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 題
23기 엄기두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는 두말할 나위없이 매우 중요하기에 그 양태도 다양하다. 개인과 개인 상호간의 인간 관계는 종으로는 물론 횡으로도 아주 미묘하기에 우리 청봉회원들이 어떻게 좀 더 우애있는 단체로 결속될 수 없는가 생각해 본다.
써클 생활은 참여하는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면 매일같이 회관에 나와 매사에 열의를 가짐으로써 그 동향은 물론 자기의 임무를 부여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럼으로 해서 생기있고 원활한 써클생활이 펼쳐리리라 생각한다. 청봉의 대열에서 이탈에서 본 경험이 있는 회원은 누구나 느낄수 있는 감정이겠지만 그것에 대한 향수는 너무나 강열한 것이었다.
군에 간 회원들의 대학방문시 회관에 제일 먼저 들리는 일등은 뚜렷한 본보기라 하겠다. 우정은 존경하는데서 비롯되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된다고들 하기에, 친목과 함께 친절을 본위(本位)로 하는 청봉회원들 사이의 정은 눈물겹도록 밀착되어 있다. 그러나 더욱 우정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남녀회원을 불문하고 언행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끌어주는 선배나 밀어주는 후배사이의 관계를 개선하여 해빙시켜야 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적극적인 활동으로 알차고 뜻있는 청봉을 세워 떳떳한 선배가 되고 귀염받는 후배가 되어 명실공히 청봉인이었음을 자부하자.
눈에 보이지 않게 무난히 해결하며 작은 일부터 서로 돕고 친절하게 처리하여 우리 청봉의 이념 아래 그 사명을 다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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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24기 성 제 훈
나는 지금 이글을, 내가 술을 잘 먹는데 대해 자위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쓰려고 한다. 성인이 아닌 학생의 신분으로써 술을 마신다는 것이 꼭 옳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 자신 지금 이 순간도 술을 입에 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마실 것이다.
남들은 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지 알수 없으나, 나는 내 자신을 잊기위해, 소위 현실도피책으로 술을 먹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술을 먹을 때는 컵에 따라 한잔을 홀짝거리며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특히 안주도 없이 병채들고 나팔불며 깡술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 물론 그런 행위가 나 자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술을 안 마셨으면 안 마셨지, 한잔 홀짝거리며 마시기는 싫다. 그렇게 술을 마신다면 내가 술을 마시는 의의가 없어진다. 내가 커서 애주가-사실은 지금도 애주가지만- 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계속 술을 대할 것을 약속하면 이글을 쓴다.
우리는 가끔 술을 대할 때가 있다. 술의 역사는 매우 길다. 그리이스 신화에도 나오고 있다,
옛날, 중국에서 한 노인이 뽕나무론가 (기억이희미하다) 술을 만들어서 왕에게 바치니, 왕은 술을 마시고 나서 맛은 좋지만 이 술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실수를 하게 될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다. 술의 역사가 김과 더불어 인간과 술과의 관계 또한 매우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 만큼 술은 인간과 오랜 역사를 같이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술은 술을 마시는 인간에게 이로움과 해하는 양면성을 들어내고 있다. 먼저 술의 장점에는 정신적인면, 생활적인면, 생리적인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신적인 면으로는 현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고, 상상력을 촉진 시켜준다. 물론 현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촉진은 장점만을 가진 건 아니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상상력은 큰 도움을 주지만, 엉뚱한 곳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면 이성을 상실하고 범죄에 까지 이를 수도 있다.
다음 생활적인 면으로는 친구와 담소하면서 마시는 술은 기분을 전환시킬 수 있고, 사교 또한 일에 흥취를 돋구어 주기도 한다. 사실, 지금 이시간 이후부터 사라진다면 세상은 결코 똑바로 갈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태초부터 술이 없었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죽 전해내려오다. 이시간 이후 세상의 술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대인관계도 힘들고 나 같은 경우에 소위 스트레스 해소방법이 없어진다. 술은 인간 사이에 분명히 필요하다. 특히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마지막 생리적인 면에서도 장점은 술은 혈액의 순환을 촉진시켜 긴장감의 해소와 피로회복에 도움을 준다. 우리 인간의 몸에 있는 피는 22~23초만에 몸을 한 바퀴 돈다고 한다. 술을 마심으로써 피가 12초 또는 13초만에 몸을 도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안정시켜주고 긴장해소와 피로회복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공자 아닌 공자 할아버지가 나와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적당한 량의 술은 노동자에 있어 작업속도와 능률을 올리고 긴장감의 해소와 제품의 양과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처럼 술은 우리인간에게 많은 이로움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술은 인간에게 이로움만을 주지 않는다. 술은 우리 인간에게 정신적인면 ,생활적인 면, 생리적인 면에 있어서 커다란 해를 끼치기도 한다.
먼저 정신적인 면으로는 의지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현실 도피적이 된다. 알콜중독자를 보면 대부분이 현실 도피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내 자신이 현실도피주의자요, 의지가 약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예외를 시켜 주었으면 한다. 내가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정신나간 알콜 중독자는 아니니까 말이다. 또한 술은 뇌세포를 파괴시켜 기억력을 감퇴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술이 인간에 미치는 무서운 해라 할 것이다.
생활적인 면에서의 술의 피해는 막대한 양의 돈과 시간의 낭비 그리고 주벽의 피해를 들고 있다. 사실 술을 마시는데는 많은 돈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시중에서 술 한병이 350원이다. 그러나 이 술이 일단 포장마차로 들어가면 500원으로 둔갑한다. 포장마차에서 술 한병과 닭발 한접시면 1,500원이 거뜬이 나와 버린다. 만약 집에서 술을 한 병 마신다면 김치와 350원이면 되지만 포장마차에서는 이렇듯 비싸다. 그렇다면 모든 애주가가 집에서 술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사실 그것도 어렵다. 왜냐하면 술을 먹을 때는 분위기가 무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천장만 쳐다보며 술을 마신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적어도 포장마차 정도는 들어가서 마셔야 술맛이 더 나는 것이다. 술을 먹는 애주가에게는 주벽의 피해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덴마아크의 [달가스]는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고 외치며 부흥은동을 했다. 우리나라 애주가들은 기분이 나빠서 술을 마셨을 때는 밖에서 한 소리 -소위 찍소리- 못하고 당하다, 집에 돌아오면 대장이나 된 듯 마누라와 자식을 두들겨 패는 것이다. 맞은 사람은 억울해서 무슨 말인가 하고 싶지만 술취해서 정신나간 사람에게 떠들어봐야 소귀에 경읽기 식으로 입만 아플 것이다. 차라리 잘 대해주고 술이 깨면 바가지를 긁는게 나을 것이다. 또한 분별없이 마시는 술은 사무를 지연 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자타가 공인하기 때문에 예를 첨가하지는 않겠다.
한편 생리적인 면에서의 술의 피해는 여러가지 질병의 원인과 중독을 들 수 있다. 세계속의 모든 애주가들이 술을 마시고있지만, 특히 우리 한국인 애주가들의 특징은 푹음과 폭식에 있다고 한다. 한 번 마시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미인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본다. 한번 술을 마시면 취해서 나가 떨어지기 전까지 마셔대는게 나의 주벽이라면 주벽이랄수 있겠다. 술의 중독은 뭐라하지 않아도 어느정도 무서운 것인지는 알고 있겠다. 술의 중독은 뭐라하지 않아도 어느정도 무서운 것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술 중독은 모든 인체의 작용을 마비시켜 급기야는 폐인에 까지 이르게 한다. 이것이 술의 피해 중 가장 무서운 것이라 하겠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결국 술은 적당한 량을 마셨을 때는 인간 생활에 활력소와 같은 역할을 하나, 과다 섭취했을 때는 그 개인만이 아니라 이 사회까지 어둠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뜨려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술을 대하면 모든 것이 망각의 상태로 된다. 나도 되도록이면, 아니 꼭 이런 버릇을 고쳐야 할 텐데 어쩔지 모르겠다. 결국 애주가들이 술을 마실때에는 올바른 인식과 그에 따른 실천이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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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없 는 배 움 의 길
26기 문 정 희
나의 나이 벌써 스물하고도 둘.
뭇 어른들은 옛날 같으면 가정을 이끌어 나갈 -아내와 어머니로써- 나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이야기들이 징그럽고 멀게만 느껴진다. 학생이라는 보호의 틀 속에 자신을 내 맏긴 채 너무도 오랜 타성에 젖어있기 때문일까?
과거의 스물 둘이라는 나이와 현재의 스물 둘이라는 나이는 시대적 차이속에 너무도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것은 언제까지나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시대에 존속하거나 현재의 오늘에 존속하거나 간에 시대를 배워나가야 할 과제는 시시각각으로 나의 앞에 찾아들고 있다.
자연의 흐름을 타고 태어났으나 생존의 아무런 지혜를 담지 못하고 모체를 빌어 생존의 불꽃을 피우게 되었다. 불꽃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동경과 사랑을 우러나오게 하였고 비로소 생존의 방법을 허락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최초의 자립의 기쁨을 배우게 되었다. 눈은 세상을 볼 수 있을만큼 밝아지길 원했고, 귀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자 하였고 입은 진실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신은 본능적으로 불완전함을 느끼는 인간에게 완전을 취해갈 수 있도록 사고의 능력을 부여했고 이 사고의 능력으로 인해 나는 쉼없는 배움의 길을 탈피할 수 도 없게 되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될 수 없는 자연의 대법칙속에 나는 끝이 없는 배움의 길을 걷고 있다. 배움에는 깊고 얕음, 작고 큼, 넓고 좁음, 참되고 그릇됨 등의 서로 상반되는 상쇄와 서로 융합되는 증폭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이 배움이 나의 것이 되기까지는 나 아닌 타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모른다. 어떠한 가치를 판단하는데 상대성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무런 의미를 간직하지 못한다. 곧 나의 잘못과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배움에의 희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완성을 위해서 타인의 존재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닌 여러사람속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타인의 행위와 사고를 배우고 깨우침은 물론이고 그 누구인가 나의 사고와 행위를 주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됨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나의 배움앞에 신중하고 주저함이 없어야 함을 깨달았다.
내가 배움의 자세에 임할때 부끄러움은 없어질 것이고 배움에 열중했을때 보다 더 아름다울 때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