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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남자현(南慈賢) 의사는 1933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는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은 보석으로 석방했다.
이후 의사는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여관으로 옮겼으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남자현 의사는 그 유명한 유언을 남기며 유복자인 독자 영달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했다.남 의사는 1933년 8월 22일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된 남자현 의사는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알려졌다.
남자현 의사의 순국 소식에 당시 하얼빈의 한인들과 중국인들은 그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애도를 표했다.
남 의사의 유해는 하얼빈 외인 묘지에 묻혔다가 1967년 7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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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석학의 집안에서 자라면서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였다.
19세에 경북 영양의 김영주(金永周)에게 시집을 갔지만 남편은 영양 김도현 의진에 참여하여 일찍 전사하였다.
3.1운동 이후 아들과 함께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 가입하고,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북만주 일대에 교회를 세우고, 여성계몽에도 힘썼다. 1925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처단을 위해 국내 잠입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편강렬(片康烈),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27년 봄 길림 조양문(朝陽門) 밖에서 열린 나석주(羅錫疇) 의사 추도회 겸 강연회에 참여한 안창호, 김동삼 등 300여명이 중국 헌병사령관에게 체포되자 옥바라지를 하였다.
1931년 하얼빈에 있던 김동삼(金東三)이 체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동삼의 경우에는 친척으로 위장하여 면회한 후
지시내용을 연락하기도 하고, 김동삼 구출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기도 하였다. 독립운동으로 고생하는 청년들에게는 ‘어머니’로서
극진한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 파악을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자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1933년 초 만주국 건국일 행사에 주요 참가자를 처단하고자 창춘에서 하얼빈으로 가던 중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병보석으로 출옥 후 8월 22일 하얼빈의 여관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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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남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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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전지현이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안윤옥'의 연기를 하고 있다. 안윤옥의 실제 모델은 남자현 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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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의사의 경북 영양 생가이다.
남자현 의사는 1872년 경북 안동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했다.
7세 때 국문에 능통하여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했다.19살에 아버지의 제자였던 김영주와 결혼했다.
남자현이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에 사는 의성 김씨 김영주에게 시집 가 이제 막 집안 일을 익히고 살림의 재미를 알아 갈 무렵의 어느날 이었다. 일제의 만행을 보다 못한 남편 김 씨는 부인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 며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이듬해였다. 그러나 남편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결혼 6년 째로 남자현은 그때 임신 중이었다.남편을 잃은 의사는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養蠶)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1919년 3·1운동으로 조국 독립의 열망을 느끼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 가입했다.그의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였다.망명 6년째인 1925년에는 채찬·이청산 등과 함께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하기로 결의했으나 실패했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 이규동, 의성단장 편강열, 양기탁·손일민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남자현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통합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안창호 외 47명이 중국경찰에 잡히자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이들의 석방에 힘썼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 조사단 「릿톤」경이 하얼빈에 조사차 왔을 때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서 흰 수건에 「韓國獨立願」이란 혈서를 쓰고 자른 손가락을 싸서 조사단에게 보내어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연맹에 호소하였다.
또한 1932년 9월에 국제연맹* 조사단이 침략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다. 그는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본인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했던 것이다.
1933년 초, 의사는 동지 이춘기 등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武藤信義)를 제거하기로 하고 2월 29일 거지로 변장했다.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신징(新京, 현재 장춘)으로 가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