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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
1. 들어가는 말
인간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말이 있으나 그중에 인간의 사회성과 공동체를 이루는 특성을 고려하여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며 또한 인간은 정치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또한 인간은 이성의 작용을 통한 자기의식을 하는 존재임을 강조하여 생각하는 갈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보다도 인간은 예배적인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자세요, 또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은 영적인 존재요,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여러 가지 욕망을 가진 실체인 것은 확실하며 감정과 이성의 작용이 있으나, 또한 영을 체득하고 갈구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 위에서 인간이 예배적인 존재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쓰여진 최초의 예배행위는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의 예배 모습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며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 삼아 여호와께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이 심히 분노하여 안색이 변했으며 이 일로 가인은 아벨을 들에서 돌로 쳐 죽였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느냐, 혹은 받지 못하느냐에 따라 죄를 짓고 심한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볼 수 있다. 동생인 아벨을 죽인 가인은 다음과 같이 고통 하는데,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3~14)라고 고백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살인이라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며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며 인간의 삶이 존립할 수 없는 것을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인 예배의 중요성을 우리는 다시금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에 들어와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며 이혼했던 불행했던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깨닫는 그 순간에 선지자로 고백하며 진실한 예배를 묻는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들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진실한 예배인가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 대립은 예배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진실한 예배를 가르치기 위해서 예배 대상인 하나님을 가르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신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계시를 받아 예배가 무엇이며 어떻게 예배드려야 할 것인가를 그의 서신에서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예배를 통해서 바르게 살아가는 원리와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2:1~2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1~2의 말씀은 바울이 구원의 원리를 말하고 난 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성도의 실천적인 삶을 가르치는 연결점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번 시간은 로마서 12:1~2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배를 통해서 바울의 구원의 원리와 그에 따른 성도의 삶의 교훈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제물이 있었으며 예배와 제물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물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요, 응답의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2. 예배와 제물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원리를 설명한 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몸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제사의 제물과 그 제물의 성격을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제물로 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되며, 이에 대한 성도의 반응으로 바울의 교훈인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졌다.
첫째로, 번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레위기 1장에 기록된 번제는 제물이 소, 양, 염소, 비둘기였으며 제사 모습은 소, 양, 염소는 흠 없는 수컷으로 제물을 삼아 내장과 정강이는 물로 씻어 버리고 제단에 피를 뿌린 후에 각을 떠서 불로 온전히 사른다. 이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면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의 제사가 되며 죄가 사해진다.
둘째로, 레위기 2장에 나와 있는 소제이다. 제물은 곡물을 사용하였으며 날 곡물, 구운 곡물, 삶은 곡물의 가루를 취하여 기름을 붓고 유향을 불사르고 태우는 제사이다.
셋째로, 레위기 3장에 나와 있는 화목제이다. 제물은 소, 양, 염소가 드려졌으며 암수의 구별 없이 제물로 드려졌다. 제물은 머리에 안수하여 잡고 피는 제단에 뿌리고 내장의 기름을 제거한 후에 제사장이 불로 태워서 화목제를 드렸다.
넷째로, 속죄제는 레위기 4장에 기록된 대로 죄를 용서받으려는 제사로, 제사장이나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범죄 하였을 때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리고 족장이나 평민이 범죄 하였으면 숫염소를 제물로 드렸다.
다섯째로, 속건제는 레위기 5장과 6장에 나오는데 알지 못하고 범한 죄나 거짓 맹세한 경우에 속죄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였다. 제물은 암컷인 어린양이나 염소가 드려졌으며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들 혹은 고운 곡물가루가 제물로 드려졌다.
이상 살펴본 5개의 구약의 제사 의식은 모두 인간의 속죄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의 원죄 이후 인간은 죄의식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여러 수단과 방법을 추구해 왔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바울의 고백에서 볼 수 있으며, 또한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지난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 가운데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를 해석한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해석은 다양한 각도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의 고매한 인격이나 도덕적인 완전성, 그가 이룬 모든 기적의 사건들, 그가 베푼 모든 가르침이 그의 생애를 이루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공의를 이루다가 실패한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속하고 구원을 이룬 제사로 해석되는 것이 신약성서가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물이 되신 내용을 증언한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0~14). 인간이 예배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갖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깨달음이 발전하고 성장해 가는 것이 인류 역사라고 말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적인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인간이 갈구하는 참된 속된 제사가 될 수 없는 율법으로 드리는 제사라고 말한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들은 희생 제사보다 성숙되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색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호4:8)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공의를 강조해서 외친 아모스나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는 미가 선지자의 말씀도 같은 시대의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왕이신 하나님보다도,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하나님보다 인간의 신앙고백 내에서 진일보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한 사실은 인류 역사에서 인간 의식의 혁명적인 변화요 진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하나님 고백에 따라 바울은 올바른 예수님의 실체를 바로 해석하여 성도의 신앙고백과 교회의 초석을 이루게 하였다. 몸으로 드리는 제사라는 바울의 말씀을 구약의 전통과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배경 위에서 살펴봄으로 영적인 예배의 의미를 우리는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소, 양, 염소, 비둘기 또는 곡물을 예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말씀은 주전 8세기의 예언자들이 외친 공의와 사랑의 메시지보다 예배 의식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에 있어서 더 나아간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에 대한 감사와 신앙으로 성도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몸으로 드리는 제사는 무엇인가? 구약의 희생 제사의 제물이 짐승이나 곡물이라면 성도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어떠한 예배인가? 로마서 12:1~2의 말씀을 전체 로마서를 중심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 말씀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3. 몸으로 드리는 제사
모든 성경이 없어지더라도 로마서만 존재한다면 기독교의 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로마서는 중요하다. 로마서에는 구원의 핵심 원리와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전체적인 구조는 1~8장까지 이론적인 신앙의 교리를 설명하고 로마서 9~11장까지는 새로운 구원의 진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믿는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설명하고 12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기독교인의 참된 삶의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구원의 교리의 설명과 함께 믿음의 교리에 따른 성도의 실천적인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연결고리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로마서 12:1의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는 본문 말씀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온 길이 인간의 본성상 당연한 길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앙 고백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한 것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도달점이라 할 수 있다. 즉, 구원을 찾아 방황하는 헤매임의 인류 역사가 신앙을 찾은 것은 방황을 끝내고 안식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점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표면적인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로는 죄사함을 얻을 수 없으며 어떠한 이교의 예배로도 구원을 이룰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1~8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는 것이다. 로마서 12:1의 서두인 “그러므로”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말하는데, 이 말도 같은 맥락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우주와 자연의 창조와 함께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배려를 성도는 은혜와 선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그의 전체적인 돌봄과 헌신에 대해서 그것을 깨달은 성도는 희생 제물로 소, 양, 염소, 비둘기, 곡물 등의 제물로만 헌신해도 될 것인가? 거짓된 입술과 간사한 혀로 거짓된 정의와 사랑만을 부르짖을 것인가? 거기에 따라 사악한 행동과 모든 죄된 모습만을 실제 삶 가운데서 보여 주어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성도의 바른 자세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의 몸을 드리라는 말은 전체적으로 성도의 실천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윤리적인 교훈인 것이다.
그 실천적인 내용은 첫째로 교회 생활에서의 성도의 삶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를 인간의 몸으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성도는 믿음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런데 인간의 몸이 많은 지체로 이루어진 것에 비유해서 바울은 같은 은혜로 모두가 형제와 자매가 되었으나 몸의 모든 기관이 다르듯 성도는 각각의 자신들이 받은 은사가 다양함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소우주라 할 만큼 많은 지체를 가지는데 인간 몸의 모든 기관이 자기 기능만을 고집하여 절대화하고 서로 간에 불화하고 갈등한다면 인간의 몸이 유지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는 어떠한가? 각양각색의 성격과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몸이 모든 세포와 조직과 기관이 협력하여 몸이라는 생명체를 이루는 것같이 교회도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되었지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은혜의 생명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바울은 교훈하고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3~5)
몸에서 폐, 간, 위장, 신장 등이 이상이 있다면 그 기관 하나만의 이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의 기관이 잘못됨으로 몸의 전체 생명이 사망에 이르게 된다. 교회로서 몸을 이룬 모든 지체는 같이 기뻐하고 기도하고 공급하고 사랑하고 슬퍼해야 할 관련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형제 간의 사랑의 실천은 교회 내의 일치된 힘으로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 나가는 힘이다.
둘째로, 믿지 않는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이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4~17). 바울은 모든 사람과 화목할 것을 권면하며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마시게 하라고 하며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한다.
셋째로, 성도의 실천적인 삶의 내용은 예배의 본래 의미가 노동하는 것을 뜻하듯이 성도의 삶은 이웃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라고 가르치고 있다.
몸으로 드리는 제사가 교회 내의 신앙생활과 세상에서의 불신자와 관계된 생활로서 결국 우리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인 삶의 윤리는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온전히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이제 영적인 예배를 살펴보면서 바울이 말하는 신앙 안에서의 실천적인 윤리적인 삶의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도록 하자.
4. 영적 예배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말하는 예배는 믿는 자로서 실천적인 윤리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소망은 도덕적인 흠이 없는 삶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갈망은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없기에 인간 개개인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특별히 구약성서의 율법은 고도의 윤리적인 계명을 우리에게 주었으나 바울은 그 율법이 자유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욱 깨닫게만 할 뿐이라며 탄식하고 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5~24).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분열의 고통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고 화평이 이루어지는 구원 사실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예수 믿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의의 완성을 이룬 성도라면 그가 온전히 실천적인 삶을 이룰 수 있을까?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바른 삶을 이룰 수 있을까?
성도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윤리적인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과 윤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신앙이 있다 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실천적인 삶이 없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구원받은 사실이 은혜의 존재적인 사건이라면 성도의 실천적인 삶은 의무요 당위적인 사실이 된다.
그리스도의 피에 합당한 실천적인 삶이 없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값싼 은혜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의 실천적인 삶은 단순히 규범이나 법이 아니라 자발적인 기쁨에서 이루어지는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바울의 교훈이 바울의 로마서 12:1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몸과 혼이 영 안에서 하나가 되며 인간의 몸으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받으실 거룩한 산 제사가 되며, 이것이 성도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몸과 감정, 판단의 이성이 영 안에서 하나가 되며 갈등이나 분열이 없이 만남과 화해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화평이 하나님과 화평이요, 이웃과 화평이요, 자연의 물질과 화평이요, 자신의 영혼의 평화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가 드릴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예배적인 존재로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몸으로 드리는 제사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영적인 예배가 되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 영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따른 성도의 헌신적인 실천의 삶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배란 무엇인가? 바울은 바로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 드려졌던 제물과 같이 성도의 몸을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것이 예배라고 바울은 증언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 헌신하여 그의 뜻을 온전히 실현해 드릴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말의 징조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던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6~8).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실천적인 영성을 이루었던 인물로 우리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AD 1181~1226)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삶을 충성스럽게 몸으로 따르려 했던 신앙인이다. 그에게서 우리는 어떤 유형의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의 한 모습을 그에게서 읽을 수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과 전도자의 삶의 자세의 교훈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한 청빈의 삶을 이루었다(마10:9~10).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체험하기 위하여 자기 몸에 상처를 가져 그 아픔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에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고 기뻐하였다.
오늘 성도로서 우리의 올바른 윤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의 세계는 사회와 문화, 인간의 몸과 의식이 깊이 파헤쳐진 지식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시하는 시대라 말할 수 있다. 인간사회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방법론적인 이론, 국가의 정치와 국가 간의 관계, 인간의 의식을 넘어서는 무의식의 세계, 지구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 등이 이해되면서 여기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어 성도의 새로운 실천적인 삶의 과제를 깨닫게 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바울의 가르침을 새롭게 조명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가 살았던 청빈의 삶을 오늘날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탐욕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로 연결될 수 있도록 연구되어야 한다. 또한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는 환경을 보존하는 입장에서 생태계의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문제를 신앙으로 해결하려 하고, 그것들을 철저하게 실천하여 살아왔던 신앙의 선진들의 삶을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탐구해야 할 것이다. 2,000년의 세계 교회사와 함께 200년의 한국 가톨릭과 10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구약성서의 희생 제사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졌던 제물과 같이 피 흘리고 찢겨져서 하나님께 바쳐졌던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우리 신앙생활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이며,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이다. 오늘의 시대와 역사가 제기하는 문제를 보면서 바울의 말씀을 새롭게 들어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