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汭陽江東亭留別慶會
-秋江 南孝溫(1454-1492)
예양강 동정에서 경회와 이별하며 남기다.
冠山雖麗非吾土 관산 수려해도 내 고향은 아니야
別來五年紅顏蒼 이별한 다섯 해에 홍안이 늙었다.
相逢數日又相別 상봉 며칠 만에 다시 작별하니
淸淚浪浪落離觴 말간 눈물 이별 잔에 줄줄 흐른다.
汭陽江水琉璃碧 예양강물은 유리처럼 파란데
花落春光歸半強 꽃 진 봄빛 어느새 태반이 지났다.
聖朝一才無棄擲 성조는 한 인재도 버리지 않으니
如君詞藻孰能忘 그대 같은 글 솜씨 누가 잊겠나.
雷陽春竹南人思 뇌양 봄 죽순 남녘사람 사모하니
寇公應入中書堂 구공은 응당 중서성에 들어가리.
寄語努力加飧飯 부디 싫어도 밥이나 많이 드시면
鶴書赴隴今當忙 왕 조서 당도해 당연히 바쁘겠죠.
春天祖席東亭上 봄날 동정 위에서 송별연 펼치니
竹馬情懷太堪傷 죽마 회포에 크게 가슴 저민다오.
번역자 注)慶會는 尹遘의 字이다.
본관은 함안이고 성종의 폐비 윤씨 친오빠이다.
연산군 때 동부승지, 공조 · 병조참판을 지냈다.
외당숙은 신숙주이고 외할머니는 장흥 마씨이다.
연산군의 외숙이 되는데 어머니 장흥군부인 고령 申氏와 함께 성종 13년(1482壬寅)에 장흥으로 유배와 5-6년 귀양 살며 아들 둘을 낳았다.
관련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남아있다.
후손들이 현재 장흥에 살고 있다.
雷陽春竹 - 한창 돋아나는 봄 죽순은 남쪽 지방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변한 것이니 응당 등용되어 중서성(中書省)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북송(北宋)의 명신(名臣) 구준(寇準)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구준이 형주 사마(衡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죽자 서경(西京)으로 장사를 지내려고 형남(荊南) 공안현(公安縣)을 지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길에 나와 곡하고 제사 지내면서 대나무를 잘라 땅에 꽂고 지전(紙錢)을 걸어 놓았는데 한 달 뒤에 보니 마른 대나무에 순(筍)이 났다고 한다.
첫댓글 존경하는 뚜르와르님!
예양강 동정/봄날 동정 위에서 송별연 펼치니 -----------> 여기 나오는 '동정'은 현재 장흥 어디에 있는 '동쪽 정자?"를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예양강 동쪽 언덕에 있었고 부사 변포가 세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