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세손 의겸공(1768-1830)
학문에 뛰어나 임금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는 경연참찬관이란 관직을 지내시어 통정대부의 칭호를 받으셨다.
2) 13세손 필석공(1803-1881)
총명하시고 사리에 밝아 종3품(從三品)의 벼슬을 받고, 임금의 명을 받아 죄인들을 다스리는 동지의금부사란 관직을 지내시어 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으셨다.
3) 내금문중의 전성기
위와 같이 3대를 이어 오면서 궁궐안에서 큰 벼슬을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가문의 자랑이요 길이 후손에 남을 업적이다. 당연히 묘소마다 큰 비를 세워 선영(先塋)에 감사드려야 하나 그러지 못하다. 이제 늦게나마(1997) 아비(亞碑)를 세워 위업에 감사드리고 있다.
4) 고향을 떠나버린 집안들
14세손은 세계표와 같이 15분인데도 15세손 이후로 현재까지 내금문중 종친회에 참여를 하고 있는 집안은 난음, 설천, 내금 등 3집안이다. 설리, 소량은 앞으로 참여할 예정이고, 군산집안은 화헌공 종친회에 한 번 다녀갔을뿐, 나머지 9집안은 후손이 끊어졌거나 주거지 불명이다. 따라서 이번에 펴내는 무인보(1998)에는 종전에 등재되어 있는 그대로이고 등재 신청을 추가로 한 집안만 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고향을 떠난 집안들의 그 후손들이 뿌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그것은 14세손 때 가운(家運)이 기울어져 각자 살길을 찾아 헤매다가 조선말기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초기까지의 혼란기라는 100여년간의 긴 세월이 흘러, 그 후손들이 뿌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탄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