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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5 章 帝王天壇의 秘密
실로 하늘도 흉내낼 수 없고 귀신마저 혀를 내두를 만큼 정교한 세공(細工)이 아닌가?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이토록 가느다란 세필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만상천장인 천태서의 진정한 신위(神威)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햐……! 이렇게 많은 붓들이 이 안에서 나오다니……."
기검하가 제아무리 기재(奇才)라 해도 역시 소년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유명제주(幽冥祭主) 구루몽(丘累夢)!
천하에 산재해 있는 무당, 묘관, 점장이, 제사장들을 관장하는 주무종(呪巫宗)의 종주(宗主)
이다.
기이하게도 그의 비급 안에는 단지 한 가지 비밀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정녕 천지가 거꾸로 뒤집힐 통천경악할 비밀이었다.
<대저…… 인간(人間)이 동물(動物)과 다른 점은 선조(先祖)를 섬기는 제사(祭祀)를 지낸다
는 점이다. 일평생(一平生)을 오직 황실(皇室)의 대제사장(大祭祀長)으로 보낸 노부는 여기
에 황궁제일신비(皇宮第一神秘)를 밝히노라…….>
기검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궁제일신비? 황궁에도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예로부터…… 황제(皇帝)가 붕어(崩御)하면, 선황(先皇)이 평소에 쓰던 유품(遺品)을 위패
(位牌)와 함께 제단(祭壇)에 보관한다.
그 제단을 가리켜 제왕천단(帝王天壇)이라 일컫는다.>
"제왕천단이라……? 참 멋있는 이름인데……!"
유명제주 구루몽!
기검하는 그가 어째서 황제조차도 넘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성인으로 추앙 받는가를 깨달
았다.
"그래 맞아. 이제보니 선황의 유품을 보관하는 제왕천단의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당금
황제가 함부로 간섭할 수 없었던 거야."
구루몽의 권력이 막강했던 것은 그가 하늘(天)을 모시는 신관(神官)이란 것에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검하가 말한대로 선황의 유품을 보관하는 제왕천단의 대제사장이란 점
이었다.
<역대 모든 황제의 유품을 보관한 제왕천단의 수효, 총 여섯 개에 달하며 이름하여 육대제
왕천단(六大帝王天壇)이라 이르노니, 그 비밀을 푸는 자(者) 천상(天上)의 절대지비(絶代至
秘)를 얻어 환우제일( 宇第一)의 대천황(大天皇)이 되리라…….>
"환우제일의 대천황……? 후훗…… 되게 거창하구나……."
기검하는 소리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 그가 어찌 꿈엔들 육대제왕천단의 가공할 신비를 상상이나 했으랴?
훗날 이 신비로 인하여 천하(天下)는 대풍운(大風雲)에 휩싸이게 된다.
---상천옹(喪天翁) 사부신(死附身)!
천하 모든 시체들의 황제요, 시림(屍林)의 림주(林主)인 그도 한 가지 괴이(怪異)한 무공(武
功)을 남겼다.
<구유수명사…… 그 돌팔이 의원 놈이 제아무리 많은 시체를 다루었다 해도 어찌 노부에
비길손가? 노부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체(屍體)들과 생활했다.
시체(屍體), 그 귀여운 놈들은 산자(生者)와는 달리 순진하여 거짓말을 모른다.
그 놈들이야말로 노부의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愛人)이며, 사랑스러운 아들(子)이다. 여기
모든 시체들의 제황(帝皇)이 되는 길을 수록한다.
그리고 초대(初代) 구유조상혈주 만시천작(萬屍天爵)께서 본(本) 시림(屍林)에 전수한 한 가
지 절기를 적어놓는다.>
"초대 구유조상혈주가 남긴 절기라고……? 하! 그럼 아주 대단한 무공이겠는데……."
기검하의 눈빛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인간의 신체능력 중 가장 무서운 살상력(殺傷力)을 가진 것은 바로 소리이다. 후세인들은
그것을 가리켜 살음(殺音), 또는 음공(音功)이라 한다.
그러나 그 음공과 살음들의 시작은 바로 본혈(本穴)의 곡성(哭聲)에서부터 시작되었으
니……
호곡(號哭), 천하의 모든 음공살음이 우리 구유조상혈의 호곡에서 파생(派生)되고 꽃을 피웠
다.
후인(後人)이여! 경배하라! 음공의 창시자께서 남긴 고금최강(古今最强)의 파천살음(破天殺
音)이 여기에 있도다!>
여의조화어(如意造化語)!
말(語). 그 하나로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부린다.
시체를 마음대로 다루고…… 분노한 자의 화를 봄눈 녹듯 풀어버리며…… 여인(女人)을 감
미로운 사랑의 황홀경에 빠뜨린다.
구유굉천파(九幽宏天破)!
대자연의 모든 것을 이용하여 펼치는 사멸음(死滅音).
나무(木)…… 돌(石)…… 물(水)…… 심지어는 책(冊)이나 도검(刀劍)으로도 펼칠 수 있다.
그 가공할 파괴력에는 삼라만상 중 그 어떤 것도 견디지 못한다.
귀염신증향(鬼殮神憎響)!
말 그대로 귀신조차 진저리를 치고 천신(天神)마저 혼비백산하는 저주의 음성(音聲)으로 극
사(極邪)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누구든지 스스로의 귀를 잘라내고 싶은 충동에 빠지며……
마침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살(自殺)하게 된다.
상령몽환소(喪靈夢幻嘯)!
그야말로 극락(極樂)을 헤매는 듯한 쾌락(快樂) 속에서 저절로 죽게 만드는…… 끔찍한 죽
음의 휘파람(嘯)……!
안락사(安樂死).
이것에 당한 사람은 얼굴에 전혀 고통이나 공포의 빛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미칠 듯한
희열의 표정만 남아있을 뿐이다.
기검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히야…… 어찌 인간의 입에서 이런 소리들이 나올 수 있지?"
그는 자그마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소리 하나만 가지고도 천하를 지배한다는 것이 결코 광언(狂言)이 아닌 것 같
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한 통의 서찰이었다.
---무령상문신(霧靈喪門神) 한삭(寒索)!
앞으로 기검하를 경호하게 될 보이지 않는 그림자(影)요…… 혈상묘(血喪廟)의 묘주인 그
가 남긴 것이다.
<혈주! 서찰을 놓고 만상천장인 천태서가 남긴 천자제일필을 조용히 드십시오. 절대 당황
하지 말고 속하의 말대로 따르셔야 합니다.>
(천자제일필을 들라니……? 무엇 때문일까?)
기검하의 뇌리에는 의혹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으나 곧 서찰에 따라 소리없이 천자제일필
을 집어들었다.
<우선 돌팔이 의원이 전수해 준 염력(念力)을 끌어올려…… 천필 제갈일의 최후초식인 천
필만리회풍사(千筆萬里廻風死)를 펼치십시오.
하나 이것은 혈주 자신마저도 모를 정도로 아주 태연하고 신속하게 하셔야 합니다.>
대체 무령상문신 한삭이 이런 내용을 남긴 것은 무슨 뜻인가?
<비명소리가 들려와도 절대 놀라지 마십시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다면 혈주가 먼저 죽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기검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알았어…….)
그는 천자제일필의 끝에 전신의 진기를 끌어모았다.
파파파!
무서운 금광(金光)이 천자제일필에서 소리없이 폭발했다.
그와 동시에, 천여 줄기의 가느다란 금광들이 사면팔방으로 벼락같이 폭사되는 것이 아닌
가?
그것은 놀랍게도 천자제일필 속에 감춰진 일천 개의 무수한 세필이었다.
"크아악!"
"아악!"
기검하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벽과 천정에서 선렬한
피분수가 끔찍하게 솟구쳤다.
와당탕!
사방에서 흑의(黑衣)를 걸친 괴인들이 썩은 짚단처럼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어? 웬 사람들이 벽과 천정에 숨어 있었지?"
하나, 기검하는 도저히 어린아이의 행동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본래의 침착함을 되
찾았다.
갑자기 땅 속에서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크크크…… 혈주! 놀라셨습니까?"
귀에 익은 음성, 그것은 바로 무령상문신 한삭의 음성이 아닌가?
"말라깽이 할아범! 어디에 있지?"
기검하는 사방을 둘러보며 반가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크크크…… 혈주! 속하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혈주께서 그저 이것 한 가지만 기억하시
면 됩니다. 속하는 항상 혈주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을……."
"아……."
기검하는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혈주를 경호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影)…… 무령상문신 한삭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
행하고 있었다.
"혈주! 놈들은 바로 백련대황교가 천하를 감시하기 위해 심어놓은 흔적없는 유령군단(幽靈
軍團)…… 환허은밀종(幻虛隱密宗)의 고수들입니다."
"환허은밀종?"
기검하는 반짝 이채를 떠올리며 그 이름에서 왠지모를 기이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환허은밀종(幻虛隱密宗)!
그들의 신비(神秘)함만으로 따진다면 이 하늘 아래 그 어떤 세력에게도 뒤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 무서운 은자(隱者)들이었다.
이때 무령상문신 한삭의 음산한 괴소가 재차 들려왔다.
"크크…… 혈주! 놈들은 혈주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줄곧 혈주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몰랐지?"
"크크…… 그건 혈주의 내공이 아직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공이 높아지면 그들이 숨어있는걸 눈치챌 수 있단 말이야?"
"물론입니다. 하나 지금은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시간이 아닙니다. 어서 천자제일필을 품 속
에 갈무리하고 속히 이곳을 떠나십시오."
"으응…… 알았어!"
"크크…… 그럼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혈주의 능력이라면 결코 우리 육대공봉을 실
망시키지는 않으리라 믿으니까요……."
기검하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 일단 내가 결심한 이상 조사님의 모든 것
을 얻는 것은 기정 사실이야."
더 이상 무령상문신의 대꾸는 들려오지 않았다.
기검하는 천자제일필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차르륵!
믿을 수 없게도 사방의 벽면에 깊숙이 박혀있던 세필들이 흡사 자석에 달라붙는 쇠붙이인
양 무섭도록 빠르게 끌려오는 것이 아닌가?
무려 천 개나 되는 세필들이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천자제일필의 자루 속으로 빨려 들어갔
다.
금철인주(金鐵引珠)!
어떠한 금속도 흡입하는 만년자철석으로 천자제일필 안에는 금철인주로 만든 구슬(珠)이 박
혀 있었던 것이다.
"햐! 정말 기막힌 붓(筆)이로구나. 이토록 편리한 장치가 되어있다니……."
기검하는 신기한 표정으로 천자제일필을 요모조모로 살펴보았다.
정말 괜찮은 병기가 아닌가?
내력을 전혀 쓰지 않아도 쉽사리 회수할 수 있으니 정말 괜찮은 병기가 아닌가!
문득 기검하의 눈길이 바닥에 흥건히 고인 핏물과 시체에 멎었다. 머리가 풍차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가만…… 흔적을 남기는 것은 좋지 않아…… 더군다나 죽은 사람을 이렇게 방치한다는 것
은 예의에 어긋나니……."
기검하는 한동안 고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이곳 바로 밑에 지하수맥(地下水脈)이 있었지? 그걸 여태껏 생각 못했다니……."
그는 중화풍수지리도 안에서 본 내용을 번개처럼 떠올린 것이다.
"후훗! 그 수맥만 터뜨리면 이곳은 곧 물바다가 되어 깨끗이 수장(水葬)될거아……."
기검하는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말라깽이 할아범의 구유굉천파(九幽宏天破)면 어렵지 않게 그 수맥을 터뜨릴 수 있겠지."
기억하는가?
삼라만상 중 그 어떤 것도 견디어 내지 못한다는 가공할 사멸음(死滅音), 구유굉천파(九幽宏
天破)!
기검하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천자제일필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툭! 툭! 툭!
한데 처음에는 둔탁하고 작던 음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커져가고 있지 않은가?
우르릉!
서서히 구유귀상청이 무섭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기검하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지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툭! 툭! 툭!
그런데, 음향만은 점차 커져 종내에는 뇌성(雷聲)처럼 울려퍼지는 것이 아닌가?
꽈르릉!
무시무시한 굉음이 끊임없이 울리며 구유귀상청을 진동시켰다. 석벽에서 뿌우연 먼지와 돌
가루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천폭지멸(天爆地滅).
굉음은 더욱 무섭게 커지며 지축이 뒤흔렸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구유귀상청이 아예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와……."
기검하는 입을 딱 벌렸다.
"무지막지한 위력이구나. 한낱 붓으로 지면을 가볍게 치는데 어찌 뇌성벽력(雷聲霹靂)까
지…… 정말 구유굉천파의 위력은 놀라운데? 이제 이곳은 곧 물바다가 되어 영원히 사라지
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유귀상청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꽈르릉!
벽면과 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다.
보라! 여기저기서 용트림을 하듯 거세게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물기둥의 엄청난 위용을.
쏴아아!
그것은 실로 일대장관이었다.
폭포수처럼 거의 십 장여까지 솟구치는 물기둥들은 흡사 화산이 폭발하는 듯했다.
콸콸콸……!
천정이 마구 허물어지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삽시간에 구유귀상청 안은 홍수처럼 쏟아져 들
어오는 물살에 깊숙이 잠겨버렸다.
"후훗…… 이제 가봐야겠구나."
기검하는 가볍게 몸을 날려 거대한 물기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유유자적한 태도로 세찬
물살에 자신을 몸을 맡긴 채 구유귀상청 밖으로 사라져갔다.
* * *
삼라만상(森羅萬象) 자연(自然)의 법칙(法則) 중 가장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월이다.
어느 덧 육년(六年)이란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타강( 江)!
파란만장한 중원사(中原史)를 억겁의 침묵으로 지켜온 중원의 이대 젖줄 중 하나인 양자강
(揚子江) 수만 지류(支流) 중의 하나로 수많은 사연을 지닌 채 흐르고 있다.
타강의 상류, 수려한 산세(山勢)를 등지고 하나의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회점(勿廻店)!
일명(一名), 돌아올 수 없는 촌락이라 불리우는 곳으로 이백여 호의 전형적인 농가가 상류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장엄한 대자연 속에 파묻힌 한가로운 정경이 참으로 마음 편하다.
타강을 사이에 둔 넓고 광활한 평야(平野)는 이제 붉은 석양을 받아 온통 황홀한 환상의 세
계로 휘몰아들고 있다.
역시 자연은 위대한 아름다움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끝없는 감동과 입정(入定)할 수 없는 위
엄을 주는 것이다.
기암절경(奇岩絶景) 속에 한 채의 아담한 정자(亭子)가 세워져 있었다.
정자 역시 황혼 아래 붉게 타오르는데 안에는 한 소년(少年)이 우뚝 서 있었다.
허름한 삼베옷의 미소년(美少年).
깎은 듯 단아한 이목구비와 약간의 창백한 안색이 여인의 아름다움마저 회의케 만들었다.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탈속한 선인지경(仙人之境)의 풍도를 엿보이는 미소년은 기검
하, 바로 그였다.
육 년의 세월은 그를 한 명의 늠름한 장부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정자 밑을 흐르는 폭류(暴流)를 바라보고 있었
다.
콰콰콰콰!
쏴아아!
거대(巨大)한 굉음으로 협곡을 진동시키며 굽이쳐 흐르는 폭류는 장엄한 것이 사나이의 가
슴에 야망과 웅지를 불러 일으킨다.
문득 기검하의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저 거센 폭류…… 언제 보아도 좋군."
차고 서늘한 시선이 어떤 광채를 담았다.
"형식이 없이 상대의 의표를 과감하게 찌르는 새로운 힘(力)! 바로 저 폭류가 내게 가르쳐
준 이치다…… 또한 그것만이 백련대황교란 무적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첩경이지."
기검하는 백련대황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배움에 있어…… 때로는 수만 권의 책보다도…… 대자연이 더욱 깊고 많은 것을 가르쳐주
지……."
점점 황혼은 그 마지막 빛을 더해간다. 붉은 빛이 강렬해질수록 채색된 모습은 더욱 아름답
다.
눈(眼)!
멀리서 기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일신에 초라한 승포를 걸친 노인, 적노! 바로 그였다.
그의 두 눈은 지금 은은한 감동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대(巨大)하다…… 공자님의 등이 갈수록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는 기검하의 뒷모습에서 태산을 느꼈다.
"굴강한 위엄, 사나이의 힘과 정열…… 그리고 짙은 고독이 배어 있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내의 모습이 아닌가?"
그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대견함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흐뭇함에 젖어있던 적노의 얼굴에 한 가닥 우려의 빛이 나타났다.
"다만…… 대자연마저도 무시하는 듯한 오만함이 흠이라면 흠…… 하나 어쩌면 그것이 공자
님의 더욱 큰 매력일 수도 있겠지."
적노는 순간의 우려를 미소로 날려보내며 천천히 정자로 걸음을 옮겨갔다.
"웬일인가? 할아범."
다가온 적노를 발견하고 기검하가 묻자 그는 빙긋 웃었다.
"공자님께 청혼(請婚)이 들어 왔습니다."
"청혼……?"
기검하가 뜻밖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내 그 표정은 담담하게 변했다.
"그래, 내게 청혼을 한 여인은 어떤 여인인가?"
"여인 중의 여인이지요. 그녀의 이름은 십전냉모란(十全冷牡丹) 단금봉(端琴鳳)! 공자님께서
용(龍)이라면 봉(鳳)으로 비유될 수 있는 여인입니다."
"할아범이 수다를 떨 정도라면 꽤 쓸만한 여인같군."
"그렇습니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무슨 문제지?"
적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여인은 바로 마마파천황 단엽상의 하나밖에 없는 딸입니다."
"……."
기검하의 검미가 꿈틀했다.
마마파천황 단엽상이라면 바로 자신의 아버지인 무적철혈신 기무빈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데 중추적(中樞的)인 역할을 한 육인(六人)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자신의 딸을 기검하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기검하의 입가에 뜻모를 미소가 스쳤다.
"무림사상 최강의 승부사라는 그가 무적철혈신 기무빈의 아들인 내게 딸을 주겠다…… 재미
있군."
"……."
"할아범이 보는 단엽상은 어떤 인물인가?"
적노의 얼굴에는 이미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큰 그릇…… 비록 지금은 백련대황교에 눌려 이빨을 숨기고 있
지만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기검하는 빙긋 웃었다.
"그럼 그가 나에게 딸을 주겠다는 이유는?"
"글쎄요…… 이 늙은이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서……."
적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덧붙였다.
"단지 이 늙은이가 알기로는 공자님의 모친과 단금봉의 모친 사이에서 이미 정혼이 되어있
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어머니가 정하신 정혼이라…… 그럼 지켜야겠지."
느닷없는 기검하의 말에 적노의 안색이 일변했다.
"예……? 그럼 공자님께서는 그의 청혼을 수락하시겠다는 말씀……?"
"물론일세!"
기검하는 잘라 말했다. 적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회의에 찬 시선을 던졌다.
"공자님! 그는 공자님의 부친을 죽게한 장본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기검하가 그의 말을 잘랐다.
"하나 그 딸이 아버지가 지은 죄를 이어받을 필요는 없지. 또한 아버지가 죽은 가장 큰 이
유는 아버지 자신이 약했기 때문…… 죽이지 않으면 죽음을 당하는 이런 난세(亂世)에서 그
를 원망할 필요는 없네."
적노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십전냉모란 단금봉은 계집으로 태어났음을 한탄할 정도로 극히 뛰어난 재녀(才
女)…… 여기에는 분명, 모종의 흉계가 있습니다."
기검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서늘한 시선으로 적노를 잠자코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할아범은 육년(六年) 동안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지?"
실로 엉뚱한 질문에 적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뚜렷하게 대꾸했다.
"여인(女人)입니다."
기검하는 다시 빙긋 웃었다.
"맞아! 할아범은 지난 육 년 동안 내게 여인을 가르쳐 주었지. 십전냉모란 단금봉! 나는 그
녀 역시 하나의 여인으로밖에는 생각지 않아."
"……!"
적노는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침묵을 지켰다.
적노가 기검하에게 지난 육 년 동안 여인을 가르쳤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기검하는 천천히 광란하는 폭류로 시선을 돌렸다.
쿠쿠쿠!
쏴아아!
그리고 잠시 후, 기검하의 입에서는 지극히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단엽상이 보낸 자에게 이르게. 십전냉모란 단금봉은 이미 기씨(奇氏)가문의 여인이니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보내라고……."
만마대군벌(萬魔大軍閥)!
누가 이곳을 모르는가?
이 하늘 아래 살면서 이곳을 모른다면 아예 그는 사람도 아니다.
현(現), 백만마도인(百萬魔道人)들의 총수(總帥)가 기거하는 곳, 바로!
마종천자(魔宗天子) 마마파천황 단엽상의 처소였다.
마마파천황 단엽상!
그는 지금 대청 중앙 호화로운 태사의에 몸을 묻고 있었다.
"……."
해(年)가 갈수록 대효웅과 최강의 승부사로서의 인상이 깊어져가고 있는 풍모(風貌). 젊었을
때는 태산(太山)이되 냉혹하고 예리한 야수(野獸)적인 기질을 풍겼으나, 이제는 그 날카로움
을 지혜와 위엄의 무게로써 능히 감싸고 있었다.
추측할 수 없는 지혜와 장중한 기백이 그의 가느스름한 눈빛 속에 앙금처럼 담겨있는 것이
다.
"……!"
그의 전면 한 사나이가 이마를 바닥에 처박은 채 무엇인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속하가 보고온 바로는…… 기검하 그 자는 대종사(大宗師)의 염려와는 달리 그리 뛰어난
인물이 아닌줄 사려되옵니다. 또한……."
순간 단엽상이 사나이의 말을 잘랐다.
"천경(川庚)! 결론은 내가 내린다. 너는 듣고, 본 사실만 얘기하면 된다."
"죄…… 죄송합니다."
천경이라 불리운 사내는 흠칫 몸을 떨더니 머리를 더욱 깊숙이 처박았다.
"그자는 구룡란(九龍卵)이라는 계곡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소일하
고 있습니다."
"……!"
"그 외에 그의 유일한 취미는 여색(女色)! 화화공자(花花公子) 기검하라고 하면…… 그 근처
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가 고개를 흔들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기녀(妓女),
유부녀, 과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후리는 패륜아로서……."
그때 사내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고있던 단엽상이 가볍게 손을 저었
다.
"천경! 그만 가서 쉬거라."
"존명!"
천경은 또 한 번 머리가 깨져라 바닥에 처박았다. 연후, 엎드린 상태 그대로 개(犬)처럼 기
어서 뒤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문득 그를 바라보던 단엽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경! 너의 허리가 좀 굵어진 것 같구나……."
그저 무심하게 뱉아진 한 마디였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천경은 갑자기 학질걸린 개처럼 푸들푸들 전신을 떨었다.
"대…… 대종사!"
단엽상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무서운 결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리가 굵어진다는 것은 곧 나태해졌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나태함은 열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
고로, 한 사람의 죽음은 열 사람을 살릴 수 있다!
"……."
사나이, 천경의 눈가에 눈물이 차 올랐다.
나태한 수하를 결코 그대로 두지 않는 마마파천황의 칼같은 성격을 그는 너무나도 잘알고
있었던 것이다.
충(忠)을 신조로 삼고 살아온 세월…… 그 많은 세월에 비교도 할 수 없는 짧은 나태의 시
간이 이런 결과를 부른 것이다.
하나 남은 가족을 위해 기꺼이 그는 죽어야했다.
"대종사! 부디 만수무강 하시길……."
픽!
시뻘건 핏물(血水)과 함께 허연 뇌수가 유리알처럼 잘 닦인 바닥을 더럽혔다.
천경은 스스로 머리를 박살내어 죽음의 길을 떠난 것이다.
첫댓글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