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대한 낙하 끝에 찾아온 평화
히말라야의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은 설산의 능선을 타고 내려와 살갗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눈 앞에 펼쳐진 산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거대한 침묵처럼 서 있었다. 희박한 공기 탓인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조여 왔다.
도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앞에는 지연이 서 있었다.
오랜 세월 마음 한구석에 묻어 두었던 사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도, 막상 마주할 순간이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 속에는 하지 못한 말들이 있었다. 서로 다르게 기억한 순간들이 있었고, 당시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후회하게 된 선택들도 있었다.
도진은 지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흔적을 남겼다. 눈가에는 잔주름이 생겼고, 표정에는 지난날의 기쁨과 슬픔이 함께 배어 있었다.
그러나 도진에게는 여전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한때는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환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이 났고, 함께 걷는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곁에서 멀어졌다.
무엇이 결정적인 이유였는지, 누구의 잘못이 더 컸는지 이제 와서 정확하게 가려내기는 어려웠다. 그때는 옳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상처로 남기도 했다.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 때문에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다.
도진은 자신이 그 시간을 잘 견뎌 왔다고 생각했다.
일했고, 사람들을 만났고,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왔다. 지난날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쓴 날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뜻밖의 순간에 되살아났다.
익숙한 노래를 들을 때면 지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걷다가도 문득 함께 걸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 웃음과 닮은 지연의 표정을 기억해 내기도 했다.
도진은 그런 마음을 애써 밀어냈다.
지나간 일이라고,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스스로 말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이라는 말은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움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짧은 말이었다.
오랜 세월을 건너온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도진은 대답하려 했다.
잘 지냈다고 말하고 싶었다. 별일 없이 살아왔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지나간 일은 모두 잊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괜찮은 척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괜찮지 않은 날에도 괜찮다고 했다. 외로운 날에도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순간에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른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라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미 지나간 일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스스로 다그쳤다.
그렇게 버티는 동안 마음속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도진은 지연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 도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미안해."
겨우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어느 시절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도진 자신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말 속에는 오래 묵혀 둔 후회와 미처 전하지 못한 진심이 함께 들어 있었다.
"정말 미안해."
두 번째 말은 첫 번째보다 더 작았다.
도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차가운 땅 위에 스며들었다.
곧이어 또 한 방울이 떨어졌다.
도진은 더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그동안 꾹 눌러 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억울했던 날들, 후회했던 순간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외로움이 뒤섞여 가슴을 흔들었다.
그는 어깨를 떨며 울었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눈물이 아니었다. 용서를 얻기 위한 눈물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강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감춰 두었던 자신의 모습을 더는 숨길 수 없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지연도 울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한 걸음 다가와 도진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도진은 그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서로가 얼마나 오랫동안 말없이 버텨 왔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한참 뒤, 지연이 조용히 말했다.
"나도 힘들었어요."
도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막상 말하려고 하면 자꾸 엉뚱한 말만 나왔어요."
지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떤 일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만 아팠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만 후회했던 것도 아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왔지만, 두 사람 모두 쉽게 꺼내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도진은 자신이 겪은 아픔에만 매달려 있었다. 지연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는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이 기억하는 상대의 모습에 기대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오래전의 기억 속에 상대를 가두어 둔다. 자신이 받은 상처는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자신이 남긴 상처는 잊고 살아간다.
도진은 지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잊은 줄 알았어."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잊으려고 한 적은 있어요. 하지만 잊는 것과 사라지는 건 다른 일이더라고요."
그 말이 도진의 마음속에 오래 머물렀다.
두 사람은 더 많은 말을 나누었다. 그러나 모든 오해가 한순간에 풀린 것은 아니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고, 이미 겪은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변명하기 보다 들으려 했고,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보다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건너왔는지 헤아리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했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설산의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도진은 눈가를 닦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슬픔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후회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더는 그것들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문득 어린 시절 보았던 비구름을 떠올렸다.
구름이 비를 쏟아내면 하늘은 한동안 어두워진다. 하지만 비가 그친 뒤에는 구름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젖은 대지는 새로운 햇살을 받아들인다.
마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슬픔을 드러낸다고 해서 사람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지난 세월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후회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때 비로소 다시 살아갈 자리가 생기는지도 몰랐다.
도진은 자신이 늘 강해야 한다고 믿었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강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일이 아니었다. 상처받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하는 것,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이 더 큰 용기일 수 있었다.
그는 지연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설산을 바라보았다.
눈 덮인 봉우리 위로 희미한 햇빛이 번지고 있었다. 구름은 천천히 흩어졌고, 멀리 떨어진 능선의 윤곽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도진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살아간다.
누구도 자신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건강했던 사람도 어느 날 병을 만날 수 있고, 내일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도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을 수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두려워질 때도 있다.
그러나 끝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언젠가 헤어질 사람이라면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끝날 삶이라면 남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을 조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전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굳이 내일까지 미룰 필요가 있을까?.
도진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미루며 살아왔는지 생각했다.
먼저 사과를 미루고. 고맙다는 말도 미루고.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감추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면 그때 마음을 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벽한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삶은 늘 무언가가 부족한 상태로 흘러갔다. 돈이 부족할 때는 시간이 부족했고, 시간이 생기면 다른 걱정이 찾아왔다. 그렇게 내일로 미루는 사이 오늘은 지나가 버렸다.
도진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삶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부족한 채로, 때로는 상처를 앓은 채로,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도 살아가는 것이었다.
거창한 성공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았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도 괜찮았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오늘의 작은 기쁨을 발견하고, 하루를 마칠 때 후회할 일을 조금씩 줄여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몰랐다.
그때 지연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살고 싶어요?"
도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무언가 그럴듯한 말을 찾았을 것이다. 남은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이루고 싶은 목표를 이야기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잠시 설산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너무 멀리 보면서 살지 않으려고."
지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으면 밥을 먹고, 걸을 수 있으면 같이 걷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미루지 않고 말하면서 살고 싶어. 특별한 일이 없어도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면 고맙게 생각하면서."
도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는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하지 않으려고."
지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발밑의 눈이 낮게 밟혔다. 차가운 바람은 여전히 불었지만, 도진은 더는 그 바람을 피하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지연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며 눈 앞에 펼쳐진 길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두 사람에게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오늘의 깨달음이 앞으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도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지나온 길 위에 발자국이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지워질 흔적이었다. 언젠가는 눈이 다시 내려 그 길을 덮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걸었던 시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도진은 다시 지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구름은 비를 내려놓았고, 설산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도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삶의 임계점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더는 거짓된 자신을 붙들고 살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그때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는 다시는 완벽한 인생의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정답이 하나뿐이라면 누구나 같은 길을 걸어야 하겠지만, 사람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견뎌 온 상처가 다르며 행복을 느끼는 방식도 다르다.
누군가는 높은 산을 오르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고, 누군가는 작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에 만족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오랫동안 품어 온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은 시간을 바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정한 정답을 그대로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되,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해서 평생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일이었다.
도진은 지연과 나란히 걸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지금 살아 있었다. 지연도 곁에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아직 걸어갈 길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더 가져야 하는지보다 누구와 함께 걷고 싶은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하는지보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강한 척 버티는 것보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열고,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이 더 큰 용기라는 것을.
도진은 지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설산 너머로 햇빛이 조금씩 번져 나갔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두 사람은 이제 그 바람 속에서도 함께 걸어갈 수 있었다.
삶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지만, 아주 소중하게.
정답을 알 수 없지만, 다시 선택할 수 있게.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살아 있는 오늘을 사랑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