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 내지는 실천윤리로 삼았던 나라에서 주로 유교경전의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 이와 같은 과거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천자가 귀족세력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으로서 수 · 당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중국에서 비롯된 과거제도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 때였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고려초에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건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조성되고 있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전보다 대폭 늘어난 강역과 인구를 통치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종래의 골품체제(骨品體制)만으로는 새로운 통일정권을 유지해 나가기가 어렵게 되어 새로운 통치체제, 즉 전제왕권의 수립을 꾀하였다. 이를 위하여 충과 효를 중시하는 현실적인 실천윤리인 유교의 이론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귀족적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부적 성격의 집사부(執事部)를 최고의 행정관부로 하는 전제주의적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이와 함께 신분적 제약을 받는 육두품(六頭品)출신의 지식인들이 왕권과 결탁하여 신분적 권위에 집착하는 진골(眞骨)귀족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설치되었다.
국학은 유교경전을 주로 가르치는 관리양성의 교육기관으로서 대체로 육두품의 자제들이 입학하였다. 그리고 독서삼품과는 국학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운영된 것으로서 국학생이 관직에 나아가는 등급을 정하는 시험이었다. 과거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고려 광종 9년(958년)부터였다. 광종은 개국공신세력과 지방호족세력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적인 전
제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무협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을 충량한 국왕의 관료로 삼기 위해서였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는데 있어서는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의 도움이 컸다.
-고려- (1)과거의 종류 고려시대의 과거는 크게 제술업(製述業) · 명경업(明經業) · 잡업(雜業)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제술업과 명경업은 조선의 문과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합격하면 문관이 될 수 있었기에 가장 중요시되어 흔히 양대업(兩大業)이라 하였다. 제술업은 처음에는 시(詩) · 부(賦) · 송(頌) · 시무책(時務策)이 주요시험과목으로서 때에 따라 취사되었으나, 1004년(목종 7) 삼장연권법(三場連卷法:初場에 합격해야 中場에, 中場에 합격해야 終場에 응시할 수 있는 시험제도)의 시행과 함께 초장에 경의(經義), 중장에 시 · 부, 종장에 시무책을 시험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초 · 중 · 종장의 시험과목은 시대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명경업은 제술업과 달리 《상서 尙書》 · 《주역 周易》 · 《모시 毛詩》 · 《춘추 春秋》 · 《예기 禮記》가 시험과목으로서, 그 내용을 읽고 뜻이 통하는지를 시험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는 한 · 당유학(漢唐儒學)의 영향으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양대업 가운데서도 제술업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잡업은 명경업보다 격이 떨어지는 기술관 등용시험으로서, 과거가 처음 시행된 광종 때는 의업(醫業) · 복업(卜業)만이 있었으나, 성종 때 크게 늘어났다.
`한편 고려시대는 과거의 중요한 종류의 하나인 무업이 실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과거제의 결함을 찾아볼 수 있다. 예종 때 국자감에 7재(七齋)를 설치하면서 무학재(武學齋)인 강예재(講藝齋)를 두어 무학을 가르치고 여기에서 양성된 인재들을 시험을 통하여 선발, 등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무학재는 문치주의를 지향하는 문신들의 반대로 20여년 만에 혁파되고 말았다. 그 뒤 무업은 1390년(공양왕 2)에 설치되었지만, 그 실시는 조선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고 승려들에게 승계(僧階)를 주기 위한 승과(僧科)가 시행되었으나, 이것은 관료선발 기능과는 거리가 있었다. 승과는 고려건국 초기부터 있어왔으며 광종 때의 승계확립과 아울러 성행하여 많은 국사(國師) · 왕사(王師)가 이로부터 배출되었다.
(2)예비고시와 본고시 중국의 송 · 원 시대, 그리고 한국의 고려시대는 지방장관이 고시관이 되어 시행하는 예비시험인 향시(鄕試), 그 합격자를 예부(禮部)에서 재시험하는 회시(會試:省試 또는 覆試라고도 함.), 또 그 합격자를 국왕이 스스로 고시관이 되어 시험하는 전시(殿試)의 3단계시험, 즉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과거제가 시행된 초창기에는 예부시(禮部試:성시 또는 東堂試라고도 함.) 한번의 합격만으로 급락(及落)이 결정되는 단일제였다. 비록 합격자에 대한 엄선을 기한다 하여 재시험하는 복시(覆試)가 있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이따금 실시된 것이지 정식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것마저 의종조 이후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제가 실시된 지 약 50년 뒤인 1024년(현종 15) 각 지방에서 시행하는 예비시험(1차시험)인 향시(鄕貢試 · 擧子試 · 界首官試라고도 함.)가 실시되었다. 한편 귀족관료들의 자제들에게만 입학자격이 주어지는 국자감의 유생들은 일반 응시자들과 달리 별도의 예비시험을 치렀는데, 이것이 바로 감시(監試:이 감시는 조선시대의 館試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의 小科에 해당하는 國子監試를 약칭한 감시와는 서로 뜻이 다름.)이다.
예비시험인 향시와 개경시, 그리고 감시에 합격한 수험생들은 본시험(2차시험)인 예부시에 응시하였다. 물론 이들은 각자의 전공에 따라 제술업 또는 명경업에 응시하였겠지만, 그 대다수가 고려시대에 가장 중시된 과거인 제술업에 응시하였다. 이들 예부시 응시자들은 삼장연권법의 시험절차에 따라 초장에 합격해야만 중장에 응시할 수 있고, 중장에 합격해야만 종장에 응시할 수 있었다. 물론 예외도 있어서 국자감 유생의 경우 국자감의 정기시험인 고예시(考藝試)의 성적이 좋으면 그 정도에 따라 중장이나 종장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는 예부시의 합격으로 급제가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예부시합격자에 대한 엄선을 이유로 재시험(3차시험)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이것이 복시(覆試)로서 이따금 국왕 스스로 고시하는 수도 있었으나, 대체로 문신에 명하여 고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복시는 제도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의종 이후 거의 시행되지 못하였다.
잡업도 예비고시와 본고시의 두 단계로 구분되어 시행되었다. 잡업 예비고시의 경우 양대업과 달리 지방에서 시행되는 향시 같은 것은 없었고 중앙에서만 시행되었는 데, 대체로 해당 기술을 교육하는 관부에서 주관하여 실시하였다. 율(律) · 산(算) · 서(書)의 경우 국자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으므로, 그 주관 아래 율업감시 · 산업감시 · 서업감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자감에서 가르치지 않는 의(醫) · 복(卜) · 지리(地理)의 경우 그 교육을 직접 담당한 전문기관, 즉 태의감(太醫監) · 사천대(司天臺) · 태사국(太司局)에서 각기 감시에 해당하는 예비고시를 주관하여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잡업의 제업감시(諸業監試)에 합격한 수험생들은 본시험인 예시의 여러 잡업, 즉 명법업 · 명산업 · 명서업 · 의업 · 주금업 · 지리업 등에 각기 전공별로 응시하였다. 잡업은 예시로써 급제가 결정되며, 제술업에서 이따금 실시된 바 있는 복시가 시행되지는 않았다.
한편 고려시대 과거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소과에 해당되는 시험이 새로이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1032년(덕종 1)에 생긴 국자감시와 그 100여년 뒤인 1147년(의종 1)에 생긴 승보시(升補試)가 바로 그것이다. 국자감시는 충렬왕 때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개칭된 이후 성균시라고 하였다. 이 국자감시는 국자감 입학시험으로서, 조선시대 소과의 하나인 진사시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승보시는 국자감에 7재가 생긴 뒤 국자학(國子學) · 태학(太學) · 사문학(四門學)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그 재생(齋生)을 뽑는 시험이었다. 이것이 1367년(공민왕 16) 생원시(生員試)로 바뀌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진사시와 함께 소과로 제도화되었다.
(3)응시자격 고려시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은 원칙적으로 양인신분(良人身分)이면 가능하였다. 그러나 문신등용시험인 제술 · 명경 양대업의 경우 실제로는 응시자격의 폭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즉 양대업의 경우 대체로 귀족관료의 자제인 문음자제(門蔭子弟)나 국자감 유생, 그리고 각 주현의 향리 중 향공(鄕貢)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부호장(副戶長) 이상의 아들 및 입사직(入仕職)인 중앙의 서리(胥吏) 등에게만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다만 잡업의 경우 부호장 밑의 하급향리의 자손은 물론 일반양인 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려 말기로 내려가면서 지방향리 자제들의 과거를 통한 관인으로의 진출이 늘어났다. 특히 향리들의 잡업을 통한 면역(免役) 및 신분 상승이 늘어나 향역(鄕役)을 담당할 향리의 수가 줄어들게 되자, 고려말에는 향리의 세 아들 중 한명만 잡업에 응시할 수 있다는 규제를 가하였다. 그리고 현직관리의 경우 6품 이상의 관리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그 이하의 관리만 응시할 수 있었으나 세번 이상은 응시할 수 없었다.
(4)고시절차 시험기일과 고시절차는 1084년(선종 1)에 정해진 삼년일시(三年一試), 즉 식년시(式年試)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실제로는 매년 또는 2년이나 수년 만에 한번씩 과거가 시행되었다. 시험기일은 처음에는 봄에 실시하여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 발표를 하였다. 그 뒤 1004년부터는 명경업과 잡업은 11월에 실시하여 다음해 3월에 발표하고, 제술업은 3월에 실시하여 같은 달에 발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시험기일에 앞서서 시험을 관리하고 점수를 매기는 고시관이 임명되었다. 과거를 처음 실시할 때는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만을 두었다. 그러나 972년 부고시관인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두어졌다가 곧 없어졌으나, 977년(경종 2)에 부활되었다. 신급제자에게는 합격증서로 홍패(紅牌)가 하사되었다.
(5)고시관과 급제자와의 관계 고려시대에 고시관인 지공거와 급제자 사이에는 일생을 두고 지속되는 좌주(座主) · 문생(門生)이라는 독특한 사제관계를 맺어서 하나의 학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과거 실시에 있어서 왕권의 개입을 의미하는 복시가 비교적 자주 실시되었던 고려 전기는 지공거의 권한이 커질 수 없어서, 아직 좌주 · 문생의 관계 같은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왕권이 미약해진 무신집권기에 들어와서 고시관인 좌주와 급제자인 문생의 유대관계가 강화되는 면을 보였다. 한편 좌주 · 문생의 관계는 좌주의 좌주, 문생의 문생으로 확대되어 하나의 학벌을 형성하였으며, 그 결과 고려 후기 이래 좌주 · 문생간의 유대관계를 세력기반으로 하는 문벌에 의하여 정치가 주도되었다.
-조선- 조선시대 과거에는 소과 · 문과 · 무과 · 잡과의 네 종류가 있었으며, 또한 정기시(定期試)와 부정기시(不定期試)의 구분이 있었다. 정기는 3년에 한번 열린 식년시 하나밖에 없었으나, 수시로 열린 부정기시는 증광시(增廣試) · 별시(別試) · 알성시(謁聖試) · 정시(庭試) ·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이 중 식년시와 증광시는 소과 · 문과 · 무과 · 잡과가 모두 열렸으나, 별시 · 알성시 · 정시 · 춘당대시는 문과와 무과만이 열렸다. 그리고 시험시기는 식년시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모든 시험을 식년(子 · 卯 · 午 · 酉) 정월에서 5월 사이에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향시인 초시에 합격한 자들이 서울에 올라와 복시에 응시하는 데 기간이 촉박하였고, 또 농번기에 수험생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농사에 방해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1472년(성종 3) 초시를 식년 전해인 상식년(上式年) 가을에, 복시를 식년 봄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1437년(세종 19) 이후부터 과거시험의 장소를 1소(所)와 2소로 나누어 고시한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고시관은 여러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수시관제(複數試官制)로서 상시관(上試官) · 참시관(參試官) 수인과 감시관(監試官) 1인이 임명되었고, 전시의 경우 대독관(對讀官) 3∼5인(3품 이하), 독권관(讀卷官) 3인(2품 이상)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시관은 고려시대의 지공거와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제한된 소임만을 하게 되었다.
(1)과거의 종류 1)생원 · 진사시
소과(小科)라고도 불리 우는 생원 · 진사시에는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었는데, 다같이 초시 · 복시 두 단계의 시험에 의하여 각기 100인을 뽑아 생원 · 진사의 칭호를 주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고시과목은 생원시의 경우 사서의(四書疑) 1편과 오경의(五經義) 1편으로 정해졌으나, 정조 때 오경의 중에서 춘추의(春秋義)를 빼고 사경의만 시험보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진사시의 경우는 부(賦) 1편, 고시(古詩) · 명(銘) · 잠(箴) 중 1편으로 정해졌지만, 실제로는 명 · 잠이 출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험시기는 식년시를 예로 든다면, 생원 · 진사시 초시는 상식년 8월 하순에, 복시는 식년 2월에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생원 · 진사시 초시에는 한성시(漢城試)와 향시가 있었다. 한성시는 서울 및 경기도의 수험생(경기도 수험생은 경기도의 향시가 폐지된 이후부터 응시하게 됨.)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시험장소는 대체로 1소를 예조, 2소를 성균관 비천당(丕闡堂)으로 하는 것이 상례였다. 향시는 8도에서 도단위로 실시하였다. 그 중 경기도 향시는 1603년(선조 36)에 폐지되었다. 향시도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도는 좌 · 우도, 평안 · 함경도는 남 · 북도로 나누어 고시하였다. 다만 인구가 적은 강원 · 황해도만은 나누지 않고 한 곳에서 고시하였다. 시험장소는 일정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고 소속 읍 중에서 윤번으로 정하였다. 향시의 시취액수(試取額數)는 지역별로 각기 차등이 있었다.
생원 · 진사시 복시는 각종 초시에 합격한 유생들을 식년 2월 또는 3월 서울에 모아 다시 고시하는 것으로서, 생원 · 진사 각 100인을 뽑았다. 복시 수험생들은 먼저 《소학 小學》과 《가례 家禮》를 임문고강(臨文考講)하는 조흘강(照訖講)에 합격해야만 녹명소(錄名所)에 녹명할 수 있었다. 이 시험을 학례강(學禮講)이라고도 하였다. 이어 양소(兩所) 시관들이 입격시권(入格試卷)을 가지고 입궐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양소 합격자를 한 사람씩 맞바꾸어가면서 등급을 매기되, 진사시 · 생원시별로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이어 합격자의 성명을 성적순으로 써서 국왕에게 보고하고, 또 따로 방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합격자 발표 후 길일(吉日)을 택하여 궁궐 뜰에서 방방의(放榜儀)라는 의식을 거행하여 생원 · 진사들에게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인쇄하여 합격자와 관계기관에 나누어 주었다. 생원 · 진사는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정상적인 길이었다. 생원 · 진사의 자격만으로 관직을 얻기는 어려웠으며, 얻는다 하더라도 하급직인 능참봉 · 교수 · 훈도 등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생원 · 진사만 되어도 면역의 특권이 주어져서 사회적으로는 대우를 받았다.
2) 문과
문과에는 원칙적으로 생원 · 진사가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시대 일반유생인 유학(幼學)에게도 문과의 수험자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시대는 학교와 과거의 독자성을 인정하여 양자를 이원적으로 병립시켰던 것이다. 이 점에서 명 · 청 시대에 학교시험을 과거에 포함시켜 일원화함으로써 학교를 과거의 준비기관처럼 만들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의 문과는 식년문과와 기타의 문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식년문과에는 초시 · 복시 · 전시의 3단계시험이 있었는데, 이 중 초시 · 복시는 초장 · 중장 · 종장으로 나누어 고시하였다. 이를 동당삼장(東堂三場)이라 하는데, 1일의 간격을 두고 시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초시는 관시(館試) · 한성시(漢城試) · 향시(鄕試)가 있는데, 상식년 9월초의 길일을 택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하였다.
문과초시인 관시(50인) · 한성시(40인) · 향시(150인) 합격자 240인을 식년 봄에 서울에 모아 다시 고시하여 33인을 뽑는 것을 복시 또는 회시라 하였다. 문과복시의 수험생들도 먼저 《경국대전》과 《가례》를 임문고강하는 조흘강에 합격해야만 녹명할 수 있었다. 이 시험을 전례강(典禮講)이라고도 하였다. 문과복시의 고시과목은 초장이 강경시험으로서 문과초시의 제술시험과 달랐고, 중장과 종장은 같았다. 따라서 초장과 중장 및 종장은 시관과 고시방법을 달리할 뿐 아니라 각각 따로 합격자를 발표하고 있어서, 사실상 별개의 시험이었기 때문에 후세 이를 구별하여 전자를 강경시(講經試), 후자를 회시라 하였다. 배송강경에서 7대문 모두에 조(粗:강경시험은 通 · 略 · 粗 · 不의 4등급으로 나누어 채점하였다.) 이상의 성적을 얻어야만 합격이 되어 중장과 종장의 수험자격이 주어진다.
전시는 회시합격자 33인과 직부전시인(直赴殿試人)을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에서 고시하여 등급을 정하는 것이었다. 전시는 신하인 시관이 쥐고 있던 급제결정권을 국왕이 직접 장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왕권강화를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고시과목은 《경국대전》에 의하여 대책(對策) · 표 · 전 · 잠 · 송 · 제(制) · 조(詔) 중의 1편을 고시하도록 하였으나, 《속대전》에서는 논 · 부 · 명을 더 보태어 10과목 중 1편을 고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많이 출제된 것은 책(策)이었다. 이와 같은 전시는 회시에서 뽑는 33인의 등급을 매기는 데 불과하였으므로 부정이 없는 한 떨어뜨리는 일은 없었다. 최종합격자의 등급을 나누는 방법이 조선초에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1468년(세조 14)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으로 등급을 나누기로 하였는데, 이후 이것이 정식이 되었다.
한편 식년문과 이외에 증광문과 · 별시문과 · 알성문과 · 정시문과 등이 있었다. 증광문과는 즉위경(卽位慶)이나 30년 등극경(登極慶)과 같이 큰 경사가 있거나 작은 경사가 여러 번 겹쳤을 때 연 것으로, 소과 · 문과 · 무과 · 잡과가 있었는데, 고시방법은 식년문과와 같았다. 다만 관시만은 1662년(현종 3)에 폐지되어 그 액수가 한성시의 1 · 2소에 보태어졌다. 시취액수도 같아서 초시에서 240인, 복시 · 전시에서 40인을 뽑았다. 고시과목은 초시와 전시는 식년문과와 같았으나, 복시만은 달라서 초장에서 부 1편과 표 · 전 중 1편, 종장에서 책 1편을 고시하여 사서삼경의 강경이 없었다. 그러나 1759년(영조 35) 초시 합격자에게 스스로 원하는 1경을 배송시켜 조(粗) 이상을 뽑는 회강(會講)을 설치하였다.
별시문과도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또는 10년에 한번 당하관을 고시하는 중시(重試)가 있을 때 실시한 것으로 문 · 무 두 과만 열었다. 처음에는 일정한 시행규칙이 없어서 그때마다 품정하여 실시하였으나, 영조때 초시 · 전시 두 단계의 일정한 규칙이 생겼다. 초시는 전국의 유생을 서울에 모아 고시하는 것이 관례로서, 처음에는 시험장을 3개소로 나누었으나, 뒤에는 2개소로 나누어 고시하여 300인 또는 600인을 뽑았다. 시취액수가 일정하지 않아 많을 때는 30인을 뽑았으나, 적을 때는 3인에 불과하였다.
알성문과는 국왕이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유생들을 고시하여 성적우수자 수인에게 급제를 준 것으로서, 문 · 무 두 과만 열렸다. 이처럼 국왕의 친림(親臨) 아래 거행되었기에 친림과라고도 하였다. 이 시험은 다른 시험과 달리 단 한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는 단일시(單一試)이고, 고시시간이 짧은 촉각시(燭刻試)였다. 또한 당일 급제자를 발표하는 즉일방방(卽日放榜)이었다. 응시자격은 처음에는 성균관 유생에게만 주었으나, 뒤에는 지방 유생에게도 주었다. 알성시는 운이 좌우하는 과거이어서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숙종 때의 경우 만여인, 영종 때의 경우 1만7000인 내지 1만8000인이 응시하기도 하였다.
정시문과는 처음에는 매년 춘 · 추에 성균관유생을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에서 고시하여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전을 준 것이었으나, 1583년 정식 과거로 승격되었다. 정시도 국가에서 경사 또는 대사가 있을 때 실시된 것으로서 문과와 무과만이 열렸다. 정시문과도 알성문과와 마찬가지로 단일시이고 촉각시였다. 그리고 국왕이 친림할 경우 즉일방방하였다.
이밖에도 문신의 승진을 위한 시험으로 중시 · 문신정시(文臣庭試) · 문신중월부시법(文臣仲月賦試法) · 문신전강(文臣殿講) 등이 있었다.
3) 무과
조선왕조는 양반관료체제를 갖추면서 문과와 무과를 균형 있게 실시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무과는 문과가 실시될 때마다 동시에 실시되었다. 무과의 고시과목은 크게 강서(講書)와 무예(武藝)의 두 종류가 있었다. 강서는 복시에만 있는 시험으로 사서오경 중의 하나,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하나, 《자치통감》 · 《역대병요 歷代兵要》 · 《장감박의 將鑑博議》 · 《소학》 · 무경(武經) 중의 하나를 각각 희망대로 선택하여 《경국대전》과 함께 고강하였다. 무예는 조선 전기는 목전(木箭) · 철전(鐵箭) · 편전(片箭) · 보사(步射) · 기사(騎射) · 격구(擊毬)의 6기(技)가 있었으나, 후기는 유엽전(柳葉箭) · 관혁(貫革) · 조총(鳥銃) · 편추(鞭芻)를 신설하고, 기사를 기추(騎芻)로 변경하는 한편 격구를 폐지하였다. 식년시 · 증광시를 제외한 무과는 무예 10기와 강서를 합한 11기 중에서 1∼3기를 택하여 고시하였다.
식년무과는 식년문과와 같이 초시 · 복시 · 전시 세단계의 시험이 있어 초시는 상식년 가을, 복시 · 전시는 식년 봄에 각각 거행하였다. 초시에는 원시(院試:訓속院試)와 향시(鄕試)가 있는데 무예로 고시하였다. 원시는 훈련원이 주관하여 70인을 뽑았고, 향시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여 경상도 30인, 충청 · 전라도 각 25인, 강원 · 황해 · 영안 · 평안도 각 10인, 도합 120인을 뽑았다. 따라서 무과초시의 시취정액은 모두 190인이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조선 후기는 초시의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고, 각 시험장에는 2품 이상 1인, 당하관 문신 1인과 무신 2인을 시관, 감찰을 감시관으로 하였다. 복시는 초시합격자들을 식년 봄 서울에 모아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하여 강서와 무예로 고시하여 28인을 뽑았다. 전시는 복시합격자 28인을 다시 무예(처음에는 騎擊毬 · 步擊毬였으나, 뒤에는 11技 중의 1, 2기)로 고시하여 등급을 정하여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을 급제시켰다.
기타의 무과로 증광시 · 별시 · 알성시 · 정시 · 관무재 · 중시 등이 있었다. 증광무과는 고시방법과 과목이 식년무과와 같았다. 다만 증광무과 복시의 강서가 식년무과 복시와 달라서 무경칠서(武經七書)와 4서5경 중에 희망하는 하나만을 고시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경사가 겹칠때 실시하는 대증광무과는 식년무과의 2배를 뽑았다. 별시무과는 초시와 전시의 두 단계 시험이 있었다. 초시는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실시하였으나, 뒤에는 각 도에서도 실시하였다. 정시무과와 알성시무과도 고시절차와 고시과목이 별시무과와 같았다. 다만 알성시무과의 경우 초시의 두 시험장에서 각 50인을 뽑고, 전시에서 국왕의 친림 아래 시취한 것이 달랐다. 관무재는 한량(閑良) · 군관(軍官) · 조관(朝官) · 출신(出身) 등이 응시할 수 있었는데,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 시험이 있었다. 복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자가 한량일 경우 전시에 직부할 특전을 주고, 출신일 경우 수령이나 변장(邊將)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무과는 조선왕조가 북으로부터 여진, 남으로부터 왜의 침입을 받게 되자 크게 변질되어 대량으로 시취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명종대의 을묘왜란, 선조대의 여진추장 이탕개(尼蕩介)의 침입으로 무과의 시취액수가 정액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지만, 대량으로 시취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그리고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기까지 서북 변경의 방위가 긴급해짐에 따라 유방병(留防兵)의 보충 · 강화가 불가피하게 되자, 종래 문과와 함께 실시되던 무과가 단독으로 실시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또 한꺼번에 1만여인의 합격자를 내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처럼 많은 합격자를 내는 무과를 만과(萬科)라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왕조의 국제적 지위가 안정된 뒤에도 무과출신의 부방의무(赴防義務)의 대가로 징수하는 물자(군량미 등)가 당시 고갈상태에 빠져 있던 국가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기에 계속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천민들도 만과에 진출하는 자가 많아지게 되어, 결국 무과는 천시되어 사대부들의 자제들이 이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4) 잡과
기술관의 등용고시로서 역과(譯科:漢學 · 蒙學 · 倭學 · 女眞學) · 의과 · 음양과(陰陽科:천문학 · 지리학 · 명과학) · 율과 등의 네 종류가 있었다. 잡과는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설행되었으며, 초시 · 복시만 있고 전시는 없었다. 초시는 상식년 가을 해당관청의 주관 아래 실시되었고, 복시는 식년 봄 해당관청의 제조(提調)와 예조당상(禮曹堂上)의 주관 아래 실시되었다. 잡과에서 향시가 있는 것은 역과의 한어과뿐이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나 있는 잡과의 시취액수는 역과 초시에 57인(한학 45인 · 몽학 4인 · 여진학 4인 · 왜학 4인), 의 · 율 · 음양과 초시에 각 18인(음양과:천문학 10인 · 지리학 4인 · 명과학 4인)을 뽑았고 역과 복시에 19인(한학 13인,몽학/여진학/왜학 각 2인), 의 · 율과 복시에 각 9인, 음양과 복시에 11인(천문학 5인,지리학/명과학 각 2인)을 뽑았다. 시험과목은 각 과의 전공서적과 경서 및 《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였다. 합격자에게 처음 홍패를 주었으나, 뒤에는 백패(白牌)로 바꾸었다.
(2)응시자격 응시자격은 조선시대 과거응시자격은 법제상으로는 천인이 아니면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평민인 양인(良人)의 응시자격을 보장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응시할 수 없다고 규정한 법조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신분에 따르는 아무런 차별이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기술관을 뽑는 잡과의 경우 천계의 혈통이 섞이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신을 뽑는 문과나 그 예비시험의 성격을 가진 생원 · 진사시, 무신을 뽑는 무과에는 사족(士族), 즉 양반신분이 아니고는 응시하여 합격하기가 어려웠다.
양반신분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결격사유가 있는 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즉 중죄인의 자손, 영불서용(永不敍用)의 죄를 지은 자, 범죄를 저질러 영영 관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자, 현직관료로서 범죄인에 대한 재판을 일부러 질질 끄는 자와 고문하여 치사하게 한 자, 공물(貢物)을 대납(代納)하는 자, 산사(山寺)에 올라가 말썽을 부리는 유생 등에게는 문과의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다. 또한 재가녀(再嫁女) 및 실행부녀(失行婦女)의 자손, 태종 때 만들어진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에 의하여 서얼(庶孼)은 영원히 금고되어 문과나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53년(명종 8) 양첩(良妾)의 자손에 한하여 손자 때부터 문과와 무과 응시자격을 주었고, 1625년(인조 3)부터는 천첩(賤妾) 자손도 증손자 때부터 응시가 가능하였다.
(3)고시절차 단 한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는 알성시 · 정시 · 춘당대시 등을 제외한 과거시험의 수험생은 시험 전에 녹명소에 녹명을 하여야 하였다. 수험생들은 녹명소에 먼저 자신의 성명 · 본관 · 거주와 부 · 조 · 증조의 관직과 성명 및 외조의 관직 · 성명 · 본관을 기록한 4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하여야 하였다. 이를 접수한 녹명관은 수험생의 결격사유가 없음을 확인한 다음 녹명책에 기입하고 명지(名紙, 試紙:시험지)에 답인(踏印)한 뒤 시험 장소를 배정하여 주었다. 수험생은 시험지 머리에 본인의 관직 · 성명 · 연령 · 본관 · 거주, 부 · 조 · 증조의 관직과 성명 및 외조의 관직 · 성명 · 본관을 다섯 줄로 쓴 다음 그 위를 종이로 붙여 봉하였다. 이를 피봉(皮封) 또는 비봉(秘封)이라 하였다. 이처럼 누구의 시험지인지 알아볼 수 없게 이름을 가리는 것을 봉미법(封彌法)이라 하였다.
그리고 시험지의 피봉과 제문(製文)을 분할하여 제문을 서리(書吏)에게 붉은 글씨로 베끼게 하였는데, 이를 역서(易書)라 하였다. 역서는 문과 중 식년시 · 증광시 · 별시에서만 하고, 친림과인 알성시 · 정시 · 춘당대시 및 생원 · 진사시에서는 하지 않았다. 역서가 끝나면 본초(本草:본시험지)와 주초(朱草:붉은 글씨로 베낀 답안지)를 대조하여 틀린 곳이 없나를 확인하고 주초만 시관에게 넘겨주었다. 시관은 주초를 가지고 채점하여 과(科:갑 · 을 · 병과)와 차(次:제1인 · 제2인 · 제3인)를 정하였다. 합격된 시험지는 본초와 주초를 일일이 대조하였다. 합격자 명단은 국왕에게 보고한 뒤 발표하였다.
과거급제자에게는 성적에 따라 관품이나 관직을 올려 주었다. 문과의 경우 장원은 무직자라도 정품직을 주고, 갑과의 경우 정7품, 을과의 경우 정8품, 병과의 경우 정9품을 주었으며, 원래 관품을 가지고 있던 자에게는 장원은 4계, 갑과는 3계, 을과는 2계, 병과는 1계를 더 올려주었다. 무과의 경우는 참하관의 관품을 성적에 따라 차등있게 주었다. 잡과도 마찬가지였다. 문무과는 정3품 당하관 이하가, 생원진사는 정5품 통덕랑 이하가, 잡과는 참하관 이하가 응시할 수 있게 한 것도 과거시험 성적에 따라 문무과는 당상관으로, 잡과는 참상관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시험이었음을 의미한다.
1876년에 개항한 이후 서서히 개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근대적인 사회로 변모하게 되자, 종래의 관리등용시험인 과거, 즉 문과 · 무과 · 잡과와 같은 것으로 새로운 시대를 담당할 관료를 선발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었다. 이에 따라 1894년에 있었던 갑오경장 때 성균관을 근대적 교양을 가르치는 학교로 개편하는 동시에,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관리등용법을 제정하였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에서 마련하여 시행한 <선거조례 選擧條例>와 <전고국조례 銓考局條例>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의 과거는 학문 등 문화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무력 일변도의 사회에서 탈피하여 문관이 지배하는 문치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과거는 그 중추적인 제도로서 활용되었다. 문관이 무관과 서리(胥吏)를 누르고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이를 쉽게 수행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따라서 과거가 행해지던 사회에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 하였고, 과거에 합격하려면 유교교양과 유교경전을 익혀야만 하였다. 즉 독서인이 되지 않으면 사회의 지배층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교육열을 자극시켜 발달된 고급 문화를 이룩할 수 있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