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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0년 병진(1796) 9월 17일(기미) 양력 1796-10-17
20-09-17[03] 소두 홍준원을 불러서 보고 김인후의 학문과 도학에 대해 하교하다
소두(疏頭) 홍준원(洪準源)을 불러서 보고 하교하기를,
“나는 선정(先正)을 배향하는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오래전부터 생각을 해 왔었다.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 안 문성공(安文成公 안향(安珦)),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 이 네 유현 가운데 정포은은 고려 말에 태어나서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창도하여 우리 동방에서 기자(箕子) 이후의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 공이 매우 크니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최치원과 설총도 동방의 유학자로서 두드러진 사람들이지만 종사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나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최치원의 경우는 좀 지나친 듯하다. 안 문성공은 공자의 사당에 큰 공이 있으니 사현사(四賢祠)와 같은 사당을 별도로 세워서 제사 지내 주는 것으로 보답한다면 진실로 합당할 것이다.
김 문정공(金文靖公 김인후(金麟厚))은 《대학》과 〈서명(西銘)〉의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을 처음으로 밝혀내었고, 경(敬)에 처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와 도학(道學) 연원의 정통으로 볼 때 실로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 된다. 내가 시대를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운 감회를 깊이 일으켜 경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문정공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은 모두 도학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을 아울러 칭하고 있다. 그러나 종사하는 중대한 전례에서는 다만 사문과 도학을 가지고 논해야 할 뿐이지 절의나 문장 같은 것은 오히려 그 나머지 일에 속한다. 김 문정공의 절의에 대해서도 오히려 나머지 일에 속한다고 하면 그의 도학의 경지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하였다.
[주-D001] 사현사(四賢祠) : 성균관 근처에 있던 사당으로, 숙종 때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흉년으로 중단되었다가 영조 1년(1725)에 완성되었다. 진(晉)나라의 동양(董養), 당(唐)나라의 하번(何蕃), 송(宋)나라의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澈)을 제향하였다. 《英祖實錄 1年 4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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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見疏頭洪準源敎曰: "予於先正配享, 竊自有講明者, 久矣。 崔致遠、薛聰、安文成、鄭圃隱此四賢中, 鄭圃隱生於麗末, 始倡道學, 在我東爲箕子後一人, 其功甚大, 實合於腏食聖廟。 至於崔致遠、薛聰, 亦東方儒者之表著, 然其於從祀, 則予未知如何, 而崔致遠似或過矣。 安文成, 有大功於聖廟, 報以俎豆之典, 如四賢祠之別爲立祠, 則實爲允當。 惟金文靖則《大學》、《西銘》微辭粤旨, 始爲發明, 居敬直內之工、道學淵源之正, 實爲斯文之宗匠。 故予之曠感而欽歎者, 正以此也。 今之言文靖者, 皆以道學、節義、文章, 竝稱, 然配享重典, 只當以斯文、道學, 論之而已。 至如節義、文章, 猶屬其餘事。 以金文靖之節義, 謂之猶屬餘事, 則其道學之尊, 尤可尙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