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르완다 생두를 만난 것은 2013년 가을이었다. 한 지인이 맛이 좋다며 부룬디 커피원두 한봉지를 가져왔다. 부드럽고 걸쭉한, 그리고 밸런스가 참 좋았다. '그래, 그 생두를 사서 볶아 팔자!' 그러나 그 생두는 품절되어 있었다. 아쉬움에 그 생두 공급상의 생두 목록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르완다 마헴베'라는 생두를 발견했다.
나는 르완다의 슬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중앙부에 위치한 르완다는 벨기에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벨기에 식민정부는 르완다 사람들에게 커피심기를 권장했다. 르완다는 에티오피아처럼 고도가 높다. 그래서 적도 부근의 나라지만 서늘하고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잘 자라는 아라비카 품종의 커피나무 재배에 적합하다고 한다. 그래서 르완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커피나무를 심었다. 재배기술도 부족하고 수확 후 처리시설도 빈약했지만 부지런한 농부덕에 품질이 좋아 벨기에 등 유럽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수출의 70%가 커피였다고 하니 국가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이 큰 고난을 두 번이나 겪으며 르완다 커피는 빛을 잃었다.
1962년 르완다는 독립했다. 큰나무가 쓰러지면 작은 나무들이 서로 싸우는 법, 르완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독립 후 르완다의 두 종족간에 대립과 전투가 이어졌다. 1994년에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대학살하는 일이 일어나 신문 국제면에 크게 소개되었다. 후투족이 투치족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는데 이 때 50만에서 100만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멀리 떨어진 , 이름도 생소한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나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두번째 고난은 커피 가격의 폭락이었다. 커피가격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가격의 급격한 변화는 생산자나 소비자에게 모두 고통스럽기 때문에 1962년에 유엔의 주도로 커피의 수요에 맞추어 국가별 생산량을 통제하는 국제협정이 체결되었는데 1989년에 30년 가까이 유지되어온 이 협정이 깨져버렸다. 그 후 커피값은 폭락을 지속하여 2000년대 초반에는 예전 가격의 1/4수준이 되었다. 커피 재배는 더 이상 르완다 농부들에게 돈이 되지 않았다.
종족간의 대립과 전쟁, 커피재배의 경제성 상실 등으로 르완다의 커피는 힘을 잃었다. 다행히 2000년대 중반부터 커피가격이 상승하고 정치가 안정되며 르완다의 커피재배는 다시 살아났다. 그렇게 살아난 커피의 하나가 마헴베 커피였다.
나는 그 공급상에게 1키로를 주문했다. 볶아 맛을 보고 감탄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들, 그리고 고객들과 시음을 한 후 그 커피를 카페의 원두판매 목록에 올렸다. 몇 달 후 마헴베 생두가 안타깝게도 품절이 되어 나는 마헴베와 작별했다. 2~3년이 지난 후 테라로사의 이윤선씨가 쓴 [테라로사 로드]라는 책을 보다가 마헴베 농장, 저스틴의 이야기를 발견했고 테라로사가 그 생두를 수입해 팔고 있음을 알았다. 예전의 생두에 비해 부족했지만 테라로사에서 공급받아 몇 년 더 판매했다.
용연공방을 열고 다시 르완다 커피를 찾았다. 아프리카 커피하면 에티오피아, 케냐, 탄자니아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익숙하다. 나처럼 탐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한다. 르완다, 부룬디, 콩고, 우간다 등이 탐험 목록에 들어 있다.
다행히 커핑 점수가 85점에 달한다는 '야하하' 생두를 발견하고 1키로 주문했다. 맛이 뛰어나다. 이리저리 볶아 맛을 봐도 좋다. 공방을 찾는 커피 매니아 몇 분에게 시음 기회를 드렸더니 모두 감탄했다. 5키로를 확보하고 메뉴판에 이름을 올렸다. 5키로를 언제 다 쓸 수 있을지 그것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