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의 결말은 무지!
[7회] 조선은 왜 쇄국을 포기하고 개국을 했을까? /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 YouTube
법률방송 2024.07.31
[7회] 조선의 쇄국의 종료 / 조선 관료의 무지
일본과 청은 조선을 개국 시키려고 함께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을 다른 나라에 빼앗길 위험성이 있다.
7-1. 기유약조
- 임진왜란 (1592-1598년, 7년 전쟁)
- 기유약조(1609년) : 광해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맺은 조약. 조선의 요청을 모두 받아 주었다. 그리하여 아주 제한적 교류를 허용하게된다. 부산 초량진에 1년에 쓰시마 번주의 도장을 받아오는 세견선 20척 만 출입 가능하였다.
- 기유약조는 1876년 조일수호조약 까지 267년 동안 유지된다.
7-2. 메이지유신
- 1869년 메이지 유신으로 판적봉환 (260개 번, 영지와 영민을 천황게 넘김). 중앙집권제 시행으로 번주였던 다이묘들은 주지사로 임용.
-1869년 12월 메이지 정부에서 쓰시마 번주가 조약 변경을 요구. 일본의 체제 변화를 인식. 하지만 변화 거부.
7-3. 청일수호조약
- 조선은 청의 속방이므로 중국과 먼저 체결하고 중국의 압력으로 조선과 체결하기로 함.
- 1871년 청일수호조약 체결. 서로의 방토에 대한 불가침 조약 체결.
- 청의 생각 : 청의 군사력으로는 속방인 조선을 지킬 수 없다. 조선을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어 조선을 보호하는 게 목표.
- 일본은 1872년 운요호로 강화도 포격 (운요호 사건). 일본은 조선을 청의 방토(속국)이 아니고 속방(독립국)이다.
- 일본의 입장은 고려는 조공을 보내고 책봉 받지만 세금을 거두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속국이 아니고 속방이다.
7-4.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 청의 입장은 일본이 함대를 보내 강제로 조선을 열것 같다. 조선에 일본을 자극시키지 말고 나라를 열라고 사전에 정보 제공.
- 1876년 1월 6척의 전함이 강화도에 진입.
- 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약(일명 갈화도 조약) 체결. 기유약조 종료. 조선 최초의 근대조약.
- 청과 일본이 모두의 요구가 맞아 떨어짐. 일본의 입장 : 조선이 중국의 수중이나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 방지. 중국의 입장 : 임진왜란 처럼 군대를 보낼 능력이 없으니 조약을 맺어 여러 나라와 수교해서 균형을 잡히게 함.
7-5. 무지한 수신사
- 외교관 파견. 일본은 부산에 영사를 개설.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로 보내 인사 치례 (일본측에서 경비 부담).
- 수신사 예조판서 김기수는 일본 군대 발전의 시찰을 거부함. 김기수 왈 '조선의 학문은 주자학 뿐이다. 이를 어기면 사문난적이 된다"고 자랑.
- 김기수는 고종에게 부국강병은 통상인데 통상에 대해 무지하여 부정적으로 대답. 국제 통상의 원칙을 모름.
- 일본과 중국에 의해 열렸지만, 교역을 할 일이 아니다.
- 이 후 개화파가 등장하지만 실패를 하게된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