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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2)
(하나님의 나라 임하옵소서)
2026년 2월 1일 / 마태복음 6:32-33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그냥 기도가 아니고 우리 신앙의 균형을 잡아주는 너무나도 귀중한 가르침이다. 주님의 기도 안에는 심오한 진리들이 많아서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 기도를 따라 살면 우리의 신앙과 삶에 놀라운 변화가 올 것이다.
언제나 우리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우리의 삶, 생각, 모든 활동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정리되게 하시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초점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이면 방황할 일이 없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는 모세를 비롯한 그 누구도 아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시원한 그늘을 주며, 밤에는 불기둥이 빛과 따뜻함을 제공하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고 보호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낮과 밤 언제나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우리는 다윗의 시편 23을 좋아하는 것이다. 시편 23편은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과정 아니 그 이후에도 계속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에서 안식을 누리는 전체를 어우르는 말씀과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였다.
시 23:1-6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했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고, 예수님의 설교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일관된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에덴동산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출발이었으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에서 벗어남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러내어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일으키시고, 다윗을 통해 왕국을 세우시는 구약의 과정을 통해 이 나라는 영원하지 않지만, 그분이 오시면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가 올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교회로 이어졌다.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1.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된다.
마 16:18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세워주신 교회에 오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 들어오게 되고, 내 육신과 자아 중심으로 살았던 것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삶 속에 시작된다.
이 세상은 고통이 많다.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질병들이 생기고, 수많은 재난과 전쟁이 일어난다. 고통의 면죄부를 가진 사람은 없다. 이 땅에는 불의가 넘쳐나고 공의가 바로 시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맹인이 눈을 뜨고, 38년 된 병자가 낫고, 귀신들이 쫓겨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들이 일어나는 등 ….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사단이 묶임을 당하기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의 경계선에서 살아가면서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오늘도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2.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일까?
눅 17:20-21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마 24:23-28, 37-41)
공간적인 의미나 소유의 의미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하셨다. 또한, 미래적인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이 말씀 앞에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 죽고 나서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면 천국이 지금 이곳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갈등과 불안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으면 불안함이 사라지고 평화와 샬롬의 축복이 온다. 천국은 샬롬의 나라, 평화의 나라이다. 이것은 외부의 어떤 환경에 의해서 침해받거나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샬롬’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다스림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그곳은 천국이지만, 안타깝게도 문제는 나 자신부터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죄성은 자꾸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한다. 걷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아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왜 사람들이 배우고, 일을 하고, 힘을 가지려고 할까? 그것은 좀 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 사건의 핵심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것이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반역의 문화와 아버지의 품을 떠나고자 하는 탕자의 문명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탕자는 아버지에게 돌아감으로 모든 상황이 끝나고 행복해졌다. 아버지에게 오면 모든 것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아버지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면 그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데도 자꾸만 떠나려고 한다.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
♬ 525 돌아와 돌아와 ❶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후렴>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 와 돌아오라 ❷ 돌아와 돌아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❸ 돌아와 돌아와 환난있는 곳과 죄가 있는 곳과 미혹받는데서 ❹ 돌아와 돌아와 집에 돌아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세상은 ‘네가 신이다’라고 말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대중문화도 ‘네가 왕이고 주인이니 마음대로 해라!’라고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교육받고 자라고 있다. 부부 싸움도 실체를 들여다보면 ‘내가 왕이다’라는 주도권싸움이다.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사연들의 원인은 모두가 왕 노릇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개인의 입장과 주장이 중요해졌다. 모두가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고집이 세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아이들도 모두 자기가 왕인 줄 안다. 모두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고 야단이다. 갈수록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주장들이 분명하고 강해져 가기 때문이다. 대하드라마를 보면 왕위 찬탈극이 첨예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끝없는 암투들은 우리의 내면세계에서도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왕좌에 계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분을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으려 하기 때문이다.
3. 기도할 때 ‘주여!’하고 외치는 것은 대단한 신앙고백이다.
마 16:13-17 /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주여’라고 외치는 순간부터 ‘나는 종입니다. 나에 대한 모든 주권은 주님에게 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과 더 나아가 ‘나의 주(lord)’로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님을 구원자로서만이 아니라 나의 주인으로 모실 때 신앙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이 정확히 잡혀있는 삶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모두 안에도 주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신앙이 되기를 축원한다.
4. 우리 삶의 모든 일 속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집안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누가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까? 그것이 아이들이라면 그 가정의 주인은 아이들이다. 그런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가정이 언제 하나가 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 길은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실 때이다. 남편의 주인, 아내의 주인, 아이들의 주인도 하나님이 되실 때만이 그 가정이 하나가 되고 행복해진다. 모든 결정을 내릴 때도 먼저 기도하고 주님의 의도를 묻고 결정한다면 그 가정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그 가정을 하나님이 다스리심으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음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주인으로 삼고 있는 동안에는 내 인생과 삶이 변할 수 없다. 우리는 은혜가 충만하면 주님을 마음의 왕좌에 모셔 들이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다시 왕좌에 내가 올라앉는다. 하나님을 내 삶에 모셔 들인다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은 자기 부인이다.
♬ 534장 주님 찾아오셨네 ❶ 주님 찾아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❷ 보라 성자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영광 중에 계신 주 모시어 들이세 헛된 교만 버리고 우리 구주 모시어 영원 복락 누리세 모시어 들이세 ❸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늘에서 부르네 모시어 들이세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 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❹ 주여 내가 믿으니 오소서 오소서 주여 환영하오니 오소서 오소서 생명길로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 알게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아멘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렇게 달라진다
♬ 289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❶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후렴>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❷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털 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❸ 내 맘에 소망을 든든히 가짐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림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❹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 빛 홀연히 비쳐 저 멀리 하늘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❺ 내가 저 천성에 올라가 살기는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천성에 올라가 주님을 뵈오리 그 기쁨 비길데 없네
5. 요즘은 가족 전도가 참 어렵다.
특히 남편을 전도하려 할 때 부인이 주도권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이끌려고 하거나, 열심히 하려고 하면 할수록 남편은 더 멀어지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온전히 들어가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논리, 강조하고 내세우려고 했던 것들이 점점 죽어갈 때 그것을 본 남편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된다. 예전에는 순종하지 못했던 아내가 점점 순종하고, 교회에 다녀올수록 점점 변하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죽어지는 모습을 볼 때 남편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온다.
아이들 특히 사춘기에 있는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이면 문제가 일어난다. 나 자신부터 자아가 살아서 무엇을 해보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곳은 전쟁터로 변한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을 다스리려 하니 그것이 먹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표현을 썼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가? 내 자아, 욕심, 주장이 죽고,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라고 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잘 표현한 구절이다. 나 중심적 삶의 태도가 죽어야 한다. 내 욕심과 고집이 죽으면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을 겸손하다고 말한다. 자아가 완전히 죽었다는 확실한 증표는 겸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밖에는 없다. 자아가 죽지 않은 겸손은 위선에 불과하지만 반대로 자아가 죽어질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겸손한 가정이 수준 높은 가정이다. 겸손한 교회가 수준 높은 교회이다.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가정, 교회가 수준 높으며 깨끗하고 평안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면 자아가 죽어야만 한다. 자기 교만, 자기 자랑, 자기 욕망, 자기 생각, 자기 주관, 자기 사랑 등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은 신앙생활은 갈등이 많고 요란만 하고 복잡하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은 교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은 원망과 불평이 많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은 변질되기 쉽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에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에는 참다운 봉사와 헌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아가 죽지 않은 봉사와 헌신에는 인간의 한계가 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계집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이 무너졌다.
6. 경건의 훈련이 필요하다.
내 생각과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도 영적 훈련을 시켜야 한다. 아이들이 원한다고 모든 것을 다 해주면 결국은 아이의 인생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결혼생활에서 내 생각대로 가정을 움직이려고 하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내 생각과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기다리는 훈련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거부하고 싶어지고 입으로만 ‘아멘’할 뿐이요, 마음에 새겨두지 않으므로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자아가 나를 세상으로 끌어내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도록 만든다.
내가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갈등은 잠재워지지 않는다. 신자는 내 생각과 논리와 감정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살 수 있다. 힘들지만 내 자아를 꺾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복하는 순간 기이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롬 6:11-13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8:11-14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적인 나라를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적인 힘이 들어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에게 칼을 휘둘러 귀를 자르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고 기꺼이 붙잡혀 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의 생각과 의지를 꺾고 아버지의 원대로 순종하기 원하는 기도가 끝난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모델이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완전히 힘을 빼고 죽기로 결심으로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샬롬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나를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죽어지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내 자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직장, 가정, 모든 인간관계,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내 힘과 욕심, 주장대로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는 경험이 이루어질 때 그곳에 샬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우리의 불순종과 반항 때문에 갈등은 깊어지고 평화는 멀어지고 고통과 탄식은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는 기도는 ‘내 자아중심적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이다. 기도를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내 자아가 살아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을 잠재우고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주권 앞에 복종하고 엎드려져서 내가 죽었다는 고백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며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기도의 자리는 치열한 자리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간곡한 기도를 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은 엎드려 기도하는 자리이다. 내 자아가 죽고, 나를 부인하는 경험이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면 무슨 갈등이 일어나겠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전한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반쯤 죽지 말고 완전히 죽기를 소원하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이 기도는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원한다는 기도였다. 철저히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갈등은 끝이 없고 평화는 멀어져가고 인생은 꼬일 수밖에 없다. 열정은 사라지고 마음에는 낙심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두세 사람이 모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어 확장되면서 교회 안에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때 이 교회가 천국이 된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가 된다. 교회가 어떤 회의를 할 때, 하나님의 통치 아래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하고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분열과 분쟁이 있을 뿐이다.
♬ <작은 불꽃 하나가> / ❶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❷ 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이라네. 주님의 사랑 놀라와 한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새희망을 전하고 싶으리. ❸ 친구여 당신께 이 기쁨 전하고 싶소. 내 주는 당신의 의지할 구세주라오. 산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 산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7. 철저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 안에 무엇인가 요구하는 욕심, 불편한 마음, 짜증 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바란다. 내 개인의 필요를 가지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려고 하면 불편하고 짜증만 날 것이다. 그러면 시험에 들고 평화가 사라질 것이며 공동체도 깨질 것이다.
교회는 바로 ‘나’이다. 내가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사람은 볼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은 왜 그러냐고 묻지도 말고 강요하지도 말라.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통치와 다스림 안에 살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내 가운데도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통해 열방 가운데로 퍼져 나가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뿐 아니라 모든 민족 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는 사단에 붙잡힌 영혼을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는 영적인 전쟁이다. 그러기에 사단이 그냥 놓아주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사단이 통치하는 곳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서 억누르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마 11:28-30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8.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우리는 영적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 안에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영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뿐 아니라 이 땅을 지배하는 어둠의 권세들과 싸우는 영적 전쟁의 기도이다. 우리가 속한 곳, 생각, 모든 관계 안에 어둠의 실체를 보고 그것을 쫓아내며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때 우리에게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어둠의 생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마 16:19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신앙생활의 맛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처음에 예수를 믿었을 때는 겨자씨 한 알처럼 조그만 평화가 생겼지만,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 순복할수록 이 평화와 만족이 겨자씨처럼 점점 자라 나무가 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평화가 내 심령을 지배하는 것이다. 전에는 만사에 결핍을 느꼈지만, 하나님 나라가 커질 때 자신만의 만족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에게도 기쁨과 평안을 주게 된다. 이런 역사가 우리 모두 안에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결 론
요한계시록에서는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비전이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위하여 절대 순종, 자아의 죽음, 말씀 앞에 끊임없이 무릎을 꿇을 때 그것을 실천하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에서 경험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분쟁과 갈등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다.
계 21:1-7 / <새 하늘과 새 땅>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 22:20-21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참고로 하면 유익한 글들
❚ 모두가 축복받는 용서 /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브라함 링컨(Lincoln, Abraham) 대통령은 언제나 그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욕을 안겨주는 정적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고릴라를 보기 위해서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오리지널 고릴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라며 링컨을 욕되게 하였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스프링필드가 링컨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고 링컨의 생김새가 고릴라 같았기 때문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런데 링컨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내각을 조직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장관 자리에 바로 이 사람을 임명하였다. 모든 참모들은 링컨의 이런 개편에 충격을 받고 놀랬다. 참모들이 링컨에게 어떻게 당신의 적을 그런 중요한 자리에 앉힐 수 있냐고 물었더니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그 사람이 적이 아니지 않소. 나는 적이 없어져서 좋고, 그가 나를 돕게 되었으니 내가 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서 좋지 않소. 내가 이 사람을 용서하고 중요한 자리에 임명한 것으로 인해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잃었단 말이오?’ 복수는 복수하는 사람과 복수 당하는 사람 모두를 파멸시킨다. 그러나 용서는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축복한다. 복수를 해서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 링컨은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 / 신학자 풀리쳐에게 한 신학생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풀리쳐 박사는 조용히 대답했다. ‘자네가 유능한 전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한 가지를 잊지 말게나! 그것은 영국에서 내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자세를 갖춘다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네를 통해 일하실 것이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쁘게 사용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하나님께서 실력 있는 사람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부르심 앞에 순종하고 겸손함을 겸비할 때였음을 잊지 말자!
❚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 혹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세기의 작가 미켈란젤로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작업에만 몰두했으며 언제나 배우는 데 힘썼다.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모래시계를 든 노인이 손수레를 타고 있는 상이었다. 그 모래시계에는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던 위대한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배움의 자세를 잊지 않았다. 이 말을 마음에 새겨두는 것은 어떤지?
❚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지혜 / 링컨 대통령이 한 번은 어떤 정치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여러 연대(聯隊)를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육군성 고위 당국자인 애드윈 스탠튼은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잘못된 명령을 내린다고 링컨을 비난했다. 이러한 스탠튼의 반응에 링컨은 자신의 행동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명령이 얼마나 잘못된 명령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명령을 철회했다. 우리도 종종 우리의 행동에 대해 지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잘못할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주님, 저희로 저희의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귀한 충고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 아랫사람에게 배운 지혜 /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은 한번 연구에 몰두하면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뉴턴이 말년에 연구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난로 가까이 앉아있던 그는 너무 더워 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참다 못한 그는 하인을 불러 난로 불을 꺼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인은 ‘선생님,의자를 잠깐 뒤로 빼시면 되는데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대물리학자 뉴턴은 그제야 무릎을 치며 ‘아,그렇구나.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라고 하면서 의자를 뒤로 빼고 다시 연구에 몰두했다.
❚ 모 신학대학의 교수인 어느 젊은 목사의 경험담 / 박사학위를 받고 유학에서 돌아와서도 전임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고 강사생활을 하며 월 60만원으로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던 때의 일이었다. 아이를 한 달에 20~30만원 하는 유치원에 보낼 수가 없어서 고심하던 중에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석 달에 19만원만 내면 되는 어느 초등학교의 병설 유치원을 알게 되고는 기뻐했다. 경쟁률이 매우 높았지만 그 목사님의 아이는 입학이 되었다. 그런데 예비소집을 마치고 돌아온 사모님이 우울한 얼굴로 돌아왔다. 울었는지 눈도 퉁퉁 부어있었다. 사모님이 운 것은 아들의 입학허가 때문에 감격해서가 아니었다. 생활이 어려운 가정들이 많은 지역이어서 맞벌이 일을 나가야 하는데도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던 몇 부모들이 있어서 그 유치원 원장 선생님이 이미 입학이 된 아이들의 학부모들에게 정원 30명 외에 다섯 명만 더 받으면 안 되겠냐고 호소했다. 그래서 이 사모님이 찬성했더니 주위의 눈총이 싸늘해지더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어머니들이 ‘애들이 늘면 교육환경이 나빠지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했다. 그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 원장 선생님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추가입학을 기대했던 부모들은 울며 돌아갔다. 그런데 반대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교인들이었다.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그 사모님은 원장 선생님과 입학이 불허된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너무나 죄송해서 울며 돌아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