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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고행상 |
다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이들에게 각각 지도를 받아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경지도 일단 정신통일의 상태가 끝나버리면 다시 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므로 선정의 수행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야만 했다. 이 수행법으로서도 결국 죽음에 이르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다른 훌륭한 수행자를 찾아보았으나 아무에게서도 그가 바라던 스승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가야지방의 우루벨라로 간다.
네란자라강(니련선하 尼連禪河) 근처 고요한 숲 속에서 다른 고행자들과 함께 생사를 건 6년간의 치열한 고행이 시작된 것이다.
고행은 당시 유행하였던 수행으로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을 해방시킨다는 수행이다. 이 수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혹독하다. 그들은 육체를 괴롭히기 위해 하루 종일 퇴비 더미 속에 누워 있거나 날카로운 가시밭을 맨발로 걸어 다니기도 한다. 싯다르타 역시 혹독한 고행을 하였다. 하루에 쌀 한 톨, 한 모금(일미일수一米一水)의 물로 견디며 어떤 때는 호흡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하는 혹독한 고행도 했다.
훗날 싯다르타가 부처님이 되신 후 이 때의 고행에 대해서 말하기를 “과거의 어떤 수행자도, 현재의 어떤 수행자도, 또 미래의 어떤 수행자도 이보다 더한 심한 고행을 닦은 자도 없고 닦을 자도 없으리라.”고 했다.
❺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깨달음을 위해서 6년간 설산(고행을 상징)에서
수도 고행하는 모습
그러나 6년간의 치열한 고행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처절한 고행을 경험했으면서도 그러한 극단적인 고행이 도리어 인간의 육신을 피로하게 하고 수행에 방해가 됨을 간파하였다. 그렇다. 마음이 근본이다. 육체는 마음을 따라서 움직이는, 마음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근본(마음)이 바로 서면 그림자는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밝고, 바르고, 새롭고, 깨끗하게 하기로 수행의 방향을 과감하게 바꾸었다. 그리고 고행을 중지하였다. 단식도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너무도 더러워진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네란자라 강으로 내려가서 몸을 씻었다.
목욕을 마치고 강가에서 지친 몸을 잠시 쉬고 있을 때 마침 새벽 숲으로 기도하러 오던 그 곳 마을 수자타라는 처녀에게서 숲의 신에게 바치려고 준비한 유미죽을 공양 받아 기운을 회복하였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다섯 수행자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토록 고행을 쌓고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세상 사람이 주는 음식을 받아 먹으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고행을 그만 둔 싯다르타가 타락했다고 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싯다르타는 홀로 숲속에 들어가 커다란 보리수나무아래 길상초를 깔고 동쪽을 향하여 깊은 명상에 잠겼다.
“이제 만일 여기서 번뇌를 멸하지 못하여 미혹과 거짓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설령 이 몸이 가루가 된다 하여도 이 자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는 굳은 각오로 정진을 하였다.
그때 마왕 마라(Mara 일명 마왕 파순)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훼방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하여 먼저 자신의 세 딸을 보내 싯다르타를 유혹한다. 마왕의 세 딸은 온갖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고타마는 수미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왕은 자신이 거느린 모든 악귀들을 동원해서 창칼과 불화살, 태풍, 폭우, 암석을 던지며 수행을 방해했으나 그것들은 모두 꽃으로 변하여 흩날릴 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니 마왕이 직접 나서서 별의별 유혹을 다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 도망치고 말았다.
❻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35세 되던 해 보리수아래서 모든 번뇌, 즉
마왕파순(욕망, 애착 등)의 항복을 받고 결국
성도成道를 이루는 모습.
드디어 음력 12월 8일 샛별이 반짝일 때 보리수 아래에서 모든 의문의 실마리, 연기緣紀의 도리를 깨달으므로써 모든 존재의 근본원인인 무명無明을 타파하였다.
우주의 생성소멸은 인연과因緣果의 원리에 따라서 움직인다.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이나 업業의 그림자에 가리워 고통 받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아셨다.
4) 전법교화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은 21일 동안 보리수 아래 앉은 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만족감과 기쁨이 자기만의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었다. 대우주 속에 실로 조그마한 인간에 불과하였던 그였으나 이제 대우주와 둘이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통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자신의 기쁨은 온 누리에 생명 있는 존재(衆生) 모두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성불한 기쁨과 만족감만으로 혼자 법열에 젖어 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부처님이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자신이 법열에 잠겨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 순간에도 중생들은 끝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무엇이 행복이며 어떤 것이 괴로움인지조차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고해苦海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리도 아닌 것을 진리인 줄 알고 평생을 매달려 있는가 하면, 괴로움을 벗어나겠다는 몸부림이 오히려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수렁에 빠져 헤매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중생들의 이러한 아픔과 슬픔이 자신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중생의 아픔이 바로 부처님 자신의 아픔이었다.
새로운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그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밑을 떠나 처음으로 향한 곳이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園(므리가다바아, 싯다르타가 성도한 우루벨라로부터 약 300km나 떨어져 있음))이었다. 거기에는 앞서 수행자 싯다르타가 타락하였다고 비난하며 고행림을 떠났던 다섯 수행자가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행주의를 버린 싯다르타와 헤어져 녹야원으로 가서 수행하고 있던 다섯 수행자는 어느 날 싯다르타가 자기들을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싯다르타가 성도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그들은 서로 싯다르타에게 아는 체를 안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싯다르타가 곁에 이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자리를 권하였다.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다섯 수행자에게 비로소 첫 가르침을 펴셨다(초전법륜初轉法輪).
이 때 부처님은 다섯 수행자에게 출가수행자는 욕락慾樂과 고행苦行의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취해야 할 것을 가르쳤으며,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으로서 그들을 깨우쳐 진리의 세계에 눈뜨게 하였다. 다섯 수행자 중에서 교진여가 가장 먼저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없애 버린 성자(아라한과)의 경지에 들어갔다. 곧 이어 네 명의 수행자들도 차례로 번뇌의 속박에서 완전히 풀려나 아라한이 되었다.
❼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같이 수행했던 녹야원의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는 모습
그 무렵에 그 근처 어느 부호의 외아들로서 인생을 비관하고 번민하던 야사라는 청년이 녹야원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제자가 되었다. 야사의 부모와 아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재가 제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우바새와 우바이의 시작이다. 또 야사의 친구 59여명도 깊은 감화를 받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귀의한 제자가 60여명이 되었는데, 이 중에 종전의 종교를 수행하던 5명 외에는 모두 가정에서 생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부처님은 이들이 가르침에 따라 진리를 증득하게 되자 여러 지방으로 가서 진리의 가르침을 전하게 하였다.
“비구들이여! 자 전도를 떠나가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과 신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전도를 떠나되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자도 있거니와, 그들이 만약 법을 듣지 못한다면 마침내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그들도 법을 들으면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벨라로 가리라!”
부처님은 진리를 증득하여 해탈한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빨리 많은 지방으로 가서 불법을 알리고 교화하게 하였으며, 자신도 홀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교화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불교의 참뜻은 스스로의 해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 곳에 한 사람씩 가급적이면 빨리 많은 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펴도록 하셨다. 이것을 유명한 전도선언(또는 전법선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선언은 부처님께서 교단을 구성하고 교단에 부여한 최초의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교단은 언제나 이 전도의 선언이 담고 있는 부처님의 명령을 중생들의 역사 안에서 실천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전도의 선언을 기점으로 불교의 세력 확장은 불길처럼 번져 나갔고, 한낱 신흥종교에 지나지 않던 불교가 바라문교의 역사적 전통을 뒤엎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집단으로 발전하였다.
부처님께서도 빠른 걸음으로 당시 인도문화의 중심지이며 많은 수행자가 모여 있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라자가하)으로 향하였다. 이 길목에서 30여 명의 젊은이들을 제자로 교화하고, 마가다국 우루벨라Uruvela로 가서 사화외도(事火外道 불을 섬기는 외도)의 바라문 가섭(Kassapa카사파로) 삼형제(가야가섭, 우루빈라가섭, 나제가섭)를 교화하여 제자로 삼았다. 이들 가섭 삼형제는 당시 마가다국의 가장 이름 있는 종교가였고, 또 국왕인 빔비시라왕Bimbiisara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모두 합해서 1,000여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 무리들도 모두 스승을 따라 부처님께 귀의하여 새로운 제자가 되었다. 이들 삼형제는 부처님보다 훨씬 연장인 종교가들이었는데, 이들이 거느린 1,000여명의 무리와 함께 젊은 싯다르타의 제자가 되었으므로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왕사성 사람들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국왕도 왕실의 권속 및 많은 신하들과 함께 감화를 받고 부처님의 재가신자가 되었으며, 부처님이 머물면서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사원을 지어 바치었다. 그 것이 바로 불교최초의 절 죽림정사竹林靜舍이다.
이로부터 불교는 왕사성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그 교세가 확장되어갔다. 어느 날 사리불(사리풋타)이 불제자 앗사지(다섯 수행자 중의 한 사람)로 부터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부처님 가르침 일부를 전해 듣고 크게 기뻐하며 친구 목련(갈라나로)과 함께 스승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데리고 부처님에게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
그 뒤 부처님은 고향 카필라 성으로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친척과 그 곳 사람들을 교화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난다(난타難陀 마하파자파티의 아들)와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아난타(아난다), 데바닷타(아난다의 형), 아나율(아누룻다) 등 사촌동생과 적지 않은 석가족 사람들이 불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 그리고 고향 카필라를 왕래하며 직접 가르침을 폈으며, 바라나시와 코삼비 사람들에게도 교화의 손길을 펴셨다. 부처님이 직접 교화하신 곳으로는 왕사성과 사위성이 가장 중심지였으며, 북쪽으로는 카필라, 남쪽으로는 바라나시, 동쪽으로는 참파, 서쪽은 코삼비 등이었다. 당시 불교는 많은 불제자들에 의하여 동쪽으로는 갠지즈강 하류에까지 전해졌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봄베이 북방인 슈로나국의 알라비아해 연안까지 전파되었다. 불교는 그만큼 널리 전파되었는데, 그 가르침은 각계각층에 펼쳐져서 종래의 풍습에 의해 출가한 출가 수행자나 새로운 출가 수행자나 국왕, 왕비, 귀족, 부호, 평민, 천민이 모두가 차별 없이 교화되었고 큰 감화를 받게 된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에는 계급의 귀천도 빈부의 차별도 인종의 구별도 없었다. 오직 화합과 평등과 진리에 의한 질서만이 존중되었다. 그리고 당시까지 인도 종교계에 허용되지 않았던 여성 출가 수행자(비구니比丘尼)가 새로운 불제자佛弟子의 위치에 자리 잡기도 하였다. 성불한 뒤 가르침을 펴기 45년의 발자취는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룩할 수 없는 커다란 인간 승리의 본보기라고 하겠다.
5)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며 분석적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지혜와 자비가 주 내용이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단호하면서도 현실적이다. 추론을 배격하고 실제의 경험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실제의 생활에 응용되기를 강조한다. 우주 생성의 기본 원리인 연기법緣起法이 있으며, 존재의 인식에 십이연기 十二緣起가 있다.
존재의 관찰에는 4단계의 사제법四諦法이 있으며, 행동 강령에는 팔정도八正道 가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근본불교라 하고, 그것들을 토대로 초기 불교시대가 열리고, 더 뒤에는 대승불교시대가 나타난다.
다양한 형태의 변화된 불교의 기본바탕인 근본불교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지양하는 입장이다. 매번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 것을 강조한다. 세존은 내세적인 것이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 생활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독 묻은 화살’의 비유를 통해 어떤 것이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인지, 무엇을 본질로 삼아야 될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불확실한 내세적인 것, 일단 지나가 버린 과거사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으셨다. 그런 것은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를 따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의 일을 자세히 살펴 흔들리거나 움직임이 없이 그것을 잘 알고 익히라.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진실로 저 염라대왕의 무리들과 싸움이 없는 날 없거늘 밤낮으로 게으름을 모르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사람, 그를 가리켜 한밤의 현자賢者라 하고 마음 고요한 성자聖者라고 한다.”
6) 평화로운 열반
부처님이 80세가 되시던 해, 부처님께서는 벨루바Beluva라는 곳에서 여름 안거를 지낸다. 이곳은 바이샬리 부근에 있었다. 우기가 걷히자 부처님께서 북으로 발길을 옮겨 리치치하비스Lichchavis라는 부족이 사는 마을을 통과하신다. 그리고 파바Pava라는 마을에 묵으실 때 대장간을 하는 춘다Chunda의 공양을 받으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카쿠쯔타Kakutstha의 강둑에 닿으신다.
그 곳에서 목을 축이고 목욕을 하신 다음, 쿠시나가라Kushinagara에 닿으셨다. 사십 여년을 곁에서 모신 아난다에게 사라 나무 밑에 침상을 준비하라고 이르신 후 부처님께서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마치 사자처럼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고요히 누우셨다.
"아난다여! 쿠시나가라의 말라스Mallas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오늘밤 자정 무렵 여래는 열반에 들리라고, 아난다여, 나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구나, 나의 여정은 이제 막을 내리려 하노라. 나는 이제 팔십 세가 되었구나. 비유컨대 낡은 수레가 움직일 수 없음과 같을지니라. 육신이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만큼, 늙고 병들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내가 이미 가르치지 않았던가,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은 다 사라져 없어지리라고. 그러나 여래는 육신이 아닌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내가 가르친 진리는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하리라."
아난다는 눈물을 삼키며 이 슬픈 소식을 말라스의 사람에게 전하고, 다시 부처님께 그 삶을 연장시킬 수 없겠느냐고 간청한다. 부처님께서는 그윽한 미소로 제자들을 달래시고, 슬픔에 잠겨 사라수 곁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펴고자 했다. 이때 쿠시나가라의 100살이 넘은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평소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허둥지둥 사라수의 숲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지금 매우 피곤하시고 병을 앓고 계시니 번거롭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그의 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수바드라를 가까이 오도록 이르시고 말씀하시었다.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말아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부처님은 수바드라를 위해 설법을 들려 주셨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었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것이다. 이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시간이 가까워지자 무수히 모여든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 하여라! 진리로 등불을 삼고 진리를 의지 하여라!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육신은 비록 여기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시기 전 아난에게 마지막 남긴 유훈遺訓을 간략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한다.
❽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80세 되던 해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입멸 즉, 열반涅槃에 드신 모습
이 말씀을 남기고 부처님께서는 음력 2월 15일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나무 아래서 평안히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이야말로 진리 속에 살다 진리 속에 가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다. 그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을 들어 보였다. 그가 들어 보인 길은 다름 아닌 지혜와 자비의 길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부처님의 육신은 꽃으로 장식되어 많은 이들의 충심이 담긴 송별을 받았다. 돌아가신지 꼭 일주일이 되던 날 육신은 마쿠타반다나 Makutabandhana사원으로 옮겨졌다.
그것은 그분이 가장 아끼던 제자 가섭을 기다리기 위한 조치였다. 부처님께서는 열 분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사리불과 목건련 두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상수제자였던 가섭은 이때 다른 지방으로 전교를 떠났던 것이다. 가섭이 도착하자 부처님께서는 두 발을 관 밖으로 내어 가섭에게 보이신다. 가섭은 스승의 육신에 정례하고 장례를 비롯한 교단의 사후수습을 진두지휘하였다.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것을 '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라고 한다.
부처님 입적 소식은 인근 여러 나라에 퍼졌으며 평소에 부처님을 존경하던 모든 이들은 이 장례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화장 후 그 분의 사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 사리를 모시기 위한 분쟁이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타협을 보지 못하고 전쟁마저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그때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드로나라는 현자가 있어서 중재를 시도, 그 사리를 똑같이 8등분(팔왕분골八王分骨)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서로 그 사리를 정중히 모시고 가서 스투파(Stupa 탑)를 세우고 깊이 공양하게 되었다.
부처님은 세상을 떠나 열반에 드셨지만, 그 분의 가르침은 영원히 남아 온 세상으로 퍼져 나아가 무수한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수없는 세상을 평화롭게 하였다.
부처님은 우리와 다름없는 똑같은 인간이다. 다만 그 분은 우리들보다 먼저 인류 최초로 깨달음을 성취한 분으로서 우리들을 그와 똑같은 깨달음으로 인도할 위대한 스승이며, 진리의 길로 안내할 인도자이며, 우리의 병환을 고쳐줄 치료자이다. 그 분이 우리들과 다름없는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도 그 분과 다름없이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7) 부처님 말년의 슬픈 일
사람들에게 괴로움과 번뇌, 탐욕과 성냄을 벗어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설법을 해 온 부처님도 어느덧 노년에 달하셨고 그 일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으셨는데 노년의 부처님에게는 세 가지 불행한 일이 있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국이 코살라국에 멸망을 당한 일이었다. 코살라국의 유리왕이 카필라국을 치기 위해 군대를 몰고 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부처님은 서둘러 길을 나서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큰 길 한가운데에 고요히 정좌하시고 코살라국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셨다. 부처님을 발견한 유리왕은 마차에서 내려 절을 하고 여쭈었다.
“길가에 서늘한 나무 그늘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길 한가운데 뙤약볕 아래에 계십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친족의 그늘이 나무 그늘보다 더 시원합니다.”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 유리왕은 군대를 돌렸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 하지만 카필라국이 빌미를 제공한 터였으므로 부처님도 유리왕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결국 카필라국은 멸망하였다.
두 번째는 부처님이 너무나 소중하게 여겼던 수제자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부처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건이다. 사리불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고, 목련존자는 이교도들의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다. 부처님은 두 사람이 떠난 교단을 둘러보며 매우 허전해하시면서 세상의 덧없음을 거듭 말씀하셨다.
세 번째는 부처님의 사촌이면서 아난다의 형이었던 데바닷다가 교단을 분열시킨 일이었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교단이 커지자 마가다국의 태자 아사세의 후원을 받아 부처님의 교단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며 자객을 보내고, 높은 산에서 바위를 굴리고, 성질이 포악한 코끼리를 풀어 부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사촌이자 제자인 데바닷다가 교단을 분열시키고 부처님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은 부처님의 일생과 교단에 크나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8) 부처님의 제자들
세상의 참 모습을 올바로 꿰뚫어 보신 지혜로운 부처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었다. 그 중 부처님 뜻을 가장 잘 받들어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의 진리를 부처님과 더불어 널리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신 독특하게 뛰어난 열 명의 제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➀ 지혜제일 사리불 智慧第一 舍利佛 사리풋타 Sariputva
바라문족 출신으로 육사외도六邪外道의 한 사람이며 회의론자인 산자야Sanjaya를 섬기다가 부처님의 제자 아설시阿說示를 만나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닫고 목건련과 함께 자신의 제자 250명을 이끌고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집단으로 개종했다. 석가모니의 아들인 라훌라의 후견인이었으며,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설법할 수 있을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석가모니보다 나이가 많았고 먼저 타계했다. 갖가지 지식에 해박하고 통찰력도 빼어나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간주되었으며, 지혜제일智慧第一 또는 법왕자法王子라고 호칭되었다. 사리자舍利子, 신자身子, 추로자秋露子, 우파저사優波底沙, 사리불다라舍利弗多羅라고도 한다.
② 신통제일 마하목건련 神通第一 摩訶目健蓮 마하갈라나로 Maudglyayana
바라문족 출신으로서 육사외도의 한 사람이며 회의론자인 산자야Sanjaya의 제자였으나, 사리불을 따라서 죽림정사로 갔고, 마승馬勝 비구의 권유로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 교단의 장로로서 교화에 노력하였으며, 신통력이 뛰어났으므로 신통제일神通第一로 인정받아 대목건련으로 불렸다. 주로 자이나교의 교도에 의해 박해를 받았으며, 제바달다의 제자들에 의해 암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불교 교단을 질시하던 집장범지執杖梵志라는 외도에 의해 왕사성에서 난자당하여, 석가모니보다 먼저 타계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옥에서 아귀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신통한 눈으로 보고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공양을 드려 구출하였다는 설화로 유명하다. 음력 7월 15일의 우란분회盂蘭分會는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구리다俱利多, 대목련大目連, 목가략目伽略, 몰특가라沒特伽羅, 채복근菜茯根, 채숙씨采淑氏, 목건라야나目健羅夜那, 목련目連이라고도 한다.
③ 두타제일 마하가섭 頭陀第一 摩訶迦葉 마하캇사파로 Mahakasyapa
부인과 함께 출가하였으며 소욕지족小欲知足하여 ‘십이두타十二頭陀의 행은 대가섭이 제일’이라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오 백 아라한을 데리고 제일 결집第一 結集을 할 때 상수上首가 되었다. 특히 선종에서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의 고사로 유명하며 선종 정토의 제일조第一祖 로 받든다. 카쉬야파의 음역으로 가섭迦攝, 가섭파迦葉波, 음광飮光이라고도 한다.
④ 천안제일 아나율 天眼第一 阿那律 아누룻다 Aniruddha
석가모니의 사촌 아우로서 아난다와 더불어 출가하였으며 부처님 설법하는 자리에서 졸다가 부처님께 꾸지람을 들은 뒤 눕지 않고 항상 앉아 정진하다가 눈이 멀었으나 육안肉眼대신 천안天眼을 얻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신뢰를 얻어 최후의 여행에도 동행했다. 부처님이 입멸하자, 장례를 치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니율다阿泥律陀, 무멸無滅, 여의如意, 선의善意, 무탐無貪, 아나율다阿那律陀라고도 한다.
⑤ 해공제일 수보리 解空第一 須菩提 수부티 Subhuti
사위성에 거주하는 상인이었는데, 사위성 근처에 건립하던 기원정사가 완공된 것을 기념하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서 출가했다. 이 기원정사를 교단에 희사한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그의 숙부이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난 후에는 항상 공적空寂을 즐기고 공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했다하여 해공제일解空第一 또는 공생空生으로 불렸다. 교화 활동에서 외도로부터 비난, 중상, 박해를 받아도 결코 다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므로 무쟁제일無諍第一이라고 알려졌으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양을 받았으므로 공양제일供養第一이라고 존경되었다. 대승불교의 반야경에서는 항상 그가 공의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수부제須扶提, 須浮帝, 소부저蘇部底, 선길善吉, 선현善現이라고도 한다.
⑥ 설법제일 부루나 說法第一 富樓那 푼나 만타니풋타 Purna
카필라성 부근의 바라문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정반왕의 국사國師의 아들로서 생년월일이 석가모니와 같으며 부처님이 성도한 소식을 듣고서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귀의하였다. 득도한 후, 각지를 떠돌며 포교에 전념했다. 교묘한 언변으로 교화하는 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하여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고 불렸다. 만원자滿願子, 만자자滿慈子, 만축자滿祝子,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라고도 한다.
⑦ 논의제일 마하가전연 論議第一 摩訶迦栴延 마하캇챠나 Katyayana
서인도국 아반티국 찰제리족(크사트리아) 출신으로 갓 태어난 석가모니의 미래를 예언했던 아사타阿私陀 선인의 제자였는데 국왕의 명을 받아 부처님의 영접하러 갔다가 법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부처님의 설법을 잘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교의를 이해하고 논하는 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하여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고 불렸다. 가다연나大迦多衍那, 가저야야나迦底耶夜那, 대가전연大迦栴延, 호미好眉, 문식文飾, 선승扇繩, 가전迦栴이라고도 한다.
⑧ 지계제일 우바리 持戒第一 優婆離 우팔리 Upali
하층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서 석가족의 전문 이발사로 부처님이 고국에 갔을 때 출가하였다. 출가한 후로는 계율을 매우 엄중히 지켰으므로 지계제일持戒第一 또는 지율제일持律第一이라고 불렸다. 제1차 결집 당시에 율장 부분을 암송하였으며, 마하가섭, 아난다와 함께 '결집의 3인'으로 꼽힌다. 근집近執, 근취近取, 오파리 波利라고도 한다.
⑨ 밀행제일 라후라 密行第一 羅喉羅 라훌라 Rahula
출가하기 이전의 석가모니의 아들로서 출가의 장애가 되었다 하여 붙인 이름 15세 때 부처님이 귀국 시에 어머니(이모 마하파자파티)와 함께 출가하여 최초의 사미가 되었고 출가 후에는 사리불의 지도를 받아 수행했다. 침묵을 원칙으로 삼아 수행에 전념하여, 많은 비구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배워 익히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을 은밀히 잘 실행한다 하여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고 불렸다. 한편으로는 다른 제자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드러내기도 하여, 부처님으로부터 훈계를 받기도 했다. 나호라羅 羅, 나운羅云, 羅雲, 복장覆障, 장월障月, 집일執日, 나후羅喉라고도 한다.
⑩ 다문제일 아난타 多聞第一 阿難陀 아난다 Ananda
석가모니의 사촌 아우로 출가한 이래로 20여 년 동안 줄곧 부처님 곁에서 시봉하였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들었다고 하여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으나, 마하가섭의 훈계를 듣고서야 비로소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파자파티(최초의 비구니)가 출가할 수 있도록 석존께 간청했으며 제일 결집 때 들은 바를 암송하여 경을 결집토록 하는데 공헌을 하여 선종의 제 2조로 추앙된다. 경희慶喜, 무염無染, 환선歡善, 아난阿難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가르침은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위력을 발휘하여 수없는 사람들을 구도의 길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여 지혜에 의한 자유, 자비에 의한 평화 속에서 살게 하였다.
우리도 그 분이 보여주신 지혜와 자비를 따라서 자유 속에서 평화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한 발 한 발 그 분의 삶을 따라 배우며 실천하여 그 분의 제자로서 손색이 없는 참다운 구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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