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요셉 신학교
김영화 순이바르바라
▣ 첫인사(기도)
찬미 예수님!
천주교 원주교구 성지해설봉사단 김영화 순이바르바라입니다.
배론성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 시작 기도
성모송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성 요셉 신학교
이곳 성요셉 신학교는 1855년 매스트르 신부가 당시 공소 회장이던 장주기 요셉 성인이 제공한 3칸짜리 초가에 6명의 신학생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의 명칭은 배론 신학교였으며, 1861년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성요셉 신학교로 되었습니다.
이 초가는 1950년 한국 전쟁 때 전소되었으나 여기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이 되었는데요. 이 사진은 최양업 신부님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서품되신 당시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님과 그 신자들의 방문사진입니다. 이후 주변 본당 신부님들의 방문 증언에 의해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2001년 충북 도기념물 1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앞에 있는 십자비는 1972년에 세운 신학당 표지석이고 저기에 계시는 두 분은 푸르티에 교장신부님과 프티니콜라 교수신부님이십니다.
▣ 교육과정
신학교 교육과정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육과정에 맞춰졌을 거라고 하며 라틴어와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라틴어반은 훗날 소신학교과정이고, 1861년 이후 귀국하는 페낭 유학생들의 교육과정은 대신학교 과정입니다.
이곳에서 1863년 페낭 유학생이었던 임빈첸시오와 이바울리노가 각각 소품과 삭발례를 받아 처음으로 성직자가 탄생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전 신학생은 라틴어과정 4명, 신학과정 2명, 삭발례자 1명, 소품자 1명이었습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사제는 1명도 배출되지 못하였습니다.
오두막집에 갇혀 두려움으로 고생을 하고 소리를 죽여 글을 읽어야 했으며 마음놓고 산책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 좁은 공간에 10여명이 함께 생활하였는데 특히 방 안 등잔불로 인해 신부와 신학생들 모두 갖은 질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요셉신학교는 1855년부터 1866년까지 11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 교수진
교수진은 프랑스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푸르티에 신부님과 프티니콜라 신부님, 장주기 요셉 성인이신데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는 중심에 섰던 푸르티에 신부님은 신학생들 교육의 대부분을 담당하시며 묵상을 지도하고 치명서적을 읽으며 신학생들을 위해 사전과 문법책을 썼습니다. 『신심생활입문』의 번역을 마무리하여 베르뇌 주교가 그것을 인쇄하도록 도왔고 『조선어한문라틴어 사전』을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10만 어휘를 모은 『조선어 연구』를 펴냈으나 다 소각당하였습니다.
지혜롭고 인자하며 부지런하였고 자기희생과 겸손의 미덕을 가지셨던 푸르티에 신부님은 식물학과 여러 분야의 과학적인 지식이 풍부하여 신학교 주변의 식물을 채집하여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으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업적을 기려 1874년 윤노리 나무를 ‘푸르티아에아 빌로사’라는 이름으로 한 속을 설정해 주었다고 합니다.
프티니콜라 신부님은 조선은 거룩하고 축복받은 순교자들의 땅으로 가슴을 뛰게 한다며 입국하시어 배티를 중심으로 사목하시다가 1861년 9월 신학교로 오셨습니다. 푸르티에 신부님을 도와 라틴어를 가르쳤으며 교우촌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심한 병에 시달렸으나 고통은 선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참된 보물이고 영혼에게는 대단히 큰 재산이며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이라고 하며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열정과 순명을 실천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장주기 요셉 회장은 한문을 가르쳤으며 신부님들의 한글을 담당하였습니다.
▣ 순교
푸르티에 신부님과 프티니콜라 신부님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남종삼 요한을 체포하러온 의금부 도사에게 체포되어 같은 감옥에 갇혀 고문도 함께 받고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시어 함께 묻히셨습니다.
박해가 수그러들자 신자들이 유해를 발굴하여 왜고개 세묘지로 옮겼으며 다시 용산 샤르즈뵈프 신부님에게 보냈고 1900년 명동성당으로 이전하여 현재 두 신부님의 유해는 명동 대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습니다.
두 신부님은 아직 시복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확실치 않으며 현재 추진 중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주기 요셉 성인은 다블릐 주교님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치명하였고 신학생들 중 김요한사도, 유안드레아, 권요한은 서울에서 순교하였습니다.
▣ 성 요셉 신학교 의의
성요셉 신학교의 의의는 첫째 방인사제를 양성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이 한국교회에 영성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 둘째 첫 정주형 대목구 신학교로 대·소 신학교를 겸비하였다는 것, 셋째 조선 사회의 전통교육이 근대교육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 넷째 프랑스 신학 교육을 이 땅에 접목시킨 최초의 교육기관이라는 것입니다.
성요셉 신학교는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박해로 인해 잠시 중단된 것이었기에 방인사제를 양성하고자 하는 염원의 맥은 끊어지지 않고 19년 후인 1885년에 강원도 여주시 강천면 부엉골에 임시 신학교로 설립, 계승되었습니다. 1887년에 서울 용산으로 옮겨 예수성심신학원으로 개칭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서울 혜화동 소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신학교는 교회의 심장이라고 합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본 회칙 중 첫째가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여 성직자로 양성시키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최종태 지은 『사제로부터 온 편지』라는 책이 있는데요. 거기에 조선 최초의 사제가 탄생하는 순간을 보려고 목숨을 건 항해를 하였고 조선인 사제가 주는 성체를 받으며 우리민족에게도 사제를 내려 주심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제 양성을 위해 선교사가 부족함에도 푸르티에 신부를 신학교 전담으로 파견한 것, 갖은 질병과 박해의 불안한 상황에서도 신학교가 발전하도록 지원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던 주교님과 신부님들,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를 만나러 간 신앙선조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사제에 대한 열망을 묵상해 보며 여기 성요셉 신학교를 특별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헤어짐(마침기도)
이상으로 성요셉 신학교 해설을 하였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늘 우리는 배론 성지에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여러분의 순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돌아가시는 길 내내 행복한 여정이 되시고 오늘 보고, 듣고, 느끼신 신앙선조들의 삶을 디딤돌 삼아 보다 깊이 있는 영성생활의 신앙인이 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