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29일은 박순애 여사의 85회 생신이었다. 언제부턴가 노환으로 기억력이 희미해지고 거동이 불편해 종일 당신의 방에 앉거나 누운 채로 소일(消日)하는 노모. 그러나 그녀는 아들의 대국일정과 결과에 늘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물론 금방 들어도 시합의 명칭을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뭔가 큰 시합에 아들이 나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귀신같이 알고 계셨다. 그날 평창동 거실에는 직계가족 수십 명이 모여 생신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 조훈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서 최초로 창설된 국제대회 춘란배 결승전 대국이 난징(南京)에서 거행됐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국제대회에서 부진을 보였던 조훈현은 국수 컴백을 신호탄으로 본격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춘란배 예선에서 샤오웨이강 9단, 저우허양 9단, 창하오 9단 등 6소룡 중국기사들로 첩첩이 쌓인 죽(竹)의 사다리를 파죽(破竹)의 기세로 치고 올라간 것. 반대편 시드에서는 이창호가 위빈 9단, 요다 9단, 최명훈 6단을 차례로 꺾고 올라와 있었다. 지긋지긋한(?) 사제대결이 머나먼 중국 땅에서 재현되었다.
6월 25일 난징의 진링(金陵) 호텔에서 벌어진 제1국에서 스승이 의욕적인 강수를 연발하며 제자의 대마를 잡고 선승. 이날 이창호는 흑을 잡고 패배해 국제대회 흑번필승 25연승의 진기록을 접어야했다. 6월 27일 속개된 제2국에서는 제자가 절묘한 맥점을 구사하며 스승의 대마를 잡아 복수에 성공했다. 같은 날 벌어진 3,4위전에서 최명훈 6단이 창하오 9단을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함으로써 금, 은, 동을 한국이 싹쓸이해 주최측을 무색케 만들었다.
이틀 후 벌어진 최종국은 스승보다 제자에게 더 중요한 일전이었다. 신설기전인 춘란배를 차지하고 이듬해 개최되는 응씨배에서 우승하면 세계최초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98년 국제대회 3관왕이었던 이창호는 99년에도 삼성화재배와 LG배를 거머쥐어 가공할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응씨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 등 3개 기전만 존재할 때 스승이 한발 먼저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제는 춘란배까지 생겨 메이저 국제기전이 6개로 늘어나면서 그 대기록을 달성할 사람은 이창호밖에 없는 듯싶었다.
15만 달러의 우승상금은 물론이려니와 사이클링 히트의 교두보가 걸린 큰 승부를 앞둔 상태였지만 사제는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같은 팀 최명훈 6단이 3위를 차지하면서 선수단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탓이었을까? 그들은 전날 부담 없는 기분으로 난징의 공원을 산책하고 명승지를 돌아다녔다. 식사시간에 조 국수는 익살스런 웃음을 지어 보이며 후배들에게 말했다. “적당히들 두지 그랬어. 우리가 싹쓸이해버리면 춘란배가 축소되거나 폐지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러자 누군가가 맞받았다. “그러는 국수님께서는 왜 양보하지 않고 6소룡을 자근자근 밟으셨어요?” “야, 나는 벌이가 궁하잖아. 셋이나 되는 애들 대학에도 보내야 하고….”
최종국. 다정한 사제는 바둑판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앉았다. 이창호의 흑번. 덤 5집 반. 아무래도 흑을 쥔 제자 쪽이 편해 보였다. 초반 쌍방의 행마가 난징 시를 감싸고 흐르는 양쯔강 물결처럼 평화롭게 흘러갔다. 틈만 나면 전단(戰端)을 찾아 육박전을 펼치는 스승이 이번만은 어떤 결심이 있었던 모양으로 유장(悠長)한 호흡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돌부처로 통하는 제자가 중심을 잃고 먼저 삐끗했다. 그때부터 스승이 타이트하게 조이기를 시도해왔다. 도처의 귀와 변에 손바닥만한 집들을 굳혀두고 야금야금 중원의 흑진에 교두보를 확립하는 전략이었다.
1,2국에 서로 대마를 잡고 잡히는 살육전을 펼쳐 관전자들을 즐겁게 했던 두 사람이 최종 결승국에서는 집 차지 바둑의 진수를 선보이며 제한시간을 모두 소비한 끝에 285수의 빽빽한 기보를 남겼다. 결과는 백의 2집반 승리. 격차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백의 완승국으로 평가된 한판이었다. 잊혀질 만하면 한 건씩 사고를 내는 노장 조훈현은 그렇게 제자의 대기록을 심술궂게 방해하며 나름대로 스승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조 국수의 춘란배 우승이 확정된 순간, 중국 현지의 소식통이 승전보를 알려왔고 평창동 자택에서 샴페인이 터졌다.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손자들의 축가가 울렸고 며느리 정미화 여사가 시어머니 귀에 희소식을 전했다. “어머니, 아들이 춘란배 타이틀을 땄대요.” “춘란배가 뭐다냐? 후지쯔배겄지.” “그래요. 아무튼 이겼다니까 기뻐하세요.” “누구한테 이겼는데?” “창호한테요.” “뭐, 창호한테?” 노모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력이 현저히 감퇴되었지만 언제부턴가 아들이 제자인 창호에게 자꾸 밀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않고 있는 그녀였다.
“애야, 어디서 뒀다냐?” “중국에서요. 할머니.” “뭔 대회라고?” “춘란배요. 중국에서 만든 국제대회예요.” “그래? 그럼 우승한 거냐?” “네. 상금도 많이 받고 트로피도 받았답니다.” “그래, 쓰겄다.(전라도 사투리로 좋다는 뜻)” 그녀는 생신잔치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꾸 외손자인 필자에게 아들의 시합에 관해서만 물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쯤에 중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인공 조 국수가 낭랑한 음성으로 어머니께 생신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이겼다면서?” “네, 어머니.” “장하다. 내 새끼. 어여 오거라.” 노모 다음에 수화기를 건네받은 아내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글썽거렸다.
필자는 수없이 많은 큰 승부 뒤끝에 외갓집에 들렀지만 그 때처럼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응씨배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외숙모의 눈물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삼촌이 전화로 이겼다는 말을 전해온 것도 처음이었다.(그는 늘 졌다고 대답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음.) 그만큼 세기말 조 국수는 힘겨운 행보를 걷고 있었으므로 오랜만에 들려온 우승 소식에 모두가 감격했던 거였다. (그날 십여 명이 넘는 조카들과 손자들은 국수의 사모님으로부터 특별용돈을 받았다. 춘란배 상금의 일부분을 쪼개 갖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99년 조 국수의 전적은 42승 13패.(76.3%) 전년도에 비해 한결 안정감을 되찾은 기록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국내외 바둑계는 이창호의 제국이었지만 조훈현은 제국의 고문(顧問)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았고 언제든지 전쟁터가 부르면 출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전사로 대기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