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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원전의 수명은 누가 결정하는가
―고리1호기 시민승리와 미완의 에너지민주주의
김해창 | 경성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
들어가며 ― 시민이 멈춘 원전, 다시 돌아온 수명연장
우리는 원전을 멈춰 세운 적이 있다. 그것도 정부가 먼저 안전성을 깨닫고 결단해서가 아니었다. 원전사업자가 경제성을 따져 스스로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원전 주변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더 이상 이 위험을 떠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냈고, 그 목소리가 지역사회를 움직이고 정치권을 움직여 마침내 중앙정부의 정책을 바꾸었다. 고리1호기 이야기다.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1호기는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용 원전이었다. 설계수명 30년을 다한 뒤 2007년 한 차례 계속운전이 허용됐다. 이후 다시 수명을 연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대로 됐다면 국내 최고령 원전을 사실상 50년에 가깝게 가동할 수도 있었다.
부산시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5년 2월 부산에서는 시민사회·여성계·종교계·학계·경제계·정치권 등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약 120개 단체가 '고리1호기폐쇄부산범시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시민행진과 100만인 서명운동, 부산역 시민대회, 국회의원 면담, 산업통상자원부 항의방문, 국회 기자회견과 부산시청 앞 농성이 이어졌다. 그해 6월 박근혜 정부가 고리1호기 영구정지를 권고했고 한수원 이사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필자는 당시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 2014년 11월부터 2015년 6월까지 매주 '고리1호기 폐쇄를 위한 시민행진'이 30차례 이어졌고 1,400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2015년 3월 부산역 시민대회에는 약 1,700명이 모였다.
고리1호기 폐쇄는 단순히 발전소 한 기를 멈춘 사건이 아니었다. 원전 없는 대규모 소비지역으로 전력을 보내면서 위험은 발전지역이 부담해온 구조에 대해, 중앙정부가 독점해온 원전정책에 지역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개입해 국가정책을 바꾼 사건이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고리2·3·4호기를 비롯한 노후원전의 수명연장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왜 그런가. 단순히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만 말해서는 부족하다. 우리는 고리1호기를 멈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전의 수명을 결정하는 구조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지역주민에게 실질적인 동의권이 생긴 것도 아니다. 지방정부가 원전 수명연장 여부를 결정할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된 것도 아니다. 시민이 원전 안전을 독립적으로 검증할 지속적인 제도도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 질문을 조금 달리해야 한다. '원전은 안전한가 위험한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전은 싼가 비싼가'도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원전의 수명은 누가 결정하는가. 정부인가. 원전사업자인가. 원자력안전위원회인가. 전문가인가. 아니면 그 원전 곁에서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시민인가.
고리1호기 폐쇄는 이 질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시민적 응답이었다. 그러나 그 응답은 아직 제도화되지 못했다. 그것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미완의 에너지민주주의'다.
제1절 우리는 원전을 멈춰 세운 적이 있다
1. 2007년의 실패가 2015년의 승리를 만들었다
고리1호기 수명연장 반대운동은 처음부터 성공한 것이 아니다. 2007년 첫 번째 수명연장 저지운동은 실패했다. 체르노빌원전사고 이후 부산에서도 고리원전을 둘러싼 반핵운동이 꾸준히 이어졌다. 원전 주변 환경피해와 핵폐기물 문제, 신고리원전 증설과 부산·울산지역 핵단지화 문제 등이 차례로 제기됐다. 1994년에는 부산환경운동연합이 고리1호기의 안전성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고, 이후 국내외 반핵연대도 확대됐다.
그러나 2007년의 운동은 주로 환경단체 중심이었다. 수명연장 문제를 부산사회 전체의 의제로 확대할 조직력과 전략이 충분하지 못했다. 지역주민운동과 환경운동 사이에도 보상문제를 둘러싼 간극이 있었다. 결국 고리1호기는 2007년 12월 다시 가동됐다.
이 실패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환경단체만의 힘으로는 국가 원전정책을 바꾸기 어렵다. 원전을 둘러싼 정책을 바꾸려면 지역주민과 일반 시민사회, 종교계, 학계, 경제계, 정치권과 지방정부까지 참여하는 훨씬 넓은 사회적 연대가 필요했다. 2015년의 승리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2007년의 실패에서 배운 결과였다.
2. 후쿠시마와 세월호가 안전의 의미를 바꾸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부산시민의 원전 인식을 크게 바꾸었다. 사고 발생 열흘 남짓 뒤인 3월 23일 고리원전 앞바다에는 '고리=제2의 후쿠시마?'라는 현수막을 단 고무보트가 나타났다. 다음 날 '핵없는 안전한 부산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고리1호기 폐쇄, 부산 핵단지화 저지, 핵사고에 대비한 시민안전대책이 주요 의제가 됐다.
2012년에는 고리1호기 정전사고 은폐가 알려졌다. 전력공급이 일시적으로 끊긴 사고 자체도 문제였지만 시민들의 불신을 더욱 키운 것은 사고가 곧바로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때부터 원전 안전은 기계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정부와 원전당국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신뢰의 문제가 됐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안전에 대한 시민사회의 인식을 다시 한번 바꾸었다. 원전사고가 날 확률이 몇 퍼센트인가라는 전문가의 설명보다 "사고가 났을 때 정부가 정말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해졌다. 원전사고가 발생하면 수백만 주민을 어떻게 대피시킬 것인가. 학교에 있는 학생과 병원 환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도로와 터널이 정체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부와 사업자는 정보를 제때 공개할 것인가. 안전의 범위가 원자로 내부에서 도시 전체의 대응능력으로 확장된 것이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고리1호기 폐쇄가 부산시장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등장했다. 당시 여야 후보 모두 고리1호기 폐쇄 문제를 공약에 반영했다. 고리1호기는 더 이상 환경단체만의 의제가 아니었다. 부산사회 전체가 외면하기 어려운 지역의제가 됐다.
3. 원전 반대에서 에너지분권으로
이 시기 부산에서는 또 하나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원전은 위험하다'는 주장에 머물지 않고 누가 전기를 만들고, 누가 사용하며, 누가 위험을 부담하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했다.
2013년 말 출범한 '부산전기료반값추진시민운동본부'가 그 한 사례였다. 주장의 핵심은 단순히 부산시민의 전기요금을 낮춰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대규모 발전시설과 위험은 지역이 떠안는데 전국적으로 동일한 전기요금체계를 적용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문제제기였다. 이 논의는 이후 발전지역과 대규모 소비지역 사이의 지역별 차등요금 논의로 확대됐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원전안전이용부담금'을 제안했다. 2014년 조사 결과 탈원전정책을 위해 부산시민은 1인당 월평균 7,727원을, 서울시민은 월평균 4,556원을 부담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전의 편익은 넓게 누리면서 위험은 특정 지역에 집중시키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부산의 탈핵운동은 이미 에너지정의와 에너지지역분권운동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4. 120개 단체가 하나가 되다
2015년 고리1호기 범시민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폭넓은 연대였다. 환경단체뿐 아니라 시민·여성·소비자·사회복지단체, 기독교·천주교·불교·원불교 등 종교계, 대학과 학계, 경제계와 여야 정치권까지 약 120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들의 원자력에 대한 철학이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는 동의했다. "한 번 수명을 연장한 국내 최고령 원전을 다시 연장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고리1호기 범시민운동의 중요한 교훈이 있다. 사회운동이 성공하려면 모든 참가자가 똑같은 철학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고리1호기에서는 그것이 '2차 수명연장 저지'였다.
5. 시민·정치·정부를 동시에 움직이다
범시민운동은 거리집회에만 머물지 않았다. 시민행진과 서명운동을 통해 시민여론을 만들었고, 국회의원과 여야 대표를 찾아가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부산시장과 부산시의회를 움직였고, 세종시 산업통상자원부를 찾아갔으며,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국가에너지위원회가 열리는 서울까지 올라갔다.
이 세 축의 결합이 중요했다. 거리운동만 했다면 정부는 일부 반대단체의 집회라고 치부했을 수 있다. 정치권만 움직였다면 정쟁으로 흘렀을 수 있다. 전문가 토론만 했다면 시민의 공감을 넓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민운동, 제도정치, 정부 압박을 동시에 진행했기에 국가정책을 움직일 수 있었다. 당시 기록도 고리1호기 폐쇄의 성공요인으로 시민적 공감, 진보·보수 범시민연대, 부산시장과 여야 정치권의 참여, 대국회·대정부 전략, 시민행진과 서명운동, 지역언론의 지속적인 보도를 꼽고 있다.
2015년 6월 12일 박근혜 정부는 고리1호기 영구정지 권고 방침을 밝혔다. 6월 16일 한수원 이사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시민이 국가정책을 바꿨다.
그러나 바로 이 성공 속에 다음 숙제도 들어 있었다. 2015년 당시 필자는 이미 고리2호기는 2023년, 고리3호기는 2024년, 고리4호기는 2025년에 설계수명이 끝나므로 이들의 수명연장을 막는 것이 다음 과제라고 썼다. 아울러 폐로과정 정보공개와 시민참여, 방재대책, 지역에너지분권과 부산의 에너지전환도시 전략을 제안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 문제를 몰랐던 것이 아니다. 과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제를 제도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제2장 탈원전은 왜 되돌아갔는가
1. 시민의 승리는 왜 제도가 되지 못했나
고리1호기폐쇄부산범시민운동본부는 목표를 달성한 뒤 해산했다. 다양한 성향의 단체들이 고리1호기 폐쇄라는 하나의 목표로 모였기 때문에 탈핵·에너지전환이라는 장기적 과제까지 조직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에도 필자는 범시민운동본부 해산으로 탈핵에너지전환을 추진할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힘이 약해지고 있음을 우려했다. 부산시와 부산시의회 역시 고리1호기 폐쇄에서 분출된 시민에너지를 지역에너지분권과 에너지전환을 위한 강력한 제도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결국 남은 것이 없었다. 설계수명 종료 후 폐쇄라는 법적 원칙도, 원전지역 지방정부와 주민의 실질적인 결정권도, 원전 안전과 에너지전환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정책화하는 범시민적 상설 거버넌스도 남지 않았다. 정책결정 하나는 바꿨지만 정책결정 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 제도적 공백 위에서 이후 세 정부의 에너지정책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2. 문재인 정부 ― 방향은 바꿨지만 전환을 제도로 완성하지 못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한국 에너지정책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정부는 '에너지전환 로드맵'을 통해 신규원전 건설계획 백지화, 노후원전 수명연장 금지, 원전의 단계적인 감축을 공식화했다.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재생에너지 3020 정책을 통해 원전·석탄 중심의 전력체계에서 재생에너지와 분산형 전원, 수요관리 중심으로 옮겨가는 방향도 제시했다. 정부 정책에는 환경성과 국민안전, 분산형 에너지시스템, 에너지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가치가 명시적으로 들어갔다. 이는 고리1호기 시민운동의 요구가 국가정책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전환은 방향은 분명했으나 제도적으로는 미완의 전환이었다.
가장 큰 한계는 정책을 정권교체에도 유지될 수 있는 법적 원칙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노후원전 수명연장 금지는 정부정책이었다. 그러나 '설계수명을 다한 원전은 원칙적으로 폐쇄한다'는 기준 자체를 후임정부도 따라야 할 불가역적인 법제도로 정착시키지 못했다. 결국 탈원전은 정책이었지만 충분히 강한 제도는 아니었다.
두 번째 한계는 에너지원은 전환하려 했지만 에너지 권력의 중앙집중구조를 충분히 바꾸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부는 분산형 에너지체제와 에너지민주주의를 내걸었다. 그러나 실제 원전정책의 핵심 결정구조는 중앙정부–한수원–원안위를 중심으로 유지됐다. 원전지역 지방정부와 주민에게 원전 계속운전이나 폐쇄에 관한 실질적인 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중앙정부가 원전을 늘리는 것은 중앙집권이고 중앙정부가 원전을 줄이면 민주적인 정책이라는 식의 접근은 충분하지 않다. 에너지전환은 에너지원만의 전환이 아니라 결정권의 전환이어야 한다.
세 번째로 신고리5·6호기 공론화의 성과를 상설적인 제도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2017년 공론화에는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참여해 33일 동안 숙의했고, 최종적으로 59.5%가 건설재개를 선택했다. 동시에 원자력발전을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도 다수를 차지했다. 정부는 결과를 수용해 신고리5·6호기 건설을 재개하면서 원전의 단계적 감축정책을 병행했다. 공론화 자체는 의미 있는 민주주의 실험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왜 이러한 숙의방식을 노후원전 계속운전, 사용후핵연료, 원전 폐로와 같은 장기적 갈등사안의 상설적인 결정방식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는가. 공론화의 경험은 남았지만 에너지 숙의민주주의의 제도는 남지 않았다.
네 번째 한계는 산업·고용·지역전환 문제다. 정부가 원전지역·산업·인력을 위한 보완대책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원전산업 종사자와 원전지역 주민에게 "원전 이후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충분히 체감할 만한 답을 제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원전산업계는 그 틈을 '원전 생태계 붕괴'라는 강력한 정치적 담론으로 채웠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경험을 "탈원전을 해서 실패했다"고 단순화하는 것은 핵심을 잘못 짚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 탈원전을 에너지민주주의·지역분권·산업전환의 제도로 충분히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정부에서 정책의 역전이 가능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살아남는 정책은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법과 제도, 산업과 시장, 지역사회와 시민의 삶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3. 윤석열 정부 ― '탈원전 종식'과 수명연장의 일상화
윤석열 정부는 출범 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정책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정부가 스스로 정리한 원전정책 성과에는 '탈원전 종식', 신한울3·4호기 건설 재개, 원전 10기의 계속운전 절차 신속 추진, 원전 생태계 복원과 수출산업화가 핵심으로 제시됐다. 계속운전 대상에는 고리2·3·4호기를 비롯해 한울1·2호기, 한빛1·2호기, 월성2·3·4호기가 포함됐다.
이것은 단순한 정권교체에 따른 발전원 비중 조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원전정책의 기본철학 자체가 바뀌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설계수명 종료는 원칙적으로 폐쇄를 준비하는 시점이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설계수명이 끝난 원전 상당수를 계속운전하는 것이 국가의 공식정책이 됐다. 따라서 설계수명의 의미도 달라졌다. '여기까지 운전하는 것을 기본으로 설계한 기간'에서 '한 번 더 운전 여부를 심사하는 시점'으로 바뀐 것이다.
필자는 신규원전 확대 이상으로 이 변화가 중요하다고 본다. 신규원전은 부지 선정과 건설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이미 존재하는 노후원전을 10년 더 운전하는 것은 비교적 빠르게 원전 발전량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정부와 사업자에게는 효율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의 입장에서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발전설비를 빨리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설계수명을 다한 원전을 계속 돌려야 할 충분한 이유인가.
첫 번째 문제는 계속운전의 예외성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설계수명을 다한 원전을 하나하나 특별한 사안으로 보고 사회적 필요성을 검토한 것이 아니라 10기 원전의 계속운전을 정책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 계속운전이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인 원전운영 방식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졌고 원전 안전은 경시됐다.
두 번째 문제는 원전정책을 산업진흥정책과 매우 강하게 결합했다는 점이다. 정부는 원전생태계 복원과 일감 확대, 원전 수출산업화를 중요한 성과로 제시했다. 원전산업과 원전수출을 정부가 전략산업으로 추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산업진흥의 강도가 커질수록 안전규제기관에는 더 높은 독립성과 투명성이 요구된다. '원전산업을 살려야 한다'는 정책목표와 '이 원전을 더 운전해도 안전한가'라는 규제판단은 엄격하게 구분돼야 한다.
세 번째는 계속운전 논의가 주로 기술적 안전성과 전력수급·경제성의 문제로 좁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설계수명을 다한 원전을 추가로 운전할 것인지 판단하려면 안전성뿐 아니라 대체전원, 핵폐기물, 사회적 비용, 지역수용성, 미래세대의 부담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고리2호기 문제를 지역주권·생명권·세대정의·산업전환이 맞물린 구조적인 문제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네 번째는 지역주민의 실질적인 결정권이 여전히 약했다는 점이다. 주민 의견수렴 절차는 존재하지만 원전지역 지방정부와 주민이 계속운전 여부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제도적 권한은 제한적이다.
결국 윤석열 정부 원전정책의 문제는 단순히 원전을 확대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노후원전 계속운전을 정상적인 국가 에너지정책으로 만들면서도 그 결정구조는 여전히 중앙집권적으로 유지했다는 데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고리1호기 시민승리가 제기했던 에너지민주주의의 질문이 다시 뒤로 밀려난 것이다.
4. 이재명 정부 ― 재생에너지 대전환과 원전 병행의 딜레마
이재명 정부의 에너지정책을 윤석열 정부와 같은 정책이라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현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분명한 국가전략으로 삼고 있다. 2026년 발표된 제1차 재생에너지 기본계획은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2035년 발전량 비중 30% 이상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재생에너지 주력전원화'와 '에너지 대전환'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대규모 보급과 함께 지방정부 참여, 주민수용성과 소득공유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은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방정부와 지역주민의 참여를 재생에너지 정책의 중요 요소로 보는 것은 에너지분권의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현 정부 에너지정책의 가장 큰 긴장과 모순이 나타난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대전환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들어 있는 신규 대형원전 2기를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2026년 1월 공식화했다.
여기에서는 적어도 신규원전 문제와 노후원전 계속운전 문제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신규원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장기 전력수요, 탄소중립, 건설기간과 비용 등을 놓고 별도의 사회적 논쟁을 할 수 있다. 반면 노후원전은 이미 당초 설정된 설계수명을 다한 시설이다. 고리2호기 계속운전 추진은 윤석열 정부 시기에 본격화됐지만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최종 계속운전 허가는 2025년 11월 13일, 현 정부 시기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현 정부는 "전 정부에서 시작된 절차"라고만 말하고 비켜설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만든 노후원전 계속운전의 정책경로를 그대로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재생에너지 대전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노후원전 원칙을 만들 것인가는 현 정부의 몫이다.
첫 번째 문제는 현 정부의 노후원전정책에 독립적인 원칙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에는 2030년, 2035년 목표와 구체적 보급전략이 있다. 그에 비해 설계수명을 다한 노후원전을 언제까지 어떤 원칙으로 계속운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안전을 전제로 활용한다'는 것 이상의 분명한 사회적 기준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실용주의가 발전원 구성의 단순한 절충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원전도 하고 재생에너지도 하고 필요하면 다른 전원도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전환에는 선택과 우선순위가 따른다. 정부재정과 연구개발 인력, 전력망과 저장시설에 대한 투자를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대규모 중앙집중형 발전체계를 얼마나 오래 유지하면서 분산형 재생에너지체제로 옮겨갈 것인가. 재생에너지를 '주력전원'으로 만들겠다면 노후원전 계속운전도 그 장기적인 전환경로 속에서 판단해야 한다.
세 번째는 AI 시대의 전력수요를 원전 확대의 포괄적인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AI와 데이터센터, 반도체산업의 확대는 향후 전력수요를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AI에 전기가 많이 필요하다'와 '그러므로 노후원전을 계속 돌려야 한다' 사이에는 수많은 정책선택이 존재한다. 따라서 질문은 'AI 시대에 원전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AI 시대에 가장 빠르고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유연하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네 번째는 재생에너지에서 강조하는 지역주권의 원칙을 원전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에서 지방정부와 주민의 참여, 주민수용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왜 태양광과 풍력에서는 지역주민이 사업의 주체이고 수용성이 중요한데, 노후원전 수명연장에서는 지역주민이 주로 의견제출자의 위치에 머무는가. 에너지민주주의는 에너지원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아니다.
다섯 번째로 현 정부는 앞으로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새로운 장기원칙을 세워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노후원전의 계속운전을 자동적인 전력공급 전제로 넣을 것이 아니라, 설계수명 종료 후 폐쇄를 기본으로 하고, 기술적 안전성뿐 아니라 전력수급상 필요성, 대체수단, 사회적 비용과 지역수용성을 충분히 검증한 뒤 예외적으로 계속운전을 판단하는 새로운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의 미완과 윤석열 정부의 역주행을 동시에 넘어서는 길이다.
5. 세 정부를 관통하는 문제 ― 정권이 아니라 원칙이다
문재인 정부는 원전을 줄이려 했다. 윤석열 정부는 원전을 확대하고 오래 사용하려 했다. 이재명 정부는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병행하려 한다. 그러나 세 정부를 평가할 때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시민과 지역사회에 에너지 결정권을 얼마나 돌려주었는가. 이 기준으로 보면 세 정부 모두 아직 미완이다. 그래서 논쟁을 '탈원전이냐 친원전이냐'에서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지켜야 할 에너지정책의 민주적 원칙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제3장 고리2호기가 던지는 질문
1. 설계수명은 폐쇄의 기준인가, 재심사의 기준인가
설계수명이 끝나는 다음 날 원전이 갑자기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부품을 교체하고 안전검사를 받았다고 새 원전과 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40년이 됐으니 무조건 위험하다'와 '검사했으니 안전하다'라는 단순한 논쟁을 넘어야 한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설계수명을 넘어 이 원전을 계속 운전해야 할 사회적 필요성이 충분한가." 설계수명 종료는 물리적인 절대수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해당 원전을 앞으로도 사용할 것인지를 다시 판단하는 중요한 정책적 경계가 되어야 한다. 폐쇄를 기본값으로 하고 계속운전을 예외로 두는 원칙이 지금 필요하다.
2. 안전하다는 것과 계속 돌려야 한다는 것은 다르다
현재의 계속운전 논의는 기술적인 안전성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운전할 수 있는가와 운전해야 하는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원안위가 담당해야 할 것은 기술적 안전성이다. 경년열화와 주요 구조물·기기의 상태, 중대사고 대처능력, 방사선환경영향을 엄격하게 심사해야 한다.
그런데 안전기준을 통과했다고 곧바로 계속운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원전이 국가 전력수급상 꼭 필요한가. 대체할 방법은 없는가.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와 폐로지연 비용까지 포함해도 경제적인가. 지역사회가 추가 위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따라서 '기술적 안전성 심사'와 '사회적 계속운전 필요성 심사'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기술적 안전성은 원안위가 판단한다. 그 뒤 전력수급, 대체수단, 사회적 비용, 핵폐기물, 지역수용성을 공개적으로 검토하는 별도의 사회적 판단절차를 두자는 것이다. 기술의 질문은 기술로 엄격하게 판단하고, 사회적 선택은 민주주의로 판단하자는 것이다.
3. 계속운전의 입증책임은 정부와 사업자에게
지금까지 시민사회는 "왜 노후원전을 폐쇄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설명해왔다. 그러나 논리를 뒤집을 필요가 있다. 설계수명은 이미 끝났다. 그렇다면 당초 예정된 기간을 넘어 계속 사용하려는 정부와 사업자가 왜 굳이 더 운전해야 하는지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해당 원전이 없으면 전력수급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재생에너지·ESS·전력망·수요관리로 대체할 수 없는가. 추가 유지관리와 사용후핵연료 비용을 포함해도 경제적인가. 기후재난과 복합재난 조건에서도 충분히 안전한가. 지역사회의 동의를 얻었는가. 이를 '계속운전 입증책임의 원칙'으로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4. 노후원전의 경제성에 빠진 비용
노후원전 수명연장의 강한 논리는 경제성이다. 이미 건설된 발전소를 조금 더 사용하는 것이 새 발전소를 짓는 것보다 싸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무엇을 비용에 넣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기존 고리2호기 정책자료에서도 한수원의 계속운전 경제성평가와 과거 고리1호기 수명연장의 사후적 경제성평가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문제로 제기했다.
원전의 경제성에는 추가 안전설비 보강비, 유지관리비, 사용후핵연료 저장·처리비, 방재비용, 폐로지연비용 등을 포함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체투자의 기회비용을 보아야 한다. 같은 돈과 시간을 재생에너지와 ESS, 전력망, 에너지효율에 투자했을 경우와 비교해야 한다. 질문은 "이 원전을 계속 돌리면 얼마나 이익인가"가 아니라, "같은 사회적 자원을 어디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가장 효율적인가"가 되어야 한다.
5. 전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과 노후원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르다
전력수요가 증가할 수 있다는 전망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전력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과 특정 노후원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기존 정책자료에서는 고리2·3·4호기가 전체 전력설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제한적이며 일부 노후원전이 정지된 기간에도 전력수급이 유지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국가 전력수급에 결정적인 발전소가 아니라면 왜 지역은 추가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6. 기후위기는 원전의 명분인 동시에 새로운 위험이다
원전은 발전과정의 직접 탄소배출이 적다는 점에서 기후위기 대응수단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동시에 기존 원전에 새로운 위험조건을 만든다. 폭염과 해수온 상승, 강력한 태풍, 집중호우와 침수 같은 극한기상이 원전의 외부조건을 바꿀 수 있다. 고리원전에서도 과거 침수와 태풍에 따른 정지 등의 사례가 있었다.
따라서 1980년대에 설계된 원전을 2030년대까지 운전한다면 당시의 설계기준만을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의 원전을 미래에 사용하려면 미래의 기후조건으로 평가해야 한다.
7. 위험과 편익의 공간적 불평등
원전에서 생산한 전력은 전국이 사용한다. 그러나 사고위험과 방재 부담, 사용후핵연료는 발전소 주변지역에 더 집중된다. 이를 단순히 수도권과 지역의 대립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부산·울산·경남 시민과 산업도 원전의 전력을 이용한다. 핵심은 편익과 위험이 같은 방식으로 배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너지정의의 문제다. 지역 지원금을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보상과 함께 권한의 분배가 필요하다.
8. '30km 실제 주민대피 가능성'을 평가하자
원전사고에 대해 시민들이 가장 쉽게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사고가 나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필자는 고리1호기 폐쇄 당시에도 방사선비상계획구역 확대, 방호물품, 실질적인 방재훈련을 강조한 바 있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계속운전 심사에서 30km권 실제 주민대피 가능성 평가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평일 출퇴근시간에는 어떻게 되는가. 학교 학생들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태풍이나 집중호우로 일부 도로가 막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병원 중환자와 요양시설 노인, 장애인과 차량 없는 시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외국인 노동자와 관광객에게는 어떻게 정보를 전달할 것인가. 실제 인구·교통 데이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해야 한다. 발전소가 안전한가와 사고가 났을 때 도시가 시민을 지킬 수 있는가는 서로 다른 안전의 문제다. 둘 다 검증해야 한다.
9. 공람을 넘어 결정참여로
전문적인 평가서를 주민에게 공개했다고 시민참여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적인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제출한 의견이 어떻게 검토됐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의견이 실제 최종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고리1호기 시민들은 단순히 의견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직접 공부하고 토론했다. 서명하고 걸었다. 정치인들을 만났다. 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실제 정책을 바꾸었다. 원전 수명연장 역시 '의견수렴'에서 '결정참여'로 발전해야 한다.
제4장 고리1호기 시민승리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
고리1호기 시민승리를 완성한다는 것은 고리2호기 한 기를 다시 멈추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같은 싸움을 반복하지 않도록 원전의 수명을 결정하는 규칙 자체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앞 장에서 제기한 원칙들 ― 폐쇄를 기본값으로 하는 설계수명, 기술심사와 사회적 필요성 심사의 분리, 계속운전 입증책임의 전환 ― 을 제도로 옮기려면 다음이 필요하다.
첫째, 위험을 더 많이 부담하는 지역에 그만큼 더 큰 권한을 주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지역 거부권에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강화된 지역 동의권은 필요하다. 원전 소재·인접 지방정부와 주민대표, 시민사회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법정기구를 만들 수 있다. 지방의회의 동의절차나 지역 공론화도 검토할 수 있다. 지역이 반대하는데도 국가적 필요 때문에 계속운전해야 한다고 정부가 판단한다면, 왜 그것이 불가피한지 정부가 공개적으로 입증하도록 해야 한다. 기존 정책안에서도 지방정부의 동의·거부권 법제화와 독립 안전성평가기금의 설치를 제안한 바 있으니 보다 심도 있는 공개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지역 차원의 독립적인 안전감시체계를 세워야 한다. 필자는 2015년 고리1호기 폐쇄 직후부터 프랑스 지역정보위원회와 같은 시민참여·정보공개기구를 제안해왔다. 이를 발전시켜 지역 대학의 공학·환경·의학 전문가, 재난·소방·교통 전문가, 지방정부와 지방의회, 시민사회와 주민대표가 참여하는 상설적인 지역 독립 원전안전기구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재원도 원전사업자의 임의지원이 아니라 법률에 따른 지역 안전기금으로 마련해야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 경제성평가를 사업자의 발전원가 중심에서 사회적 비용·편익 평가로 확대해야 한다. 안전보강비와 유지관리비, 방재비용, 사용후핵연료 관리비, 폐로지연비용뿐 아니라 대체에너지 투자의 기회비용까지 포함해야 한다.
넷째, 노후원전 폐쇄를 주장하면서 원전지역의 노동자와 경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고리지역을 장기적인 에너지전환지역으로 지정해 원전해체산업, 재생에너지, ESS와 전력망, 안전·해체 연구 및 교육, 원전 노동자의 재교육과 고용전환을 하나의 지역전략으로 묶을 필요가 있다. 2015년에도 장기간 이어질 폐로기간 동안 별도의 지역지원제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탈원전은 원전지역을 버리는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원전지역이 새로운 에너지산업으로 가장 먼저 전환하는 정의로운 전환이어야 한다.
시민운동 역시 달라져야 한다. 고리1호기 운동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시민이 쉽게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명확한 목표를 만들어야 한다. 안전과 생명을 진영의 의제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시민운동과 제도정치를 연결해야 한다. 지방정부를 움직여야 한다. 구호만이 아니라 데이터와 정책대안을 가져야 한다. 지역언론과 지속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 뒤에 제도를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은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제도는 남아야 한다.
앞으로 탈핵운동도 '원전 반대'의 언어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 원전을 찬성하는 시민도 안전할 권리는 있다. 따라서 먼저 지역안전권 운동으로 확장할 수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위험을 알 권리, 독립적으로 안전성을 검증할 권리, 실질적인 대피계획을 요구할 권리, 원전 수명연장 결정에 참여할 권리다. 여기서 다시 에너지주권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떤 에너지를 어디에서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 재생에너지의 이익을 주민과 어떻게 나눌 것인지, 에너지 소비를 어떻게 줄이고 분산할 것인지에 시민과 지방정부가 참여하는 것이다. 탈핵에서 지역안전권으로, 지역안전권에서 에너지주권으로, 에너지주권에서 미래세대의 권리로 나아가야 한다.
원전 계속운전은 미래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수명을 연장하면 사용후핵연료가 더 발생한다. 현재세대는 전력을 사용하지만 장기간 폐기물을 관리해야 할 세대는 아직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도 없는 미래세대다. 따라서 노후원전 수명연장에는 안전성과 경제성뿐 아니라 세대정의라는 기준도 들어가야 한다.
맺으며 ― 에너지의 최종 주권자는 시민이다
2015년 고리1호기 폐쇄 결정 뒤 필자는 이렇게 썼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은 같다. 오히려 더 절실하다. 기후위기는 심해졌다. AI와 데이터센터, 반도체산업은 더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재생에너지와 ESS, 전력망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에너지안보와 산업경쟁력도 중요하다.
그럴수록 에너지정책을 단순히 전기를 몇 kWh 더 만드는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떤 기술을 선택할 것인가.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인가. 위험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편익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결정할 것인가이다.
고리1호기에서 부산시민은 이미 하나의 답을 보여주었다. 시민이 국가에너지정책을 바꿔냈다. 그래서 고리1호기 폐쇄는 원전 한 기의 폐쇄를 넘어선다. 대한민국 에너지민주주의의 중요한 시민 실험이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시민의 승리를 법과 제도로 만들지 못했기에 고리2호기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다시 마주했다. 앞으로 고리3·4호기와 다른 노후원전에서도 같은 질문은 이어질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원전의 수명은 누가 결정하는가. 전문가는 기술적 안전성을 판단할 수 있다. 정부는 전력수급을 계획할 수 있다. 사업자는 발전소를 운영한다. 규제기관은 법과 기준에 따라 허가 여부를 심사한다. 그러나 한 사회가 어떤 위험을 얼마나 감수하고 어떤 에너지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는 그들만의 권한일 수 없다. 그 최종 결정에는 그 위험을 안고 살아갈 지역주민과 주권자인 시민이 있어야 한다.
에너지의 최종 주권자는 시민이다. 고리1호기의 역사는 이미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역사를 제도로 완성하는 일이다. 그것이 고리1호기 폐쇄운동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숙제이자, 기후위기와 AI 시대 대한민국이 만들어가야 할 에너지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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