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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천락무예단(天樂武藝團) [1] 진령산맥(秦嶺山脈)의 동남쪽 끝자락과 황하가 마주친 곳. 그곳이 바로 유명한 귀답령(鬼踏嶺)이었다. 우측으로는 멀리 숭산( 嵩山)이 가물거릴 정도로 보이는 이곳 가을의 귀답령은 온통 울긋불 긋한 단풍이 물들었다. 북쪽 능선은 고목 나무가 어두운 음영을 드리우고 벽을 친 들쭉날 쭉한 바위들은 뾰족한 창 끝처럼 남쪽으로 뻗어나갔다. 개봉을 떠난 지 삼 일째 되는 날 정오 무렵이었다. 유청풍과 원개는 험하기로 소문난 귀답령에 이르렀다. 원개는 일부러 이 길을 택했다. '아주 으슥하군. 여기서 처치하는 게 좋겠어.' 귀답령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 두 갈래 길이 나왔다. 남쪽은 가파르고 북쪽은 정반대로 풀들이 자라나 초행자는 무심코 양호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불과 몇 발자국 가지 않아 강풍 에 휘말려 마(魔)의 만단장애(萬端長涯)로 추락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렇게 졸지에 원귀(怨鬼)로 변하는 고개가 바로 귀답 령이었다. 원개는 그 지점에서 유청풍을 앞장 세웠다. 그는 흐뭇한 마음에 전 대를 슬며시 만져 보았다. '히히히....... 이런 곳에서 정리해야 소문이 안 나거든?' 유청풍은 그의 앞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하지만 나란히 걷던 원개가 뒤로 처지는 순간 그도 위험을 감지했 다. '큰일이다. 저 자가 살의를 품었는데 대책이 없으니.......'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무림의 고수를 상대로 무모하게 싸울 형편 도 아니며 그렇다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없는 긴박한 상황이 었다. 강풍이 휘몰아치는 절벽은 불과 삼 장밖에 남지 않았다. 슥! 원개는 은밀히 우수를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 그의 손이 빠르게 하 강하면서 한 줄기 위맹한 장력이 쏟아져 나왔다. 쐐애액! 유청풍은 귀를 찢는 파공음이 들리자 재빨리 풀밭에 뒹굴었다. 하지만 장강은 화살같이 날아가 정확히 그의 등을 격타하고 말았다 . "윽!" 그는 비명과 함께 시뻘건 피를 토하며 내리막 풀밭 위를 빠르게 굴 러갔다. 무릎까지 자란 풀밭은 얼음 못지 않게 미끄러웠다. 유청풍은 가물 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힘껏 풀을 움켜쥐었으나 허사였다. 마음과 달리 그의 몸은 절벽 끝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낭떠러지! 으아악......!" 뿌연 구름이 깔린 까마득한 바닥을 보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휘류류륭! 마침 절벽을 타고 올라온 돌풍은 그를 휘감아 버렸다. 한편 유청풍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신형을 날리려던 원개는 갑자 기 흠칫했다. "억! 저건 뭐야?" 삼 장 앞. 낙락장송의 시커먼 음영 아래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 인영은 빨간 경장을 입은 삼십대 중반 가량의 여인이었다. 앞섶이 좌우로 벌어진 홍의경장 사이로 눈부시게 뽀얀 젖가슴이 거 의 반 이상 드러나 있었다. 또한 측면이 허리어림까지 절개되어 그녀 의 굴곡 심한 몸매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한데 더욱 놀라운 일은 유청풍이 바로 그녀의 발 아래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여인은 그를 일으켜 앉힌 후 단약(丹藥) 한 알을 입에 넣어주었다. "보환단(寶丸丹)을 먹고 잠깐 쉬어라." 일순 그녀의 눈에서 야릇한 빛이 흘러나왔다. '호오! 아주 잘 생겼구나.' 유청풍은 대답할 기운조차 없어 소나무에 기대앉았다. 기이하게 그 녀가 먹여 준 약은 놀라운 효험을 나타냈다. 향긋한 기운이 목구멍에서 번진 순간 그는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 되어 말은 할 수 없어도 의식만은 또렷해졌다. 게다가 갈라진 등은 출혈을 멈추고 그새 아물어지고 있었다. 홍의경장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원개를 불렀다. "급장수야, 이리 오너라." 원개는 그녀가 자신을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자 버럭 소리쳤다. "건방진 계집! 넌... 누구냐?" 여인은 아미를 찌푸리며 한 발짝 내디뎠다. 일순 홍광(紅光)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원개 앞에 우뚝 섰 다. "네놈은 정해단에 가서 영 못쓰게 됐구나. 감히 색절을 모독해?" 원개는 갑자기 전신의 진기가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젠장, 저 계집이 모염정일 줄이야!' 그는 소문으로 오절의 위명을 익히 들어 왔지만 막상 대하기는 난 생 처음이었다. 다른 오절이 그러하듯 모염정 역시 자신의 행적을 좀 처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절 중 네 명은 모두 환갑이 지났으나 모염정만은 삼십대였 다. 이들은 모두 무공 수준이 무림에서 최고봉에 올라 있었다. 설령 원개가 팔비육두(八臂六頭)라 해도 그들을 상대하기란 계란으 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더구나 모염정은 고수들의 진기를 갈취하여 공력이 그들 가운데 단 연 최강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원개는 가슴이 바짝 오그라 붙는 듯했으나 신속하게 허리춤에서 쇠 몽둥이를 풀어냈다. '쳇! 저 계집이 날 희롱하는군. 색절이 여기에 왜 나타나겠어?' 삶의 방식이 저질일 뿐 그도 엄연히 일류고수였다. 결코 호락호락 기 죽을 위인은 아니었다. 창! 진기를 주입하자 강철 쇠몽둥이는 넉 자 길이로 늘어났다. 그것은 원개가 자랑하는 장상봉(葬喪棒)이었다. 곡상봉(哭喪棒)을 개조한 장상봉은 속이 텅 비었는데 십여 개의 구 멍이 상단에 뚫려 있어 거대한 퉁소처럼 보였다. 그는 희희낙락한 표 정으로 힘차게 장상봉을 휘둘렀다. 삐... 삐이익! 장상봉에 뚫린 구멍 사이에서 소름 끼치는 음향이 일어났다. 이 음 향은 상대방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효력이 있었다. "흐흐흐! 정에 울고 정에 사는 정해단을 무시해? 야한 계집년! 오 랜만에 장성삼곡(葬聲三哭)으로 놀아 볼까?" 삐이이이......! 속 빈 장상봉은 무슨 한이 그리 많은지 구슬픈 귀곡성(鬼哭聲)을 토해냈다. 구멍에서 나온 소리가 빠른 회전력과 어울려 연신 가슴 저 미는 괴향(怪響)을 발했다. 모염정은 그를 바라보며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흥, 쇳덩이도 네놈을 혐오하는구나. 저승으로 갈 환영곡(歡迎曲) 을 불러 주니 말이야." 원개는 그녀의 말이 귀에 와 닿지 않았다. "시끄럽다! 계집, 널 잡아서 활동비로 써야겠다." 비릿한 음소(陰笑)를 흘리던 그는 벼락치듯 신형을 솟구쳤다. "으흐흐! 고것... 차앗!" 장상봉은 거북스러운 음향을 발하며 맹렬한 속도로 색절을 휘감았 다. 바로 그가 자랑하는 장성삼곡의 제 일초식 장비어루(葬悲於淚)였 다. 그 초식을 자세히 보면 찌르고 후리는 동작이 동시에 전개됨을 알 수 있었다. 수백 개로 변화된 시커먼 장상봉은 모염정을 요절낼 듯이 상중하 요혈을 동시에 파고들었다. 순간 모염정은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쳐들어 한바퀴 돌리더니 강 기 속으로 불쑥 집어넣었다. "타핫!" 뚝! 투둑! 그녀의 일갈 후, 이내 허무한 절단음과 둔탁한 낙하음(落下音)이 연이어 들려왔다. 동시에 원개는 비명과 함께 붉은 피를 울컥 토했다 . "으욱! 웩!" 동강 난 장상봉은 숲 속 멀리 날아가고, 원개는 비틀거리며 겨우 세 뼘 정도 남은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그의 모습은 허수아비와 같았다. 모염정은 도수로 철봉을 잘라버린 한편 그에게 내상을 입힌 것이었 다. 원개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학질 환자처럼 덜덜 떨었다. '이.. 이런... 제기랄! 도강절파(桃降切破)구나. 진짜를 몰라보다 니.......' 그는 하초(下焦)가 완전히 풀려 방뇨(放尿)할 지경이었다. 살기 띤 모염정은 냉랭한 교갈(嬌喝)을 터트렸다. "꿇어라!" 멍청히 서 있던 원개는 살벌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정신없이 허둥댔 다. "예? 아, 예!" 그는 고철로 변한 장상봉을 내던지자마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 싹 비벼댔다. "색절님, 부, 부디 약한 자에게 온정을 베푸시와......." 그는 머리칼마저 풀려져 영락없이 백사장에 대기한 사형수 꼴이었 다. 모염정은 애달픈 비굴함을 철저히 외면했다. "온정? 네가 그런 말을 해......? 우선 경건하게 대가를 받아라." 꽈드득! 섬뜩한 탈골 소리와 동시에 원개는 심장이 뽑히는 듯한 비명을 질 렀다. "끄아악! 다시는......." 그는 두꺼운 입술을 심하게 떨며 우측 팔을 잡고 비오듯 땀을 흘렸 다. 모염정은 눈을 무섭게 흘긴 채 냉갈을 터트렸다. "이놈! 이것이 네가 망발한 대가이며......." 그녀는 또 다시 원개의 좌측 어깨마저 뽑아 버렸다. "이번은 더러운 눈을 함부로 굴린 벌이야." 뿌드득! "꺼으윽......!" 뼈가 으스러지는지 빠지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거북한 음향과 함께 원개는 펄쩍 뛰며 처참한 소리를 질러댔다. 차마 눈뜨고 못 볼 오싹한 광경이었다. 결국 급장수 원개는 허연 거품을 토한 후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어깨부터 비틀어진 그의 두 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모염정은 역시 지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원개의 옆구리를 통렬히 가격했다. "일어나." 퍽! 하며 비계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교족이 긴 타원형을 그렸다. 원개는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끄르륵......!" 바로 그때 뒷간 수준의 내용물이 입에서 툭 튀어나와 역겨운 냄새 가 코를 찔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교롭게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전대는 절벽 아래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혼란한 나머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모염정이 걷어차면서 어긋난 팔을 맞춰준 사실조차 몰랐다. 모염정은 여차하면 일지(一指)를 퉁길 기세였다. "누가 정해단 대통좌냐?" 악마의 그것처럼 생긴 긴 손톱 끝이 원개의 이마에 척 닿았다. 정신이 혼미해진 원개는 턱을 덜덜 떨었다. "모, 모릅니다. 점조직이라서......." 점조직의 구성원은 자신이 상대하는 인물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하물며 원개같이 평면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자를 문초해 봐야 소용없 는 일이었다. 모염정도 그 점을 알지만 한번 더 겁을 준 것이었다. 그녀는 원개의 척추를 향해 일지를 날렸다. "얍!" 뜨끔한 순간 원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윽!" "흥, 월백분침(月魄噴針)의 위력을 알고 있겠지?" 비로소 원개는 조금 전 그녀가 우선이라고 말한 뜻을 깨달았다. "예, 그럼요." "한 달 내로 내게 와라. 일 각만 늦어도 객사야." 월백분침은 체내에서 한 달이 경과하면 저절로 독을 분사하는 무서 운 독침이었다. 또한 모염정 외에는 그 누구도 절대 풀지 못할 독랄 한 절기였다. 원개는 공포를 느낀 나머지 한없이 저자세를 취했다. "바, 반드시 이행할 것입니다. 믿어 주십쇼." 모염정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누가 저 공자를 죽이라고 시켰느냐?" 그녀의 손 끝에 강한 진기가 잔뜩 모아졌다. 몸을 떨던 원개는 죽 음을 의식하고 술술 불었다. "예, 와.. 와호장의 고일두가 보... 보석을 주면서... 제... 제가 듣기로는 재주를 시기한 것 같은데 내막은 호미취골이 압니다요." "살루문에서 못된 짓 하다 나온 그 강시 같은 갈곤태 말이지?" "예, 예... 바로 그 잡니다요." "정해단과 살루문은 견원지간인데 어떻게 갈곤태와 협조했지?" "아무리 그래도 공생관계라... 실무자끼리는 통하는 법이니까요." 모염정은 한 차례 흘겨본 후 유청풍을 향해 신형을 돌렸다. 나무에 기대 있던 유청풍은 운기조식으로 체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유공자, 갈곤태란 놈이 선친의 유체(遺體)를 훼손한 자야. 하나 아무 염려 말아. 무덤은 내가 잘 해드렸으니... 빨리 무공을 배워 원 수를 갚아야지?" 그녀의 음성에는 심금을 울리는 마력이 담겨있었다. 설사 애도의 목소리에 도취 당하지 않았더라도 선친의 시신을 훼손 한 자를 용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유청풍의 눈에서 시뻘건 광채가 좍 뻗어 나갔다. '으윽, 죽일 놈들!' 불현듯 그의 뇌리에 단궐이 강조한 당부가 떠올랐다. '냉정해라....... 그 참뜻을 깨우칠 때까지.......' 그는 숭고하게 죽음을 맞이하던 단궐의 초연한 모습을 죽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장 선친의 산소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이 말을 되씹으며 자제하는 한편 수없이 각오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만, 사양하렵니다." 기실은 끈끈한 모염정의 손길을 벗어나는 일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 었다. 모염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특별히 정한 행선지도 없는 것 같은데......?" 유청풍은 여전히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급장수와 동행할 겁니다." 실로 귀신조차 짐작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답변이었다. 생명의 은인(恩人)을 마다한 채 자신을 죽이려던 원수와 동행할 줄 누가 상상하겠는가? 더구나 아름답고 화끈한 여고수 모염정의 제의를 거절한 젊은이가 있다면 선뜻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영악한 그녀도 그의 심중을 간파할 수가 없었다. "달리 뜻이 있는가?" 이상하다는 듯 유청풍이 오히려 되물었다. "저는 팔려가는 중입니다. 약속은 지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모염정은 살기 어린 눈으로 원개를 노려보았다. "알겠어. 저 자식을 당장 처치해......." 날벼락이 떨어질 찰나 원개는 혼비백산하여 황급히 소리쳤다. "저, 절대 오, 오햅니다. 예, 바로 데려 가시라니깐요." 그의 턱 밑에 맺혀 있던 침이 덩어리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는 속으로 유청풍을 한없이 원망했다. '참으로 물귀신 같은 놈일세. 누구 죽는 꼴 보려고 그러나?' 유청풍은 그의 심중을 헤아리고 모염정을 적극 만류했다. "절대 죽이면 안 됩니다. 저는 돈을 벌 생각이거든요." 모염정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돈? 도무지 속을 모르겠네?' 그녀는 재차 그의 속을 떠보았다. "어느 단체로 갈 생각인가?" 유청풍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냥... 기왕 온 김에 서쪽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일순 모염정은 그를 향해 묘한 미소를 흘렸다. '네 마음대로 안 될걸? 사염미안공(思艶迷眼功)을 이용해 영원토록 내 애마(愛馬)로 삼을 테다. 호호! 멋진 녀석.' 그녀는 유청풍만 볼 수 있도록 비스듬히 자세를 잡았다. 언뜻 처연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자태는 미모의 독신 여인만이 풍길 수 있는 고혹적이고 우수 어린 야릇한 모습이었다. 이렇듯 냉혹 한 것 같으면서도 사람의 넋을 빼는 요염한 미소가 모염정 본연의 가 공할 무기였다. 휘르르....... 바람이 불 때마다 경장이 나풀거려 팽팽한 젖가슴은 물론이고 꼭 감춰야 할 곳까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말았다. 원개는 그렇게 혼나고도 발정 난 수캐처럼 침을 줄줄 흘렸다. '햐아, 지독한 몸매다. 벗으면.......' 그는 초점을 잃은 채 여인을 끌어안은 자세를 잡더니 풀썩 쓰러졌 다. 유청풍은 돌연 이상한 허상에 사로잡혔다. '으윽, 죽어간 사람들이......!' 갑자기 눈앞에 단궐과 사곡의 환자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외조부와 어머니 그리고 맞아 죽은 선친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비참한 모습으로 살려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처럼 사염미안공은 사람의 감정을 부추겨 이지를 잃게 만든 다음 시술자의 의지대로 조종하는 섭혼술(攝魂術)의 일종이었다. 이때 여인을 그리던 자는 탈진할 때까지 교접하는 몽상에 빠지며, 억울한 사람은 비분강개함을 참지 못해 스스로 의지를 상실하는 것이 었다. 원개는 이 수법에 걸려들어 기절했으며 유청풍은 환상 속에 휘말려 들어 머리를 감싼 채 몸부림을 쳐댔다. 그는 심마(心魔)에 빠져 든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이를 악문 채 환 상에서 벗어나려고 뇌운진기를 회전시켰다. 하지만 모염정의 공력이 훨씬 높은 터라 그는 사염미안공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어언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으며 안색은 무 참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참 머리와 가슴을 쥐어뜯던 그 가 태연히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닌가? 모염정은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다 화들짝 놀랐다. '아니, 고혜원이 어떻게......?' 울창한 고목가지가 늘어진 바위 위, 고혜원은 그곳에서 모든 광경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쌍륜화극으로 햇살을 반사하여 유청풍 의 눈가를 비쳐주고 있었다. 유청풍은 그 따가운 햇살을 받아 사염미안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모염정은 질투심을 느낀 나머지 짐짓 언성을 높였다. "청풍, 원수를 안 갚고 돈을 벌겠다니 무슨 소리냐?" 그녀는 단 한 마디로 유청풍과 고혜원의 사이를 갈라놓을 심산이었 다. 고혜원은 신형을 날려 그녀 앞에 내려섰다. "제가 사과할 거예요." 그녀는 유청풍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염정은 대뜸 모진 말을 내뱉었다. "연하의 정인을 따라 도주할 생각인가?" 그녀는 살수를 펼치고 싶었지만 와호장을 의식하여 억지로 자제했 다. 고혜원 역시 모욕감에 떨면서도 유청풍의 마음이 심란하므로 분노 를 억눌렀다. "선배! 말조심하세요. 감정을 풀려는 것뿐이니까요." "흥! 사람이 죽었는데 무엇으로 보상하겠다는 거야?" "선배가 데려가면 해결되나요?" 모염정은 아차 싶었다. '자칫 내가 표적이 되겠구나. 그렇다면 청풍이 뇌운진기를 운용할 때까지 지켜볼까?' 그녀는 태연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모든 것이 좋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조언한 거야." 한데 곧 갈 것 같던 그녀는 좀처럼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고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모염정을 불신하여 아예 유청풍 과 동행할 작정이었다. 한데 유청풍은 검미를 찌푸리며 못마땅한 안 색을 드러냈다. 결국 모염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화해하겠다면... 내가 간섭할 필요가 없지." 그녀는 원개를 향해 우수를 휘저었다. 원개는 비로소 사염미안공이 풀려 벌떡 일어났다. 모염정은 싸늘한 음성으로 당부했다. "유공자가 원하는 곳까지 잘 바래다주거라." 원개는 재빨리 유청풍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이보게나, 조금도 염려 말게. 내 친절히 안내하겠네." 어느새 그는 말투부터 친근하게 바꾸었다. 비대한 체구가 온통 땀에 젖어 알몸처럼 드러났는데 두 눈마저 움 푹 들어가 있어 그는 열흘쯤 중병을 앓고 난 환자 같았다. 휙! 모염정은 유청풍에게 생긋 미소를 보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실로 색절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유청풍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혜원을 쏘아보았다. "돌아가. 네가 사과할 것은 없어." 그는 그녀가 이번 일에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거리를 두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고혜원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결국... 원수를 갚겠단 말인가?' 그것은 그녀가 제지할 수도 없으며 이런 상황에서는 말해봐야 변명 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거렸다. "미안해. 그럼... 몸조심하길 바래." 돌아서는 찰나 그녀의 싸늘한 안광이 원개를 훑어 내렸다. 멍청히 서 있던 원개는 내심 깜짝 놀랐다. '이거 알고 보니 겁나는 녀석일세! 지독한 계집들이 짹소리도 못하 고 물러가잖아?' 유청풍이 발걸음을 떼어놓자 그는 다급히 물었다. "이.. 이보게. 어디로 갈 텐가?" 그는 하인마냥 어정쩡한 자세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실상 그는 모염정과 고혜원의 보복도 두려웠지만 새삼 유청풍을 달 리 본 것이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여걸들이 갑자기 그 의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청풍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천락무예단(天樂武藝團)을 아오?" "물론, 천지를 옮겨다니며 순회 공연하는 가무단을 누가 모르는가? 아마 지금쯤 서안에 있을걸? 이래봬도 웬만한 사람과 단체는 내가 좍 꿰고 있단 말일세." 유청풍은 아버지가 일러 준 천락무예단을 따라 전국을 일주하며 무 림 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향후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몇 발자국 걸어갔을 즈음 원개는 창피함을 느꼈는지 체면을 회복할 요량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주절대기 시작했다. "아마 자네는 이해 못할 걸세. 내가 무림에 처음 발을 내밀 때의 화려함을... 다들 놀래더군. 뭐, 특이하다나? 왜냐하면 말이지, 그 당시엔 삼혈과 오절이 주름 잡던 시절이었는데......." 끝날 줄 모르는 그의 입담에 밀려 어느덧 귀답령도 까마득히 멀어 지고 있었다. [2] 유청풍과 원개가 천락무예단이 있는 서안(西安)에 도착한 것은 개 봉을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위수(渭水)를 둘러싼 둑 아래 저 멀리 지붕 가득 오색기가 펄럭이 는 커다란 막사가 눈에 띄었다. 원개는 삼십여 년 간에 걸쳐 들은 풍월을 밑천 삼아 천락무예단의 내부사정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천락무예단은 춤과 무예(武藝), 그리고 오락을 곁들인 연극을 순 회 공연하는 종합가무단인데......." 이러한 가무단이 중원에서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대략 하(夏) 나라 때부터였다. 상서(尙書)에 격석부석(擊石 石) 백수솔무(百獸率舞)이라고 기록 된 바 이는 석(石), 즉 경(磬)을 두드리니 온갖 짐승이 함께 춤춘다 는 말이다. 조(組)를 이루어 연주하는 악기인 경은 타악기(打樂器)의 시초로 이미 당시 가무(歌舞)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가 대중에게 흘러 들어가 음악 과 동작으로 애환을 표현함으로써 자연 가무단이 성행하게 되었다. 창설 백 년을 자랑하는 천락무예단 역시 서민들의 진솔한 삶을 표 출하여 그 인기가 중원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매우 높았다. 뛰어난 재주를 지닌 단원 숫자가 얼추 백 명을 웃돌았으니 그 규모 와 수준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두 사람이 입구에 다가갈 즈음 문지기는 벌써 원개를 알아보고 묵 묵히 비켜 주었다. 마침 금일 마지막 공연을 끝냈는지 관객은 한 명 도 보이지 않고 천막 안은 사방에 유등을 밝혀 놓아 예상보다 환했다 . 짙은 분장을 한 배역들이 객석 쪽으로 우르르 몰려 나왔다. 원개는 맨 앞에서 걸어 나오는 오십대의 호리호리한 장한을 손짓으 로 불렀다. 그 장한은 유일하게 분장을 하지 않았는데 작은 눈을 매섭게 번뜩 였다. 그는 잰걸음으로 다가와 반갑게 원개의 손을 잡았다. "아니, 급장수 형님께서 갑자기 웬일이시우?" 원개는 유청풍을 돌아보며 나직이 말했다. "인사하게. 죽간자(竹簡子)를 맡고 있는 설가대(薛賈大)일세." 죽간자란 연극을 진행하는 사회자이자 가무단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는 주무(主務)였다. 설가대는 유청풍이 인사하기도 전에 거만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할 줄 아는 게 뭐 있나?" 적어도 천락무예단원이 되려면 어느 한 방면에서 귀신 소리를 들어 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청풍 나이에 입단한 남자는 한 명도 없었 다. 그 만큼 수준도 높고 남자가 맡을 역할이 제한되어 있어서 아예 초 보자를 받지도 않을 뿐더러 기라성 같은 고참 재주꾼들도 서로 경쟁 하는 실정이었다. 대놓고 무시하는 언동에 유청풍은 의연한 자세로 되물었다. "무엇을 해야 하오?" 이때 옆에 서 있던 고참 배역들은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으음, 아직 이 바닥 실정을 모르는 놈이구나.' 그것은 얼마 못 버티고 돌아가도록 만들되 절대 그냥 보내지 말자 는 신호였다. 눈치 빠른 원개가 재빨리 둘러댔다. "이보게들, 이 사람이 워낙 곧아서 그러네. 하나 좀 두고보게나. 아마 무궁무진한 잠재능력을 발휘할 테니......." 사실 그가 구체적으로 자랑스럽게 늘어놓을 만한 장기를 유청풍은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개는 막연한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 었다. 설가대는 마지못해 승낙하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다. "뭐, 제 맘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형님께서 정히 그러시다면, 일단 알았소이다." 고달픈 이 바닥은 유달리 인간거래(?)가 빈번하여 그들도 악명 높 은 원개를 내심 어렵게 여겼다. 한 마디로 급장수 원개는 이 세계에서 저승사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한(恨) 많은 인생들의 앞날은 순식간에 곤두 박질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원개는 얼른 유청풍에게 작별을 고했 다. "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만 주게." 이런 말은 그가 누구에게나 상용하는 습관성 용어였다. 유청풍은 시종 덤덤한 태도로 대했다. "수고했소." 원개는 홀가분한 듯 바람처럼 휑하니 사라졌다. 설가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의아스러워했다. '거참, 별일이네. 물건값도 안 받고 가다니......?' 물건값이란 유청풍을 인수한 대가를 뜻하는 것이었다. [3] 그날 밤이었다. 유청풍은 오십대 남자 배역들과 함께 잠자리를 배정 받았다. 그는 두 사람이 걸어 다닐 만한 좁은 바닥에 서 있었으며 그 앞 침 상에는 고참들이 입단서열대로 죽 늘어앉았다. 그들 모두 안색을 딱딱히 굳혀서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일 상좌의 설가대는 자기 우측부터 소개했다. "이 방의 둘째가 탈바가지 안창구(安唱九)다. 그 다음이 줄타기 강 봉만(姜奉萬), 세 번째가 불뿜기 도종(都宗), 맨 끝자리가 북치기 노 달맹(盧達盟)이지. 이들은 같은 달에 입단한 동기지만 엄연히 신고한 날짜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라." 그는 조직에서 서열이 얼마만큼 무서운지 은연중 주입시켰다. 유청풍은 그가 네 사람의 장기를 말할 때마다 따라서 고개를 움직 였다. 탈바가지 안창구는 천(千)의 얼굴을 만드는, 즉 가면(假面) 제조분 야에서 당대 제일인자이며 몸집이 마른 강봉만은 외줄 타기의 달인이 었다. 또한 얼굴이 화상으로 얽어버린 도종은 만가지 화염(火焰)을 뿜어 내어 불에 관한 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귀재였다. 구 척 장신인 노달맹은 뒷간에 앉아서도 무대와 호흡을 맞출 정도 로 입신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鼓手)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발두(撥頭) 같은 가면극이나 사자무(獅子舞)처럼 곡예를 곁 들인 연극에서 주요배역을 담당하는 중원 최고의 재주꾼들이었다. 유청풍은 기죽이는 소리를 듣고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유청풍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 설가대는 그의 말을 냉정히 자르며 목에 힘을 잔뜩 넣었다. "지금부터 엄숙하게 입단신고식을 거행하겠다. 우선 무릎걸음으로 고참들 앞에 가서 큰절을 올려라." 칸막이용 송판이 바람에 의하여 파라락 떨려서 그런지 분위기는 돌 연 음산해졌다. 고참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유청풍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아무리 신고를 잘해도 손을 보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수 많은 사람을 상대로 만두를 팔았던 유청풍이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 다. 그는 굴욕적인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싫소." 순간 설가대는 눈꼬리를 칼 끝처럼 말아 올렸다. "뭐야? 전통의식(傳統儀式)을 거부하겠단 말이지?" 그는 금세라도 잡아먹을 듯이 싯누런 이빨을 천천히 드러냈다. 하지만 유청풍은 태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 기회에 잘못된 전통을 고칩시다." 가당치 않은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고참들은 일제히 인상을 구겼다. '어라? 요 자식이 죽으려고 아주 기를 쓰는군.' 실내는 폭풍전야처럼 점점 싸늘한 공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청풍은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단호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 "같이 앉아서 인사를 나누던가 아니면 모두 내려오시오." 고참들은 눈을 부릅뜨며 어금니를 우드득 깨물었다. 이윽고 탈바가 지 안창구가 으스스한 흉소를 흘렸다. "우후후후... 엄청 시끄러운 녀석이 굴러왔구나." 그 말이 신호인 양 별안간 등불이 꺼졌다. 동시에 트집을 잡으려고 벼르던 고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죽여라!" 짙은 어둠 속, 살벌한 고함과 함께 각목, 주먹, 발, 머리가 유청풍 에게 집중포화처럼 쏟아졌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개종자 같으니......." "요 새낄 아예 곤죽으로 만들어라." 빠악! 퍼버벅! 공간이 매우 협소하여 유청풍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몸을 웅크 린 채 팔로 얼굴 부위를 감쌌다. '우욱!' 그는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지만 뭇매는 이제 시작이었다. 제아무리 신력을 타고난 자라도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유청 풍은 고통을 못 이겨 이리저리 몸을 비틀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자세를 취하던 빙 둘러싼 고참들은 짐승을 패듯 사정없 이 짓밟으며 몰매를 퍼부었다. "건방진 새끼! 고참을 뭘로 아는 거야? 엉!" "이썅! 어디서 개 방귀 같은 소리를 픽픽 하고 지랄을......." 비록 이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험하게 생활했는지라 흥분하 면 무지막한 기질을 드러내는 자들이었다. 유청풍은 머리가 갈라지고 입술이 터진 것은 물론 시퍼렇게 피멍든 손목, 어깨, 등, 허리, 엉덩이가 쩍쩍 갈라졌다. '으으.......' 몰매를 맞은 그는 옷이 너덜너덜해졌으며 마치 절벽에서 굴러 떨어 진 사람마냥 흙과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핏물을 토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감각 은 둔해져 양쪽 귀에서는 윙윙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하나 거북스런 욕설을 동반한 무서운 매질은 우박처럼 쏟아졌다. "간덩이가 부은 놈! 반쯤 죽어봐야 정신차리겠어? 에잇!" "이마빼기에 피도 안 마른 게 감히 뭘 믿고......." 와작! 따악......! 연무장에서 수련목을 두드리는 것 같은 아니, 도살장에서 짐승을 쳐죽이는 듯한 몸서리쳐지는 격타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피가 튀고 살이 뭉개져 뼈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마침내 엄청나게 난타를 당하던 유청풍은 이를 악물었다. '크윽, 도저히... 못 참겠다.' 그는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성난 맹수처럼 포효를 터트렸다. "이야아앗!" 찰나 신나게 두들겨 패던 고참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날아갔 다. "여기가 어딘 줄... 억!" "어이쿠! 꾸르륵......." 분노가 폭발한 유청풍은 널려 있는 그들을 다시 한번 집어 던졌다. "에라차!" 와지끈! 뚝딱! 우두둑! 쿵! 어두운 실내에는 잠시 천막이 부서지는 파열음이 계속되더니 이내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크으으......." "아우으......." 단검에 배를 찔린 설가대는 엎드린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실상 그 단검은 유청풍을 겁주려고 그가 소품실에서 가져와 기둥에 매달아둔 것이었다. 그의 배에서는 비릿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탈바가지 안창구는 천막 지지용 철주와 호되게 부딪치는 순간 코뼈 가 부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침상으로 떨어진 줄타기 강봉만은 허 연 거품을 토하며 줄에 걸린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판자 두 겹을 뚫고 나간 북치기 노달맹은 휘영청 달빛 아래 큰 대 자로 쭉 뻗었다. 화염 도종은 찢어진 천막에 둘둘 말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유청풍은 주위를 훑어본 후 몇 발자국 비틀대다가 그대로 퍼져 버 렸다. '제길, 보름은 족히 쑤시겠구나. 으윽.......' [4]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유청풍은 피멍든 몸을 제일 먼저 일으켰다. '쳇, 엉망이군.' 그는 깨질 듯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며 청소를 시작했다. 밤새 끙끙 않던 고참들은 슬며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철주와 정면 충돌한 탈바가지 안창구는 코가 으스러져 얼굴이 퉁퉁 부었는데 연신 킁킁거렸다. 허리를 다친 외줄 강봉만은 엉금엉금 기 었으며 목에 부목(副木)을 댄 화염 도종은 상체를 천으로 칭칭 감은 채 발을 질질 끌고 다녔다. 북치기 노달맹은 목발을 짚고도 한참 만에야 겨우 한 발을 떼어놓 았다. 그들은 몹시 초췌한 몰골이었으나 눈에서는 무서운 독기를 뿜어냈 다. 죽간자 설가대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아직도 의식불명인 채 급히 달려 온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배가 한 자나 찢어져 당분간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쨌든 여단원 가운데 누군가가 그를 응급처치하여 목숨을 건져 준 셈이었다. 잠자리와 실내 정리를 마친 유청풍이 간 곳은 소품실이었다. 소품실은 거대한 병참기지를 방불케 했다. "휴우......!" 북만 해도 대중소 수십 개가 있으며 거치된 도검창극은 물론이고 방패도 백여 점을 웃돌았다. 걸려 있는 남녀 단원들의 의류와 신발 또한 천여 벌이 넘었다. 그밖에 농기구며 가면과 여러 가지 짐승모양 을 본따서 만든 봉제품들은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한데 이러한 소품들 대부분이 서로 섞여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평상시야 이렇게 사용하지 않겠지만 아마 누군가 손을 댄 모양이었 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이러한 것을 정돈하는 업무가 유청풍과 같은 입단초년생이 할 일이 었다. 그는 바쁘게 움직였다. "오전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끝내야 말들이 없겠지?"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소품들은 하나씩 정돈되기 시작했다. 각종무기는 가대에 세워졌으며 북은 등에 지는 대고(大鼓)부터 시 작하여 가슴에 거는 고고(高鼓), 허리에 차는 요고(腰鼓) 등 크기별 로 쌓여졌다. 등패는 철패, 동패, 목패 등 재질별로 분류되었다. 의복은 고대, 당송(唐宋), 원, 명나라 시대로 나누어진 후 다시 남 자와 여자의상 그리고 계절별로 구분되어 옷장에 자리 잡았다. 그밖에 수백 종의 신발, 보관(寶冠), 요대가 옷장 옆에 정렬되었다 . 가면은 서시(西施), 항우(項羽), 송강(宋江), 화상, 도사, 사자, 호랑이, 여우, 황소, 독수리, 앵무새 등 사람과 짐승이 따로따로 못 에 걸렸다. 모든 소품들을 분류한 다음 먼지를 털고 닦아내니 물에 빠진 생쥐 처럼 땀을 흘려 입에서 쓴 냄새가 풍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객석에 좌석용으로 깔린 칠팔십 개의 멍석을 밖으로 끌어내어 모래 를 털고 다시 정렬해 놓았을 때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지 않은가?' 이천 평쯤 됨직한 무대와 객석을 쓸어 낸 후 걸레를 잡는 순간 손 발에 감각을 못 느낄 정도였다. 두 마차분 쓰레기는 말할 것도 없거 니와 심지어 아이들이 남긴 대소변을 치우고 흙을 뿌려야만 했다. 창고는 들쥐들이 모여 사는 서식지였다. 그 안에는 천막을 치는 도구인 망치, 삽, 밧줄과 이동시 사용하는 손수레와 상자는 물론이고 건초와 기름통 그리고 폐품 등 온갖 도구 와 물건들이 뒤섞여 있었다. 유청풍은 그것들을 모두 밖으로 들어냈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쥐들도 숨을 곳이 완전히 없어지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사용빈도를 고려하여 물품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창고를 나왔을 때 육신은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 다. 귀에서는 귀뚜라미가 울었으며 눈썹에서는 소금이 반짝거렸다. 광활한 천막주위에도 지린내가 나고 쓰레기가 쌓여 있기는 마찬가 지였다. 그는 판자를 물로 씻어내고 지저분한 곳을 흙으로 덮어버렸 다. 중요한 정리를 끝낸 그는 세면을 한 다음 식당으로 갔다. 둑 밑에 있는 식당은 조그만 천막 속에 커다란 솥 몇 개가 설치되 어 있을 뿐이었다. 모두 그곳에서 밥과 반찬을 받아 둑에 나란히 앉 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천락무예단 창설 이래 최악의 하극상(下剋上)을 벌인 유청 풍만 보면 경이로운 눈초리로 힐끔힐끔거렸다. 누구나 초죽음 당하던 전통의식을 갑자기 나타난 괴소년(怪少年)이 하룻밤 뚝딱대서 고쳐 놓았기 때문이었다. 납작코가 된 안창구는 맹꽁이 우는 듯한 목소리로 연신 잔소리를 퍼부었다. "킁, 밥을 다 먹었으면 나가서 두들겨라. 우리도 북풍한설(北風寒 雪)과 찜통 더위를 이겨냈으니......." 여기서 두드린다는 말은 북을 친다는 이 바닥 속어(俗語)였다. 즉,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북을 잘 쳐대야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실상 삼복(三伏) 더위와 혹한 속에서 하루종일 커다란 북을 치는 일만 해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염천(炎天) 아래 보름 이상 북을 친 사람이 없 을 정도로 더위를 먹고 쓰러졌는가 하면 눈보라마저 얼어 버릴 듯한 추위를 견디지 못해 동상에 걸려 손발을 절단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 결국 불구가 된 이들은 재주를 발휘할 겨를도 없이 단원 생활을 포 기한 채 떠나고 말았다. 한 마디로 입단 초년생의 하루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오후에는 공연 전까지 오전과 같은 일과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먹밥을 들고 나가 마을을 다니며 북을 쳐댄 후 잠잘 준비를 마치면 이때가 대략 축시(丑時) 무렵으로, 눕는 즉시 골아 떨 어지게 된다. 그렇게 잠드는 것도 불과 한 시진 반 정도일 것이다. 새벽에 제일 먼저 일어나서 하루일과를 시작해야 되기 때문이다. 유청풍은 천락무예단이라고 적힌 어릿광대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새카맣게 때가 낀 대고의 끈을 만져 보았다. '이게 고생의 상징인가?' 그때였다. "단주(團主)님께서 오래요." 열 살이 갓 넘은 여자아이가 한 마디 툭 던지고는 횡 하니 사라졌 다. 유청풍은 천막 맨 안 쪽에 위치한 단주실로 향했다. 단주실은 떠돌이 생활을 해서 그런지 의외로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실내에 놓인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 그리고 한 쪽 구석에 놓여 있는 침상이 기물의 전부였다. 내년에 환갑인 단주는 모발이 온통 하얗게 세고 앙상한 체격에 독 수리처럼 매서운 노인이었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며 부시시 눈을 비볐다. 그의 안색은 덮고 잔 시커먼 홑이불만큼이나 냉기가 풀풀 날 렸다. 유청풍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유청풍이라고 합니다." 단주는 못들은 사람마냥 목침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실내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단원들이 부산히 움직이는 기척과 공연 전 대사 연습하는 소리만 사방에서 들려왔다. 문득 단주의 쌀쌀한 음성이 실내를 덮었다. "원래 가락이 그러냐?" 이 바닥에서 황제나 다름없는 그가 전례를 깨트린 말이었다. 실상 정식 입단한 사람도 단주를 개별 접촉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오직 단주로 만 불리는 것이다. 그런 그가 아직 입단계약도 맺지 않은 햇병아리를 직접 훈계하는 자체가 파격적이었다. 유청풍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알아서 적응하겠습니다." 단주는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특별한 재주도 없으면서 고생할 필요가 있나?"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자가 몇이나 됩니까?" 일순 단주는 찌를 듯한 눈초리로 최후 통첩을 날렸다. "보기는 좋아도 쉬운 게 없어." 유청풍은 대담하게 받아쳤다. "나쁜 버릇을 간단히 고쳤지 않습니까?" 대뜸 단주의 흰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위태로움을 감수하겠다 그 말이지?" 냉정한 그 음성은 설령 불상사가 확대되어 누가 죽던 책임지지 않 겠다는 뜻이었다. 유청풍은 번번이 되묻는 투로 답했다. "단주님은 당연히 모르는 척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일순 단주는 창 끝보다 더 예리한 안광을 쏘아보냈다. 마주친 두 쌍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퉁겨 나왔다. 단주의 눈 초리가 닳고 닳은 천리화통(千里火筒)이라면 유청풍의 눈빛은 절벽을 깨부술 섬광(閃光) 같았다. 단주는 조그만 상자를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탁자 위로 집어 던 졌다. "써." 유청풍은 그 종이를 들여다보며 의자에 앉았다. '입단계약서.......' 이어 붓을 든 그의 손이 입단계약서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붓 끝이 계약서 하단으로 내려갈 즈음 단주가 한 마디 덧붙였다. "사 년이다." 유청풍은 말없이 계약기간을 적어나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단주는 단호히 명을 내렸다. "검무자(劍舞者)를 따라 다녀라." "예." 대답한 유청풍은 내심 놀랐다. 무술을 춤으로 표현하는 가무를 검기무(劍器舞)라 부르는데 이를 맡은 주역이 바로 검무자였다. 따라서 검무자의 조수가 되는 자체가 대단한 승진이었다. 하지만 가무단의 주역이나 조수는 아무나 맡는 것이 아니었다. 검무자는 뛰어난 예술적인 기량을 요하는 배역인 만큼 유연한 동작 과 무술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남다른 표현 감각을 지녀야 한다. 유청풍은 초년생으로서 할 일을 하면서 검무자의 뒤치다꺼리와 함 께 자기 발전을 꾀해야 하므로 그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 이다. 그렇게 십여 년 동안 조수만 하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 단주가 계약기간을 짧게 정한 이유도 유예기간을 부여한 것이었다. 유청풍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 나왔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단주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이한 미소를 흘렸다. '녀석, 독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5] 유청풍은 서둘렀다. "됐어. 여기에다 대고(大鼓)를 싣고 다니며 북을 쳐야지." 검무자의 조수로 임명받은 그는 하루종일 북을 치는 일은 면제되었 다. 하지만 오전과 오후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두 번은 반드시 두드리 고 와야했다. 그리고 나서 검무자가 시키는 일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수레를 사용할 작정이었다. 서안 성내는 아침부터 갑자기 소란스러웠다. 둥다라당당! 둥당당......! 번쩍! 번쩍! "와, 신기하다!" 아마 기백 명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수많은 아이들이 천락무예단의 깃발이 꽂힌 손수레를 좋아라 박수 를 치며 정신없이 따라 다녔다. 어릿광대가 끄는 그 손수레는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마차인 눈부 시게 빛났다. 마차 주위에는 온통 일곱 빛깔 무지개가 서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마차에 부착된 징이 찬란한 햇살을 반사하는 것이었다 . 깨끗하게 닦여진 징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기이함을 자아냈 다. 또한 그 손수레에는 대고가 두 개나 실려 있었다.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굴대에 달린 세 개의 북채가 양쪽의 대고를 저절로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어찌나 웅장한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말을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말이 놀라는 바람에 잠시 내려야만 했다. 심지어 장사하러 나가던 사람, 가게문을 열려던 사람, 타지방 에서 관광 온 사람, 새외의 유색인, 이삼 층에서 내다보는 사람은 물 론이고 순라(巡邏)들까지 현란한 손수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락무예단? 한번 구경가야겠어. 얼쑤......." "어라, 금년에는 선전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넓다고 소문난 서안대로 한쪽 방향이 단숨에 막혀버렸다. 그래도 뭐라고 화를 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요란한 북소 리가 발을 절로 떼어놓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오랜 동안 만두 상자를 끌었던 저력(?)임은 아무도 몰랐다. 유청풍은 오전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검무자 동방노야(東方老爺)를 찾아갔다. 칸막이로 된 동방노야가 사용하는 독방은 무대를 중심으로 단주의 집무실 반대편에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무대 좌측부터 단주실 , 여단원실, 소품실이며 우측 편은 검무자, 창고, 일급 배역들, 남자 단원들이 사용하는 방이 있었다. 비록 판자로 만들었을망정 천락무예단에서 독방을 쓰는 사람은 단 주와 동방노야 둘뿐이었다. 일류주역 동방노야는 늘 분장한 상태로 지내는 칠순의 노인이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안광만은 섬광처럼 빛났으며 중원최고의 검무자 답게 잘 다듬어진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이각(二刻) 후에 연극이 시작되건만 그는 눈을 감고 앉아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시 눈치를 살핀 유청풍은 공손히 자기를 소개했다. "새로 입단한 유청풍입니다. 제가 조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방노야는 묵묵부답이었다. 유청풍 역시 그러려니 여겼다. '오직 성(姓)만 기억하는 사람이라더니.......' 동방노야는 자신이 맡은 역할 외에는 일체 관심이 없으며,어릴 때 충격을 받아 자신의 성씨가 동방이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단원들은 그가 연로한 주역임을 감안해 동방노야라고 부른다는 것 이다. 유청풍은 멋쩍은 나머지 가만히 있기도 뭣하여 실내를 정돈하기 시 작했다. 침상 밑에 널려 있는 신발은 물론이고 옷과 소품 그리고 일 용품에 묻은 먼지를 닦아 침상 옆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깨끗이 타구(唾具)를 씻어 둔 다음 동방노야가 사용할 가면 을 순서대로 탁자에 배열해 두었다. 비로소 동방노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가 보아라." 한 마디로 조수가 필요없으니 그만 두라는 추방이었다. 이때 그의 음성이 고막을 윙 울리는 바람에 유청풍은 깜짝 놀랐다. '윽, 절정고수가 있을 줄이야.' 원개가 들려준 말에 의하면 천락무예단에서 무공을 익힌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서운 고수가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 유청풍은 허리를 펴며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주연의 방이 너무 지저분해요." 그때 동방노야가 눈을 번쩍 떴다. 타는 듯한 안광에 유청풍은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심호 흡을 한 뒤 우회적으로 자신감을 나타냈다. "앞으로는 제가 이곳을 정돈하겠습니다." 동방노야는 냉정히 잘랐다. "방해하지 말아라." 그는 어서 사라지라며 재차 독촉장을 날렸다. 유청풍은 두 손을 모은 채 정중히 사과했다. "아, 미처 몰랐습니다. 연극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실 줄......." 그는 유명한 주역은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며 내심 감탄해 마지 않았다. 하나 그 말은 조금도 물러날 의사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 동방노야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다소 억양을 높였다. "나가서 북이나 쳐라." 이번에는 가만히 있어도 상체가 떨릴 정도로 파향(波響)이 커졌다. 유청풍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방금 마치고 왔습니다." 일순 동방노야는 의아한 눈초리로 흩어보았다. 온 동네를 다니며 북을 쳤으면 어째서 남들처럼 옷이 젖도록 땀을 흘리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통상 한 시진 이상 북을 친 사람은 땀 이 말라 허연 소금기가 옷에 배어야 마땅했다. 한데 지금 유청풍의 옷은 조금 젖었을 뿐이며 얼굴 또한 말끔하여 누구라도 선뜻 믿기 어려웠다. 그는 수레를 미는 시늉을 해 보였다. "북을 싣고 다녔거든요." 순간 동방노야는 유청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상대가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고요한 안광을 뿜어냈다. 하나 그 안광은 상대방 뇌와 폐부를 샅샅이 투과할 것만 같았다. 유청풍은 의욕적이며 자신 있는 태도로 마주 쳐다 보았다. 그의 시 선은 어떤 음지도 말려버리는 태양처럼 반짝였다. 이윽고 동방노야는 소품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것을 무대 뒤에 갖다 놓거라." 그가 일막(一幕)을 진행하는 동안 사용할 소품은 상당한 양이었다. 각종 의류와 신발을 비롯하여 도검류, 가면, 삿갓, 두건 등등 수십 가지가 넘었다. 이것을 주역은 수시로 들락거리며 재빨리 바꾸는 것 이다. 물론 이 막 때는 일부를 소품실로 반납한 다음 그 장면에 맞게 추 가로 준비해야 될 것이다. 유청풍은 대답한 후 소품들을 커다란 보자 기에 싸서 묶었다. "예." 가만히 지켜보던 동방노야가 눈을 매섭게 치켜 떴다. "순서를 알고 하는 거냐?" "아침식사 때 옆 사람이 읽는 대본을 잠깐 보았습니다. 일 막에서 는 여섯 번 바뀌더군요. 도구 위에 의류를 올려놓을 겁니다." 동방노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결국 그가 후계자를 보냈구나. 이십 년을 참더니.......' 그의 뇌리에 수리마제 단궐이 스쳐지나갔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즐독 ㄳ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