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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집(松沙集) 기우만(奇宇萬)생년1846년(헌종 12)몰년1916년자회일(會一)호송사(松沙), 학정거사(學靜居士)본관행주(幸州)특기사항정재규(鄭載圭), 조성가(趙性家), 정의림(鄭義林) 등과 교유.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松沙先生文集卷之二十七 / 墓碣銘 / 梅軒李公墓碣銘 幷序
| 李德養 | 1579 | 1641 | 全州 | 仲潤 | 梅軒, 靑丘 |
開之學未有考。祇以夫子使之仕一句。得槩其造詣。然則沙溪先生所謂才調文學。治亂可用。以槩公志節足矣。而况所考未有無地者乎。逆适之變。募義士馳進至淸州。聞事平而還。丁卯虜變。領兵至礪山。以朝旨罷兵。丙子又糾合同忘。星夜馳到淸州。聞和議成。痛哭而歸。遂絶當世意。其上庠已在丁卯矣。及除顯陵參奉。見告身及年月。有建虜年號。不就職。時人稱靑丘高士。梅軒所自號。軒前之植。豈所謂今之大明梅者耶。公諱德養字仲潤。璿系。孝寧大君其八世。寶城君諱㝓,栗元君諱綜,呂陽君諱謙。大君下三世。而於公五世以上也。高祖諱對贈領相全城君。曾祖諱楫府尹。文章氣節。著稱於時。副尉舜賓,校尉洛。祖若禰諱。妣玉川薛氏。外祖進士混。公以萬曆己卯生。卒於六十三辛巳。葬光州泉谷面下莞案山子坐。夫人李氏雙封。李氏籍淸安。主簿弼女。一男絢。一女適高傅來。側室二男絺,綌。絢二男復亨,復圭。墓舊闕顯刻。後孫懼其久而無稱。石旣具。康五,康民俾宇萬銘。銘曰。
懿親王室。與同休戚。有難必赴。在公當職。告身僞號。公恥之獨。寧我無官。梅軒栖息。靑丘高士。足屛國爵。我欲表出。以厲來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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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집(渼湖集) 김원행(金元行)생년1702년(숙종 28)몰년1772년(영조 48)자백춘(伯春)호미호(渼湖), 운루(雲樓)본관안동(安東)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이재(李縡)의 문인으로서 노론(老論) 낙론(洛論)을 대표하는 산림학자(山林學者)
渼湖集卷之十三 / 序 / 湖南丙子倡義錄序
昔當宣,仁之世上下四十年間。國家累經大難。湖南之士。輒沫血奮戈。以衛社稷。其在壬辰。如金健齋,高霽峰之倫。其義聲固已聞於天下。甲子适變。又有辛公惟一諸人。謀興師討叛。兵且發。聞賊平而止。然人猶至今誦之。獨至丙子虜亂。其變尤極矣。而無聞焉何也。豈山川之鍾於人者不如古歟。將天地翻覆。區區人力。有不自容而然歟。余未嘗不慨然。往歲湖南儒士數人。以丙子倡義錄。來授余曰。是擧也。吾邦之遺老。往往能言之。顧無文字可藉。近從人家古紙中。得其時往來公帖。印署如新。遺蹟爛然。此不可使之復泯。願吾子圖之。噫。余固疑之。信有是哉。盖其時虜騎驟薄王城。車駕入南漢。自圍中下 哀詔。徵四方兵入救。於是玉果縣監李公興浡。其弟察訪起浡。淳昌縣監崔公蘊。前翰林梁公曼容。前察訪柳公楫。聞命悲憤。立草檄傳告列郡。號召同志。十數日中。風馳雲合。得兵累百人。日夜趣兵至淸州。而和事成矣。遂相嚮痛哭而散。嗟乎。此數公者。皆職卑責微。其餘則多布衣疎賤耳。一朝倉卒。徒以忠義相感激。提數百烏合之卒。犯百萬不測之强虜。不計其力之强弱。惟知死於君父之爲急。赴白刃如騖。及其兵罷之日。或入深山。或遯荒野。多終身不出。盖有昔人蹈海之風。今讀李公所爲數詩。係心天朝。感憤激烈。有匪風下泉之遺音。推其志。卽與日月爭光可也。雖功烈不得遂于一時。其秉義卓然。亦足暴於天下後世矣。詎不偉哉。當公之世。有尤齋宋先生。表章大義。如吾祖文正公及三學士諸賢詳矣。至於砲手吏胥之賤。亦皆爲之特書。而公等之名。不見于其間。豈兵未久而罷。事蹟旋晦。無能以告者歟。不然。以公等樹立之如彼。而獨靳其筆法。余知其無是也。雖然。今去丙子寖遠。天下不復知有皇朝矣。然則是錄者雖不幸而不及於尤翁。而亦幸而出於此時。如長夜晦冥。東方一星。尙煌煌在天。此豈偶然而然歟。余旣感諸公風烈之如昨。而崇禎之涒灘適三回矣。竊爲之俯仰流涕而書于卷。噫。其亦有知余之意也歟。崇禎紀元百三十七年季冬庚寅。安東金元行。謹序。
미호집 제13권 / 서(序) / 《호남병자창의록》 서〔湖南丙子倡義錄序〕
예전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시대에 걸친 40년 동안 국가가 누차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호남의 선비들은 그때마다 피범벅이 된 채 분투하여 사직을 호위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건재(金健齋 김천일(金千鎰)), 고제봉(高霽峯 고경명(高敬命)) 같은 이들은 그 의로운 명성이 실로 이미 천하에 파다하며, 갑자년 이괄(李适)의 변란 때는 또 신공 유일(辛公惟一) 등이 병사를 일으켜 반적을 토벌할 계책을 세우고서 병력이 출발하려 할 때 적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는데도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 일을 전송(傳誦)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경우는 그 변란이 더욱 극심했는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어쩌면 산천이 사람에게 정기를 모아준 것이 예전만 같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천지가 뒤집어지는 변괴를 미미한 인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그러한가? 내가 이에 대해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난해 호남의 유사(儒士) 몇 사람이 《병자창의록》을 가지고 와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 거사는 우리 지방의 유로(遺老)들이 왕왕 말씀하시곤 했는데, 다만 의거할 만한 기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근자에 어떤 집의 오래된 종이뭉치에서 당시 왕래한 공첩(公帖)을 찾았는데, 인장과 서명이 선명하고 지난 행적이 충분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를 다시 소멸되게 해서는 안 되니, 선생께서 도모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 내가 실로 의심했었는데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도다.
당시 오랑캐 기병들이 왕성(王城) 가까이 쳐들어가자 어가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포위된 가운데 애절한 조서를 내려 사방의 병력을 불러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다. 이에 옥과 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浡), 그의 아우 찰방 이기발(李起浡), 순창 현감(淳昌縣監) 최온(崔蘊),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 유즙(柳楫)이 명을 듣고 비분하여 곧바로 격문을 초해 열군에 전달하여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십여 일 만에 바람처럼 달려오고 구름처럼 모여들어 병사 수백 명을 얻어 밤낮으로 병사들을 재촉하여 청주(淸州)에 이르렀는데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마침내 마주보고 통곡을 하고는 해산하였으니, 슬프다.
이 몇 공은 모두 직위가 낮고 책임도 보잘것없었으며, 그 나머지는 대부분 포의(布衣)요 미천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급박하게 단지 충의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수백의 오합지졸을 이끌고서 백만의 예측할 수 없이 강한 오랑캐에게 덤벼들되 그 힘의 강약은 따지지 않고 오로지 군부의 위급한 상황에 목숨을 바칠 줄만 알아 시퍼런 칼날 앞에 질주하듯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병력을 해산하는 날에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황량한 변방에 숨기도 하여 대부분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으니, 대체로 옛사람의 바다에 뛰어들려던 기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공(李公)이 지은 시 몇 수를 읽어보면 천조(天朝)를 연연해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이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분위기가 있으니, 그 뜻을 미루어가면 곧 해와 달과 더불어 광채를 다투어도 될 것이다. 비록 공렬이 당시에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우뚝하게 의기를 확립한 것은 천하와 후세에 드러내기에 충분하니,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공이 생존하던 당시에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 송 선생께서 대의(大義)를 표장(表章)하셨으니, 우리 조고인 문정공(文正公) 및 삼학사(三學士) 같은 분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하셨고, 미천한 포수(砲手)나 이서(吏胥)들의 경우에도 모두 특별히 기록하셨다. 그런데 공들의 이름은 거기에 보이지 않으니, 어쩌면 병력이 오래지 않아 해산되고 사적(事蹟)이 곧바로 소멸되어 아무도 고한 사람이 없어서인가? 그렇지 않다면 공들이 수립한 것이 저와 같은데도 유독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는 그런 일은 없으리라 확신한다.
그건 그렇고, 병자년(1636, 인조14)에서 점차로 많은 시일이 흐른 지금에는 천하 사람들이 황조(皇朝)가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창의록》이 불행히도 우옹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이 마치도 기나긴 밤 캄캄한 어둠 속에 동방의 별 하나가 오히려 하늘에 밝게 빛나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어찌 우연히 그런 것이겠는가.
나는 공들의 의열(義烈)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숭정(崇禎) 갑신년이 마침 세 번째로 돌아왔다. 이에 삼가 천지를 우러르고 굽어보며 눈물을 흘리며 책에 쓰니, 아, 아마도 나의 뜻을 알아줌이 있으리라.
숭정 기원 137년(갑신, 1764) 늦겨울 경인(庚寅)에 안동 김원행은 삼가 쓰다.
[주-D001] 이흥발(李興浡) : 1600~167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유연(悠然), 호는 운암(雲巖)이다. 1624년(인조2)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8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집의에까지 올랐으나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와서 화친을 청하자,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뒤 1637년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 명나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며 학문을 닦았다. 저서에 《운암일고(雲巖逸稿)》가 있다.[주-D002] 이기발(李起浡) : 1602~1662. 본관은 한산, 자는 패연(沛然), 호는 서귀(西歸)이다. 형 이흥발, 동생 이생발(李生浡)과 함께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의 문인이 되어 학문을 닦았다. 1624년(인조2)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같은 시험에서 형 이흥발과 동생 이생발까지 삼형제가 동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1627년(인조5)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 정언, 예조 정랑, 시강원 필선,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산사(西山祠)에 배향되었으며, 1673년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1677년에는 조정에서 그를 충절신(忠節臣)으로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다. 문집으로 《서귀집》이 전하는데, 형인 이흥발의 문집 《운암일고》가 부집(附集)되어 있다.[주-D003] 최온(崔蘊) : 1583~1659.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다. 1609년(광해군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때 대북파의 전횡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사업(司業)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직하고, 1653년(효종4) 세자시강원 진선,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04] 양만용(梁曼容) : 1598~1651.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장경(長卿), 호는 오재(梧齋)이다. 1633년(인조11) 사마시에 장원한 뒤 시강원 설서ㆍ예문관 검열ㆍ예조 좌랑을 역임하였고,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영국 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저서에 《오재집》이 있다.[주-D005] 유즙(柳楫) : 1585~1651.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용여(用汝), 호는 백석(白石)이다. 최명룡(崔命龍)ㆍ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6년(광해군8)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인조반정 뒤 김장생의 천거로 오수(獒樹)에 제수되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의 막하에서 의병모집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봉향(奉享)되었으며, 저서에 《백석유고(白石遺藁)》가 있다.[주-D006] 옛사람의 …… 기상 : 옛사람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이다. 노중련이 신원연(新垣衍)으로부터 진(秦)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받들자는 말을 듣고는 분개하여 “불의한 진나라가 황제가 되어 천하를 다스린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東海)에 빠져 죽고 말겠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주-D007] 비풍(匪風)과 하천(下泉) : 《시경》 〈회풍(檜風)〉과 〈조풍(曹風)〉에 실린 시로, 현인이 국가의 쇠망을 걱정하는 내용이다.[주-D008] 문정공(文正公) :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ㆍ서간노인(西磵老人), 시호는 문정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비변사 당상으로서 화의(和議)를 극력 반대하여 화의 성립 후 심양(瀋陽)에 잡혀가 구류되기도 하였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청음집》이 있다.[주-D009] 삼학사(三學士) : 병자호란 때 항복을 반대하던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을 말한다. 청나라에 대해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한 뒤 척화신(斥和臣)으로 심양에 잡혀가 피살되었다.[주-D010] 숭정(崇禎) 갑신년 : 1644년(인조22)으로, 이해 3월에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북경이 함락됨과 동시에 의종(毅宗)은 자살하고 명나라가 멸망하였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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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명저/편자저작시기분류사항번역대본원문판수항x자역자
| 호남병자창의록 : 湖南丙子倡義錄 |
| 박기상 (朴麒祥 , 1693 ~ ?) 편찬 이덕양 (李德養 , 1579 ~ 1641) 편찬 |
| 18 세기 |
| 사부(史部) 잡사류(雜史類) |
| 1762년 간행된 초간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 신해진 (申海鎭 , 1959 ~ ) |
광주⋅도유사 光州都有司
참봉 류평 參奉柳玶-108
별제 신필 別提申滭-110
현감 정민구 縣監鄭敏求-112
진사 이덕양 進士李德養-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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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상(朴麒祥)
[진사] 영조(英祖) 3년(1727) 정미(丁未)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61위(91/100)
자(字) 미보(美甫)
생년 계유(癸酉) 1693년 (숙종 19)
합격연령 35세
본인본관 죽산(竹山)
거주지 광주(光州)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부(父)]
성명 : 박시화(朴始華)
관직 : 유학(幼學)
[안항(鴈行)]
형(兄) : 박인상(朴麟祥)[進]
형(兄) : 박홍상(朴鴻祥)
형(兄) : 박귀상(朴龜祥)
[출전]
『숭정재정미합5경증광별시사마방목(崇禎再丁未合五慶增廣別試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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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 책7 / 묘갈명(墓碣銘) / 참봉 죽헌 허공 묘갈명 갑인년(1794, 정조18)〔參奉竹軒許公墓碣銘 甲寅〕
| 許暹 | 1589 | 16?? | 泰仁 | 明遠 | 竹軒 |
옛날에 국가에 병란이 있을 때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이 때때로 초야에서 분연히 일어났는데도 혹은 드러나고 혹은 드러나지 못하는 것은 그 사이에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비는 응당 스스로 그 의리를 다해야 하니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는 고(故) 죽헌(竹軒) 허공(許公)이 창의(倡義)한 행적에 대해 이미 그 뜻을 훌륭하게 여기면서도 또 그의 불행을 슬퍼한다.
공의 휘는 섬(暹)이고, 자는 명원(明遠)이며, 죽헌은 그의 호이다. 허씨(許氏)의 본관은 태인(泰仁)이다. 시산군(詩山君) 포(褒)로부터 나와 대대로 고려에서 현달하였다. 아조(我朝) 세종(世宗) 때에 사문(斯文)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3대를 내려와 진사(進士) 숙현(叔賢)은 공의 고조이다. 증조 귀(龜)는 참봉을 지냈다. 조부 찬(纘)은 호가 송음(松陰)이니 송강(松江)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을 스승으로 섬겼고, 추천으로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아버지 지립(之立)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어머니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통례(通禮) 김웅변(金熊變)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에 태어나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효행으로 고을에 이름났다.
숭정(崇禎) 을묘년(1615, 광해군7)에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기암(畸菴) 문정공(文貞公) 정홍명(鄭弘溟)과 종유하였으니 송강의 아들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처음에 북부 참봉(北部參奉)으로 벼슬하게 되었는데 사직하였다. 또 장릉 참봉(章陵參奉)에 제수되자 마지못해 잠깐 나아갔으나 얼마 안 되어 모친을 떠나 멀리 가는 점을 들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공은 대대로 호남(湖南) 옥과(玉果)에 살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큰 뜻이 있어서 한 고을에서 명망이 높았다.
인조(仁祖) 갑자년(1624, 인조2)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어가가 피난했을 때에, 공이 동지들을 이끌고 의용군(義勇軍)을 불러 모으자, 향인(鄕人) 중에 주부 심민겸(沈敏謙), 창평(昌平)의 진사 이중겸(李仲謙) 등이 수천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호응하였다. 북쪽으로 올라갈 때에 먼저 양식, 꼴〔芻〕, 병장기〔仗械〕 등을 실어 보내면서 상소를 지어 임금에게 올리자, 임금이 글을 내려 장려하고 가상히 여겼다. 얼마 되지 않아 난이 평정되어 마침내 그만두었다.
13년이 지난 병자년(1636, 인조14)에 오랑캐 군사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여 위급해졌을 때에 임금이 애통조(哀痛詔)를 내리자, 공이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지현사(知縣事)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공이 곧장 올라가 뵈었다. 운암이 공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크게 기뻐하면서 군무(軍務)를 모두 맡겼다. 공이 마침내 향인 양산익(梁山益), 김홍서(金弘緖) 등과 함께 다니며 의병을 모아 수천 명을 얻었는데, 모두 밭 갈고 농사지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한산한 사람들로, 다만 의기에 서로 감격하여 앞다투어 반드시 죽기를 원하고 살아 돌아올 마음이 없었다. 이에 열군(列郡)에서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기암을 추대하여 원수로 삼고 운암은 부원수가 되었다. 군대의 행렬이 청주(淸州)에 이르렀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오랑캐와 화의를 맺은 뒤라, 마침내 병기를 버리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공은 이때부터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았고, 매번 의병이 해산하던 날이 되면 번번이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읊조리면서 깊은 울분을 쏟아내었고, 마침내 집에서 생을 마쳤다.
아, 공이 관직을 사직하고 돌아가 봉양하며 발자취를 감추고 아름답게 은거하여 당시대에 세상에 나가려는 뜻을 접었는데, 하루아침에 임금에게 위급한 일이 생기자 분연히 제 몸을 돌아보지 않고 두 차례 의병을 이끌고 적개심을 불태웠다. 비록 전장에 나아가 적을 섬멸하여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다할 수 없었지만, 그 지조와 절개의 범위는 백세토록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일이 까마득하여 묻히고 드러나지 못하고 병자년의 사적이 《창의록(倡義錄)》에 대략 첨부되어 있을 뿐이니, 바로 이 점이 온 나라의 뜻있는 선비들이 함께 한탄하는 바이다. 그러나 공과 같은 분은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은혜와 의리 사이에서 경중을 살펴 가려서 나에게 있는 것을 극진히 할 뿐이었으니, 공이 어찌 세상에서 알아주기를 바랐겠는가. 지금 공이 별세한 지 300여 년이 지나 가승(家乘)이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아, 평소의 행적과 몰년 월일을 모두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큰 절개가 이와 같으니 그 세세한 것은 대략 알 수 있고, 그 시종을 살펴보건대 연원이 유래한 바를 또한 속일 수 없다.
공의 묘소는 본현(本縣) 치소 북쪽 용지동(龍池洞) 임좌(壬坐 남남동향)의 언덕에 있다. 부인 여양 진씨(驪陽陳氏)는 참봉 진순신(陳舜臣)의 딸이니, 부묘(祔廟)하였다. 아들은 생원 재후(載厚)이고, 손자는 상(庠)이다. 증손자는 억(嶷), 대(
), 금(嶔), 률(嵂)이다. 대의 아들은 등(橙)과 남(楠)이다. 나에게 명(銘)을 청한 자는 금의 아들 귤(橘)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봉양을 위해 작록을 사양했으니 / 爲養而辭爵祿
어쩌면 그리도 높은가 / 何其高也
어려움을 만나 전쟁터에 나아갔으니 / 當難而赴矢石
어쩌면 그리도 굳센가 / 何其毅也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 成敗則天
내 의리 부끄러울 것 없어라 / 我義無愧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움은 / 維孝維忠
그 근본한 바 있으니 / 厥有所本
공을 알고자 하거든 / 有欲知公
어찌 가정과 사우의 가르침 살피지 않으랴 / 盍考諸家庭師友之訓
[주-D001] 사문(斯文)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 허사문은 1429년(세종11) 식년시에서 을과 1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 世宗 11年 己酉 式年試》[주-D002] 송강(松江)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 : 1536~1593.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 시호는 문청이다. 저서에 시문집인 《송강집(松江集)》과 시가집인 《송강가사(松江歌辭)》가 있다. 창평(昌平)의 송강서원(松江書院), 연일(延日)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주-D003] 숭정(崇禎) …… 입격하였다 : 허섬은 1615년(광해군7) 진사시에 2등 11위로 입격하였다. 《國朝司馬榜目 光海 7年 乙卯 式年試》[주-D004] 인조(仁祖) …… 때에 : 이괄(1587~1624)의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이다. 1622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반정을 성공시켰다. 1624년(인조2) 아들 이전(李旃)이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時政)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아 영변의 군영에 금부도사가 당도하자 분노하여 난을 일으켰다. 서울로 진격하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하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한 뒤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지 이틀 뒤 관군에 참패하여 이천(利川)으로 도망했는데 부하 장수 기익헌(奇益獻) 등에게 목이 잘려 죽고 말았다.[주-D005] 주부 심민겸(沈敏謙)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윤(士允), 호는 두암(杜菴)이다. 문학훈도(文學訓導) 심광형(沈光亨)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에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정유재란 때에도 왜군을 격퇴하는 데에 공을 세워, 전란이 끝나자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인조를 호종하였고, 정묘호란 때에는 동궁(東宮)을 호종하였다. 전라도 옥과의 구암사(龜巖祠), 나주의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곡성군지, 곡성문화원, 2002》[주-D006] 애통조(哀痛詔) : 재해나 국난을 당했을 때 내리는 조서로, 임금이 자신을 탓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1636년(인조14) 12월, 인조가 “내가 덕이 없어 이 같은 비운(否運)을 만나 노로(奴虜)가 침략하였다. 정묘년에 변란이 생겼을 때에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치욕을 달게 받아들였으나 이는 부득이한 계책으로서 마음은 역시 편치 않았다. 이번에 오랑캐가 대호(大號)를 참칭하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므로 내가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使者)를 단호히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화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오직 바라건대 그대들은 각자 충의심을 분발하고 함께 맹세하여 기어코 이 오랑캐를 물리쳐 함께 큰 복을 도모하라.” 한 애통조를 내렸다. 《국역 인조실록 14년 12월 18일》[주-D007]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 : 1600~167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유연(悠然), 호는 운암이다. 162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8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냈다. 저서에 《운암일고(雲巖逸稿)》가 있다.[주-D008] 아름답게 은거하여 : 원문의 ‘가둔(嘉遯)’은 은거를 뜻한다. 《주역》 〈둔괘(屯卦) 구오(九五)〉에 나오는 표현으로, 멈추고 행할 때를 알아 고상하게 은둔한다는 말이다.[주-D009] 적개심을 불태웠다 : 원문의 ‘敵王愾’는 제후가 천자의 노여움을 산 적에게 가서 친다는 말로,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4년 기사에 “제후가 왕의 성낸 바를 대적하여 그 공로를 바친다.[諸侯敵王所愾, 而獻其功.]” 한 데서 나왔다. 여기에서는 허섬이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 갔을 때 의병을 일으켰던 일과, 병자호란 때 정홍명ㆍ이흥발 등과 함께 청나라 오랑캐를 상대하려고 했던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주-D010] 신하가 …… 의리 :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회계산(會稽山) 싸움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한 뒤에, 월나라의 신하 범려(范蠡)가 구천에게 말하기를 “신하 된 사람은 군주가 근심하면 신하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고하고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치욕을 갚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爲人臣者, 君憂臣勞, 君辱臣死.]”라고 한 데서 나왔다. 《國語 卷21 越語下》[주-D011] 창의록(倡義錄) : 《호남병자창의록(湖南丙子倡義錄)》을 말한다. 1770년(영조46) 간행한 구본(舊本)을 증보하여, 1858년(철종9) 중간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게 되었을 때, 현감 이흥발(李興勃) 등 5명이 전(前) 참의 정홍명(鄭弘溟)을 전라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임금을 돕기 위해 북상하던 중,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에서 임금을 뵙고 통곡하며 돌아갔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주-D012] 생원 재후(載厚) : 허재후(1633~?)로, 본관은 태인(泰仁), 자는 선리(善履)이다. 1633년(인조11) 식년시에 생원 3등 49위로 입격하였다. 《國朝司馬榜目 仁祖 11年 癸酉 式年試》[주-D013] 봉양을 …… 사양했으니 : 허섬이 장릉 참봉(章陵參奉)에 제수되었을 때 마지못해 잠깐 벼슬에 나갔으나 곧바로 모친을 떠날 수 없음을 들어 관직을 버리고 돌아온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강지혜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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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거의록
도서관 소장정보 종합DB 해제 목차
서명원서명저/편자저작시기분류사항번역대본원문판수항x자역자
| 광산거의록 : 光山擧義錄 |
| 光山擧義錄 |
| 광주유림 (光州儒林 편찬 |
| 18 세기 |
| 사부(史部) 잡사류(雜史類) |
| 조선대학교 소장본 |
| 신해진 (申海鎭 , 1959 ~ ) |
의병을 일으킨 제공들의 사실(擧義諸公事實)
전 감찰 고인후 - 65
前監察高循厚 66
전 현감 정민구 - 68
前縣監鄭敏求 - 69
전 별제 신필 - 70
前別提申滭 - 71
전 현감 박지효 - 72
前縣監朴之孝 - 73
충의위 이덕양 - 74
忠義衛李德養 - 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