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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六章 혼행출도(婚行出島)
①
검은 팔선탁 위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금괴(金塊)에서 발해지는 황금빛이 석백
송의 방안을 황홀하게 물들였다.
다섯 관짜리 금괴 육십 개.
무적세가에서 보내는 것이라며 세 명의 수하들과 함께 금괴를 가져온 자는 뜻
밖의 인물이었다.
비록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금진후의 서찰과 금괴를 건네고 수령증을 받자마
자 황급히 돌아갔지만 석백송은 그 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오 년 전, 세력을 확장하던 흑마방의 회남(淮南) 분타주
에게 당한 후 새로운 검공(劍功)을 익히기 위해 폐관참수(廢關參修)에 들어갔
다고 알려진 안휘성 회남땅 용검문(龍劍門)의 주인 탁표(卓彪)가 틀림없었다.
물론, 탁표와 정식으로 수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하나 그가 일찍이 소림에서 무공을 닦을 때, 당시 문주이던 아버지와 함께 소
림을 방문했던 소문주의 해맑고 준수한 모습은 턱수염이 무성한 장년이 된 탁
표에게 아직도 남아있었고, 기억력이 남다른 석백송은 탁표에게 입혀진 세월
의 더께를 걷어내고 눈앞의 장한이 당시의 미소년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
이 있었다.
무슨 까닭으로 무적세가의 일에 탁표가 끼여들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 아는 체를 할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석백송에게는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려 삼백 관에 달하는 금괴를 바라보는 석백송의 마음은 전혀 황홀하지도 뿌
듯하지도 않았다.
"닷새, 닷새 후면 표물이 도착한다……."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는 문제의 표물이 닷새 후에 도착한다는 금진후의 서찰
이 온통 그의 정신을 빼앗은 것이다.
잠시,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석백송은 엄중한 신색을 되찾고 문밖에서 기다리
고 있던 총관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방안에 들어선 이형완은 탁자 위에 쌓인 금괴를 일별하고는 밝은 목소리로 대
명했다.
표국의 살림을 책임진 그의 입장에서야 어떤 내막이든 관계없이 막대한 수입
이 생기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다.
"삼백 관일세. 이백관은 보관하고 나머지는 은자로 바꾸게."
"성화전장(盛華錢莊)은 금 백관을 바꿀만한 은자를 지니고 있지 않을 텐데요.
선대 때부터 거래해온 성화전장이 항주에서 손꼽히는 규모이긴 했으나 전표(
錢票)도 아니고 은자로 바꾸기에는 금 백관은 너무도 막대한 액수였다.
몇 년 전에 장백산(長白山) 근처에 대규모 금광(金鑛)이 발견되어 금의 시세
가 예전 같지는 않다 해도 금 한 냥이면 은으로는 열 일곱 냥, 그러니 금 백
관이면 은자로는 무려 십칠만 냥이었다.
"우선 성하전장에서 되는 대로 바꾸고 모자란다면 다른 전장과 거래해도 관계
없네."
적어도 일고여덟 곳의 전장을 다녀야 모두 바꿀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나오는
순간, 이형완은 세권표국의 넉넉한 살림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며 저
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고강한 무공이 무인의 자랑이라면, 비록 자기 것은 아닐망정 이형완같은 사람
에겐 막대한 재물이 자랑이었다.
사실, 세권표국이 표국으로는 중원제일을 다툰다 해도 그 수입은 무역을 하는
상인들에 비하면 내세울 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은자가 오가는 곳에서는 거
래 액수만큼의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 기회에 콧대높은 전장
의 주인들이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형완에게 있어서 다시없는 보람
이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성공적으로 표행을 마치고 돌아온 표사들이 복명하듯, 힘차게 외친 이형완은
서둘러 금괴를 상자에 담았다.
질펀한 풍악소리가 그치지 않는 금연루 후원의 외딴 전각.
화려하게 치장된 방안에는 호피(虎皮)를 깔아 보기에도 푹신한 의자가 있었고
, 그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턱을 괴고있는 자는 금연루의 주인 황대진이었다.
"휴우……."
깊은 한숨을 토한 황대진은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래도 큰 사고를 치고야 말
것 같다는 예감으로 자꾸만 불안해지는 심사를 애써 달랬다.
조금 전만 해도 그랬다. 금(琴)을 잘 타고 미모가 빼어난 난홍(蘭紅)이를 놓
고 돈 자랑, 세도 자랑을 하며 선객(先客)들에게 시비를 벌이는 고관집 망나
니 애새끼들의 행패에 불끈 울화가 치밀어 단매에 쳐죽이려다 꾹 참고 돌아선
것이다.
"지나친 충성이 화근이다……."
애초에 금진후가 봉래도의 인물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보고한 자신의 경솔함
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전주 염상호의 채근은 그칠 줄 몰랐다.
매일 올리는 보고로도 모자라 하루가 멀다하고 전서구(傳書鷗)를 통해 세세한
지시를 보내오는 것이 아닌가.
전주는 물론이고 하늘같은 방주의 관심마저 집중된 지금, 이대로 아무런 성과
도 거두지 못한다면 자칫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크으……."
심사가 편치 않은 탓인지 입안에 감도는 풍미가 그윽해 즐겨 마시던 울금향(
鬱金香)도 소태처럼 쓰기만 했다.
불안과 울화가 뒤범벅이 되어 술잔만 들이키던 황대진에게 귀가 솔깃한 소식
을 전한 것은 마안기무전 항주 분찰(分察)의 부찰주(副察主)이자 구룡전장(九
龍錢莊)을 관리하고 있는 나소철(羅蘇喆)이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보통 전장의 일은 다음날 아침에 점검하는 것이 상례임에도 나소철이 급한 걸
음으로 그의 거처를 찾아온 것이다.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
짜증이 가득한 황대진의 눈치를 살피며 방으로 들어선 나소철이 내놓은 것은
묵직해 보이는 금괴였다.
"……?"
살짝 취기가 도는 눈으로 말없이 바라보는 황대진을 향해 나소철은 조심스럽
게 입을 열었다.
"이 금괴는 오늘 낮에 세권표국의 총관 이형완이라는 자가 은자로 바꿔달라며
가져온 것입니다."
"금괴가 가짜라도 된다는 말이냐?"
"그게 아니고 이 금괴는 북경의 만금공방(萬金工房)에서 주조(鑄造)한 것이라
는 겁니다."
무심코 금괴를 들어 뒷면에 새겨진 '萬金'이라는 작은 글씨를 살피던 황대진
의 눈에 기광이 서렸다.
"뭐라고, 만금공방……?"
천하각지에서 본 궁으로 올라온 정보 중 각 분찰에서 알아야 할 내용을 취합
해 전주가 정기적으로 내려보내는 기무요보(機務要報)에서 얼마 전 보았던 내
용이 떠오른 것이다.
순간, 황대진의 머리가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독사보다 빠르게 나소철을 향
해 내밀어졌다.
"하면, 무적세가에서 만금공방에 주문했다는 삼백 관의 금괴중 하나란 말이냐
?"
나소철이 전장 일을 맡은 것도 보주(寶珠)나 귀금속에 관해 적지 않은 지식과
안목이 있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 표면에 흠집이 적고 광채가 선명한 것으
로 보아 최근에 주조된 금괴임에 틀림없고 속하가 알아본 바로는 이형완이라
는 자가 성내의 전장에서 바꿔간 금괴가 대략 백관쯤 된다고 합니다."
황대진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에 따라 나소철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
다.
"또한, 보통 금괴는 두 관 짜리로 만드는 데 비해 이형완이라는 자가 뿌린 것
은 모두 다섯 관 짜리이니 아무래도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닌 듯 해서……."
천하가 넓고 부호(富豪)도 많다하나 황금 삼백관이라는 엄청난 거금이 움직이
면 어디에서고 표가 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기무요보에 따르면 무적세가에서 주문한 금괴 역시 다섯 관 짜리로
육십 개였다.
무적세가에서 주문한 금괴가 삼백 관, 세권표국에서 은자로 바꾼 금괴가 백
관.
그것도 만금공방에서 주조한 다섯 관 짜리 금괴로.
"흐음, 무적세가에서 주문했던 것으로 보이는 금괴가 세권표국에서 나왔다…
…!"
대체 무슨 연유로 무적세가에서 세권표국에 그런 막대한 황금을 전했는지 이
유를 짐작 할 수 없었다.
하나 그의 임무는 정보를 알아내어 보고하는 것이었고, 판단은 상부의 몫이었
다.
봉래도나 무적세가의 인물을 발견한 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무적세가와 관계된
일을 보고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황대진으로서는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잘하면 징계가 아니라 상을 받을 지도 몰랐다.
"수고했다. 최근에 세권표국을 방문했던 자들을 자세히 알아보고, 당장 세권
표국에 대한 감시를 늘려라!"
오랜만에 활기찬 상관의 모습에 나소철도 덩달아 얼굴이 밝아졌다.
"존명!"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봄바람이 제법 선선하건만 나소철이 나가기 무섭게 보
고서를 작성하는 황대진의 이마에 하나둘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손바닥만한 종이에 세필(細筆)로 빼곡이 적어나가는 일이 쉽지는 않으나 늘
해오던 일이니 그 때문은 아니었다.
자질구레한 일들만 적어 올리던 보고서에 모처럼 무적세가와 관계된 일을 쓰
자니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렸고, 행여 획이 엇나갈까 붓을 잡은 손가락에 있
는 힘을 다 주고 있으니 어찌 땀이 나지 않겠는가.
②
봉래도의 포구(浦口)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도주 일가에 대한 충성이 남다른 도민들이 무적세가로 시집가는 군주를 배웅
하기 위해 모여든 까닭이었다.
포구에 늘어선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경사스러워야 할 군주의 혼사가 외인들에게 밝혀서는 안 될 비밀이라는 것도
즐거울 일은 아니었지만, 군주를 수행해 가는 사람이 고작 시비(侍婢) 한 사
람뿐이라는 사실이 더욱 환송객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삼십 년 전의 사건 이후 은연중 원수로 여기고 있는 무적세가
의 소가주.
포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표정이 밝은 사람은 당사자인 설운
경뿐이었으나 그녀 역시 애써 웃음 지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
할 수 있었다.
"이제 출발할 때가 되었구나."
봉래도의 중신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뱃전에 다가선 설태천이 꼭 쥐고 있던 설
운경을 손을 놓으며 재촉했다.
이별의 아쉬움과 설운경의 운명에 대한 서글픔이 클수록 예정대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 터져 오르는 분노의 불길도 거세 진다는 최상몽의 말은 일리가
있었고 따라서 가능한 대로 많은 도민들이 환송토록 하고 시간을 길게 끌어야
한다는 계획에 그도 동의했었다.
해서 하루도 연무를 거르지 않던 해남신풍군까지 동원한 것 아닌가.
과연, 포구에 가득한 도민 중 남몰래 눈물짓는 자가 적지 않았고, 뛰어난 미
모에 그 보다 더욱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설운경을 연모(戀慕)하는 자가 한둘
이 아니라는 소문이 맞는 소리였는지 연록색 무복 위로 쌍도를 빗겨 차고 천
군(天軍)처럼 위풍당당하게 늘어선 해남신풍군의 젊은이들 대다수는 마치 정
인(情人)을 떠나보내듯 안타까운 상실감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의도는 적중한 듯 했다.
하나 설태천 자신이 더 이상 설운경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양녀라 해도 친딸 못지 않게 아끼고 사랑한다고 자부했으나 결국, 혈육의 정
을 못 이겨 설운교 대신 미끼로 삼아 떠나 보내는 심사가 편할 까닭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나은 편이었다.
일찍이 자신의 무남독녀인 해연(海姸)을 설운경의 시비로 들여보낸 창해룡 하
진악은 어쩌면 영이별인 딸에게 따뜻한 이별의 말도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석상처럼 자신의 뒤에 시립하고 있지 않은가.
자식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신분에 따라 다를 리 없건만 주군의 마음을 헤아려
자신의 슬픔은 드러낼 생각도 하지 못하는 우직한 충성.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 설태천은 뒤를 돌아보며 하진악에게 눈짓했다.
"……."
도주의 뜻을 알아차린 하진악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한발 앞으로 나서며 포
구가 떠나갈 듯 우렁찬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해연이 듣거라!"
눈길은 딸에게 향했어도 얼굴이 붉어지도록 커다랗게 외치는 것으로 보아 말
은 모두에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 집안은 천오백 년 전부터 봉래도의 충신임을 자부해 왔다. 영광스럽게
도 네가 군주님을 모실 기회를 얻었으니 목숨을 아끼지 말고 충성을 다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하진악의 말을 들은 모두가 뭉클 가슴을 치는 떨림을 느꼈지만 그 말에 대답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였다.
충혼(忠魂)은 피를 따라 흐르는가.
여인의 몸으로는 설운교 다음으로 무공이 강하다고 소문난 해연은 아비 못지
않게 당차게 대답했다.
"누구든 군주님을 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소녀가 봉래도의 충신 하씨 집안의
여식임을 분명히 알도록 하겠습니다."
서글픈 일이었다.
설운경이 변을 당하도록 사지(死地)로 내모는 일에 하진악도 함께 하고 있으
니 그녀의 말대로라면 결국, 아비와 딸이 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전혀 다르지 않은 충성의 이름으로…….
창노한 음성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허어, 경사스러운 혼사를 치르려 떠나는 마당에 오가는 언사가 어찌 이리도
비장한가!"
공력을 담아 외치는 봉래신장의 목소리는 조금 전 하진악의 그것보다 더 우렁
차게 중인의 귓전을 때렸다.
"이번 혼사로 무적세가와 한 집안이 되면 우리 봉래도의 앞날은 환하게 열릴
터이고, 자네도 언제든 딸을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니 아무 걱정 말게. 천하의
평안을 위하는 이 아이들의 뜻이 갸륵하거늘 설령 무슨 흉사라도 벌어지면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걸세. 이 늙은이의 말이 틀리는가?"
덕담(德談)임에는 틀림없지만 딴뜻이 있는 사람이 들으면 움찔할 소리였다.
설태천과 최상몽 등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질 때, 설운교가 쪼르르 달려나
왔다.
혼사가 결정된 이후로 수없이 많은 밤을 밝히며 안타까운 이별의 정을 나누었
지만 자매의 도타운 우애는 그것만으로 부족한 모양이었다.
"언니!"
"운교야……."
떨리는 목소리로 서로를 부른 두 사람은 이내 부둥켜안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
백목련과 해당화가 함께 피었는가. 미모도 기품도 다른 두 자매가 얼싸안은
모습이 비장한 분위기와 어울려 더욱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제법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마저 틈새를 파고들지 못하도록 정 깊은 자매
의 몸뚱이가 밀착된 순간, 설운교는 언니의 귓전에 나직이 속삭였다.
"언니, 아무 걱정 말아요.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꺼
야."
두 딸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쳐들어 무심한 갈매기 떼만 바
라보고 있었다고는 하나 설태천 정도의 고수도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한 음
성이었다.
설운경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혹시 할아버지가 들려준 뜻밖의 이야기를 동생도 알고 있는가 해서 설
운교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관계가 편치 않은 무적세가로 시집가기 위해 이역만리로 떠나가는 언
니가 못내 안쓰러워서 하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그래, 고맙구나. 혼례를 치르고 나면 다시 볼 수 있겠지."
봉래신장에게 들은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는 탓인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설운경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려 나왔다.
설운경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설태천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소녀 아버님의 지극하신 사랑만 받다가 멀리 떠나오나 늘 강령(康寧)하시길
천지신명께 빌겠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설태천은 자신의 은인이요 아버지였다.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 해적(海賊)의 습격을 받고 봉래도에 표류해온 난파
선에서 이미 죽은 어미의 품에서 가는 숨결을 이어가던 핏덩이였던 자신을 마
침 늦도록 자식이 없던 설태천이 바다가 보내준 선물이라며 거두어 딸로 삼은
것이 어느새 십구 년.
그 후, 일년이 지나지 않아 고대하던 친 혈육을 보게 되었음에도 조금도 모자
라거나 기울지 않게 정을 베풀어준 아버지가 아니던가.
설령, 자신에게 무슨 참혹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녀는 설태천을 원망할 마음
이 전혀 없었다.
물기 머금은 백모란(白牧丹) 봉오리가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듯 아버지
께 인사를 올린 설운경은 동생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못난 언니 몫까지 아버님을 잘 모시거라."
설운교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그시 감은 설태천의 눈가는 가볍게 떨렸다.
이제 와서 대사를 돌이킬 리는 만무하지만 도주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
을 본 최상몽은 악역을 자임했다.
충성된 신하라면 주군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는가.
이미 모든 출항준비를 끝내고 초조한 표정으로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 선장을
향해 손짓을 보낸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출항하려면 물때를 맞추어야 했고,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출항을 서둘러
야 한다는 신호였다.
몸조심하라는 말도, 남편과 시댁어른을 잘 받들라는 지극히 당연한 당부도 할
수 없는 설태천은 그저 손짓으로 딸의 하직인사에 답할 뿐이었다.
설운경의 승선을 재촉한 것은 남모르게 설태천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봉
래신장이었다.
"어서 배에 오르거라. 머지않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게다."
"……."
수많은 의미를 담은 눈길을 보내는 봉래신장에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인사한
설운경이 마침내 몸을 돌려 배에 오르는 순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도열
해 있던 해남신풍군 가운데서 전혀 난데없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봉래도 천세!"
"군주님 천세!"
혼행을 떠나는 신부를 배웅하며 나올 소리가 아니었지만 어느새 사천오백 해
남신풍군이 한소리로 외치기 시작한 함성은 포구에 나온 모든 도민들에게까지
번져 파도를 뒤엎을 듯 커져만 갔다.
도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군주를 중원으로 떠나보내는 아쉬움에
다 까닭 모를 비분까지 겹쳐 뒤범벅이 된 그들의 심중을 담으려면 목이 터져
라 외치는 '천세' 소리가 가장 적합한 지도 몰랐다.
어떤 자에게는 사랑스러운 딸 같던 군주.
혹은, 속 깊은 누이요 동생으로 여겨지던 군주.
또, 어떤 자에게는 잠자리를 포근하게 하는 꿈속의 다정한 연인이었던 아름다
운 군주.
옛이야기를 듣는 꼬맹이들이 천상의 선녀가 어떤 모습일까 고민하는 수고를
덜어준 군주.
바로 그 군주…….
설운경을 떠나보내는 봉래도 사람들의 함성은 커다란 돛이 찢어질 듯 바람을
받고 사라져 가는 배를 쫓아 망망한 바다위로 한없이 울려 퍼졌다.
③
오전 집무를 끝낸 석백송은 표국을 나섰다.
거리에는 아침의 활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리 빡빡하고 분주하지 않은
것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내일이면 표물이 도착한다, 내일이면…….'
부담감은 아니었다. 당당히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로는 오히려 설렘
마저 느끼는 그였다.
더 이상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성공적인 표행이 되도록 나름대로 만전을
기하느라 분주한 이즈음의 나날들.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론, 무림인과 상인을 막론하고 도움을 청할만한
인물들에게 필요한 조력을 구하는 일까지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봉래도에서 실어오는 진주와 산호의 오 할 이상을 취급하는 진가보상(陳家寶
商)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봄나들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한가롭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진대인(陳大人)을 만나면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십이 년 전 첫 거래를 튼 후 단순히 사업상의 관계를 넘어선 교분을 쌓고 있
는 진가보상의 주인을 만나 부탁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한가로운 발걸
음을 옮기던 석백송의 미간에 일순간 주름이 잡혔다.
무심결에 도로변의 정경을 훑다가 길모퉁이 포목점의 좌판에서 비단을 고르는
한 사내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는 주인과 흥정을 하는 듯
하지만 은밀한 눈길로 자신을 흘끔거리는 쥐눈의 사내.
이틀 전 그가 항주에서 가장 질 좋은 마필(馬匹)과 마구(馬具)를 취급하는 능
풍마방(陵風馬房)에 들렸을 때는 마방의 한쪽에서 청총마(靑聰馬)를 흥정하던
사내였다. 어쩐지 찜찜한 마음에 저절로 목소리를 낮추게 만들던 사내.
뿐인가, 이형완이 금괴를 거래한 전장중 하나인 금월전장(錦月錢莊) 주인의
초대를 받아 매향루(梅香樓)에서 산해진미를 대접받고 돌아오던 지난 밤 표국
의 문 앞에서 스쳐간 사내도 그였다.
그러고 보니, 삼 일 전 표국의 문을 지키는 위사(衛士)들을 돌아볼 때, 표국
과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다루(茶樓)의 창가에 앉아 무심한 듯 표국을
건너다보던 자도 같은 인물로 보였다.
가호(家戶)수가 육만을 넘고 인구는 사십만을 헤아리는 대도읍 항주.
설령 담을 맞대고 있는 이웃이라 해도 그렇게 자주 마주친다는 것은 흔치 않
은 일이었고, 무엇보다 지금은 공교로운 우연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적
당하지 않은 시기였다.
석백송은 눈치채지 않게 유심히 사내를 살폈다.
은밀히 흘끔거리는 날카로운 눈길하며 은연중 풍기는 기도가 만만치 않은 것
이 아무래도 무림인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나를 감시하기 위해……?'
이내 평온한 신색을 되찾은 석백송은 방향을 바꿔 한가로운 걸음으로 골목길
로 접어들었다.
온갖 상점들이 늘어선 대로의 뒤쪽은 높다란 담장이 이어진 주택가였다.
길게 뻗은 골목이 꺾어지고 높은 담장 너머로 가지를 늘어뜨린 아름드리 버드
나무를 발견하는 순간, 석백송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무성한 가지 사이로 몸
을 숨겼다.
아마도 어느 부호의 저택인 듯, 담장아래로 펼쳐진 정원에는 온갖 꽃들과 잘
가꾼 정원수가 가득했고 기분 좋게 나뭇잎을 스치는 봄바람이 실어온 신록(新
綠)의 청량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건만 석백송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인 채 골목 어귀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두세 번의 호흡을 할 시간.
마침내 골목길 모퉁이로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
인적 없는 막다른 골목길.
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목표를 잃은 미행자의 표정이었다.
사내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석백송은 사내의 등뒤로 사뿐히
뛰어 내렸다.
차르르륵.
질 좋은 비단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린 사내는 지척에서
뒷짐을 지고 빙글거리는 석백송을 발견하고는 어쩔 줄 몰랐다.
하나 당황은 잠시. 사내는 이내 길을 잃은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보았다.
세권표국 주인을 은밀히 감시하라는 명령은 실패한 듯 보였지만 목숨을 보전
하려면 순순히 정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가는데 까지 가보는 수밖에…….
"어…… 이 길이 아닌가?"
"어디를 찾으시는가?"
석백송은 사내의 하는 꼴에 장단이라도 맞추려는지 태연히 말을 건넸다.
"그게, 유대인(劉大人) 댁을 찾는다는 것이 그만 길을 잘못든 모양입니다."
"이 동네에 사는 유대인이라면 관영로(貫榮路)에서 미곡상(米穀商)을 하는 양
반뿐인데……?"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쥐눈의 사내는 주저 없이 반색을 했다.
"맞습니다. 그 어른 댁이 어딘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석백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대신 무슨 일로 나를 미행했는지 이유를 설명해 보시오!"
사내는 뻗댔다.
"미행이라니요? 타관에서 친지 어른을 뵙고자 온 사람이 길을 잃고 헤매면 도
와주지는 못할 망정 그 무슨 해괴한 말씀이시오!"
"있지도 않은 유대인이 당신의 친지란 말인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막상 석백송이 자신을 시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
자 사내는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내가 누구를 찾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항주에서는 표국의 주인이 포교(捕
校)노릇도 함께 하는 모양이지!"
석백송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타관에서 왔다는 사람이 내가 표국의 주인인줄은 어찌 알았을꼬?"
순간, 사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무의미함을 느꼈
다.
그렇다면 방법을 하나였다.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신속히 몸을 빼는 것.
석백송과 승부를 결하기에는 부족한 솜씨였지만, 몸을 뺄 능력은 충분했다.
"에잇!"
발악하듯 외치는 일성과 함께 사내의 우수(右手)가 석백송의 가슴을 향해 쇄
도해 들었다.
세 자도 못 미치는 거리, 빠른 기습.
여지없이 가슴에 일격을 맞고 쓰러지는 석백송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하나 석백송의 대응은 신속했다.
"어딜……!"
상대의 기색을 살피고 있던 석백송은 가볍게 상체를 틀어 공세를 흘려보내며
칼날 같은 수도(手刀)로 상대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 찍었다.
파악.
"흐윽!"
고통을 참지 못하고 짤막한 비명을 토하긴 했어도 사내는 그대로 허물어지지
않았다.
바닥을 짚은 왼손을 축으로 몸을 휘돌려 석백송의 무릎을 노린 발길질이 매섭
게 바람을 갈랐다.
휘이익!
어깨뼈를 손상시킬 만큼 강한 일격을 성공시켰건만 석백송은 더 이상 상대를
몰아 붙이지 못하고 황급히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차합……."
뼈가 부서졌는지 극심한 통증을 전할 뿐, 힘을 줄 수 없는 오른팔은 쓰지 못
하고 왼팔뿐인 사내는 재빨리 등을 땅바닥에 붙이고 소매를 떨쳤다.
슈슈슈슉!
반장 남짓 솟구친 석백송의 신형을 향해 쇄도하는 수십 줄기의 보랏빛 광망(
光芒).
순간적으로 날아드는 비침(飛針)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석백송은 반격
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신속하게 몸을 튕겼다.
거리가 있고, 충분히 공력을 모아 일장을 발출할 수 있다면 몰라도 거리는 가
깝고 몸은 허공에 떠 있었다. 이런 처지에서 독이 발라진 것으로 보이는 비침
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촤르르륵.
요란스럽게 옷자락을 펄럭이며 공중제비를 돌아 몸을 피한 석백송의 발이 지
면에 닿는 순간, 어느새 몸을 일으킨 상대의 품속에서 오리알 만한 물체가 날
아들었다.
휘익, 펑!
폭음과 함께 짙은 흑무(黑霧)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
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사방 오 장 여를 암흑천지로 만든 흑무를 헤치고 나선 석백송이 예리한 안광
을 번뜩였지만 사내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조금전의 일이 꿈인 듯, 지나
는 강아지 한 마리 눈에 띄지 않는 적막한 골목.
침중한 얼굴로 서 있던 석백송은 무심한 햇살에 번뜩이며 땅바닥에 떨어진 침
을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쇄혼침(碎魂針)!"
다양한 암기(暗器)의 제조는 물론, 그 암기로 펼치는 암기술에 능한 귀주(貴
州)의 천교문(千巧門)의 인물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물건이었다.
그리고, 흑마방에 흡수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여러 문파 중에 하나가 천교문이
었고.
마치 쇄혼침에 요혈을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석백송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흑마방이란 말인가……."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느낀 석백송이 불길한 예감을 털어 내듯 힘차
게 옷자락을 떨치고 진가보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러 골목에서 사라지고
난 후.
석백송이 서 있던 길옆 담장 위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사내가 있었다.
암종탄(暗踪彈)을 던지고 몸을 숨겼던 쥐눈의 사내, 상부의 명으로 항주의 일
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낭패를 당한 소주분찰(蘇州分察) 소속 배재철(裵載撤)
은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고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세권표국의 중요사가 정해지는 천행전의 밀실.
특별히 국주가 동석시킨 백기표사 사군명은 물론, 국주의 명을 받고 모여든
열 명의 표두들은 하나같이 긴장된 표정이었다.
표두들을 모두 소집하는 일이 드문 까닭도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어딘가 모르
게 긴장감을 풍기는 국주의 모습에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진 것이다.
"……."
말없이 표두들을 둘러본 석백송은 그들의 늠름한 신태와 충직한 표정에서 적
지 않은 힘을 얻는 기분이었다.
일전의 비무대회에서 보인 놀라운 무공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하나하나의 가슴
에 굳게 자리한 충성과 책임감을 알고 있기에 그는 눈앞의 사내들이 더욱 믿
음직스러웠다.
"내일 중요한 표물이 도착한다."
"……?"
표두는 고사하고 표사가 된지도 두 달이 조금 넘은 사군명이야 예외로 한다해
도, 표두들은 최소한 사 년에서 십여 년에 달하는 세월을 표두 노릇으로 보낸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중요한 표물인지는 몰라도 국주가 기껏 표두들을 소집해서 하는 소리
치곤 싱겁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나 이어지는 석백송은 말은 순간적으로 풀어졌던 그들의 얼굴을 굳게 만들
기에 충분했다.
"표물은 봉래도에서 오고 목적지는 무적세가다!"
"봉래도……!"
"흐음, 무적세가라……."
이제껏 표국안에서만 지낸 사군명이야 무적세가와 봉래도라는 이름이 마치 천
상의 일월처럼 그저 막강한 힘을 지닌 아득한 존재로 여겼지만, 다른 표두들
은 달랐다.
일 년 중 열 달 가까이 천하를 누비는 그들은 그 이름이 갖는 무게를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고, 두 강자간의 편치 않은 관계로 인해 천하에 흐르는 풍운의
조짐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표두들은 이번 표행이 갖는 의미를 구하려는 듯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좌우
를 둘러보았다.
하나 마주치는 것은 똑같은 당혹의 눈길뿐.
석백송은 표두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 역시 금진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적지 않게 놀라지 않았던가.
그는 좌중의 술렁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말을 이었다.
"이번 표행에 본 표국의 명운이 걸려있다고 할 수 있으니 모두 각별한 마음가
짐이 요구된다."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는 표두들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긴 했지만 두려움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표물은 무엇입니까?"
표풍일수 하지철의 신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표두들 중에서 무공은 물론 가장 신망이 높은 그의 질문은 방안에 모인 모두
의 궁금증이기도 했다.
의문에 가득한 눈길이 일제히 석백송을 향했다.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봉래도에서 무적세가로 보낸단 말인가.
하나 석백송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건 나도 아직 모른다. 다만……."
잠시 말을 끊은 석백송의 강렬한 눈길이 좌중을 훑는 통에 표두들은 의외의
사실에 대한 의문도 표시하지 못하고 묵묵히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이번 표행을 무사히 마치면 우리 세권표국이 반석에 앉게 된다는 것을 약속
할 수 있다."
중요한 표행의 경우 계약은 전적으로 국주의 재량이었기에 표두들은 표행료가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국주가 장담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번 표행으
로 받게 되는 이익이 막대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뒤따를 푸짐한 포상…….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가문 무적세가.
무적세가에 못지 않은 힘을 지녔다고 알려진 봉래도.
뭔가 중요한 일을 맡게되었다는 자부심과, 그에 걸맞게 뒤따를 포상에 대한
기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기꺼이 해 볼 만한 일이었다.
표두들이 자신감과 긴장이 뒤섞인 마음으로 결의를 다질 때, 석백송은 내심
숨을 가다듬었다.
흑마방의 이목이 쏠려있으며, 표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
만 십중팔구 흑마방의 방해가 예상된다는 말을 하기가 힘든 것이다.
하나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최소한 마음의 대비라도 할 수 있는 법.
석백송은 떨어지기 힘든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흑마방이다. 벌써 표국 근처에 흑마방의 이목이
깔린 것으로 보이고, 표행 중 적지 않은 위험이 예상된다."
"……!"
표두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무적세가나 봉래도가 무서운 존재이긴 해도 직접적인 위협이 될 까닭은 없었
다.
하나 흑마방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들이 이제껏 상대해왔던 녹림 패거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일뿐더러,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흑마방의 집요함은 무적세가를 위협
할 만큼 세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여실히 발휘되지 않았던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망연히 자신만 바라보는 표두들과 달리 처음부터 별다
른 표정의 변화 없이 태평스레 앉아있는 사군명을 주시하고 있던 석백송이 사
군명을 지목했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표두들의 시선이 사군명에게 모아졌다.
새파란 신참에게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겠는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좌중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는지 그다지 어둡지 않은 표정의 사군명은 국주에
게 가볍게 목례하고 말문을 열었다.
"무적세가와 봉래도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시키나 그것은 표행과는 관계가 없
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계약이 이루어졌으면 일을 할 따름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을 들은 표두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무슨 당치 않는 소리냐는 듯 혀를 차는 쪽과 뭔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숙이는 쪽.
그러거나 말거나 사군명은 자기 할 말을 그치지 않았다.
"또한, 표물을 노리거나 표행을 방해한다면 설령 그것이 흑마방이라 해도 마
땅히 물리치고 표행을 성사시키는 것이 표두들의 임무라고 알고 있습니다. 표
행은 천하를 흐르는 핏줄기요, 표물은 표사의 생명이니까요."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전혀 틀리지 않은 정답.
석백송은 흡족했다.
예상과 다르지 않는 사군명의 대답이 만족스러웠고, 예상보다 더 많은 표두들
이 사군명의 말에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것이 기꺼웠다.
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도 정면돌파 아니던가.
이제는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백기표사의 말대로 표행이 우리의 일인 이상 물러서거나 두려워 할 이유는
없다. 이미 계약은 끝났고 표물은 내일 도착한다. 우리는 기필코 이번 표행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하며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세권표국의 성망이
천하제일을 다툰다면 자네들이야말로 오늘의 세권표국을 이룬 주인공들 아니
던가!"
지도를 펼친 석백송이 자신의 계획을 낮고 힘찬 목소리로 설명함에 따라 표두
들의 얼굴은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현란하고 신묘한 것은 상도(常道)가 아니오 진리는 단순하다 했던가.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한 사군명의 말에 새삼 자신들의 임무를 자각하고 민망
해하던 표두들에게 석백송이 최선을 다해 세운 치밀한 계획은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적세가니 봉래도니 하는 이름에 위축되고 흑마방의 위세에 겁을 집어먹었던
그들이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것이다.
홍수나 가뭄을 일으키는 하늘의 조화와 상관없이 그저 때에 따라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무심(無心)해서 위대(偉大)한 농부의 그것처럼.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감사합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