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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독 텍스트 요약분 2024. 04, 04 최후의 관문, 몸에 갇힌 느낌 돌파! |
귀를 열면, 다섯 그루 생명나무를 알고, 불멸이 되리라! | 우리의 시작과 끝 | 고요한 묵상 4 | 도마복음 32 (18절 19절)
https://www.youtube.com/watch?v=nSg_KVAqboQ
강독 텍스트 요약분:
1. 도마복음 제 18절 제자들이 예수께 질문
- 질문: 죽음이란 것이 진정 있습니까?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종말을 맞이해서 사라질 겁니까?
- 답변: 종말론을 이야기하지 않음
묵시적 종말론, 죽음, 종말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시작이 있어야 종말이 있을 것인데,
시작이 없고 탄생이 없고 창조가 없기 때문에 종말도 없고 죽음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2. 예수님 대답의 의미
- 도마복음 예수님은 제 1분기 지혜 전승에 의거, 유일한 궁극의 진실을 말씀하고 계심
- 죽음을 묻는데 죽음을 말씀하시지 않고 시작은 아는가? 라고 반문
시작과 끝은 하나로 불이(不二), 두 개가 아님
- 시작과 끝은 하나이므로 끝의 물음에 대해서 시작은 아는가? 로 반문
즉 죽음이란 없다는 말. 시작이 없다면 끝인 죽음은 당연히 없다
- “시작의 장소에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사람은 축복 받나니,
그는 끝을 알게 될 것이고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절의 의미
- 시작이 이 하나의 의식이고 끝도 이 하나의 의식이다
즉 시작과 끝은 시작과 끝이 아니고 그 모양이 시작과 끝이지 이 단일의식, 깨달음이다.
- 탄생도 단일의식/깨달음이고 죽음도 단일의식/깨달음이다
- 시작의 장소에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한다는 말은 시작과 끝 전체를 개인이 아닌
단일의식으로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하게 되면 단일의식의 1인다역 연극 속에서
이중적 지위(가상역할과 진짜역할)를 얻게 된다
3. 일반인들의 의문 검토
(태어나고 죽은 일이 있는데, 왜? 탄생죽음이 없다고 할까?)
- 신생아들 매일 태어나고 장례식장에선 매일 죽어 가는데 왜 탄생과 죽음이 없다느냐?
- 엄마 뱃속으로부터 10개월 된 태아가 밖으로 나오면 태아가 아닌 사람이 됨
이때를 탄생 시작이라 하나 모체에서 출산되는 태아는 출산 전후에 끊어짐이 있지않음
모체의 자궁 내에서 물질대사 하고 있었음.
- 태아 이전 수정 시 역시 수정난과 태아는 끊어짐 없었음.
- 수정란의 발생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인데, 정자와 난자는 부모의 생식 세포로서 존재했고
그 세포도 여러 햇빛, 공기, 물 등 원소들의 조건적 결합해 있었던 것.
- 원소들은 140억 년전에 존재했던 것.
- 따져보니 저 홀로 갑자기 생긴 것은 없고 전부 있었던 것들의 결합
결국 완전한 무에서 유가 나오기는 불가능한 것
- 육체적인 몸의 시작에서 추적해 보아도 시작이 없음을 알 수 있고,
물질 육체로 볼 때, 이 피지컬 바디 측면에서 볼 때 죽는다 해서 단 하나의
분자원자도 사라는 것이 아니다.
- 그러면 결국 생사가 있다고 한 것은 이러한 결합을 시키는 생명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 셈이다.
- 결국, 삶과 죽음을 주목할 때, 육체 물질 원소의 결합과 분해 보다 생명력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 생명력은 바로 의식이다.
- 이 의식은 탄생 이전에도,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있다는 것을 직관하고 있다.
탄생 이전에 내가 없었다는 사실은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다
-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죽음과 탄생 즉 시작과 끝은 없다
- 물질적 측면, 즉 육체의 측면에서도 시작과 끝은 없고,
생명력 즉 의식 측면에서도 시작과 끝 그런 것은 도무지 없다.
- 우리의 직관은 의식의 자기 체험이었다
- 다만, 우리의 오래된 마인드셋, 사고 습관, 생각의 틀 때문에 잘못알고 있었던 것
4. 시작도 끝도 없다는 무시무종(無始無終)
- 여러 경전에서는 무시무종으로 표현
- 단일한 의식은 단하나의 영혼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 시작 없고 끝이 없는 우리가 바로 시작과 끝이라는 모양을 연기하는 셈
- 시작과 끝이 없는 무시 무종은 유시유종을 연극하므로써
하나가 여러 개고 여러 개가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을 이야기 함.
- 시작도 바로 이것(=단일의시)이고 끝도 바로 이것(단일의식)이니,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다. 즉, 시작 아닌 시작, 끝이 아닌 끝을 나타낸다.
- 스스로 변하는 자변(自變)이기에 매순간 일원상 위의 모든 점에서
영원한 시작과 영원한 끝을 머금는다.
- 하나의 원상 위에는 매순간, 모든 점이 바로 시작점인 동시에 끝점이 되며,
이는 매순간 창조와 멸망(생멸)이 동시에 일어남을 뜻함.
- 시작과 끝이 없다 라기 보다, 매순간이 영원한 시작이며 동시에 끝이다 라고해도 좋을 것이다.
5. 중요한 공지 게시글 “알파와 오메가, 영원을 문답하다“
- “알파와 오메가, 영원을 문답하다“에서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끝이 아니고,
바로 영원이다 라고도 할 수 있다.
- 카페 전체 공지 난에 게시 된 이 글은 밥통 스피커의 생각으로 쓴 글이 아니며,
순식간에 어떤 글이 작성되었는데,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개인적인 의도로서,
그런 건 나오지가 않았슴.
-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이것은 곧 영혼이고,
이 알파와 오메가의 문답은 '자기 깨달음의 문답'이다.
즉, 질문자와 답변자가 둘이 아닌 그런 문답이다..
- 이 글을 늘 곁에 두고 잠자기 직전이나 아침 기상직후 이것을 듣거나 읽으면
아주 많은 축복이 있을 꺼라 여겨짐
- 결국, 삶과 죽음의 시작과 끝은 단일의식의 자기 자각, 자기 체험, 자기 깨달음이다.
6. 불생불사라는 단일의식은 지금 당장 어디있고 무엇이냐?를 물을 때?
- 바로 컵이다/ 저기있는 나무다/ 저기 버스 소리다/
- 구체적으로 가르쳐 보라고 하면, 바로 이것이다, 눈앞을 이렇게 가르칠 수 있다
- 생사는 세트로 한 묶음, 불생불사도 세트로 한 묶음이다
그런데 생사는 개인의 일이고, 불생불사는 단일의식의 일이다.
7. 의식은 머리 속이 아닌 몸 밖에서 이루어짐
- 우리의 정체는 의식이므로 우리는 몸 밖에 있다.
- 항상 의식 이탈, 체외 이탈, 유체 이탈 상태에 있다
- 그러니까 체외 이탈, 의식 이탈이라는 것이 신비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다.
- 깊은 잠에 들어서도 우리는 아무 것도 의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한다
- 일상에서 우리가 이 컵을 의식한다 할 때, 컵은 이 컵이 있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의식된다.
- 그러면, 의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의식이 머리 안에 있습니까?
- 이 진실을 알고 주변을 둘러보면, 의식 아닌 곳이 없다.
- 이 두루한 의식 안에서 생멸이라는 멋진 연극, 생명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 탄생과 죽음은 가장 효율적인 생명축제, 연극의 장치인 셈이다.
8. 고요한 묵상 4번째 / 내가 몸이라는 아주 강력한 느낌 해결하기
가) 내가 몸이라는 아주 강력한 느낌의 정체
- 단일의식이라는데, 떨쳐버리기 어려운 나는 내가 이 몸 안에 들어앉은 개인이라는 이 느낌
- 이것은 우리가 140억년 전부터 고심해서 만들어낸 셋업 설정이므로 떨칠 필요가 없음
- 단지 이용하면 됨.
- 내가 하나의 몸이라는 이 느낌은 단일의식의 1인다역 장엄한 연극과 생명 축제의 본래 설정으로 걸작품에 해당.
- 안 깨달아도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에 깨달을 필요가 없음,
못 깨닫거나 안 깨달아도 이미 140억년 이전 훨씬 이전부터 깨달아 있기 때문에 깨달을 필요가 없다.
- 개인은 깨닫는 기능 자체도 없고, 그런 역할도 아님
- 개인은 멋있게 표현하면 깨달음의 표현형이다,
- 내가 몸이라는 아주 강력한 느낌은 사실상 마지막 최대 관문에 해당
- 내가 몸이거나 내가 몸속의 영혼이라는 느낌,
나) 마지막 최대 관문은 어떻게 통과해야 할까?
- 이 느낌은 버릴 대상, 극복 대상, 초월 대상이 아니라는 분명한 이해와 동반되는
믿음으로 통과하는 것이지, 느낌을 깨 부수어서 통과하는 것이 아님.
- 개인 느낌은 극복 대상이 아니고, 개인 느낌은 깨달음, 반야지혜,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깊은 이해로 통과
- 개인 몸이라는 느낌은, 깨달음의 자기표현형이다.
- 이렇게 앎으로써, 마지막 최대 관문을 통과하는 것임을 분명하고 선명하게 이해함으로써,
이 관문을 통과해야.
다) 내가 몸이라는 느낌에 대한 시각 바꾸어야
- 최대관문 통과방법이 개인의 상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 내가 몸이라는 느낌, 내가 몸속에 영혼이라는 이 느낌을 오히려 소중히 해야
깨달음의 자기 표현형, 즉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 개인 몸 느낌, 이것이 이미 깨달음, 그것도 아주 멋진 깨달음이다
- 몸이 나라는 이 느낌을 없애려 하지 말고, 열쇠만 잘 쥐고 있으면
오히려 재미있게 운용가능
- 감옥이라 한다면, 감옥은 일종의 테마이므로 부셔 버리지 말고, 필요시 빠져 나오는
열쇠만 잘 보관하고 있으면 됨.
- 감옥을 빠져 나오는 열쇠가 바로 반야지혜인 단일의식임
-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는 대자유 만끽.
감옥을 부셔버리고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일은 대자유도 없고 재미없는 천국.
- 개인이라는 느낌이 있어야 자유도 만끽 가능
- 몸속에 내가 들어않아 봇 벗어나고 있다는 이 느낌은 떨 칠 대상이 아니고,
멋지게 우리가 소중하게 사용해야 될 그런 멋진 보석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야
9. 개인마다 단일의식이라 하면서,
왜 각 개인은 분할 된 듯한 다른 생각, 느낌, 체험, 경험을 하는가?
- 다중인격의 예, 일란성 쌍둥이의 예, 일인다역의 연극, 꿈의 비유,
공중파와 제조 메이커들의 수신장치에서 보여주는 다른 소리 뉘앙스,
하나의 전자기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선풍기, 히터, 전기 자동차, 인공위성 등 다양한 예를 들었지만,
어쩐지 느낌을 극복해야 된다, 초월해야 된다라는 생각,
그 감옥을 부셔 버려야 된다는 생각이 앞서곤 하므로,
새로운 능단금강보검인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꺼내들어 본다.
10. 능단금강보검인 음양오행(陰陽五行)을 통한 통찰
가) 목화토금수라는 5개의 의식 원소/빛/의식
- 내가 몸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이 느낌은 하나인 의식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의식원소들의 서로 다른 배합 비율의 필터를 거치면서 잠시 다양한 뉘앙스로 나타난 것
- 단일 햇빛은 각양각색의 색 유리창을 통과하면 다양한 모양과 색깔을 연출하지만,
그 모든 다양한 모양과 색깔은 본질인 단일 햇빛일 뿐이다.
- 이는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이 무지개 빛을 띤 수백만 가지 색깔을 보여도 단 하나의 햇빛이듯,
개인의 서로 다른 생각, 느낌, 의식, 체험, 경험은 그 전체가 하나의 단일의식의 자기 체험이고
자기 깨달음이다.
나) 도마복음19절에 담긴 기묘한 말씀
A)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한 사람은 복되다”
"낙원에는 여름과 겨울에도 영향 받지 않고 나뭇잎도 떨어지지 않는 다섯 그루의 나무가
그대들을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 선악 나무와 생명나무 두 그루가 아닌, 5 그루라는 묘한 말이 있다
- 단일의식이라면 똑같은 단일한 생각, 느낌, 의식과 경험이어야 하는데,
왜 나는 다른 사람과 확연하게 구분 되는 생각, 느낌, 체험, 경험,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 이것을 볼 때 단일의식이 아니고 개별 영혼, 개별 의식이 각자의 몸 안에
들어 있는 거 아니냐?라고 얘기하고 싶어진다.
- 그것이 아님을 19절에서 예수는 말씀하셨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한 사람은 복되다".
-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한 사람은 의식이다
- 개인으로 존재하기 전에 이미 존재한다면 축복이라 함.
B) “그대들이 내 제자가 되어 내 말에 귀를 열면, 이 돌들이 그대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 특별한 체험, 수행, 공부 없이도 그저나의 제자가 되어서 귀를 열고 내 말을 듣는다면,
불생불멸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 이 개인 느낌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C) “낙원에는 여름과 겨울에도 영향 받지 않고 나뭇잎도 떨어지지 않는 다섯 그루의 나무가
그대들을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 무엇 때문에, 여기에 귀만 기울이면, 불생, 불멸이 되나?
이미 낙원에는 다섯 가지 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 그 나무들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겪지 아니하리라.
이 다섯 그루의 나무가 그대들을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 다섯 그루의 낙원에 있는 늘 평안하고 자유로운 다섯 그루 나무는 개인 몸 느낌을 이야기한다.
- 각각 다른 의식, 각각 다른 영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로 이것이 다섯 그루의 보석 나무다.
- 이것은 생명나무인 동시에 선악 나무다.
- 19절의 현대적 표현은 바로 개인 몸 느낌은 깨달음 프라즈나 반야바라밀다의 자기 표현형이다.
다) 5행의 발생 경위 및 성질
- 구체적으로 다섯 그루의 나무는 단일의식의 일원상이다.
숫자로 표현하면 이것은 0에서 1이다.
- 일원상 단일의식에서 1인 다역의 연극을 펼쳐지기 위해, 일단 2개로 나눔.
플러스와 마이너스. 숫자로는 2로 자기표현 됨
즉, 1인 2역 1인 2역 혹은 0인 2, 1인 2이 됨,
- 플러스(+) 마이너스(-)가 생기면 당연히 중립적인 기운이 발생.
플러스(+) 마이너스(-) 사이에 있는 중성적인 플러스(+)도 아니고, 마이너스(-)도 아닌
중립적인 바르도,‘삐’라고 함, 바르도는 3이 됨
- 이 3에서 다시 플러스(+) 안에서 다시 이 플러스(+) 마이너스(-)를 반영하게 되면,
플러스(+) 플러스(+)가 있고요,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게 되고,
마이너스(-) 안에서는 마이너스(-) 마이너스(-)가 있을 수 있다
마이너스(-) 플러스(+)가 있을 수 있다
- 이렇게 되면, 3에서 5가 된다
- 그래서 플러스(+) 플러스(+)를 우리가 화(火)라고 명명할 수 있다,
플러스(+) 마이너스(-)를 목(木)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마이너스(-) 마이너스(-)를 수(水)라고 명명하고,
마이너스(-) 플러스(+)를 금(金)이라 한다
그 다음에 이 중립 바로도를 토(土)라 한다.
-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는 각각 기운을 가리킴
- 화/목(火/木)은 온화한 기운, 온화한 의식, 온화한 생명에너지
금/수(金/水)는 차가운 기운, 차가운 의식, 차가운 생명에너지
토(土)는 양극을 중재, 중간, 중도, 중도적인 생명에너지
- 5행의 분화는 생명 축제가 벌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설정.
라) 각각이면서 전체 하나인 5행
- 5행 전체는 하나
- 0 내지 1이 2가 되고, 2가 3이 되고, 3은 5가 되는데,
5는 이 다섯 가지 생명 에너지로 우리가 구분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 여기에서 개인적 차별 느낌의 뉘앙스가 나타나기 시작
- 예를 들어, 이 5가지 기운을 안 가진 사람은 없음, 왜냐하면 이게 기본 요소니까.
이게 프라즈나 파라미터이며, 이 반야 지혜가 다섯 가지로 자기표현을 함
- 다만, 개인 개인마다 다른 점은 예로, 전체 양을 10이라 했을 때,
목, 화, 토, 금, 수 다 합하면, 기본 할당량이 각각 2라고 하면,
화(火)가 2, 목(木)이 2, 토(土)가 2, 금(金)이 2, 수(水)가 2다.
- 합하면 10이고, 10으로 개인은 구성되는데
다 2, 2, 2, 2, 2로 구성 되어 버리면 일란성 쌍둥이가 됨
- 인류 전체가 일란성 쌍둥이가 되면 연극이 진행될 수 없으므로 배합 비율이 다르게 함.
어떤 사람은 화가 1이고, 목이 3이고, 토가 1이고, 금이 3이고, 수가 2 라면.
그 1, 3, 1, 3, 2를 합하면 10
또 어떤 사람은 화가 3이고, 목이 1이고, 토가 2, 금이 2, 수가 2 라면,
그 3, 1, 2, 2, 2를 합하면 10
- 기본 프라즈나 파라미터, 10은 동일하지만, 생명 에너지가 각각 배합 비율이 다름
그러나 합치면 누구나 10으로 동일.
- 10은 같지만 각각의 조합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모습과 무관하게 그 구성 요소는 이 목, 화, 토, 금, 수로 상징되는
프라즈나 파라미터 단일의식이다.
- 이러한 현상은 개인끼리 혹은 생명과 무생명체 끼리, 생명체만 이렇게 배합되는 게 아님.
- 소위 말하는 무생물체도 배합에 따른 관계성을 보임
예를 들어, 플러스 플러스는 밀쳐내고, 플러스 마이너스는 서로 결합하고 하듯이,
서로 간의 갈등과 도와주고 극복하는 관계가 성립
내부 구조상 온갖 여러 가지 이벤트가 발생 됨
- 예를 들어, 목 화 토 금 수가 있다 했을 때,
수는 목을 생하지만(水生木), 수는 화를 극한다(水剋火). 그런데 수가 화를 극(水剋火)을 하는데
자기가 생해주는 목은 또 화를 생하고 있다(木生火)
- 이렇게 묘하게 여러가지 기운(氣運)이 돌아감으로써 이 생명 축제에 다양한 멋진 연극이 펼쳐지게 된다.
마) 하나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음양5행(陰陽五行)
- 음양5행이 진실이라는 말은 아니며, 동북 아시아에서 발전한 일종의 통계학
- 우리의 최대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개인 몸 느낌은 극복 대상이 아닌,
다섯 가지 낙원에 있는 보석과도 같은 다섯 그루의 나무를 알아보는 도구의 이해로 ,
나무를 알아 누구나 죽음을 겪지 않게 된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해보자
- 19절과 고요한 묵상 중 4번째 주제가,
단일의식이라는데 왜 개인 느낌은 이다지도 고통스럽습니까?
이것과 도마복음 19절은 완전히 일치되는 주제다
-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하고 재미있게 다루어 볼 것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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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정성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