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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 왕의 ‘거대한 나무’ 꿈(4:1~37)
1. 느부갓네살의 또 다른 꿈과 번민(4:1~9)
느부갓네살 왕은 큰 신상에 관한 꿈을 꾼 후 상당한 세월이 지나 또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느부갓네살에게 여러 꿈들을 꾸게 하셨을까? 우리는 그로 하여금 다양한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이해해야만 한다. 느부갓네살이 다양한 꿈을 되풀이하여 꾸게 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직접 억압한 바벨론 제국의 왕이자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 파괴한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그의 악행과 더불어 그에게 임하게 될 심판을 선포하셨다. 이는 그가 억압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장래 나라를 회복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대한 선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점은 그의 꿈의 내용과 해몽이 바벨론 제국과 그 안에서 포로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대로 공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일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외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바벨론 제국의 최고의 공직자로 있던 선지자 다니엘에 의해 만천하에 선포되는 성질을 지니게 된다.
결국 꿈을 꾼 당사자인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꿈과 해몽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벨론 제국의 공직자들과 일반 시민들은 그로 인해 뒤숭숭한 분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로가 되어 억압받고 있는 유대민족은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느부갓네살 왕의 꿈은 느부갓네살과 바벨론 제국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아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꿈을 잘 해몽함으로써 느부갓네살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는 다니엘 개인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꿈을 통해 메시야 사역에 관한 자신의 놀라운 뜻을 계시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그에 대한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을 통치하던 최고 권력자로서 자신의 꿈을 통해 알게 된 정치적 문제에 대응하고자 하는 마음만 간절했을 따름이었다. 그에게는 자신과 바벨론 왕국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은 거대한 신상에 대한 꿈을 꾸고 나서 그에 대한 다니엘의 해몽을 듣고 난 후에도 바벨론의 두라 평지에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바벨론 제국의 위엄을 드러내고 보존하고자 하는 왕의 정치적 의도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자기가 꿈속에서 본 거대한 신상을 기초로 한 금 신상을 만들어 정치 종교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의 계획은 의도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벨론 제국의 모든 백성들이 그 신상에 경배하라는 왕명을 적극적으로 따랐지만, 유대인들 가운데 그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벨론 제국의 지방 장관의 지위에 있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명을 따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신상 숭배를 거절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명령에 저항하는 그들을 처형하기 위해 용광로 심판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그 악행은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바벨론 제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이 만천하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느부갓네살은 또다시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왕은 그 꿈으로 인해 심한 두려움에 빠져 번민하게 되었다. 그 꿈은 ‘거대한 나무’가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꿈의 해몽을 위해 전국에 조서(詔書)를 내려 제국 내의 용하다는 모든 술사들과 박수들과 점쟁이들을 소집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왕의 꿈을 제대로 해몽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또다시 다니엘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다니엘을 곧바로 부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다니엘은 박수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단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다니엘을 먼저 부르지 않은 데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느부갓네살의 입장에서는 다니엘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몽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자신의 꿈에 대해 긍정적이고 좋은 해몽을 해주면 좋을 텐데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행동이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느부갓네살 자신에게는 그것이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바벨론의 소위 용하다는 이방 종교인들이 왕의 꿈을 해몽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몽할 수 없음을 통해 저들의 한계가 만방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 연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결국 다니엘을 불러 그 꿈에 대한 해몽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하게 된다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 것이다.
2. 느부갓네살이 꾼 꿈의 내용(4:10~17)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본 꿈을 다니엘에게 설명했다. 그는 꿈속에서 넓은 땅의 중앙에 한 거대한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나무는 튼튼하게 자라 그 높이가 하늘에 닿을 만큼 컸다. 땅끝에서도 그 나무가 보일 정도였다. 나무의 잎사귀들은 아름다웠으며 탐스러운 열매들이 가득했다. 그 과실들은 모든 사람들의 식물(食物)이 될 만했고 들짐승들은 그 그늘에서 쉬었으며 날아다니는 새들은 가지에 깃들어 놀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나무로부터 먹을거리를 얻었다. 그들의 생명이 바로 그 나무와 나무의 열매에 달려 있었다. 그때 느부갓네살은 한 거룩한 순찰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순찰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그 거대한 나무둥치를 베어버리고 그 가지들을 찍어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잎사귀를 떨어뜨려 모든 열매들을 헤치라고 소리 질렀다. 그렇게 하여 그 아래 놀던 짐승들과 가지에서 깃들어 있던 새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그 열매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량 공급을 중단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라고 명령했다. 그것을 쇠줄과 놋줄로 묶고 그것으로 들풀 가운데 있도록 하라는 말을 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이슬에 젖게 되어 땅의 풀 가운데서 들짐승들과 더불어 같이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거대한 나무의 그루터기가 남게 되지만 나무 둥치가 베어짐으로써 들짐승들이 안식으로부터 쫓겨난 것처럼, 그 나무 그루터기도 그와 같은 형편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꿈 가운데서는 거대한 나무둥치가 잘려 나간 그루터기에 상징적으로 연관된 인물에 대한 예언이 이어졌다. 그 사람은 마음이 변하여 인간의 마음 같지 않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 긴 기간 동안 원래 생활하던 형편처럼 살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우연히 발생하게 되는 사건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거룩한 순찰자의 말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사건이었다. 즉 이를 통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들의 나라를 친히 통치하시며, 그가 자신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앉게 하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인간들로 하여금 알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3. 다니엘의 해몽과 권면
(1) 다니엘의 해몽(4:18~26)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에게 자신의 꿈에 대한 해몽을 요구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모든 박사들과 점쟁이들은 해몽할 수 없지만 다니엘은 능히 해몽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 전에 이미 그를 통해 자기 꿈의 해몽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그 자리에서 다니엘의 해몽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4:18).
다니엘은 왕의 꿈 내용을 들으면서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는 그 꿈이 느부갓네살의 앞날에 미치게 될 불길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그에게 꿈을 해몽해 들려주는 것에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왕은 자신의 꿈에 대한 해몽을 사실 그대로 말해주도록 요구했다.
다니엘은 그 꿈의 내용이 느부갓네살 왕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임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다. 그것을 통해 그 꿈의 내용이 불길한 것임을 먼저 왕 앞에 시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꿈에 대한 해몽을 시작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 하늘에 닿고 땅끝에서도 보이며 잎사귀들이 무성하여 아름답고 많은 열매를 맺어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아래 거하며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 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세력이 견고해지고 번성해져서 하늘에 닿고 그 권세가 땅끝까지 미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즉 그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한 거룩한 순찰자가 나무를 베고 멸하도록 명령했다. 그가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어 쇠줄과 놋줄로 묶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 있게 하여서,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과 더불어 살면서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한 것은 장래 느부갓네살 왕에게 미칠 일에 관한 사건이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말씀하셨으므로 앞으로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니엘은 그 꿈을 조만간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들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고 이슬에 젖을 것이라 해몽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형편 가운데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말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의 뜻대로 그 나라를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 알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바벨론 제국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통치권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이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거대한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줄 왕이 깨달은 후에 다시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는 나라가 견고히 서게 되리라는 사실에 대한 예언임을 말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이 꾼 ‘큰 나무 꿈’에 대한 선지자 다니엘의 해몽이었다.
(2) 다니엘의 권면(4:27)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간곡히 권면했다. 그것은 공의를 행함으로 죄악을 중단하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도록 요구했다. 그렇게 하면 혹 왕이 평화로운 가운데 나라를 다스릴 날이 더 길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느부갓네살 왕이 공의를 행하지 않은 편파적인 정치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도록 당부한 것은 그가 부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에 치중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먼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죄를 속하라고 요구한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즉 회개함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으라고 권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이 가운데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이다. 즉 본토를 뒤에 두고 이방 지역으로 사로잡혀온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정치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정권으로부터 심한 압제를 당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과 그의 왕국을 약화시켰다가 다시 회복하도록 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은 당시 막강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느부갓네살 왕과 바벨론 제국이 기고만장하여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무서운 억압정책이 지속되고 있는 형편에서 그 강압 정치를 잠시 늦추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권면을 통해 이방에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다. 다윗 왕국이 패망의 지경에 이른 형편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세상의 모든 권력들을 간섭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뜨거운 용광로에서 극형에 처해졌을 때 저들과 함께 있던 ‘그 인물’과 연관된 메시야를 구체적으로 소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느부갓네살에게 임한 꿈의 실현과 회복
(1) 꿈 가운데 예언된 일이 발생함(4:28~33)
느부갓네살 왕의 꿈은 드디어 현실로 드러났다. 그 꿈을 꾸고 다니엘로부터 해몽을 듣고 나서 만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에 있는 왕궁의 옥상을 거닐면서 자신의 치적들을 기억하며 스스로 자화자찬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거대한 바벨론 제국을 건설하여 도성을 세우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낸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처럼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며 성공한 인생에 대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만족에 가득 찬 그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때 마침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바벨론 왕국에 군림하는 왕으로서 그의 지위가 그로부터 떠났음을 선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이제부터 그가 사람들에 의해 왕궁으로부터 쫓겨나 광야에서 힘겨운 투쟁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일은 곧 그에게 발생하였다. 느부갓네살은 왕궁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과 같고 손톱은 새 발톱 같은 상태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그가 왕위에서 쫓겨난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대적자들로부터 왕좌를 빼앗긴 느부갓네살은 일곱 때를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살아야만 했다.
우리는 이에 관한 말들을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느부갓네살 왕이 본문 가운데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문자적으로 짐승의 모습으로 변한 채 들짐승같이 살고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느부갓네살을 대적하는 반란 세력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왕궁 바깥으로 쫓겨나 광야에서 유리하는 삶을 살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본문 가운데 느부갓네살이 사람들에 의해 쫓겨났다고 하는 표현은 궁중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4:32).
한편 많은 학자들은 느부갓네살이 왕궁으로부터 쫓겨난 까닭을 정신질환 때문이라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 만일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면 그를 광야로 쫓아낼 것이 아니라 궁궐 내에 격리 수용해 보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정신질환에 걸렸다면 나머지 가족들은 그의 치유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약물치료를 비롯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성을 다할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대해서도 그렇다. 질병에 걸려 고통에 빠진 가족을 집 밖으로 내쫓는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 도리어 환자가 먹기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물며 느부갓네살은 막강한 제국을 통치하던 왕위에 있던 인물이다.
본문 가운데 왕이 소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는 말은 반란으로 인해 쫓겨난 느부갓네살이 왕궁의 진수성찬이 아니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궁색한 식생활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몸이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맞았다는 것은 화려한 왕궁을 떠나 사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머리털이 독수리 털 같고 손톱은 새 발톱 같았다는 말 역시 왕의 위엄에 가득 찬 모습이 아니라 다듬지 않은 거친 외모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왕궁에서 쫓겨난 느부갓네살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느부갓네살의 지위 회복(4:34~37)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인 광야에서 일곱 때가 지나고 나서 느부갓네살은 다시금 왕위를 회복해 환궁하게 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무너지고 다시금 느부갓네살의 세력이 권력을 되찾게 된 것이다. 본문 가운데 자신의 ’총명‘이 돌아왔다고 한 표현은 그가 통치력을 회복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왕위를 되찾아 환궁한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자 자극히 높은 자인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송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존경한다는 말과 더불어 그의 영원한 권세와 그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입술로 노래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할 수 있으며 그것을 금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전에 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의 모든 권력을 회복한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에 돌아와 왕좌에 앉게 되자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 앞에 나아가 조회를 하게 되었다. 그로써 그의 왕국은 다시금 옛날처럼 일어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권세는 도리어 그 전보다 더욱 커지게 되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것으로 인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한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함은 의롭다는 사실을 노래했던 것이다. 그는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낮추는 분임을 노래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꿈과 해몽 그리고 자신이 처했던 끔찍한 위기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은 그때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을까? 유감스럽지만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비록 입술로 하나님을 경배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의 순수한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말과 행동은 종교적인 것일 뿐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5. 느부갓네살에게 일어난 일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느부갓네살의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학자들은 마치 그가 진정으로 회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송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를 통한 외형을 보고 판단하는 잘못된 생각들이다.
느부갓네살이 당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다면 그동안 자기가 저질렀던 모든 악한 일들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뒤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하나님에 대한 배도 행위와 그에 연관된 모든 것들을 척결하기 위해 분명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바벨론 제국 내부에서 마땅히 정리되어야 할 일과 이스라엘 민족에 연관된 가나안 땅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했던 것이다.
바벨론의 내부에서는 그가 세웠던 두라(Dura)의 금 신상을 파괴하는 것과 더불어 바벨론 제국 내에서 자신이 만든 이방 신앙과 신상들에 대한 분명한 금지와 파괴 명령이 뒤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강제로 빼앗아 온 성물(聖物)들에 대한 반환이 즉시 이루어져야 했다. 과거에 저질렀던 느부갓네살의 그러한 행동들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였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일 느부갓네살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그 꿈을 꾸었다면 그가 감히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 꿈을 꾸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이루어졌으며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억압이 지속되고 있었다면 성전 재건과 성전의 모든 기명(器皿)들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려놓는 일이 동반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의 입술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표현과는 달리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온 하나님의 거룩한 성물들은 그 후에도 여전히 바벨론 지역에 방치되고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이 축제를 벌이면서 귀족들과 왕후들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실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금과 은으로 된 잔들로 술을 마시는 악행을 저지른 사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단5:1~3).
우리가 느부갓네살의 지나간 여러 행적들 가운데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과거부터 그는 커다란 사건이 있을 때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되풀이해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다니엘이 자기에게 거대한 신상에 관한 꿈을 알려주고 해몽해 주었을 때도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2:47).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용광로에 던져졌을 때 ‘신들의 아들’ 같은 이와 더불어 뜨거운 용광로 안을 거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되살아왔을 때도 느부갓네살은 저들이 믿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나름대로 유일신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였었다(3:28~29). 그러나 그의 그런 태도만으로는 진정한 신앙이라 인정할 수 없다. 이는 그 이후 불신앙적인 그의 태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여러 차례 경험한 후에도 여전히 불신자의 사고와 행동을 버리지 않았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그 꿈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것이라 분명히 말했다(4:2).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신’과 ‘다니엘의 하나님’을 구별했다(4:8). 그런 가운데 그는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심각한 번민을 하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바벨론의 용하다는 무당들과 술사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모아 해몽해 주도록 요구했다.
느부갓네살은 나중에 다니엘을 불러 자신의 꿈에 대한 해몽을 듣기는 하지만 할례와 상관이 없는 그의 모든 행동들은 할례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종하는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신앙적인 행동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느부갓네살의 꿈들과 사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