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李穡)·이림(李琳) 및 우리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검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전각에 오를 수 있게 하고, 의례[贊拜] 때에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각각에게 은 50량과 채색 비단 10필, 말 1필씩을 내렸으니, 정몽주(鄭夢周)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왕은〉 하교하기를,
“스승을 존중하는 것은 이 도리[儒學] 때문이며,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열성조가 재위하실 때에 시중(侍中)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와 같은 이는 사직에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기 때문에 특별히 검을 차고 신을 신고 전각에 오르도록 하며, 의례 때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 일이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어 내가 매우 흠모하였다.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이색은 어려서 중원(中原)에 유학하여 제과(制科)에 급제하였으며, 학문은 천문(天文)과 인문(人文)을 통달하고 지식은 고금(古今)을 꿰뚫었다. 우리 선조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크게 중하게 여겨졌으며, 조용히 옳은 길로 인도하고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도록 도왔으며 올바른 의논과 아름다운 글로 국가를 현창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성리학[濂洛之學]을 알게 하여, 풍속을 공자와 맹자[鄒魯]의 풍습으로 변화시킨 것은 실로 경의 힘이었다. 상왕에 이르러, 다시 경을 다시 기용해 국가의 기무를 보게 했으나 병으로 여러 차례 사양했다. 그러나 국가의 대계는 반드시 나아가 자문을 구하였으니, 도움이 되는 것이 매우 컸다. 내가 세자로 있을 때부터 즉위하던 초기까지 나를 깨우치고 보필한 공이 더욱 현저하였으니, 이로써 좌규(左揆)로 승진시켜 그에 의지하여 올바른 통치를 이루기를 기대하였다. 최영(崔瑩)이 역모를 꾸민 후로 인심이 의구심에 가득차자 경은 예순의 나이와 질병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개연히 자청하여, 가마를 타고 들어가 천자를 뵈었으며, 상세하고도 밝게 아뢰고 대답하니 천자가 기쁘게 받아들였다. 상하의 정이 통하고 종사의 계책이 안정된 것이 옛 선인에 견주더라도 더욱 빛남이 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림(李琳)은 선대부터 대대로 나라의 중신(重臣)이 되어 덕을 쌓아온 지가 오래 되었으며, 나의 모후를 낳아 상왕의 배필이 되게 함으로써 내조를 하게 하였다. 내가 갓난아기 시절에 질병이 많았는데 경이 마음을 다해 보살펴서, 오늘날 내가 왕위에 올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공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나 임금의 외조부로서 총재(冢宰)의 지위에 이르게 된 것은 내 사사로운 정실에서가 아니라 공론이 귀의한 바이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李)【태조의 옛 이름】는 문무의 지략과 장수의 재주로 선조로부터 지우를 받아 왔다. 대를 내려와 상왕을 섬겼는데, 들어와서는 정현(鼎鉉)의 반열에 참여하였고, 장수로 나가서는 병사들을 잘 지휘하였다. 기해년(1359) 이후 병사를 지휘한 30년 동안 크고 작은 전투마다 반드시 승리하였다. 큰 승첩만 보더라도, 신축년(1361)에 홍건적[關賊]이 수도를 침범하여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경이 대장(大將)을 보좌해 추악한 적들을 섬멸하여 경도(京都)를 수복하였다. 오랑캐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했을 때 여러 장수들이 패주하자 적이 승세를 타고 바로 고주(高州) 땅까지 쳐들어 왔으나 경이 가벼운 무장으로 신속히 진격해 적들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계묘년(1362)에 서얼인 덕흥군(德興君)이 군사를 동원해 서쪽 변방으로 쳐들어오자 경은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그 예봉을 꺾어버렸다. 정사년(1377)에 왜구가 해주(海州)를 노략질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도망쳐 무너져 버렸지만, 경만은 몸소 사졸들의 앞장에 서서 적들을 공격하여 거의 섬멸시켰다. 경신년(1380)에 왜구가 진포(鎭浦)로부터 양광도(楊廣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 지역을 횡행하면서, 군읍들을 분탕질하고 사녀들을 마구 죽이고 약탈하여 삼도가 시끌시끌하였으며, 원수(元帥) 배언(裴彦)과 박수경(朴修敬) 등은 모두 전투에서 져서 전사하였다. 나라에서 이를 우려하여, 경과 아홉 명의 원수를 보내었는데, 여러 장수들은 주저하여 진격하지 않았으나, 경만은 분연히 그 휘하를 통솔하여 인월역(引月驛)에서 격전을 벌여 적군을 남김없이 포획하니 백성들이 그 덕분에 안정되었다. 군사를 움직일 때, 모든 행동에 군율을 준수하여 추호도 어김이 없었으니, 군사들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 덕을 흠모했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한 들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으랴? 경의 위대한 공적을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이 이처럼 혁혁했지만 스스로 뽐내는 법이 없이 늘 겸손하게 행동하니 나라 사람들이 더욱 공을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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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왜란
태조실록1권, 총서 66번째기사
태조가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니 한산군 이색 등이 시를 지어 치하하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033) 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三道) 연해(沿海)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우왕이 태조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3도(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가서 왜적을 정벌하게 하고,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부장(副將)으로 하게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평리 우인열(禹仁烈)·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척산군(陟山君)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아 모두 태조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군대가 나가서 장단(長湍)에 이르렀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싸움을 이길 징조입니다."
하였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들어와서 6일 동안 주연(酒宴)을 베풀고 부고(府庫)를 불살랐다. 경산부(京山府)034) 를 지나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니, 삼도 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9원수가 패전하고,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2원수가 전사(戰死)하니, 사졸(士卒)로서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성하여 마침내 함양성(咸陽城)을 도륙(屠戮)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치고서,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성언(聲言)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태조가 천리(千里) 사이에 넘어진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음을 보고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편안히 잠 자고 밥 먹지 못하였다. 태조는 안열(安烈) 등과 함께 남원(南原)에 이르니 적군과 서로 떨어지기가 1백 20리(里)였다. 극렴(克廉) 등이 와서 길에서 태조를 뵙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하루 동안 말을 휴식시키고는 그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군이 험지(險地)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부서(部署)를 정하여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하고 동(東)으로 갔다. 운봉(雲峰)을 넘으니 적군과 떨어지기가 수십 리(里)였다. 황산(黃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서 태조가 큰길 오른쪽의 소로(小路)를 보고서 말하기를,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하면서, 마침내 자기가 빨리 갔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바라보고서는 싸우지 않고 물러갔으니, 이때 해가 벌써 기울었다. 태조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갔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과연 돌출(突出)하는지라, 태조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유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쏘았는데, 50여 개를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었으되, 시윗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무릇 세 번이나 만났는데 힘을 다하여 최후까지 싸워 이를 죽였다. 땅이 또 진창이 되어 적군과 우리 군사가 함께 빠져 서로 넘어졌으나, 뒤미처 나오자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이에 적군이 산을 의거하여 스스로 방어하므로, 태조는 사졸들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분거(分據)하고, 휘하의 이대중(李大中)·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하였다. 태조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衝突)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내려왔다.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태조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螺]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賊陣)에 부딪쳤다. 적의 장수가 창을 가지고 바로 태조의 후면(後面)으로 달려와서 심히 위급하니,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뛰게 하여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여, 두란이 드디어 적장을 쏘아 죽였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를 맞혔다. 태조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기세가 더욱 용감하여, 싸우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사들은 태조의 상처 입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군이 또 태조의 앞에 부딪치므로 태조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좌우에게 지휘하기를,
"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
하니, 장수와 군사가 감동 격려되어 용기백배로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군이 나무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 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적군의 용감한 사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
하면서, 마침내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이내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적군을 공격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나희(儺戱)를 베풀고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적군의 머리[首級]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면서 살려주기를 원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군의 진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아기발도(阿其拔都)가 태조의 진을 설치함이 정제(整齊)한 것을 바라보고는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아기발도가 그 섬[島]에 있으면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러 적군이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에 복종하여 굳이 청하여 왔으므로, 여러 적의 괴수들이 매양 진현(進見)할 적마다 반드시 빨리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았으며, 군중(軍中)의 호령을 모두 그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번 행군(行軍)에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써 바꾸고자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대나무가 일반 나무보다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그러나 대나무는 또한 민가(民家)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니, 그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간다면 족(足)할 것이다."
하였다. 태조는 이르는 곳마다 민간의 물건은 털끝만한 것도 범(犯)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올라(兀羅)의 전쟁에 태조가 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으므로 처명이 은혜에 감동하여 매양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보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종신토록 태조의 곁을 따라다니며 모시었다. 이 싸움에서 처명이 태조의 말 앞[馬前]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우니, 이때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조가 승전(勝戰)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채붕(綵棚)과 잡희(雜戲)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나아가서 재배(再拜)하니, 최영도 또한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謝禮)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 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우왕이 금(金) 50냥을 내려 주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전투에서 상관을 구하지 않은 관리들을 참형에 처하다 왜구가 함양(咸陽)을 노략질하였다. 진주절제사(晉州節制使) 김상(金賞)이 구원하러 가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관군이 구원하지 않아서 김상이 말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창자가 문드러져 죽었다. 체복별감(體覆別監) 이옹(李雍)을 보내어 국문하니, 부진무(副鎭撫) 하치동(河致東), 배리(陪吏) 파두(波豆) 등이 일찍이 이빈(李贇)이 죽었을 때에도 구원하지 않았고 이제 또 구원하지 않으니, 그들을 참수하였다. 도진무(都鎭撫) 하취동(河就東) 등 13인은 각각 장 100대씩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