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박해의 발단과 전개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의 하나. 1846년 6월 5일(음 5월 12일).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되어 9월 20일(음 7월 30일)에 종결되었다. 이 박 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己玄迫害)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 되었다.
〔발단과 전개 과정〕 1839년의 기해박해(己玄迫害)가 끝난 이후 1840년대 중반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해 척사 윤음이 박해의 법적인 근거가 되었으므로 언제 어디서든 다시 박해가 일어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중의 국경 감시가 엄해졌고, 따라서 외국 선교사들은 육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가 없게 되었다. 1845년 이래 김대건 신부가 해로 개척에 나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
결과 김대건 신부는 같은 해 10월 12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때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해로는 매우 위험하였으므로,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봄이 되자마자 김대건 신부에게 장차 중국에 있는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부제 등이 입국할 수 있도록 새로운 해로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마포-연평도- 백령도를 항해하면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자신이 그린 해로도(海路圖)를 중국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월 5일에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에서 선주 임성룡(林成龍). 사공 엄수(嚴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6월 20일에는 이곳에서 네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는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더욱이 처음에는 그가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양선의 출몰, 외국인의 월경까지 문제로 삼았다. 이어 김대건 신부가 중국 어선에게 전한 편지와 지도를 색출해 올리도록 황해 감사에게 지시하고, 임성룡과 엄수의 문초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들을 철저히 색출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어선에서 편지와 지도가 압수되었으며, 선주 임성룡의 부친 임치백(林致伯, 일명 君執)과 일꾼 김성서(金性西)의 부친 김중수(金重秀)가 추가로 체포되어 6월 14일(음 5월 21일) 이후에 김대건 신부 등과 함께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다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병오박해였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체포된 사람은 임성룡의 조사에서 드러난 남경문(南景文. 세바스티아노)이었다. 그는 금위영의 군인으로 당시 남대문 안에 살고 있었다.
이어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기 전에 배에서 내려 상경한 복사 이의창(李宣昌. 베난시오)과 사공 노언익(盧康益). 안순명(安順命). 식부(食夫) 박성철(朴性哲) 등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임성룡이 밀고한 충청도 덕산의 김순여(金順汝), 은진의 구순오(具順五)도 체포 대상이 되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문초에 이름이 나온 이 씨(李氏)를 혼동하여 이의창 뿐만 아니라 앵베르 주교의 복사였던 이재의(李在宣, 토마스.일명 在容)에게도 체포령을 내렸고. 아울러 이재영(李在永)으로 변성 명하고 활동하던 회장 현석문(玄親文.가롤로)과 이기원(李起元, 마티아. 일명 身達) 등도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은 김대건 신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현석문은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돌우물 골(石井洞, 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던 김대건 신부 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뒤 그곳에 있던 여신자들을 잣골(相洞, 지금의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이간난(李干簡. 아가다) 집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사포서동(司園署洞. 지금의 종로구 통인동)에 새로 매입해 놓은 김임이(金任伊, 데레사)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이 교군(輸君)들을 앞세워 이간난의 집을 찾아내서 먼저 우술임(禹述任, 수산나)을 체포하였으며, 다시 그를 앞세우고 사포 서동으로 와서 7월 15일(음 윤 5월 22일) 현석문, 이간난, 김임이와 정철염(鄭鐵能, 가타리나)을 체포하였다. 한편이 무렵에 김대건 신부의 고향인 용인의 골배마실에도 포졸들이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그 이웃의 은이(隱里,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교우촌에서 한이형(韓廣事, 라우렌시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포도청에서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으며. 현석문, 남경문, 한이형、김임이, 이간난,우술임, 정철염 등도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반면에 이기원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며, 박성철(朴成哲), 임학이(林鶴伊), 김재신(金在信). 심 큰바르바라(沈大發發兒), 허 작은바르바라(許小發發兒). 김순이(金順伊) 등은 배교하고 석방되었고. 임성룡과 엄수는 유배형을 받았다. 그중에서 임성룡은 훗날 입교하여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의 문초에서는 중국의 광동 출신인 우대건(〒犬建)이라고 하다가 여섯 번째 문초에서야 비로소 용인(龍仁) 태생 김대건으로 신학 공부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하였음을 실토하였다. 그러나 교회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권면하는 데 힘썼고, 선주 임성룡의 부친인 임치백에게 '요셉’ 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7월 30일과 8월 26일에는 페레올 주교와 조선 선교사. 스승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고,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회유문(遺諭文)도 작성하였다.
〔순교와 시성〕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이끄는 클레오파트르 호. 빅토리외즈 호, 사빈느 호 등 군함 세 척이 충청도의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편지 하나를 조선 정부에 전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46년 8월 9일이었다. 당시 세실 함장은 기해박해 때 조선에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해 항의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충청 감사의 장계로 곧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도 옥중에서 판관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헌종과 대신들이 9월 5일(음 7월 15일)에 묘당 회의(廟堂會議)를, 9월 15일에는 회정당에서 어전 회의를 열었다. 이때 영의정 권돈인과 대신들은 세실의 편지에 대한 회신 여부와 김대건 신부의 처형 문제를 서로 연관지어 헌종에게 건의했고, 헌종은 이를 받아들여 효수 경중(集首管衆)의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세실의 조선 원정이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된 것이다.
이러한 판결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음 7월 26일) 어영청(御營廳)을 거쳐 한강변의 노들 즉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만 25세였다. 그로부터 3일 뒤인 9월 19일, 그 동안 신앙을 굳게 지켜 오던 현석문도 군문 효수형을 받고 49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포도청의 옥에 남아 있던 임치백과 남경문은 이튿날 매를 맞다가 순교하였으며,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같은 날 함께 장사(杖死)로 순교하였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 온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자마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일시 활동을 중단하고 안전한 교우 촌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을 색출해 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1801년이나 1839년의 박해 때처럼 새로운 척사령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 순방을 시작할 수있었다.
순교 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여러 신자들에 의해 와서 (瓦署. 현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군종 교구청 자리)에 안장되었다가 훗날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순교자들의 시신은 임치백만이 가족들에 의하여 안장되었을 뿐 그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후 이들의 순교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었고. 1846년 11월 3일자의 서한 즉〈병오일기〉(芮午터記)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이 자료는 그곳에서 다시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최양업 부제가 번역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함께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었으며, 이후의 시복 절차에서 아주 중요한 역 할을 하였다.
그 결과 9명의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1925년 7월 5일 기해박해 순교자 70명과 함께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자료: 가톨릭 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