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7일이 구본웅 화백의 탄생 100주년이라고 합니다.
이에 관련 자료를 몇 가지 올려 봅니다.
1.
김광우의 <구본웅> | 미술비평 2005/12/26 10:48
구본웅 작/ 친구의 초상
구본웅
서산西山 구본웅(1906~53)은 1906년 3월 7일 서울 필운동의 진보적 명문 개화가정의 해방 후 유도회 총본부회장을 역임한 주자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3살 무렵 그를 업고 나갔던 가정부의 등에서 떨어지는 돌발사고로 인해 척추를 다쳐 곱사등이 불구가 되었다. 그가 비운의 신체적 불구를 극복하고 서양화가로 등단하자 사람들은 그를 ‘서울의 로트렉’이라고 불렀다.
구본웅은 1921년 서울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여 미술반 활동을 했고, 1924년에는 고려미술원 연구회 서양화반에 다니면서 동경미술학교 출신 이종우로부터 서양화 기초를 배우면서 이듬해 가을부터는 YMCA 청년학관에 신설된 미술과에도 나가면서 역시 동경미술학교 출신 조각가 김복진으로부터 조각을 배웠다. 신체조건 때문에 집안에서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서울에서 연구소를 다니며 유화와 조각을 배우던 중 1927년 제6회 선전 조각부에 석고 조소 <얼굴 습작>을 출품하여 입선과 동시에 특선을 수상했다. 조각으로 특선을 수상했으므로 그가 조각가의 길로 들어설 듯 하지만 회화에 관심이 많았고, 김복진은 자신에게서 배운 구본웅을 조각가로 만들고 싶었겠지만 김복진은 1928년 봄 제3차 공산당 검거 때 당원으로 체포되어 복역함에 따라 조각가의 활동이 중지되었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간 구본웅은 초기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던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부에 다녔고, 이듬해 니혼(日本) 대학 전문부 미학과에 등록하고 예술이론을 배웠다. 그는 1929년과 30년 다이헤이요미술회(太平洋畵會) 연구소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거듭 수상하고 1930년 봄부터 수십 년 역사의 그 연구소에 다니기 시작하다가 그 해 10월에 서양화 전문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로 승격하자 계속 정규과정을 밟아 1933년에 본과를 졸업했지만 연구과에서 1년 더 수학한 후 귀국했다.
다이헤이요미술학교 2학년 때인 1931년 6월 그는 동경에서 제작한 유화 50여 점을 가지고 서울로 와서 동아일보사 옥상 전시장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 신문 보도를 통해 그가 동경에서 독립미술협회전과 이과전에 출품하고 있었음이 알려졌다.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에 대한 사진자료가 없어 어떤 작품이 소개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이 개인전에 관해 서양화가 김주경은 1932년 정초에 『조선일보』에 기고한 ‘화단의 회고와 전망’에서 “규비즘과의 중간층과, 포비즘과의 중간층과, 내지 익스프레셔니즘 또는 임프레셔니즘과의 중간층에 속하는 작품들도 병진(竝陳)되어 있었다”고 적었다. 구본웅이 그때까지 누구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못한 입체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양식을 골고루 실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동료 화가들의 주목을 받았음은 1930년 12월 동경에서 명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김용준, 길진섭, 이마동, 김응진 등이 모두 친구 사이이기는 하지만 대단치 않은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재학하던 구본웅을 넣어 전향적인 미술연구를 다짐한 백만양화회를 만든 데서 알 수 있다.
구본웅 작 /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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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천온천에서 이상과 구본웅이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가지. 조용만씨 구술.
"이 꼴을 좀 보아, 참, 정말, 곡마단이 왔다고 애들이 따라올거야..."
며칠 전에 구화백과 이상이 백천온천으로 놀러 갔더니, 애들이 서울서 곡마단이 왔다고 두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녀서 창피해서 혼났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이상은 평생 빗질을 해본 적이 없는 텁수룩한 머리와 양인같이 창백한 얼굴에, 숱한 수염이 장대같이 뻗치었고, 보헤미안 넥타이에, 겨울에도 흰구두를 신고, 언뜻보아 활동사진 변사같은 어투로 말하는 것이 곡마단의 요술쟁이 같았을 것이고, 거기다가 구화백은 곱추인데다가 땅에 잘잘 끌리는 인바네스를 입고 중산모를 썼으니, 이 괴상한 두 사람의 콤비가 애들의 호기심을 끌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이상 평전> 225P에서, 고은 作, 청하출판사-
아래는 이상 평전에서 발췌한 구본웅 관련 설명입니다.
<낙랑> 분위기에서 곱추 구본웅은 그의 문학적 취향과 함께 파리의 물랭루즈의 난쟁이 화가를 방불케하고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곱추>에 비유되기도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둥근 안경을 쓰고 예리한 감각과 후덕한 입술과 함께 스폰서 기질을 가진 그는 이상과 동세대로서 일본의 천서, 태평양, 제미에서 수업, 동경의 <2과전>에 출품을 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던 화려한 예술 선각자로서 귀국했던 것이다. 그의 미술평론은 서양화가 정착하는 초창기의 미술 저널리즘을 크게 자극했다. 또한 그는 학교성적은 늘 수석을 유지하는 우수한 재질을 발휘했고 특히 문학적 표현도 퍽이나 세련되어 있었다.
그를 만나자마자 이상은 그와 특이한 동성애적 우정을 가지고 그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그것은 그가 김유정과 가까웠던 사실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상은 그 무렵 이미 폐침윤의 자각증상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런 병에 대한 자각은 그에게 거의 갑작스러운 신체의학적 콤플렉스에 천착하게 했고 그것이 본웅의 불구자 모습에 밀착하게 된 주된 이유였다. 이런 사실은 동병상련의 김유정과의 <정사>계획에서도 잘 나타난다.
- <이상 평전> 166P에서, 고은 作, 청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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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는 알퐁스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몬파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14살 그리고 15살 때 높은 데서 떨어져 곱사등이 불구가 되었다. 드로잉에 일찍부터 재능을 보인 그는 아마추어 화가 삼촌 백작과 집안의 친지인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야외 스포츠를 전문으로 그린 화가 르네 프랭스토로부터 화가가 되도록 격려를 받았다. 15살 때부터 24살 까지 툴루즈-로트레크는 주로 스포츠를 주제로 그렸다. 21살 되던 1885년 그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어 몽마르트르에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하고 잡지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886년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에서 수학할 때 그곳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으며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했다.
1888년경부터 그는 극장, 뮤직홀, 카페, 그리고 파리의 하류층 생활상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화가 고야의 에칭을 수집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에드가 드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후 10년 동안 술집과 카바레에 자주 갔으며 뛰어난 포스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창가를 자주 찾았고 친구로 지내던 그곳 여인들을 대상으로 소묘와 유화를 많이 제작했다.
로트렉
로트렉 작/ Divan japonais
첫댓글 참고로 구본웅 화백이 발레리나 강수진의 외할아버지라고 합니다. 강수진의 어머니 구근모씨는 불구의 몸이었던 선친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 어린 눈에도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고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세 자매를 모두 예술가로 키웠다고 합니다.
하나더...작년인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에 구본웅 화백의 이름이 올라가있다고 합니다. 현대미술사에 남긴 그의 이름이 큰 만큼 아픔이 있겠으나 더불어 이후에, 그가 보여준 반성의 모습은 우리가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