간접적으로 번역 실무나 번역 결과물 수준의 향상을 꾀하는 것이다. (참조: 정호정·임현경 <공공번역 표준화의 모델>)
[중앙일보/180203] 일찍부터 국가 번역청 만든 중국! 한국은?
띤떵훈: 중국, EU, 캐나다, 호주는 저마다 제도적으로 번역을 돕고 있습니다. 호주의 사례가 가장 적용하기 쉬워보입니다. 국내 번역가 단체인 한국번역가협회의 경우, 자격증을 발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신력이 덜하고 요구하는 곳이 많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지는 게 문제입니다. 국가 시험을 만들어 번역 수준을 간접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번역청을 만드는 것보다 인력적으로 금전적으로 효율적입니다. 번역청의 설립이 실현 가능성이 낮다면, 주변국의 사례를 통해 대안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 되겠습니다.
4) 번역청의 역할
정호정 한국공공통번역협회 회장: <1> 행정직, 실무번역직, 기구지원직 등으로 구성해 전문 번역사를 선발하고 업무를 분장하고 결과물을 평가 관리한다. <2> 전문 DB팀에서 번역 실무에 앞서 문서의 전처리/후처리 작업과 함께 번역에 필요한 전문용어 DB 제공 및 용어 업데이트를 맡는다. <3> 기구지원팀에서는 정부기관 내 번역 수요를 접수해 배당 처리하고 결과물을 전달하는 한편 사후 불만이나 애프터서비스 처리 등을 관장한다.
[중앙일보/180203] 일찍부터 국가 번역청 만든 중국! 한국은?
띤떵훈: 정호정 한국공공통번역협회 회장의 말을 근거로 볼 때, 번역청을 설립하기 위해선 많은 준비와 인력과 자금이 필요합니다. 거대한 인프라를 기초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담당 공무원을 육성하기 위해선 그에 맞는 시험과 커리큘럼이 요구될 것입니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5) 번역가 처우
학계가 번역의 중요성을 모르니까 연구 실적 평가에서 번역은 논외로 칩니다. 실제로 각 대학에서 번역물은 교수의 연구 실적 평가에 반영하지 않아요. 현실적인 문제도 있어요. 번역의 대가는 논문 한 편에 주어지는 연구비의 10분의 1 수준이에요. 전문 연구자가 학술서적 한 권을 10년 걸려 번역해도 손에 쥐는 인세는 300만 원 남짓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열정페이’를 받고서라도 번역하지만, 이를 모두에게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죠.”
대학에서 외국어를 공부해 석사학위를 딴 후 10년 가까이 번역가로 활동 중인 A씨는 이를 두고 “영화 배급사 측에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는 독자, 시청자들이 외국어로 만들어진 창작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거든요. 모든 창작자들은 영상 장면 하나, 문장 한 줄에 의미를 담는데 번역을 대충 읽고 들리는 대로만 만든다면 창작자의 뜻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번역은 딱 ‘텍스트 언어 변환’ 그 정도로만 인식이 되고 있어요.”
“이건 악순환 같은 겁니다. 알음알음 번역 의뢰가 들어오기 때문에 번역가는 최대한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주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로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바는 저렴한 비용, 빠른 마감 같은 거지요. 이런 걸 잘 해내면 같은 클라이언트에게서 계속 일감이 들어옵니다. 그러니 번역의 질보다는 양, 속도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작은 영화제의 영화나 큰 배급사의 영화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동아/180304] ‘번역청을 설립하라’ 박상익 우석대 교수
띤떵훈: 대부분의 번역가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습니다. 페이도 적고, 작업 시간이 턱없이 모자른 경우가 태반입니다.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의 경우 저자와 번역가가 함께 영광을 나눴습니다. 번역가를 또 다른 저자, 혹은 그에 상응하는 예술가로 보았기 때문인데요. 번역가를 향한 인식과 그들의 작업이 저평가 받는 게 아닐까요? 또한 인맥이 없으면 첫발을 내디기 어려운 환경으로, 시작도 못 하고 커리어를 포기하는 이들이 많은 게 현실입니다.
6)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자질
번역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해당 외국어 실력, 번역 경력만으로는 안 되고 해당 학문, 분야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중요하다. 영어 문학 작품 번역을 하려면 영문학과나 국문학 전문가나 작가, 수학 관련 번역을 하려면 수학의 전문가여야 한다. 미술 실기 기법 책이라면 미술 전공자가 번역을 해야 제대로 결과가 나온다. 즉 언어 실력은 해당 분야 전문 능력 위에 더하여 필요한 소양이지, 그것만 가지고는 제대로 된 번역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갖춘 능력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며, 특히 이과나 예체 능 쪽은 언어, 문학적 능력이 심히 모자란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다수 교양서의 경우 국문학/영문학/중문학/독문학 전공자 등이 인문/사회/과학/기술/예체능 할 것 없이 전부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 오역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전공서의 경우 각 분야 교수 (실제로는 아마도 대학원생)가 전부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어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차라리 원어로 읽는 게 더 이해가 빠른 경우가 있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외국 어문학 전문가와 해당 분야 전문가가 공동 저작을 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는 어문학 전공자가 번역한 후 해당 분야 전문가가 감수하는 정도가 한계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국어국문학 전공자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되거나,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한국어 문법이나 어휘에 대해 공부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면 전문적인 번역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결책은 양쪽 부류가 팀을 이루어서 의견을 교환해가며 교정을 보는 것이다.
실제로 좋은 번역가가 작품을 번역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은 매우 넓고 깊다. 때로는 작가처럼 맥락의 빈 부분을 채워 넣어 작품의 이해를 돕는 것도 번역가 실력과 센스에 포함된다. 한편 이러한 넓고 깊은 번역은 AI 번역에서 쉽게 기대하지 않는 부분이다. 번역은 인간의 주관 판단과 맥락에 맞는 창작 능력이 발휘될 여지가 매우 큰 분야이기 때문이다.
양질의 번역 데이터는 어떻게 생성되는 것일까. 번역 데이터는 번역가 손에서 탄생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롭게 생겨나는 언어는 끊임없는 작업을 통해 데이터로 변환된다. 또 상황 맥락과 작가 역량을 요하는 번역은 번역가 손길을 거쳐 더욱 적확한 표현으로 진화하고 정제된 데이터로 탈바꿈한다. 이처럼 정교하게 된 데이터는 NMT 기술의 필수 재료가 된다. 이에 따라서 일부 번역가가 야기한 인간 번역에 대한 부정 인식과 달리 번역가가 만들어 내는 데이터 가치는 여전히 중요하고, 수요는 지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전자신문/180702] [콘텐츠칼럼]인공지능 번역시대, 번역가의 역할은?
3. 필진 코멘트
좋은 번역은 영어 실력과 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서 나옵니다.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한다 해도, 콘텐츠에 대한 이해 없이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심한 경우, 정 반대로 해석돼 독자의 이해를 망치기도 합니다. 반대로 언어와 그 분야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 해도, 한글로 표현하는 방식이 잘못됐다면 그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철학 분야가 그렇습니다. 역자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은 쓸모가 없습니다. 복잡한 개념의 경우, 올바른 문장을 통해 만들어야 오류나 오독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번역가 스스로가 작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말을 다룰줄 알아야 우리말을 쓰는 독자를 제대로 이해시켜 주제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 적합한 문단이 있어 철학가 풍경 선생의 글을 인용합니다.
나는 어떤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철학적 생각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어려운 추상적 단어나 일상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 이루어진 철학적 문장은 헛소리이거나 그냥 잘난 체 하는 치기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번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어야 비로소 그것이 설득력이 있는지,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물어볼 수 있다.
참고: http://sellars.blog.me/221312381313
<금강경> 한 구절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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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업계에서 번역가를 다루는 방식이나 대우는 재고와 개선이 필요합니다. 작품의 질보다 번역 발주하는 업체의 수익이 우선시 되는 상황으로, 업계의 미래가 밝지 않습니다.
매일 셀 수 없을 정도의 컨텐츠가 인터넷에 쏟아집니다. 기하급수적 성장이죠. 앞으로 전문 번역가는 여러 분야에서 수요가 높아질 것입니다. 번역하는 장르에 대한 이해, 문화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 이해한 것들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국어 능력, 공신력 있는 단체의 포럼과 채널을 통한 정보 공유, 꾸준한 번역 활동을 지원하는 복지 등을 제도적, 체계적으로 제공한다면 '제대로 된' 번역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 소비자는 훨씬 수준 높은 컨텐츠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수출 측면에서도 혜택을 볼 수 있고요. 국내 소설, 게임, 크리에이터들의 컨텐츠 등을 더 많은 이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문학계에선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여러 창작자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도모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번역청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제도적 지원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