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六 章 復讐의 시작
봄기운이 완연한 춘삼월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에 걸맞게 산야는 점점 푸름을 더해 가고 있었다. 이곳 안탕산 기슭에 자리잡은 남궁세가에도 봄기운은 완연히 찾아들었다. 남궁세가의 문주인 남궁린(南宮鱗)은 화려한 실내에 앉아 화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장대한 체구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허리를 굽히게 만드는 무한한 위엄이 쉴새없이 뻗어 나왔다. 지금 화원을 바라보는 두 눈은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이 맑았다. 그 앞에 아들인 남궁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아이와 꼭 혼인을 하겠다고?" 아들의 혼사를 의논하건만 기쁜 음성은 아니다. "예!" 남궁린은 두 눈을 치켜 떴다. 그의 이마에는 내 천(川)자가 그려져 있었다. "네놈의 행실이 강호 술꾼들의 안주거리라는 말은 들었다만 이젠 아비 앞에서도 주정을 하는 게냐?" "소자 취하지 않았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님!" 남궁사는 정색을 하며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남궁린은 깊은 눈빛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돌린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소도를 집어들었다. 무성하게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화목을 향해 다가간 남궁린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렀다. "너는 장차 남궁세가를 이끌어 갈 남궁세가의 후계자다. 다시 생각해라. 서출(庶出)은 안된다." 스슥. 잘려 나가는 꽃가지들. 남궁린은 다듬은 화목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더구나 남궁세가와 천하사세의 역학적인 관계를 감안한다면 이 문제는 좀더 신중하게 고려할 일이 아니겠느냐?" 남궁사가 고개를 쳐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전 그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겠습니다." 남궁린의 미간이 한차례 꿈틀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소도를 탁자에 콱 꽂았다. 소도는 자루까지 탁자 깊숙이 쑤셔 박혀 버렸다. 남궁린의 진노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증거다. "알고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전부였고 그런 널 위해 모든 걸 쌓아 올린 아비임을." 그는 남궁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네가 지금 아비에게 반항하겠다는 것이냐?" 남궁사는 고개를 들어 부친을 바라보았다. 광룡이라 불리던 예전의 눈빛이 아니다. 바다처럼 깊고 고요한 눈빛이었다. "소자를 환락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낸 여잡니다. 그 여인이 있음으로 소생 다시 삶의 목적을 찾았습니다." 남궁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북파무림맹의 맹주 사마덕조는 용 같고 범 같은 인물이다. 결국 그와 동맹을 맺어야 한단 말인가? 이해득실이 빠르게 뇌리에서 계산되었다. '손해볼 건 없는 일이지.' "네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승낙하마!"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만일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면 연해월의 혼사를 이렇게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봉황이 날아들 것을 알면서도 꿩을 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니, 하지만 만일 남궁사마저 놓친다면 자신이 꿈꿔 온 모든 것들은 부운(浮雲)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사마덕조는 결정을 내렸다. "말도 안돼요. 어떻게 제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런 결정을 내리실 수 있죠?" 연해월은 노한 목소리로 사마덕조에게 항변했다. 사마덕조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늘 그렇듯이 책장을 넘기는 손놀림도 무심하기만 했다. "너나 아비로 봐서 손해볼 것이 없는 혼사다." 결혼, 한 사내를 가슴에 품고 그의 체취가 아직도 몸에 남았거늘 아버지는 무엇이 급한지 그녀의 혼사를 서두르고 있었다. "싫습니다." 사마덕조가 보던 책을 느릿하게 덮었다. "빠른 시일 안에 택일을 할 것이니 너도 몸가짐에 각별히 유의하도록 해라." 이미 결정은 내려진 것이었다. 북파무림맹에서 가주의 명령은 곧 법이었다.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명령이었다. 연해월은 물러서지 않았다. 불길이 이는 시선으로 사마덕조를 노려보며 분연히 외쳤다. "그런 결혼은 죽어도 못해요. 전 감정이 없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런 억지를 당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넌 나를 모르는구나!" 지독하게도 무심한 음성. 그랬다. 애초에 부모가 정한 혼사를 거부할 권한이 연해월에게 없었다. 결혼은 그저 후세를 받기 위한 행위였을 뿐, 부부간의 사사로운 정조차 표하기 어려운 것이 사회상이었다. "아버님 역시 저를 모르십니다. 어차피 평범하게 살아갈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열아홉 딸의 치기 어린 딸의 반항에 흔들릴 사마덕조가 아니다. "철없는 것. 하기야 피로 얼룩진 아비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런 말이 나올 리도 없을 테지만." "……!" "어차피 바르고 정대하게 살고자 하지는 않았다. 때론 목적을 위해 짐승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저리 강건하게 버티고 선 부친에게 어떤 말로 마음속의 연인에 대해 설명할 것인가? "아비를 미워하는 건 좋다. 그러려면 먼저 강자가 되어라. 최고의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너를 멸시하고 조롱한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키란 말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멀어졌다. '꿈일 거야.' 연해월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일 거야.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이렇게 갑자기 결정되고 이행되는 이 현실은 분명히 꿈일 거야.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에 아릿하게 어리는 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믿고 싶어요. 난 지금 굉장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어서 나를 보러 와줘요.' 쪼그리고 앉은 공간. 수백만 평에 달하는 이 거대한 북파무림맹의 한 귀퉁이가 연해월에게 보장된 유일한 곳이었다. 휘이잉! 바람이 그녀를 휘감았다. 몸이 둥실 떠올랐다. 꿈속이라 생각하기에 주저 없이 바람에 몸을 맞긴 채 그녀는 허공을 날았다. '와주셨군요.' 고루거각들이 발치 아래를 스쳐 지나고 만발한 꽃과 연못이 있는 아름다운 후원의 팔각정자가 눈앞으로 쏘아져 왔다. 그곳을 향해 다가서면서도 그녀는 현실이라 생각지 않았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내려놓았다. 그리고 들려온 음성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달콤함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요!" 연해월은 눈을 떴다. 남궁사, 그가 반대편 정자의 난간에 서서 깊은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인 남궁린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북파무림맹을 방문한 그는 사마덕조를 만나 청혼을 하고는 연해월을 찾아 온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 차 있었다. '아……!' 절망이 밀려들었으나 피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전하고 싶다. 연해월은 차분한 손길로 흩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마침 뵙고 싶었어요. 가친의 뜻과 제 뜻은 전혀 달라요. 당신과 나는 맺어질 수 없는 인연입니다." 남궁사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연해월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하오니 더 이상 저를 괴롭히는 일은 삼가 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이유를 말해주시오. 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별개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야속한 음성. 남궁사의 얼굴에 우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시작해 볼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거요?" "제가 보기엔 다른 상대를 찾아 시작하시는 게 훨씬 빠를 것 같군요. 그럼." 연해월은 교구를 돌렸다. "한 아이가 있었소." 막 정자의 계단을 내딛으려는 연해월의 뒷덜미로 남궁사의 쓸쓸한 음성이 와 닿았다. 그 음성에는 진득한 고뇌가 묻어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권력과 부, 명예를 가진 집안의 후손이었기에 세상의 모든 축복을 다 지니고 태어난 듯한 그런 아이였소." "……!" "하지만 그 아이는 그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만 했소." 남궁사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옥 같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한 여인을 잡기 위해서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미젖을 떼기가 무섭게 손에 쥐어진 것은 장난감이 아닌 칼과 창 따위들이었으며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엔 사람을 가장 빨리 죽일 수 있는 무예수련에 시달려야만 했던 거요." 정자를 걷는 연해월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띄게 느려짐은 부정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이 엄마의 따뜻한 품에서 자장가를 들으며 자고 있는 시간에 곰팡이로 찌든 무공비급과 밤새도록 씨름을 해야만 했던 그 아이의 고통을 뉘라서 알 수 있었겠소?" 걸음을 멈춤은 남궁사의 음성에 실린 고뇌의 부피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그 아이의 가장 큰 소망은 자유였소.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바람이었소." 남궁사의 얼굴에 우울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소. 세상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혀를 내두르는 희대의 개망나니는 그렇게 만들어졌던 거요." 연해월이 돌아섰다.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와 같이 못난 여인에게 속내를 보이는 저 가련한 사내를 위해서도. 남궁사는 진지한 얼굴로 연해월을 바라보았다. "한심한 놈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좋고 불쌍한 인간으로 봐도 좋소." 남궁사가 연해월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그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붉게 타오르는 그의 사랑이 잡힌 손목을 따라 물밀 듯이 밀려들어 연해월은 한순간 몸을 떨었다. "감정에 지나치게 좌우되셨군요!" "나도 내 일생 중에 이런 꼴로 정(情)을 구걸하게 될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부탁이오. 다시 한 번 고려해 주시오." 연해월은 감히 잡힌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과거를 듣는 순간에 그녀의 혼 역시 과거를 더듬고 있었으니까. 상처받은 사람의 약점, 그녀의 가슴에 서린 연민을 남궁사는 파고든 것이다. * * * 태산의 한 자락에 부경사(府京寺)라는 아담한 절이 자리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이나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그 이유는 이곳 부경사 뒤쪽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거대한 부처님의 입좌상(立座狀)이 양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높이만 해도 무려 십여 장, 입좌상은 매우 장엄한 모습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자신의 소원 한가지는 필히 들어준다는 소문이 무성해 특히 규방의 여인네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싸악싸악! 비질을 하는 소리가 매우 상쾌하게 들리는 아침이다. 오늘도 어린 사미승은 아침 일찍부터 입좌상 앞 공터를 깨끗이 쓸고 있었다. 이곳은 언제나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로 붐비기 때문에 청소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른 아침뿐이다. 사미승은 열심히 빗자루를 움직여 주변을 깨끗이 했다. 그런 연후 사미승은 입좌상의 밑, 촛불을 켤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석대 위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피우다 만 양초나 향 등도 말끔히 수거했다. "에구, 지저분하기도 하지." 그는 희고 조그만 손에 작은 막대를 쥐고 떨어져 있는 촛농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촛농을 걷어내던 사미승은 입좌상을 올려다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부처님, 이 어린 사미에게도 부처님의 대해와 같은 불력을……." 사미승이 말을 멈췄다. 부릅뜬 눈에 보이는 건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이상한 것이었다. 그것은 입좌상의 빙그레 웃음 짓고 있는 입술 근처 절벽에 커다랗게 새겨진 글씨였다. "저게 뭐지?" 사미승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소매로 눈을 쓱 비볐다. 그리고 재차 눈을 동그랗게 뜬 뒤 뚫어질 듯이 글씨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글씨는 틀림없이 그대로 있었다. "큰일났다!" 사미승은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며 대웅전 쪽으로 냅다 줄달음질쳤다. 주지스님에게 어서 빨리 이 사실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반야라 반야밀다……." 무심대사는 대웅전의 불상 앞에 좌정한 채 반야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 손으론 연신 염주를 굴리며 오늘따라 알 수 없이 찾아드는 불안감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어제 저녁엔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서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못했었다. 더욱이 날이 밝아오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전신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인 게야.' 스스로를 질타하며 삼매에 잠기길 얼마. "주… 주지스님!" 다급한 사미승의 외침이 울리며 대웅전 문이 벌컥 열렸다. 사미승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대사는 독경을 멈추고 낮은 음성으로 일갈했다. "이놈아, 부처님께서 놀라시겠다. 불자는 몸과 마음이 항상 잔잔한 수면과 같아야 한다고 누누이 일렀거늘 무슨 일로 이리 호들갑이더냐?" "크… 큰일났습니다! 미륵입좌상에 누군가 이상한 짓을 해 놓았습니다." 사미승은 숨을 헐떡이며 손가락으로 입좌상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무심대사는 천천히 돌아앉았다. "네 녀석의 그 호들갑은 역시 알아줘야겠다. 또 어느 여시주께서 부적을 갖다 붙인 게로구나." 미륵입좌상에는 종종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치성을 드리면서 몰래 부적을 갖다 붙이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그… 그게 아니에요, 누가 입좌상의 입가에 글씨를 써 놨어요." 사미승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주지스님이 야속한 듯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순간 무심대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미륵입좌상의 키는 자그마치 십여 장, 그 미륵입좌상의 입가에 글씨가 써졌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네놈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오늘 물볼기를 맞을 줄 알아라." 무심대사는 대웅전을 나섰다. 그의 뒤를 사미승이 잽싸게 뒤따랐다. "음!" 미륵입좌상 앞에 도착한 무심대사는 침음성을 흘렸다. 사미승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좌상의 입가에는 몇 자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 척살대상 제일호(第一號) 천면성자(千面聖者). 약 세 치 깊이로 단단한 절벽을 꿰뚫고 새겨진 글귀는 살인첩(殺人帖)이었다. "어때요, 주지스님! 제 말이 맞죠?" 사미승은 그것보라는 듯 어깨를 우쭐거렸다. 그러나 무심대사의 귀에는 어린 사미승의 말이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벽에 새겨진 글귀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절정에 달하는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새긴 글이다.' 소름이 돋는다. 저 정도의 내공이면 자신조차 감히 꿈꾸지 못하는 절정의 무공이 아닌가! 글을 새긴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무공이 절정에 이른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정고수가 아니면 바위벽에 세 치 깊이로 글씨를 새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무심대사는 사미승을 돌아보며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절에서 일절 향화객을 받지 않을 것이니 절문을 닫거라!" 무심대사의 돌연한 말에 사미승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그러나 대사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는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다. 다만 미륵입좌상에 누군가 낙서를 해놓았으니 부처님의 불력이 부정을 타서 그러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잘 알았습니다." 사미승은 부리나케 산문으로 내달렸다. 무심대사는 천천히 대웅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열심히 뇌리를 굴렸다. '누굴까? 누가 과연 살인명부를 남겼을까?' 그러나 아무리 뇌리를 굴려 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더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가 여인들이다. 그리고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 글귀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글귀는 분명 누군가 어젯밤에 새겨 놓았음이 분명하다.' 무심대사의 눈에서 한차례 기광(奇光)이 번쩍 스쳐 지났다. '혹시 요사채에 머물고 있는 그 청년이?' 그는 어제아침 이곳을 찾아온 한 청년을 떠올렸다. 나이는 열여덟 정도, 꽃이 시샘할 정도로 여인보다 더 아름답게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행중이라며 이틀만 이곳에서 묵어 가겠노라고 청했다. 마침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요사채에는 요양중인 노인 두 사람을 비롯해 서너 명이 머물고 있던 터라 무심대사는 쾌히 응낙했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청년은 닭 잡을 힘조차 없어 보이는 서생이다. 더구나 금강지력을 펼치려면 내공이 적어도 이갑자 이상은 되어야 남길 수 있질 않는가!' 무심대사는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그 청년이 살객(殺客)이 아닐까 의심을 해보았으나 그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심대사는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와 불상 앞에 좌정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뇌리를 굴려도 확실한 대답은 얻을 수 없었다. 어쩌면 살객은 어젯밤에 이곳을 침입해서 글귀를 남긴 뒤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제부터 내가 불안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인가?' 그는 손에 쥔 염주를 쉬지 않고 굴렸다. 어느새 염주를 굴리는 그의 손에 촉촉한 땀이 배어 나왔다. '안되겠다. 오늘 저녁에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이윽고 무심대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묵상에 잠겼다. 천면성자는 천(千) 개의 얼굴을 가진 자라 해서 붙여진 별호이며 무공 또한 대단히 뛰어난 고수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그의 진정한 진면목을 본 사람은 무림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를 죽이려는 살객이 나타났으니 그는 또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살객은 왜 천면성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밤[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밤하늘엔 오늘따라 짙은 먹장구름이 뒤덮여 있어 별빛 한 점 없었다. 밤은 인간세상의 모든 추한 것들을 감추어 준다. 또한 세상사 사악한 음모 중 태반이 밤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밤은 인간에게 안온함을 느끼게 해주고 편안한 휴식시간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밤은 이렇게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도 또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니……. 이경 무렵, 무심대사는 조용히 선방을 나섰다. 사위는 쥐죽은듯이 고요하고 간간이 풀벌레 소리만 찌르륵거렸다. 간혹 어디선가 배고파 울부짖는 늑대소리는 야색을 더욱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무심대사는 조심스럽게 대웅전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얼마 걷지 않아 그의 눈에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요사채가 보였다. 요사채의 객방에는 이미 등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아마 전부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요사채 앞에서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무심대사는 요사채를 지나쳐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곳 부경사에는 미륵입좌상과 함께 또 하나의 명물이 있었다. 지금 무심대사가 가고 있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대략 삼십여 장 정도 비탈길을 내려온 무심대사는 왼쪽으로 꺾어진 작은 소로(小路)로 접어들었다. 소로는 울창한 수림(樹林) 속으로 나 있었다. 그는 서슴없이 소로를 따라 수림 속으로 향했다. 약 십여 장 정도 수림 속으로 들어가니 탁 트인 넓은 공지가 나타났다. 넓이는 사방 약 오십여 장 정도, 칠흑 같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공지에는 수많은 석탑들이 희끄무레한 모습으로 괴물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석탑림(石塔林). 이곳이 바로 대대로 부경사 주지들의 유골이 안치되어온 탑림이다. 이곳엔 대단히 유명했던 당대(唐代)의 고승인 청허법사(淸虛法師)와 법륜상인(法輪上人)의 유골도 안치가 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많은 석탑 중 그들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석탑이 어느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석탑의 크기나 모양은 그 아래 묻힌 선승의 불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졌다고도 전해진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석탑의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아무튼 이 탑림이 부경사의 또 다른 명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무심대사는 탑림의 입구에서 한차례 사위를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매우 긴장한 듯한 모습인 그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그렇게 주위를 살폈다. 이윽고 그는 안심이 되는지 탑림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약 십여 장 정도 석탑 사이를 걸어 들어간 무심대사는 다시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다시 한 번 청력을 모으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그의 귓가에 들리는 것이라곤 밤벌레의 울음소리뿐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괴물처럼 보이는 거대한 석탑들이었다. 이윽고 그는 적이 안심이 되는지 좌측으로 꺾어들며 십여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는 한 거대한 석탑 앞에 이르러 걸음을 뚝 멈추었다. 모두 팔 층으로 이루어진 석탑이었다. 그는 서슴없이 석탑의 하단부, 즉 석대 밑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기관을 누르자 석대는 굉음을 토하며 한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그긍! 마침내 석대가 밀려나고 그 자리엔 시커멓게 뻥 뚫린 암혈(暗穴)이 나타났다. 무심대사는 빨려들 듯이 재빨리 암혈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암혈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석대는 다시금 굉음을 내며 원상복구 되었다. 무심대사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암로(暗路)를 따라 걸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왠지 모르게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감쌌다. 그는 애써 불안감을 떨치려는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만나려는 자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도 했다. 잠시 후, 그의 눈앞에 지하석실의 입구가 나타났다. 그는 재빠르게 석실 입구에 나 있는 작은 돌출부위를 눌렀다. 요란한 진동음을 내며 석문이 서서히 열렸다. 잠시 후 굉음이 멎고 석실 문이 활짝 열렸다. 무심대사는 두 눈을 빛내며 문이 열린 석실 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니?" 석실 안을 무심코 살피던 무심대사는 그 안에 있는 인물을 확인하는 순간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어서 오시오, 대사!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무심대사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지금 한쪽에 마련된 석대 위에 앉아 말을 건넨 자는 자신이 만나려던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뜻밖에도 요사채에 머물고 있던 그 서생이었다. "시주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시오?" 기절할 듯이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무심대사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천장에 닿은 그의 시선이 물결처럼 출렁였다. "저게 어찌 된 일인가?"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석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한 사내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사내의 벌려진 입 안에는 독모래인 독질려(毒疾 )가 가득 들어 있었고 얼굴은 흙빛이 된 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무심대사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금 벌어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서생은 거꾸로 매달린 사내에게 밥을 퍼 먹이듯 독질려를 퍼 먹였고, 마침내 사내는 질식과 독의 이중고에 시달리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잔인함은 물론이고 치가 떨리는 고문법이었다. 이 연약하고 심성 또한 착해 보이는 서생이 어찌 이렇듯 악랄한 고문을 했다는 말인가? 그 사실이 무심대사를 더욱 전율케 만들었다. 그는 떨리는 가슴으로 불호를 외우며 억눌렀다. "아미타불! 이 시주를 알고 있소? 그와 원한이 있는지요?" "천면성자! 십칠 년 전에 벌어진 혈겁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오!" "아미타불! 그가 죽어야 할 정도로 포악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은 것 같소만!" "소생은 아무나 죽이는 살귀가 아니오. 천면성자, 이자는 죽을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오. 천면성자가 왜 죽었는지 아시오?" "빈승은 모르겠소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숨어사는 이유를 아시오?" "그건……!" 서생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무심대사를 응시하며 물었다. "대사는 천추군림가의 혈겁을 아시오?" 순간 무심대사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거센 충격으로 흠칫거렸다. "아미타불. 모르오이다. 노승은 오직 이곳에서 불심만 닦았기 때문에 세상일에는 문외한이오이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연신 불호를 외었다. 서생은 그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천면성자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천추군림가의 혈겁에 가담했기 때문이오." 순간 무심대사의 동공이 파랑 치듯 흔들렸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생의 말에 대단히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런 무심대사를 서생은 고요하고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무심대사는 사람의 시선이 무섭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비록 살기를 띠지 않은 눈길이었으나 서생의 눈빛을 바라보노라면 마주하기 힘든, 심장이 터질 듯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씨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 죽을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오만." "아미타불! 불도에 몸담고 있는 노승으로선 무어라 말씀드리기가……."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생이 말꼬리를 잘랐다. "천면성자는 죽기 전에 나에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줬소. 물론 알다시피 고문에 못 이겨 실토한 것이지만 말이오." 서생은 무심대사의 안색을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천추군림가의 혈겁에 가담했던 자들 중 또 한 명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오." 무심대사의 안색은 더욱 더 창백해졌다. 마침내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서생이 입을 열기도 전 자신이 먼저 물었다. "그게 누구라 하더이까?" 그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매우 떨려 나왔다. 서생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술 가에 띠었다. "그가 누군지 대사가 더 잘 알고 있질 않소?" "그게 무슨 소리요?" "한때 강북무림(江北武林)을 종횡하며 독보천하(獨步天下)를 구가하던 도룡객(刀龍客), 그 역시 천추군림가의 혈겁에 참여했음은 물론 이곳에 있다고 실토했소이다." 무심대사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안색은 이미 완전히 새하얗게 탈색돼 버렸다. 도룡객, 무심대사가 바로 도룡객의 후신이었던 것이다. 서생은 무심대사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만약 도룡객이 죽음을 두려워해 어쭙잖은 땡초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아마 마루 밑 강아지도 웃을 것이오." 무심대사의 전신이 폭풍을 맞은 듯 세차게 떨렸다. 서생이 마지막으로 한 그 말은 무도를 걷는 무인이 감내하기엔 너무나 치욕적인 언사였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명예를 목숨보다 더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가 비일비재한 것이 바로 무림이 아니던가. "크하하하핫!" 갑자기 무심대사의 입에서 앙천대소가 터져 나왔다. 석실이 무너질 듯 웅웅거렸다. 대단한 내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서생은 그런 무심대사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고개를 젖히며 광소를 터트리던 무심대사는 이윽고 웃음을 뚝 멈추고 서생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부드럽던 고승의 풍모는 온데간데없고 날카로운 표정에 두 눈엔 살기가 번뜩였다. "흐흐흐! 참으로 놀라운 놈이로군. 하지만 네놈은 스스로 죽을 무덤을 찾아들었다." 이 말은 자신이 바로 도룡객임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생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그를 응시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심대사의 가사자락이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불구하고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전신내력을 모두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필시 네놈은 죽은 위지백의 자식놈이 분명하렷다?" 서생은 천천히 석대 위에서 일어섰다. "악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포악해질 수 있으니 귀하의 입이 험하다고 탓하지는 않겠소." 그의 말은 자신이 위지백의 자식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 도룡객의 짐작대로 서생은 바로 위지강이었다. 그가 철천지한의 복수행로에 마침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위지강은 도룡객과 삼 장을 마주하고 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뽑아든 천룡신검이 쥐어져 있었다. "놈! 반반하게 생긴 것이 입심도 매끄럽구나. 하지만 네가 주절대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다." 도룡객이 소맷자락을 떨치자 둥근 철구(鐵毬)가 튀어나와 그의 손에 쥐어졌다. 도룡객은 철구의 한쪽 면을 살짝 눌렀다. 촤앙! 맑은 금속성을 울리며 철구는 한 자 반 정도 길이의 접도( 刀)로 변했다. 그가 공력을 주입하자 접도는 이내 꼿꼿해졌다. 도룡객은 만면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크흐흐흐! 무척 오랜만에 잡아보는군! 너도 십팔 년 만에 피 맛을 보겠구나." 도룡객은 중지로 도신을 쓰다듬으며 음침한 괴소를 발했다. 접도는 도신 전체가 묵광(墨光)으로 번들거리는 예사롭지 않은 병기였다. "흡혈마도(吸血魔刀)! 십대마병(十大魔兵) 중 일좌(一左), 백련한철도 무 베듯 잘라버리고 한번 출수하면 꼭 상대방의 피를 묻혀야 회수된다는 마병이라고 알고 있소!" 위지강은 손에 쥐고 있던 천룡신검에 진력을 주입시켰다. "허나, 흡혈마도가 그대 손에 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소." 눈이 부실 듯 찬란한 백광을 뿜어내는 천룡신검은 진력이 주입되자 은은한 용음(龍音)을 토했다. "처… 천룡신검……?" 도룡객의 두 눈이 한껏 벌어졌다. "검중왕(劍中王)인 천룡신검을 네놈이 지니고 있었단 말이냐?" "그래도 아직 보는 눈은 살아 있구려." 위지강은 씨익 웃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가 도룡객에게는 죽음의 미소처럼 얼음장같이 차갑게 느껴졌다. '천룡신검은 강호칠겁 당시 쌍방간의 막강한 공력이 서로 충돌했을 때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고 믿었는데……!' 그렇다. 그 당시 강호칠겁에 가담했던 무림인들은 천룡신검도 위지백과 함께 사라졌다고 믿고 있었다. '좋지 않다!' 도룡객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안감을 애써 지우려 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없애려고 그는 재빨리 선공을 취했다. "애송이, 목을 내놓아라!" 도룡객의 신형이 위지강을 향해 폭사되면서 흡혈마도가 동시에 묵광을 토했다. 한 줄기 묵광 속에 그의 신형도 묻혀버렸다. 도신합일체(刀身合一體). 바로 자신의 진재실학(眞才實學)인 사왕도법(死王刀法)의 최대절초를 펼친 것이다. "천도파(天刀破)!" 묵광 속에서 일성대갈이 터져 나왔다. 파파파파팟! 묵광이 폭발하며 허공에다 수백 개의 도강을 만들었다. 그리고 도강의 편린들은 이내 위지강을 향해 우박송곳처럼 떨어져 내렸다. 위지강은 도강의 편린들이 자신의 몸 근처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천룡신검을 쳐들었다. "용형뢰!" 위지강은 낭랑한 일성을 발했다. 그가 펼친 초식은 바로 천마대구식 중 제일초였다. 도룡객은 기절초풍할 듯이 놀랐다. "네놈이 천마비록을 연성했단 말이냐?" 쿠콰콰콰쾅! 그러나 그의 음성은 엄청난 폭발음으로 인해 묻혀버릴 수밖에 없었다. 폭발의 여파로 인해 석벽에 균열이 생기고 바닥이 지진을 만난 듯 쩍쩍 갈라졌다. "크아아아악!"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도룡객은 피분수를 쏟아내며 뒤쪽으로 날아가 석벽에 쾅! 처박히고 말았다. 그의 벌려진 입에서도 시뻘건 선혈이 꾸역꾸역 게워져 나왔다. 그 속에는 잘게 부서진 내장 조각들도 들어 있었다. "이…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도룡객은 불신과 경악으로 뒤범벅이 된 눈을 치켜 뜨고 힘겹게 중얼거렸다. 위지강은 천룡신검을 다시 허리에 둘렀다.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오." 이윽고 위지강은 석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도룡객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숨은 이미 경각에 달려 있었다. 위지강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면서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위가의 후예인 위지강, 지옥에 가더라도 기억해 두시오." "위… 지강… 과연 요… 용의 후예!" 도룡객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가르릉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목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사미승은 문밖에서 대웅전 안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어디에도 주지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어딜 가신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지스님이 가실 만한 장소는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주지스님은 절의 경내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불드릴 시간이 되었으니 곧 오시겠지." 사미승은 별 생각 없이 빗자루를 들고 미륵입좌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제는 주지스님의 명으로 향화객을 받지 않은 탓으로 입좌상의 아래쪽 석대 위는 매우 깨끗했다. 사미승은 밤새 내려앉은 석대 위의 먼지를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아무튼 대단한 사……!" 사미승은 어제 아침에 보았던 절벽의 글귀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 떴다. "어… 없어졌어!" 그랬다. 사미승이 재차 확인하려던 그 섬뜩한 살인명부가 감쪽같이 지워지고 없었던 것이다. 사미승은 두 눈을 소맷자락으로 비빈 뒤 다시 한 번 절벽을 살폈다. 그러나 마찬가지. 어찌 된 일인지 지난밤 사이에 글귀가 지워져 버린 것이다. "정말 귀신이 장난을 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하룻밤 사이에 이런 괴변이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사미승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주지스님이 돌아오면 기필코 이 문제를 여쭤보리라 마음먹었다. 이윽고 사미승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주지스님이었던 무심대사가 탑림에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사실을……! * * * 빈가촌(貧家村). 이름 그대로 헐벗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장 하층 계급인 빈민들이 사는 곳이다. 대략 오십여 호가 모여 사는 이 빈가촌은 모두 쓰러질 듯 한 판자촌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가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연명해 가는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팔짱을 낀 채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거적때기 위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따뜻하게 내려 쪼이는 오후의 햇살은 노인을 춘곤증에 빠지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치고 반백의 흐트러진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온 노인의 몰골은 영락없는 주정뱅이 촌로(村老)였다. 노인의 바로 뒤편엔 그의 거처인 듯한 다 쓰러져 가는 대문도 없는 판잣집이 있었다. 말이 집이지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금방 와르르 무너질 것같이 위태롭게 보였다. 더구나 판잣집의 입구는 보통 사람도 허리를 숙이고 출입해야 할 정도로 매우 낮았다. 그런데 매우 희한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졸고 있는 노인의 오른쪽 옆에 세워진 길다란 팻말이었다. ― 천상천하만박무불통지(天上天下萬博無不通知). 팻말에는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이런 광오한 글귀가 써져 있었다. 이 글귀로 보아 노인은 점쟁이였다. 그러나 그의 초라한 행색으로 보아 이곳을 찾는 손님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믿음이 가지 않는 점술가를 누가 찾을 것인가? 사실 노인은 벌써 며칠째 공을 치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래도 노인의 신색은 항상 태평하기만 했다.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어도 온갖 세월의 풍상에 시달려온 그는 마냥 느긋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자신을 찾는 손님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 기대감이 맞아떨어지는 날이었다. 졸고 있는 노인 쪽으로 한 가닥 음영을 드리우며 누군가 팻말 앞으로 다가와 우뚝 멈추어 섰다. 졸고 있던 노인은 이 뜻밖의 손님이 매우 반가운 듯 언제 졸았냐는 듯 반색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어서 오시게,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네."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자네가 지금쯤이면 노부를 찾을 것이라 미리 짐작하고 있었지." 그러나 위지강은 노인의 말이 허풍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 노인을 무엇 때문에 찾아왔단 말인가? 위지강은 노인을 주시하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노인장이 만통자(萬通者)라는 분입니까?" 노인은 클클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클클클, 제대로 찾아왔구먼. 그렇네, 노부가 바로 천상천하에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만통자일세."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만통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는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주절거렸다. "염려 마시게. 내가 즉시 찾아주겠네. 헌데… 찾는 상대에 따라 요금이 차등 적용되네. 찾기가 힘든 사람일수록 아주 거금이 들지." 위지강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금액은 얼마가 되든 상관없습니다." "금액이 얼마 건 상관없어……?" 노인의 주름진 얼굴은 이게 웬 횡재냐는 표정이었고 두 눈은 연신 위지강의 아래위를 훑어 내리며 희번덕거렸다. 노인은 개침을 꿀꺽 삼키며 재빠르게 물었다. "누군가? 자네 같은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찾는 사람이……? 아마도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눈아래로 내려다보는 굉장한 미녀이겠구먼!" 위지강은 품속에서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노인의 눈앞에 척 펼쳐 보였다. ― 척살대상 제삼호(第三號) 육지신마(六指神魔) 태평(太平). 노인의 노구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옆으로 쪽 째져 가늘게 떠진 실눈 깊은 곳에서는 순간적으로 기광이 번쩍 스쳐 지났다. 이것은 매우 짧은 시간 속에 이루어진 변화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위지강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위지강은 노인의 그러한 변화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이자가 어디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위지강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담히 물었다. 노인은 잠시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 위지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뭐라 말할 수 없네. 하지만 이따 이경 무렵에 다시 한 번 나를 찾아주게. 그때 가르쳐주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요금은 그때 가서 후하게 드리도록 하지요." 이윽고 위지강은 노인을 뒤로하고 그곳을 떠나갔다. 멀어지는 위지강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만통자의 눈에서 갑자기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천천히 팔짱을 풀고 허리를 세웠다. 팔짱을 풀고 내려뜨린 오른팔 아래로 앙상한 만통자의 손가락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손가락이 여섯, 육지가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만통자의 오른손 손가락은 분명코 육지였다. 그리고 만통자, 그가 바로 육지신마 태평이었던 것이다. 만통자는 이윽고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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