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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비평
천문원 천문 문학론
- 큰마음과 한마음 시론
전문수(창원대학교 명예교수)
천문이란 이름의 명색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그간 문예 시론들이나 강의에 필자가 마치 선문답 화두 풀이처럼 달고 있었는지를 먼저 밝히고자 한다. 가령 철학자이고 수학자인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던 그 시대 사상계를 경천동지하게 하는 말을 한 것에 티끌만큼이라고 귀 기울여 본다면 이는 너무나 상식적인 이름에 해당할 것이다. 아마 이 이름은 천문학의 이름이 아니냐고 바로 선입견으로 말할 것이다.
이런 어려움에 처지가 곤란할 때가 많았다. 굳이 초두에 제일 먼저 글문을 열게 동기도 이 때문이다. 한글로 표기한 천문을 한자 표기로 바꾸어서 먼저 천문을 주장하는 이유를 아래에 자세히 풀이 하고자 한다.
한글 표기로는 천문이란 1개 단어가 된다. 그러나 이를 한자로 쓰면 동음이의어로 4개의 다른 뜻의 단어가 된다. 이를 어떤 큰마음에 대한 사유의 구조를 위해 풀이해 단계별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단계를 천문(天門)을 들고 싶다. 굳이 하늘 천(天)자의 뜻을 좀스럽게 풀이 안 해도 아마 다 아는 상식일 것이다. 이 세상 천지 만물은 다 어떤 절대 법칙이나 가치가 하늘의 소신이라면 이 세계를 알고자 하는 가장 영특한 인간 존재는 이 만물들 각자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을 두루 살펴보고자 할 것이다. 이 정도로 이 단계 천문을 요약하고자 한다.
다음 제2 단계의 천문(天問)은 문은 열고 들어가는 가면 아마 모르 는 것 천지일 것이다. 아마 이 단계가 문예란 미적 존재론의 어떤 의 식적 질료들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제3 단계의 천문(千聞=天聞)은 깊은 탐구의 존재 세계로 해서 거대한 침묵의 세계를 찾고 듣고 하면서 천의 세계의 핵심 탐 구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마지막 제4 단계는 천문(天文)인데 그간의 사물들에 대한 천문적 사유과정을 구성해서 문장으로 글 문을 열어 펼치는 단계이다. 저간의 상식화된 기본 글문 구성은 기, 승, 전, 결인 4단 구성이란 것 염두에 두면서 사유 구조의 과정을 하나로 묶어 본 것이 바로 천문이론이다. 따라서 이 천문 단계는 앞으로 다시 빛과 그림자란 인간의 문화사는 지구의 밤과 낮의 이론으로 길을 무구하게 열어 갈 다른 큰 영역이다. 빛과 그림자는 밝음과 어둠의 관계가 아니라 일과 기록, 계획과 실천의 거대한 맞물림의 수레바퀴의 역사학이 될 것이다.
이런 총체적 사유 구조를 생각함으로써 천문론은 존재한다는 더 높은 차원의 수학 공리 같은 것을 나름대로 구상한 것이다. 요약하면 천문(天門), 천문(天問), 천문(天聞), 천문(天文)이 문학적 시학 존재론의 철학적 얼개가 된다고 생각했다. 고로 내 시론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산골 우거지만 누구든 그가 사는 철망 문 안에 들어선 사람은 이 천문 단계별로 사유하면서 순간의 순서를 밟아 마지막 그 집의 새로운 삶의 천문 문장 하나를 읽어내는 것이 바로 글문 열기고 마음 문 열기고 삶의 문 열기 아니냐고 생각했다.
특히 시학은 구체적 특수성의 존재 미학이다. 어떤 선입견도 없이 그간 누구도 보지 못한 있는 대로의 사물을 보는 미세한 현미경 의 신비한 세계 미학이다. 기존 관습적 언어로는 감히 붙잡지 못하 는 언어 회화이다.
그러나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처럼 천지의 절대 법칙과 가치 세계 안에서 인간은 어떤 창조적 사유를 발견해서 읽어내는 것이 본질 이라고 보았다. 신은 없다고 보는 것보다 있다고 보는 편이 이 세계 를 아는 데 필요하다면 그간 누구나 매우 편리하게 대화해 온 천자 (天字)를 특별하게 아는 것 없으면서 굳이 버릴 이유가 없다고 본다. 진리란 이치를 추구하는 과정을 말할 뿐이다. 만일 진리가 다 밝혀지면 우주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인간이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없으면 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용할 필요가 없는 우주에 무슨 생명체가 왜 살겠는가.
천문이란 천문학이 아니고 모든 천지 만물에서 하늘 뜻을 알아서 하늘의 뜻처럼 넓고 큰마음인 천심, 이런 것 믿어서 조금도 손해 볼 일 없는 끈질긴 한마음을 토대로 사물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어쩌면 아주 쉬운 문학적 시론의 존재 방식이라고 공리로 보고자 한다. 작은 시골집 한 채도 집도 도시의 화려한 빌딩들처럼 밝은 큰마음의 서원(誓願) 소리가 읊어지는 문원(文園)이다.
1. 천문 존재 방식
문학은 사물과의 존재론이 지극히 특수한 방식으로 존재가치를 갖고 무한의 경지들을 저 큰마음의 공존과 공유 그리고 평등과 평화의 자유를 구체화는 차원의 미학 구현이다. 문학적 존재 방식은 모든 다른 존재 방식과 우선 달라야 가치가 있다. 홀로 현재하는 사물은 그것이 연계나 관계되는 방식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를 얻는 생태가 아니고는 그야말로 무지의 세계 존재다. 가질 수 있는 시공은 다 무한하기에 그 가능성의 개연은 무한하지만 모든 문학형식을 다 구현시킬 수 있는 미지의 질료에 불과하다. 이론적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는 논리라는 뜻이다. 만유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인간이 살기 위해 모든 이론을 세울 수 있는 존재란 것이다. 이론적 사유를 못하면 하등 동물이다.
그래서 문학은 사물 대상과 대등한 입장에서 여러 연기적 여러 조건 속에서 왜곡돼 있거나 닫혀 있는 것들에 대한 특수한 대화의 존재치를 문학적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시학이다. 어떤 기존 관념으로 존재를 이미 상식화된 것으로 재구성해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깊은 새로운 인식의 놀라운 즐거움의 미학이 밝혀져야 쾌락인 세계이다.
인간과 대등한 입장에서 모든 존재와 마치 어리석은 어린아이처럼 제 욕심 안 부리고 공생하는 천진한 천심의 대화가 그래서 필요하다. 이미 상징계로 들어선 길들어진 어른스러움은 마치 잘 만든 도구 조작이나 제작하는 것이라 그 존재 확인 과정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언제나 어리석은 순진한 발견으로 베껴내서 보여주는 일종의 새로운 제시요 제언의 입장이 문학이다. 저 공자의 술이부작의 도와 같 은 윤리적 태도의 존재론적 접근이 문학이라고 본다. 이게 바로 문학의 휴머니즘적 기본이라 본다.
모든 이 세상 존재는 진리가 아닌 것을 존재로 갖지는 않는다. 어쩌면 모든 사물은 이미 다 이 진리의 한 일종의 비유들이라 본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결코 어떤 존재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 세계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물도 결정된 실체를 가질 수 없고 비유적 모방 그 자체일 뿐이다. 삶이란 이래야 삶이다. 죽음은 삶을 완성하고 곧바로 이데아로 돌아는 종말이 되는 것이라 보면 된다. 모두가 나를 다 버려 이데아인 열반에 들어 부처나 예수가 되는 날은 지구의 종말이다. 무아란 자기 욕심 생각에 집착하는 그가 무아지만 진아는 존재한다. 지금 살아 숨 쉬는 그 자체 생명인 천심의 공유인 진아는 유아이다.
인생은 잠시의 순간적 특수 조건적 비유의 현상학적 연계 존재일 뿐이다. 어디에 고정된 나란 실체는 없다. 주어가 아닌 동사적 존재의 진행되는 현존이고 실존이다. 그렇다고 요즈음 양자 물리의 세계 처럼 어떤 절대자의 의도적 시뮬레이션으로만 보는 것은, 아직 아닌 현상학적 실존적 현존재의 비유물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실체가 증명되지 않은 매 순간마다의 유사한 비유물인 한 별종일 뿐이기는 하다. 정신을 따로 가진 존재의 숙명이다. 이런 개체의 삶이 한순간일지라도 그게 사는 실질적 실제가 실체를 비유한다고 할 수는 있다. 신, 이데아, 실체란 이념적 용어가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개별자가 다 절로 주인이 되는 존재이다. 어떤 관계적 조건에 있느냐에 따라 내 존재가 변하는 순간의 비유일 뿐인 실제는 언제나 그 순간이 개별자에게는 자기만의 주체로 가장 실체에 가까운 존재를 누린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고정된 본질이나 실체를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오늘에 와서는 아예 우주 세계, 인간 세계는 누구의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는 생각까지 하며 가상세계인 시뮬라크르를 받아들이고 있다. 메타버스의 세계로 들어서면 경계까지도 메타버스 경계가 새롭게 실현된다고 한다. 존재가 본래 그 본질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변화는 끝이 없다.
특히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문학은 언어가 곧 사물처럼 대상이 되 는 실제의 여러 방식이라 본다. 모든 의미는 언어가 새롭게 변하는 것과 같다. 어떤 언어도 고정된 본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술을 먹는다고 하는 말을 술이 사람은 먹는다고 하면 먹는다는 말의 뜻은 문맥의 영향으로 전혀 의미가 달라진다. 말이 날카로우면 그 말은 칼이 된다는 것 등 한 언어가 관계하는 타자와의 조건에서 사물 대상이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 언어이다. 사물들과 똑같은 것이 언어이다.
잘 디자인해서 깎아 먹는 과일 같은 한 언어의 진짜 맛은 계속 새롭게 미끄러져야 그 끝을 볼 수 없는 묘한 언어기술 세계가 되고 그래야 예술이다. 차원 높은 수준의 말재주 깎아 먹기 놀이가 언어예 술이다. 농담이 진담이 되는 세계이다. 감각 질료들을 언어로 잘 부리는 기술이 재미와 지혜로움 등은 새로운 깨우침을 주는 쾌락의 예 술이다.
이 시대는 미증유의 종말적 현상의 복잡성 때문에 일방적인 인간 개인의 감정 팔기는 이제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다. 타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실제가 전달되는 존재 시공간이 되었다. 야성적인 일 방적 즉석 말 깎아 먹는 방식이 아닌 정중한 사물과의 심도 있는 고심의 대화 외는 길이 없다. 즉 현대 후기의 세계 미학은 종래의 문학적 감정 함수로는 어느 한점도 방정식을 못 만든다고 보자. 기존 언어 관습으로는 요즘 새로운 깊은 인식의 시에 접근할 수가 없다 난해한 시가 아니라 무지해서 못 읽어내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기막힌 세계에 산다.
진리는 가리키는 손가락의 기술에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인데 제대로 된 손가락질 기술을 안 배우고는 구름 속 달 같은 존재를 가리키기는 불가능하다. 이미 이 세상은 사물 대상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 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로 이런 관계 변화로 생기는 현상의 시적 신비에서 시의 맛과 더불어 자신 삶의 신비도 더 폭넓게 즐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시를 언어로 쓰는 것은 내 감정을 직설로 털어 내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질을 잘 건사하는 형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문학의 언어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다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질을 대신 하는 도구들이다.
작품 속의 언어들 하나 하나 무엇을 가리키는 손가락질들이다. 어떤 내용을 밝혀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숨은 표정을 알맞게 잡은 언어로 표현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진리나 도는 우리 언어로 설명하면 달아나버리는 불립 문자 세계이다. 아무리 중언부언해도 구차스럽기만 하다. 손가락질 언어라야 그 맛을 스스로 알아 놀라는 쾌락의 문학 언어가 된다. 결국 넌지시 제언하고 제시하는 기술이 시학이다. 이런저런 말들 재료를 강제로 끌어다 푸짐해도 속빈 강정이 시어는 아니다. 만담쟁이는 될 것이다. 시어의 손가락질 방식들을 사물들에서 받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 인간 감각으로 이내 느껴 알 수 있는 형상만을 보여주기에 손가락질 그 자체인 언어 중 가장 뜻깊은 불립 문자의 가장 실속 있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리 고 사물은 바로 신비 그 자체인 우주적 존재잡기이다. 선시의 화두 같은 것이다. 이 세상 삼천대천 세계가 다 신비의 세계이다. 그래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시어의 정도이다. 특히 이 시대는 이런 문학의 존재 방식에 대해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2. 천문론과 자유 가치
벽돌 담치고 가시철망 얹어 감옥 만들던 세상이 이제 변했다, 이제 담치는 대신 천문 울타리를 치고 시인은 글의 수명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필자는 저렴한 산골 허름한 가옥 한 채 구해서 누구나 훤히 들여다보이는 철망문 두 짝을 상징적으로 설치하고는 항상 열어 두고 산다. 집 마당 둘레는 누구에게도 낯 안 가리는 꽃나무 들을 철망 대신 띄어쓰기 해 두었다.
그 대신 사람형국을 한 글월 문자를 철제 상징물로 만들어 출입문 기둥과 나란히 설치하고 천문원이라 거창한 이름 감히 당당히 붙여 주었다. 영락없는 돈키호테의 말 로시난테가 돼 있다. 그러고는 서편의 정중앙 마당 끝에는 유리문 세 짝을 설치해두었다. 천문이 실용 가능한 문처럼 속여 놓았다. 아마 전국 어디도 이런 현대판 세르반테스 짓을 알고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먼 서산 봉우리와 푸른 하늘을 자유로 여닫는 천문 열기 놀이를 풍 자적으로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계절들도 여닫고 천지 사물들의 천 심도 드나들기를 기원했다.
이미 앞글에서 밝힌 바대로 한글 ‘천문’의 이름을 한자로 풀면 4개 문이 되는데, 천문 1(天門), 천문 2 (天問), 천문 3(天聞) 그리고 마지막 전체를 문장화한 천문 4(天文) 다 상징됐으면 한 것이다. 천문이란 한글 한 단어가 중국 한자 천문 4개를 품으니 나는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한 단어의 위력을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본래 얼치기 기사 돈키호테처럼 얼치기 문인의 이런 짓 하는 보상심리인 셈인데, 이 세상 한살이가 바로 이런 내 삶임을 천신께 사죄드리는 제의(祭儀)라 봐주면 좋겠다.
요즈음 근사체험에 대한 문제가 자주 논의되는데 우리는 평상시에도 어디에 한 정신 꽂히면 몰입으로 생사체험들도 생전에 많이 한다고 본다. 체외 이탈 경험이나 어두운 곳에서 밝은 빛 체험, 어떤 특수 환경에서의 평온한 체험, 그리고 과거의 허상 체험 같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 천신에 대한 체험도 이런 식으로는 할 수 있다고 본다. 한 인간의 존재가 어디까지의 자기 진아를 찾을 수 있는지의 문제는 문예 시학 심리 현상이라고도 보고 싶다. 신비한 영혼의 획득 같은 열망이 문학작품에는 깔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3. 천심 문제
본래 인문학은 물리적 천체들의 천심을 바탕으로 하기에 굳이 천문론이라 속내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천체학과 구별한 개념용어가 인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문학은 문심(文心)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심전(心田) 경작 행위이다. 그래서 이를 보다 정교하게 이해하자면 문심을 천심과 인심을 합해 폭넓은 견해와 또 구체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자면 인간만이 인문학을 하고, 인간만이 문학을 하고, 인간만이 심전 경작 작업을 하는 존재로서는 이 거창한 문제를 그 근원에서부터 사유하는 체계를 새롭게 다루는 한 방편을 반드시 시도해야 한다.
어쩌면 문심은 천심이란 개념 하나가 다 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심은 천지만물의 천심이란 거대한 그릇 안에서 인심을 경작하는 심전 경작이니 천심의 존재부터 면밀하게 도출돼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문학 천문론을 입론하려니 천체학의 천문학 용어 충돌이 아쉬워서 서두에 일단은 미리 부연하면서 기본 개념을 확립해 두고 자 하였었는데 아무래도 좀 미심쩍해 중언부언한다.
문학적 사유의 구조를 천지만물의 천심을 가장 근본으로 보는 것이 전제된다. 이 우주 현상계의 실제는 천심이라는 우주 본심을 구체적으로 실현된 사물(事와 物)의 존재물들이다. 존재란 우선 시간 (事)과 공간(物)을 동체로 하는 사물들의 힘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진행형 동사이다. 어떤 사물도 명사적 실체성의 고정 본질을 존재로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존재자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속성으로써의 존재를 모든 사물 행간에서 이루어낼 존재라는 별명일 뿐 이다. 현 세계 현상의 모든 존재는 어떤 형태든 현실 의미(생명)를 구현하는 일정의 존재 형식이나 속성을 구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뭇잎 하나도 인과적 조건이나 일정 원리의 연계로 존재를 갖지만 한 순간의 진행형이다.
이런 핵심에는 우주 본심이란 천심이 모든 사물 속에 본질로 있다 는 가정일 수 있다. 타자를 방해하지 않는 모든 가치의 동일에 대한 순수성이다. 따라서 천심은 어디에도 작동되는 힘을 가지는 존재이 다. 이 정도는 이미 상식이 된 오랜 삶의 기본이 돼 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려면 모든 동식물은 움직이지 않는 부분과 움직이는 부분이 분리돼 있지 않고 하나의 뜻으로 협력하는 관계조건으로 조성돼 야 한다. 언제나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능력으로만 대기 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동양에서는 격물치지라는 한 단어가 천지 이치를 웅변해 왔다. 불교의 연생연멸이 존재론이라면 기독교의 신성 창조론도 신묘한 이치에 의한다는 측면에서는 다 같은 진리이다. 허공의 진공묘유나 전지전능한 신의 신비한 힘이나 다 불립문자라는 거나 술이부작이 다 같은 이치이다.
문학 천문론은 이런 천심에 근거해서 문심은 특별히 심전이란 곳에서 경작되는 창조 작품이라야 인간 형식을 갖추는 미학 탄생이라 본다. 문학작품도 다 신묘한 존재론이다. 따라서 위대한 문학작품은 실로 천문의 반열에 드는 것이다. 하늘이 이미 써 놓은 것을 겸손하게 읽어내는 천심 읽기가 바로 문심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의 발견은 가히 천문에 이르는 무한한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영원한 아바타라면 인심인 문심은 역시 진공묘유나 신의 천혜를 지혜롭게 잘 부릴 줄 아는 형상을 가진 위대한 아바타 존재이다. 실은 신을 만들어 모실 줄 아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천지 이치가 다 신의 법이라면 이치를 발견한 사람은 역시 신의 반열이다.
꽃을 알려면 내가 꽃이 돼야 안다. 내가 인식 못하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끝없는 이 인식의 발전으로 발견된 이치로 이 세상은 정체를 이루어 실체에 무한히 접근한다. 그래서 인류의 멸망론은 바로 우주의 멸망론이다.
이런 입론으로는 현상의 모든 사물은 인간에게는 대자적일 뿐이다. 인간을 빼버린 즉자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의 주체적 의식에 의존해야 하기 에 반드시 의지란 지향성을 갖는 것이 존재 지향성이고 실존이다. 이런 존재는 끝없이 세계의 형평이라는 흐름에 따라 머무름 없이 흐르는 순간적인 소멸과 생성의 법칙만이 있는 참으로 더 신비한 미덕이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것은 인간 생사에서 당연한 필연이다. 생사란 언제나 한순간의 관계이다. 한순간도 쉬지 않는 자족적 소멸 법칙이 역으로는 생성법칙이다. 사라지지 않는 생성법칙은 없다. 생사 는 상생 그 자체이다.
4. 천문의 시학적 열쇠
필자의 천문에 대한 문학적 이론화(理論化)와 구체적 기능적 열쇠 에 대한 관심은 좀 오래전부터였다. 1960년 경북 김천의 흑맥문학회(정완영, 홍성문, 윤사섭 등)에 가담하면서 시문학 장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정완영이 1960년 부산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었고 홍성문이 전국 대학생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 는 등 김천 황악산 하의 작은 흑맥문학 동인들은 매우 정겨웠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서 군복무 미필자로 그해 8월 강제 입대하게 되어 이 흑맥문학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후 1964년 1월 경향신문 신춘문예 동시가 당선(조지훈, 박목월 심사)되어 지역 한국문인협 지부에 가입하고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은 다 자기를 자신 이 만들어 나온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나를 휩싸고 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교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 어느 날 그야말로 멍때리기 산 생사체험 같은 상태에서 텅 빈 운동장을 보았다. 아이들로 북적거릴 때는 맨 밑바닥에 가라앉았다가 오후 아이들이 다 하교하고 나면 교실 내 책상까지 운동장이 붕 떠 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때 사물의 진짜 존재란 상대적 관계로 존재가 실현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운동장이 원체 넓어서 1층 밖에 없는 교실 창가면 어디서고 운동장이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는 원리도 신기했다. 운동장 따로 교실 따로가 아 니었다. 그때 경향신문 당선작이 「빈 운동장」이었다.
각설하고 모든 생명체는 어느 것도 다 누가 만들어서 이 세상에 나 온 것이니 인간이 함부로 어찌할 수 없는 천지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지배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글을 쓴 것은 다 세상에 대한 것뿐인데 내가 무엇을 만들어 글을 쓰는 문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천심이 이미 다 써 놓은 것을 부분부분 잘 비집어서 짜깁기하는 일이라야 오래 쓸 것도 많으니 우선 존재하는 있는 대로 냉정하게 잘 베껴 쓰기 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 후 오랜 세월 후 비로소 천문이라는 이름을 생각했고 천문학이란 말이 먼저 있어서 이게 방해가 되어 온갖 책을 뒤져 도대체 누가 천문학이라고 이름 지어 쓴 것인지 캐보았었다. 본래 기상학이 맞았는데 조선 후기 어느 분이 천문학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많이 혼자 원망도 했었다.
2014년 5월 첫 시집 『천문』과 2015년 7월 동시집 『천심』을 문단에 얼굴 내민지 50여 년 만에 두 권의 작품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간 《현대문학》에 평론이 첨료 되면서 늦게 대학강단에 서게 되었고, 아직 낮은 짜깁기 실력이라서 가르치기보다 자신의 공부에 더 매달리다 보니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 석사를 거쳐 1970년부터 대학 강사로 나서면서 관심을 둔 것이 반풍수 집안 망한다고 철학의 존재론에 혼자 푹 빠져 있었다. 천방지축 닥치는 대로 이게 무엇인가를 혼자 질문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졌는데 다시 철학과에 입문할 수도 없어 서 순전히 혼자 이 책 저 책을 뒤지다 보니 되는 게 없었다.
그후 계속 철학의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빠졌는데 대학 강의를 할 때마다 존재는 본래 없다고 혼자 마구 열을 올렸었다. 그후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이론을 만나면서 속으로는 그간의 내 생각에 우쭐해 하기도 했다가 너무 모른 것이 많아서 당황도 했지만 내 본래의 사유 근간은 지킬 수 있었다.
한편 불교철학에 관심을 두면서 무아 문제는 참 신선한 세계이었다. 다만 플라톤의 이데아를 이해하는 노력이 비교적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요즈음은 굳이 현대철학이라고 해서 이를 배척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데아를 누가 본 사람 없듯이 모른다는 것을, 인간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문학적 시학은 이런 짓 안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미 열린 신비스러운 문을 감히 인간이 닫아야 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본다. 신을 본 사람이 없다고 신이 없다고 할 증거는 어디 있느냐는 물음이다. 사람이란 말도 사람을 본 사람은 없다. 특수한 개인은 볼 수 있지만 인종을 분류하는 사람은 어쩌면 신비한 영역이다. 우리에게는 이데아라는 말처럼 모르는 말 천지다. 예쁘다란 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행복을 본 사람도 없다 등 다 헛소리하는 것 너무 많은데 무슨 존재란 존재가 있다는 것인가? 그이는 제자신이 안 만들었기에 그이도 모르고 산다. 남의 몸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서 어머니께서 네 몸이라고 알려주어서 내 몸이라 알고 있을 뿐 누구 것인지 요즘 이론에서는 더 깜깜해져 모른다.
인간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우선 인간은 여러 감각기관이 있고 여기다가 두뇌는 의식을 갖고 있다. 이 의식이나 감각기관은 바로 이 게 해결의 열쇠들이다. 사물의 내부를 알려면 열어서 이 의식을 통해 사물의 안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이들 감각 기관이 다 열쇠 작용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다행히 이 최우수 의식의 열쇠를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이것들이 다시 도구를 만든 게 실용할 수 있는 열쇠들이다. 그러면 이 열쇠 도구들 중 인간이 안 가진 도구는 무엇인지 챙겨볼 수 있다. 모르는 것 말고는 인간 삶의 도구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가령 인간이 만든 이 도구들 중 제일 먼저 만든 도구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아마 말이이라는 귀의 소리 도구일 것이고 보는 눈의 도구들 등 주어진 감각기관일 것인데 가장 인위적인 도구는 말이란 상호 인지 기호들일 것이다. 이런 도구들을 만들 때 필요할 때만 열고 불필요 할 때는 닫아 버리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한 번도 안 열어본 것은 그에 맞는 열쇠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어떤 것도 열기만 하는 열쇠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만일 강제로 열었다가 사물이 다쳐 죽어 없어질 수 있기에 물리적이 아닌 마음의 열쇠가 마련돼야 하는데 그게 천문 열기 열쇠이다.
사물은 사실 그 본질이 다 천문이다. 어디서나 언제나 문에 자물 통을 달고 있는 것일 뿐 누구에게나 열쇠를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 다. 들어 오고 싶은 목적이 수립되면 사물 간 서로가 이해되면 다 상호 허용된 것이다. 사물이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고자 하는 사람의 가치는 무한으로 열어 놓았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사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대의 제1호 도구가 목적이라는 수단의 의지가 곧 도구이다. 그 후 방법과 형식을 달리 무수히 사유 도구는 구상되고 개발돼야 한다. 물리적 도구만 말고 한없는 정신적 관념과 개념의 열쇠 도구가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개 발되어야 한다.
문제해결력이 있는 이론과 사유는 다 사물의 열쇠다. 사물들은 언제나 자물통을 달고 있다. 즉 잠가둘 것만 열쇠를 만들었다. 그 외 는 누구나 열도록 문만 만들어 놓고 서로 드나들라 한 것이 천심의 순수성이고 천리이다.
그래서 열쇠는 인간의 개인 욕심을 표현하는 속셈의 음흉한 용어가 될 수 있다. 고통을 숨기고 창조란 화려한 옷을 입힌 열쇠이다. 따라서 열쇠는 칼과 구별된다. 열쇠로는 닫힌 것을 열기만 하는 것이 본질이다. 닫힌 것을 그저 열기이다. 문만 당기면 된다. 문제는 열었는데 왜 열었는지를 잘 가려야 한다. 서로 허락해서 열어야 하는 협화가 필요하다. 신이 준 생명체 존재의 선물이다. 나의 외로움을 안 열어 준다는 것은 그래서 핑계이다. 자기가 안 열어주고 있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이런 잘못을 아는 것이 본질이고 담당해야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이기심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다. 자기 잘못을 아는 게 부끄러움이다. 감사와 용서가 부끄러움을 해결한다. 그래야 잠겨있는 것 을 열 때 열쇠(필요) 짓을 한다.
도장 나무는 이미 도장을 파도 좋다고 허락한 우호적인 친구요 협력자이다. 그래서 파이는 것이다. 그러나 돌은 허락해도 못 파이 는 것이 있다. 그러나 닫혀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도구인 열쇠 를 찾으면 된다. 이 세상은 다 서로 문 열어 놓았다. 이걸 알면 존 재를 안다.
나의 의식 밖의 존재들은 즉자적 존재든 대자적 존재든 다 구족 돼 있어서 내 의식으로 열어야 내가 실존하고 상대도 실존 한다. 그 런데 인간만은 이 대자적 존재에서 자신을 타자화 하는 자에 대한 빼앗김 때문에 늘 불안하다. 존재가 훔쳐 가기를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의식의 무(無)가 대자적일 때는 비로소 유(有)의 존재 가 되지만 암흑이 될 수도 있다. 존재를 잃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 대상들의 문을 잘 열 것이냐인데 이 세상 사물 대상들의 문은 다행히 본래 천문(天門)을 달고 있다. 사욕의 문도 그래서 닫고 있으면 안 된다.
모든 인간 의식의 대상들은 인간을 포함해서 천리(天理)에 의해 생겼기에 인간도 인간 밖의 세상 대상이 돼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 대상을 무수하게 소유해야 하는 힘과 필요를 통해서 삶을 누려야 하기에 반드시 사물의 문을 열어 의미화할 때는 윤리적 책임을 가치를 획득해야 한다.
모든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가진 닫힌 존재이다. 그래서 무엇을 인간의 소유 대상으로 할 것이냐인데 이때마다 필요한 도구 즉 열 수 있는 단단한 쇠붙이가 무엇이냐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우선 이론적으로는 필요한 요소라야 열쇠가 된다는 전제를 해 볼 수 있다. 가령 소나무의 문을 열려고 할 때 내가 필요한 것이 땔감이면 이 땔감의 연소성을 열쇠로 해서 문을 두드리는 방식과 같은 것이 열기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필요에 적응한 한 방식이 기 준이 된다는 것이다. 도장 하나 파는데 여러 종류의 열쇠 도구가 필 요한 것과 같다. 열어 놓은 사물이 다 천문이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대로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이치에 맞은 열쇠라야 한다.
삶에 대해 지각하고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방법이 곧 열기가 되는 원리이다. 푸른 청솔가지의 인내와 지조를 구하기 위해서 눈에 덮힌 소나무를 찾아야 하는 기법이다. 이런 것은 가히 천리의 빛과 같은 눈이다. 그래서 어떤 열쇠는 빛일 수가 있다. 빛을 못 발견하면 도구가 따라갈 문이 없다.
열쇠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것이 우선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혜안이 필요하다.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니 이 최초의 여는 열쇠는 무엇인가를 먼저 탐구해 내야 한다.그래서 그 작업은 오감을 통한 정서적 정념의 양상들을 수용하고, 나아가 지적으로 인식할 자산을 찾고, 그 다음은 이를 기대어 어떤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의지를 결 정해야 한다면 그에 따른 주제 의식에 따라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최종은 이 모든 소요 자료들을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어떤 이성적 판단을 통한 관념화나 개념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구체적으로 이 문을 여는 행동 형식이나 양식이 무 엇이냐는 것이다. 더 쉽게는 인간이 가진 정신적 도구 형식은 무엇이 있느냐는 물음도 된다. 아마 그 도구는 인간만이 가진 열쇠일 것 이다. 잠긴 것을 여는 인간의 능력은 열쇠 만드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열쇠 개념까지를 인식 할 수 있는 것은 그 첫걸음이 일단은 성공이고 지혜에 이른 것이 된다.
이제는 이 열쇠의 핵심 개념인 열쇠의 성격과 이에 맞는 열쇠의 하위 종인 열쇠 종류를 분류해 내는 탐구를 하면 대로가 열린다고 하겠다. 물론 열쇠란 개념이 특수 열쇠를 지칭하지 않는 지는 기구라 는 언어 그 자체이기에 말로 만든 열쇠 종류는 무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당연히 열쇠 종류는 사물의 종류에 따라 그에 맞는 열쇠가 돼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존재들을 지배하는 원소와 원자격인 것들을 흔히 지수화풍의 4요소를 알고 있다. 이를 일차 열쇠로 본다면 무엇인가 더 적합한 열쇠를 마련할 수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이를 기준으로 열쇠 종류를 예상해 본다.
1. 땅 열쇠. 2. 물 열쇠. 3.불 열쇠 4. 바람(공기,허공 하늘)열쇠. 이렇게 아종 개념을 잡았다면 이에 따른 그 아종들을 다시 하위 분 류할 수 있을 것이다. 가히 무한정이다. 문화 전반이 될 수 있을 거 라는 예상이 된다.
세상의 존재 자체가 이렇다. 이미 열쇠가 되는 것이 너무 많이 있었는데 미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된다.
땅 열쇠는 땅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열쇠일 터이니 열쇠 수준을 잘 잡아야 할 것이다. 단순한 물질적 지적 수준의 땅에 대한 이해는 실용적 이해 중심일 것이고 보다 고차원적인 우주 전반에 관련된 경우는 물론이고 과학, 철학, 미학 등 다양한 열쇠를 찾아야 할 것이니 매우 어려운 문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땅 파는 열 라는 수준에서 만을 생각해 볼 때는 괭이, 호미, 포클레인 등 땅의 속과 성질을 아는 초급 열쇠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들이 다 열쇠 였구나 말하는 순간 잠시 모든 것이 다 열쇠라는데 놀랄 것이다. 이게 바로 기존 관념 깨부수기다. 이런 것을 낯설게하 기라고도 한다. 신비하다, 처음 아는 신선함이다. 이게 천문론적 문 학 존재 인식이다.
그러나 문학이 열고자 하는 열쇠 전체는 여러 차원의 것이다. 단순 한 낱말 하나 문제가 아니라 이로 인한 사유 패턴에 획기적 변화가 오는 큰 문제가 야기 된다는 점이다. 호미가 잡초 캐는 열쇠라면 말 이 안 되는가? 칼을 벼르면 그 기능을 넓혀서 이것도 열쇠가 안 될 수가 없다. 말도 잘 벼르면 칼이 되어 내가 베이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 어떤 존재도 열쇠가 안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사물의 현 실존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존재의 문은 천문이기에 아마 열 수 있을 것이다. 천문은 본래 다 열려 있다고 본다. 바위 속도 열어서 금도 캐내는데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가속도의 여는 시대이다. 따라서 열쇠도 많다.
가령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열쇠로 했을 때는 땅의 어떤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될까를 질문받게 될 것이다. 아마 아주 쉽게 거친 땅속의 붉은 디자이너의 영혼을 보는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형식의 열쇠 만들기면 무한일 수도 있다. 땅의 타 존재와의 존재 문제를 다 다룰 열쇠들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할 것이다. 소나무를 열쇠로 한동안의 땅의 이해, 대나무을 통한 이해나 해석, 새들을 열쇠로 한 해석들 등 아마 우리 인류가 개발한 열쇠를 누가 다 열거할 수 없다. 가령 사과는 땅의 맛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의식 작용까지 간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다 존재의 열쇠들일 뿐이다. 저 이데아나 이성이나 절대정신이나 실존철학이나 차이 이론의 시뮬라크르나 다 열쇠의 일종일 뿐 결과는 없고 계속 열쇠들만이 철학 하는 셈이다. 포 스트모더니즘도 다 소비사회의 열쇠일 뿐이다. 인공 지능도 다 기존 기계의 열쇠이며 삶의 새로운 열쇠일 뿐이다.
그 다음 물 열쇠 문제로 넘어가면 우리 생활 속의 물 살림에 이용 되는 모든 방법이나 그 형식들은 다 물 열쇠들일 것이다. 물이 무엇이냐 물으면 다 대답할 수 있는 열쇠들일 것이다. 다른 영역으로 넓혀서 불의 문화 쪽 열쇠들 그리고 바람과 공기, 하늘 쪽 문화들의 열 쇠들을 다 다룬다면 이것은 우리가 사는 모든 것들은 다 삶의 귀중한 열쇠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열쇠들이 새로 사물을 열어 놓 으면 그것이 또 연쇄적으로 열쇠가 되는 진행형이 된다.
결국 우리는 이 문제에서 사물의 문은 여는 열쇠가 바로 내 옆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자는 것이 된다. 열려고 노력하면 어떤 형 식의 열쇠든 사물을 여는 열쇠는 있다는 것이다.
5. 결론
인간사는 다 어떤 열쇠로 열어 놓은 것들의 구성물들이다. 여러 조건으로 일차 완성돼 있는데 그 일차 구성을 어떤 범위로 잡느냐에 따라서 존재 규명을 위한 한계는 결정된다. 혹 사회적 조건에 의해 밀려난 것들이라면 그 구족된 조건을 어떤 열쇠로 열면 열린다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먹는 것들의 열쇠로 잡는 자, 입는 것들의 열쇠로 잡는 자, 사는 집을 기준으로 잡는 자 등 다양할 것이다. 어떤 문제를 푸는 열쇠여야 하는 것이 그 시대 사정에 가장 잘 맞는가 문제도 열쇠를 쥔 자의 몫일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 이 세상은 언제나 어떤 실제가 생성되는 생생한 현장이다. 이는 모든 존재는 이런 생명현상을 실현하는 현재의 삶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다. 그런데 일상의 일반적 관심은 거의 무의식적 관습의 반응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별하게 이런 현상의 벌어짐이 삶 전체의 총체성 속에서는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가치가 있는지를 묻는 눈이 있다. 묵조적 관찰자이거나 깊이 관조하는 관조적 관찰자들이 있다. 이들이 있어야 매일의 문제가 반성의 자아가 된다. 미래와 과거와 현재의 위상도 상호작용한다. 기존 문화는 다 듣기 기능이 있다. 현재를 이해하게 하는 많은 설명들 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선견의 선지식들을 언제나 강의를 해주고 있다. 학습이 이루어지는 학습장의 역할을 한다. 이런 설명은 우주적인 큰 틀의 이치에서 작은 손기술까지 들어야 할 것들이 많다. 도서 같은 것은 대표적 책 듣기이다. 쓰레기조차도 형식이 있고 특수 한 방식의 말리는 형식, 유보되는 형식 등 다양하게 형식을 갖추어 집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체적이고 총체적으로 구성된 보기는 실제 전체가 문장으로 완성 된 최종 정리로 이루는데서 끝이 난다. 모든 글은 이 천문 즉 이미 완성된 문장들일 뿐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주제 의식에 의해 잘 구 성된 완전한 단위의 문장이 생산되어 있다. 그 주제 범위와 구성 요소들을 구조화한 잘 조직된 한 유기적 세계가 문장인 천문이다. 천리가 이미 다 써놓은 것이 천문이다. 없는 것을 쓸 수는 없다는 이론이다. 인간이 만들어 쓰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을 찾아 잘 꿰맞추는 것을 인간이 할 뿐이다.
그래서 한 생의 인간 삶도 시학처럼 열기-묻기-듣기-보기의 천문 4단계 그 자체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글은 그간 솜다리문학회 회원을 위해 강의한 내용을 1차 요약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