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언어로 기도하기
찬송: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568장)
말씀: 마태복음 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묵상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유창한 언어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높일 때 사람들은 존경의 눈길을 보냅니다. 입을 모아 칭찬하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요! 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설교자들은 대개 그 쾌감을 잘 압니다. 그런 자아도취의 순간을 ‘은혜 충만’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말을 쏟아내면서 그걸로 자신이 거룩해진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거룩’은 공허합니다. 다음번의 박수나 환호가 지난번만큼 못하면 실의에 빠집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존경이 그들이 받는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강한 욕구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그 빈자리를 아는 것이 영성의 출발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쩌면 너무 유려하고, 너무 반짝이는지 모릅니다. 인상적으로 보이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대화가 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피로감이 밀려옵니다. 반대로 어떤 대화는 힘이 납니다. 한참 얘기하고 헤어진 뒤에 또 전화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때의 상대방 표정을 떠올려 보고, 의외의 반응을 생각하며 혼자서 씩 웃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은 무엇이라 말할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대화는 대개 평이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일상의 언어에 불안해하지 않는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멋있는 언어로 기도하기를 즐기는 이들의 동기를 ‘사람에게 보이려고’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러면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마6:6)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라고 하십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기란 대단히 힘듭니다. ‘자유해야지’ 하고 결심할수록 더욱더 얽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눈길을 더 강하게 의식할 때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원초적인 언어입니다. 아프고 힘들 때 나오는 외마디 비명도 기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리 있게 말하여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도, 유려한 문장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를 꾸미거나 포장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우리의 무능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감동시키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잘 보이려는 나를 내려놓을 때 그 사랑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일상의 소박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은 그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얘기하듯, 일상의 언어로 주님과 대화하기 원합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꾸밀 필요가 없는 기도 시간이 참 좋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 자신에게 있는 그 빈자리를 아는 것이 영성의 출발입니다.
* 내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꾸밀 필요가 없는 기도 시간이 참 좋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