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스데반
집사이자 전도자인 스데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장 먼저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그는 "순교자의 고귀한 군대"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 그는 원형, 즉 원형 순교자로서 완벽합니다. 그의 믿음은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고발자들 앞에서 담대하고 담대함을 나타냈습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일에 명료하고 충실했습니다. 그의 가장 강력한 발언에는 악의가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간증을 인봉하고 예수님 안에서 잠이 듭니다.
어떤 면에서 스데반은 복되신 주님 자신을 닮았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와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와 유사합니다. 오직 스티븐만이 그들의 무지를 변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젊은 회중 안팎에서 어려움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였느니라. 그러나 헬라파(그리스계 유대인)들이 히브리파(유대 원주민)를 원망하니 이는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기 때문이라. 이로 인해 일곱 명의 집사가 임명되었습니다.( 행 6장 ) 여기에 주어진 그들의 이름으로 볼 때 선택된 일곱 사람은 모두 원망하는 자들의 편에서 나온 “헬라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이 은혜로 다스리셨습니다. 스티븐은 그 숫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이 예시되었습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 활용한 자들은 좋은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그는 믿음과 능력이 충만하여 백성 가운데서 큰 기사와 기적을 행했습니다. 특히 스데반에게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다양한 유대인 종족을 위한 다양한 회당이 있었습니다. 스테판을 반대한 것은 리버틴파, 키레네파 등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혜와 영으로 말함을 막을 수 없더라.” 그 다음에는 모든 시대에 걸쳐 예수를 고백한 자들의 일반적인 경우인 일이 뒤따랐습니다. 그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공회 앞에서 그를 고소했습니다. 거짓 증인들이 매수되어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며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모세가 그들에게 전한 규례를 바꾸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제 사건은 산헤드린 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 것입니까?
우리 앞에 있는 나라의 수장들에게 스데반이 한 고귀한 연설이 있습니다 . 그들에게 그것은 설득력 있고 당혹스럽고 압도적이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스데반의 입에서 나온 성령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헬라주의자의 입술에서 그들의 운명을 듣는 것은 교만한 유대인들을 더욱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계획에 방해받지 않을 때 그분이 원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스티븐- 스데반은 국가 역사의 주요 요점을 굵은 언어로 요약합니다. 그는 특히 요셉과 모세의 역사를 언급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전자를 이방인들에게 팔았고, 후자는 통치자와 재판관으로서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이 항상 성령을 거역하고 항상 율법에 불순종하고 이제는 의인을 배반하고 살인한 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거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설을 마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 그날부터 지금까지 순교자들을 대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사실입니다. 산헤드린의 불평과 분노와 분노는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으나" 그러나 그는 그의 설교를 추구하는 대신에 황홀한 마음으로 주께로 향하고 그의 눈을 하늘, 즉 여호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의 모든 백성을 위한 집이자 모임의 중심지입니다.
“알겠습니다.” 스티븐이 말했습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높은 곳을 바라보며 인자가 그의 영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서 있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거부한 세상, 곧 살인의 세상 앞에서 참된 신자, 곧 지상에 있는 하늘에 있는 참된 신자의 위치는 이러합니다. 성령은 하늘에 오르시고 인자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느니라 스데반은 예수라 하지 아니하더라 성령은 그분을 '사람의 아들'로 묘사합니다. 사람에게 전하는 보배로운 증거니라 그가 증거하는 것은 영광을 위함이 아니요 오직 영광 중에 있는 인자를 위함이니 하늘이 그에게 열려 있느니라.... 믿음의 대상과 믿는 자의 지위에 관하여는 이 장면이니라 확실히 특징이 있지."
“그의 보좌에 가장 앞서 계시고 그 모양과 어조가 그를 좋아하시는
완전한 승리의 예복을 입고 거룩한 스데반 이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 마치 하늘이 그의 희미한 눈 위로 날아가서 희미해지는 등불처럼 높이 번쩍이는 것처럼 , 죽음이 감추고 있는 것. "그는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온순한 비둘기처럼 공중을 날아야 하며 구름 없는 깊은 저 곳에서 더 순수한 숨을 쉬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천사 얼굴을 볼 때까지 모두 천상의 은총으로 빛나는 순교자이십니다. ,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의 선을 추적하기 위해 만나십시오.
바울의 사도직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 있었고; 요한 이후에는 주님 자신이 자신의 인격으로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제안하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이 생명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우편에 앉히시니라. 다음은 열두 사도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부여받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의 증언은 멸시되고, 성령은 저항을 받고, 스데반은 순교하고, 마지막 자비의 제안은 거절당하며, 이제 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다루심은 한동안 끝났습니다. 실로의 장면이 다시 연출되고, 이가보드가 예루살렘에 기록되고, 사무엘 시대처럼 새로운 증인이 부름을 받습니다.
이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우리 앞에 옵니다. 그는 정해진 때와 정해진 장소에서 태어난 사람과 같습니다. 그의 사도직은 예루살렘이나 열두 제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둘 다 밖에 있었어요. 그의 부르심은 하늘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특별하고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것, 즉 교회의 하늘에 속한 특성, 즉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이며, 천국은 그들의 공동 집이라는 것을 알리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동안 이 복된 진리는 그분 자신의 마음 속에 비밀로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고 비밀의 참여가 무엇임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 이는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던 것이니라." (엡 3)
사도의 부르심의 성격 에 있어서 그 부르심의 신적 권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음이니라.” 즉, 그것은 그 근원에 있어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공식적인 사람들의 대회 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사명이 전달되는 매체에 관해서는 "사람에게서도 난 것이 아니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도일 뿐만 아니라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사도직은 열두 사도의 사도직보다 더 높은 직분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활 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부르심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도들의 승인이나 인정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하여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느니라." ( 갈라디아 1:15 , 17 )
사울이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방식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데, 이는 그것이 유대인의 자존심의 뿌리를 쳤고 또한 사도 계승이라는 헛된 개념에 치명타를 가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선택하고 임명하신 사도들은 어떤 면에서도 사울 임명의 원천이나 통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맛디아의 경우와는 달리 그를 위해 제비를 뽑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유대인의 땅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는데, 이것이 그들이 추첨으로 결정한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고대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 된”이라는 이 강조된 말은 모든 형태와 방식에 있어서 인간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합니다. 사도직 계승은 보류됩니다. 우리는 부르심으로 성도이고 부르심으로 종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과 말씀을 전하는 모든 사역자를 위한 참된 본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비록 위대한 사도였지만 설교자로서 그가 취하는 입장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말하노라”( 고후 4:13 )
그는 세례를 받고 힘을 얻은 후에 곧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회당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니라. 이것은 새로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분이 하나님 우편으로 높아지셨다고, 즉 그분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설교했지만, 바울은 그분의 개인적인 영광에 대한 더 높은 교리인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설교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에서 ,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그러나 이제 그분은 바울 에게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내 안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된 사람들의 특권과 축복을 누가 충분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존엄성과 안전은 이 복된 진리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복음도 있습니다. 이 복음은 특별히 바울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이것을 '내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내부에 계시된 아들에게는 교회의 부르심과 영광에 고유한 모든 것, 즉 교회의 거룩한 특권,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영접함, 보화에 들어가는 것의 모든 것이 걸려 있느니라.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게 하였으니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모으시는 자 안에서 장래의 유업이니라 이 유업의 보증이요 현재의 인침이니라 성령 이 밝은 특권의 목록은 사도에 의해 새겨져 있는데, 즉 '하늘에 있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주에게서 흘러 우리를 그분과 연결시켜 주는 성령을 통한 축복입니다.”* ( 에베소서 1:3-14 )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JGB, Christian Witness, vol. 4, 221페이지; 그리고 WK, 갈라디아서 강의, chap. 1.}
그러나 교회의 교리, 즉 사랑과 은혜와 특권의 비밀은 바울이 선언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보혜사의 임재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축복의 “밝은 두루마리” 중에서 바울은 특별히 그리고 특징적으로 사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