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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예배는 모두 이런 형식에 맞추어져 있다. 예배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부분은 아마도 구약 역대하 5장-7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예배일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그때의 예배는 방금 위에서 말한 출애급기 24장의 예배의 형태를 그대로 적용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구약 역대하 5장-7장을 보자: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신학을 보면 그 신학이 아주 분명하다
구약의 이런 예배형식은 진정한 예배의 개념을 잊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보여준 양식과 명령대로 성막을 지었다.(히 8:5, 출 25:40) 이 성막의 모양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히 7장-10장) 그러므로 오늘 성도들의 예배는 모세가 보고 따른 영광스럽고 거룩한 예배형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런 거룩한 예배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는가?
2. 신약의 예배
일반적으로 목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신약의 예배양식은 유대인들의 회당의 예배를 모방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회당의 목적을 오해한 사람들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는 아무도 회당이 예배하는 곳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이유는 예배란 반드시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번제물이 항상 따라다녔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배에서도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도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교회에서 죄 문제를 다루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 목사는 지난 2007년 부활절 예배 중 세례받기 원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2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근착 Christianity Today 잡지가 알려준다. 속사람이 중생하지 않고 받는 세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주님이 세우신 성례식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세례이다. 이는 마땅히 교회 당회에서 문답을 거치면서 본인의 신앙을 점검하고 베풀어야 할 일이다.
유대인의 회당(synagogue)이라고 하는 곳은 교회 학교였는데 그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며 준비시키며 훈련시키는 곳이었다. 성경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성전과 회당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기록하지만 그곳에서 예배들 드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 수가 성을 지나실 때 물 길러 나온 여인을 만났는데 여인이 예수님에게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중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회당이나 편한 데 가서 예배하라고 하시지 않고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는 오직 한 군데 즉 예루살렘이었으나 그가 오신 다음에는 예배하는 장소가 변했다고 말씀 하신다.(요 4:21-23) 그 예배는 성삼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경배이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교회가 성령이 머무시는 성도가 ‘새로운 성전’이라고 가르쳐 준다.(고전 3:16,17, 벧전 2:5) 그리고 구약의 화목제의 의미를 성찬식에서 찾는다.(고전 10:18) 회당에서의 설교와 기도는 사도들의 예배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러나 예배에 대해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배형식이 성전에서의 예배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본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말하는 환상을 보면 모세와 솔로몬이 예배드리던 모습 그대로이다.
(1) 예배드리려고 회집한다.(계 4:1-11)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을 창송하며 예배드린다. 역대하 5:2-5의 말씀과 같은 형태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고 보좌에 둘려 24장로가 앉아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함이다.
(2) 죄 문제를 거론하고 해결한다.(계 5:1-7)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아무도 그 책을 펼 수 없으므로 사도 요한은 운다. 그 책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길래 요한이 우는가? 그 책에는 역사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이 적혀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즉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는 희생을 통해서만 계속할 수 있다. 오직 죽임당한 하나님의 어린양만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목적을 선포하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3) 하나님 전에 나아가며 기도한다.(계 5:8)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그의 대표자인 24장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4) 찬송시를 노래한다.(들계 5:9-14)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룩하신 구속을 찬송하는 찬송시를 노래한다.
그리고 다음에 열거하는 네 가지는 계시록에서 5번이나 반복한다. 계시록에 보면 ‘일곱’이라는 숫자를 이용하여 일곱 나팔, 진노의 일곱 대접 등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건의 순서대로 매번 반복됨을 본다. 그 공통으로 반복되는 네 가지란 무엇인가?
이런 여러 가지가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반복되어 기록되었는지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계시록의 ‘일곱’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재앙에 모두 들어있다는 것이다. 가령:
거룩한 예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지성소에 들어간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마지막 심판이 올 때 끝이 난다. 그 때는 믿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축복에 들어가게 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설교를 들으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역사를 향한 그의 목적을 지금도 주의 종들을 통해서 선포하고 계신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지는 것이 바로 예배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3. 오늘날의 예배 형태는 어떤가?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의 예배와 사도들의 예배의 개념 그리고 계시록에 기록된 예배가 어떠한가를 보았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이러한 성경 말씀에 조명해 보자. 오늘 우리가 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이런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인데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예수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 나아갈 길이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4:6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갈 자가 없다.”고 하셨다. 디모데전서 2:5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키심을 알아야 하며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을 깨달아야한다. 우리가 충성하면서 하나님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그의 언약으로 우리를 감싸달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마치 아름다운 향기처럼 하늘의 보좌에 상달된다. 구약에서 번제를 드릴 때 불이 내려와서 제단을 태웠던 일을 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불을 내려 보내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의 불이 아니라 성령을 말하는데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게 되는데 물론 성찬식은 우리의 죄를 없이해주는 의식이 아니지만 그 예식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나도 죽어 죄를 멀리하게 된다. 성찬식은 구약의 유월절의 상징이지만 구약의 모든 화목제를 완성하는 잔치이기도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나며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내리는 주님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예배하는 언약의 백성으로 힘 있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다시 한 주간을 세상에서 지내고 다시 교회에 나와서 예배들 드린다. 비록 잘못되어가고 퇴폐적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우리의 정체는 거룩한 예루살렘에 살고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삼스레 상기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 전부가 예배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결론
기원 2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모든 정통적인 교회들은 이런 형태로 이런 의미로 예배를 드렸고 그들의 예배에 관한 인식도 이와 같았다. 종교개혁 시기에 들어와서는 예배에 대해서 특별한 경외감을 가지고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인식으로 예배를 존중하며 엄숙한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에서 명령하신대로 예배를 드렸다. 악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원래 예배 시에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칼빈도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성경의 시편만 노래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에서 예배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시편만 노래하도록 지시 한다. 무반주(a capella)로 불렀다. RTS의 Orlando 분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John Frame 교수는 그의 책 ‘Music in Worship’이라는 책에서 장로교가 원래의 예배는 악기를 쓰지 않고 시편 을 반주 없이 무반주(a capella)로 불렀던 일을 인정하고 있다. 더 분명한 자료는 서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회사 교수인 Scott Clark가 쓴 ‘Recovering Reformed Confession’(P&R, 2008)이라는 명저일 것이다. 이 책에는 ‘예배와 음악’에 대해 어느 신학자보다 연구를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글쓴 이 / (고) 김명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