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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우주적 가치, 이렇게 쓰니 너무 엄청나게 들리고, 어떤 측면으로는 몹시 과장된 느낌도 드는군요^^ 하여간 댓글에 이렇게 언명했으니, 그냥 양해를......
저는 심한 음치라서, 음악에 더욱 열광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음악의 박자/장단/화음 등은 전혀 분석할 재주가 없습니다. 그저 음악사/음악사회학 측면으로 접근할 뿐입니다.
그냥 편하게 평소 느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쓰다보니 또 길어졌습니다. 가능한 한 단축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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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드럼주자 중에서 1세대에 속하는 김대환(金大煥 1933~2004 호적명은 姜大煥)은 신중현과 최초의 록밴드를 결성했고, 조용필을 발굴한 인물 - 김트리오에 이끌 때 조용필에게 자주 주먹질했다고 함^^ -이기도 합니다. 프리 재즈 음악계 세계3대 알토섹스폰 주자인 강태환은 그의 외조카이고, 호적상은 동생. 김대환은 외가에 양자로 간 탓임.
그는 혀 때문에 음악에 방해가 된다고 스스로 혀끝을 잘랐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가혹하게 굴리는 기행으로 유명하며,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그가 특별 주문한 45,000 달러짜리) 무대에 끌고나와 엔진소리를 음악화하려는 시도도 했습니다. 같은 1세대 드러머 유복성(1940~)은 음악에 방해되는 양물을 절단하려고 했다는 고백도 했는데, 특히 드러머들의 집념은 유난히 특출 납니다. 1970년대산 드러머 ‘최소리’는 너무 심한 연습 탓에 난청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김대환은 한 손에 북채를 세 개씩 끼는, 총 6본의 북채를 들고 북을 연주하는 것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양 손에 6본을 성사시킨 세계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최소리도 같은 6본을 사용합니다.
* 김대환의 6본이 선명 - 두 사진은 그의 공식홈피에서 http://www.t42.co.kr/ * 첫 앨범 흑우(黑雨 : 인사기획, 1991) 1990년 먼저 일본에서 발매됨.* 묵우(黙雨 : 사운드 스페이스, 1995) - 본인의 아호로 먼저 사용한 것이 흑우. 일본인에게 흑우는 원폭 때 경험한 방사능낙진을 의미함. 그러나 김대환은 “숨겨진 소리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자”라는 아주 독특하게 해석. 흑을 숨기다로, 우를 빗방울 떨어질 때 들리는 소리로 스스로 풀이함. 묵우(黙雨)도 함께 아호로 씀.
김대환은 2003년 글자를 좌우대칭으로 쓰는 좌도(左書)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관지 포함)를 새겨 넣어, 1990년 세계 기네스북에 오릅니다. 특히 이것으로 남한에서는 아주 유명세를 탔습니다. 글씨를 보려면 대형 돋보기가 있어야 보입니다.
이것을 세서미각(細書微刻)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미각(微刻)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김대환 어째서 미각에 도전했는가?’입니다. 불가능에 도전하려는 마음이 우선 스스로 고백한 첫 번째 사유입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북소리를 내보려고 한 것입니다. 들리지는 않되, 존재하는 북소리! 녹음조차 되지 않지만, 분명한 북소리를!
김대환이 북을 쳤다고 하면, 듣지 않고 녹음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북을 쳤다는 증명을 위해, 미각을 시도하게 됩니다. 미각할 때 그의 손을 보면 틀림없이 글을 새기고 있지만, 손은 전혀 움직임이 없죠!
필자가 1993년 그의 공연장에서 그가 북채를 북에 그냥 대고 지긋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관객들이 그 뜻을 몰라서(필자도 몰랐고), ‘그저 왜 그러시오?’라고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한참 후일 그의 뜻을 알았습니다.
미각 기술의 위대함으로 한민족의 손재주를 만방에 과시한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존재하지 않는 ‘북소리’를 탐구한 그 점이 대단한 것입니다. 인류에게 던진 그의 북소리의 탐구는 발견하는 자가 임자입니다.
일본에 소노수케 오쿠라(大倉正之助)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일본 무형문화재에 대고(大鼓)라고 불리는 것으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오쿠라집안은 이 대고를 대대로 치는 업을 세습하는 가문으로, 대고는 일본 무라마치시대, 약 650년간의 연원이 확인되는 악기입니다. 이 대고를 특히 손으로 직접 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대고는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노(能)’에서 핵심적인 악기입니다.
최근 남한의 전통 북연주자(모듬북 따위)들의 무대 위의 몸짓과 연주행태는 철저히 왜색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장단만이 우리 것이고 기타는 몽땅 왜색. 좋은 것은 왜놈들에게라도 배워야지만, 아무런 생각없이, 혹은 몰래 베끼는 것은 더할 수 없이 비굴하고 치사한 짓입니다. 왜색 북치기를 조선전통이라고 우기는 교수 나부랭이들에게 물벼락을...
* 소노수케 오쿠라가 벨기에 오케스트라와 협연 * 오쿠라가 전통 ‘노’에서 반주 중650년에 걸친 ‘능악사(能樂師)’라는 전통적인 칭호가 붙어있는 오쿠라의 예술세계에, 김대환의 타악에 대한 ‘사유(思惟)’가 합쳐지면, 바로 세계 최정상급 고급문화가 창조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김대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본 오쿠라의 예술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한 자’가 가치를 독점한다!
오쿠라는 김대환의 음악적 동료나 선후배를 자처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일본에 있는 아들(日本の息子)’로 스스로 말했습니다! 겸손한 표현으로 오쿠라의 인품이 들어납니다. 이 일본인은 남한 사람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김대환의 평전을 써서 존경을 표현합니다. 그것도 김대환이 사망한 다음 해인 2005년 일본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파천의 사람 : 한국의 슈퍼 아티스트 김대환 [破天の人 : 韓国のスーパーアーティスト金大煥, 아톤(アートン)출판사]”입니다. 작은 제목으로 “원조한류★스타 김대환의 ‘파천’을 지나는 생애!”을 달았습니다.
* 파천의 사람 : 한국의 슈퍼 아티스트 김대환 [破天の人 : 韓国のスーパーアーティスト金大煥, 2005]이렇게 예술은 창조자보다 ‘발견자/향유자’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창조자를 낮추자고 함이 아니라, 철저한 민족 간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식민지는 좋은 것을 다 뺏앗기고, 나쁜 것은 재빨리 흡수되는 것이죠.
필자는 김대환에 ‘예술세계’ 자체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만, 그가 열심히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려한 개척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죄선일보가 2000년쯤엔가 김대환을 이용한 광고를 내보냈는데, 그것을 보며 ‘죄선일보 시대가 한참은 더 가겠구나’라고 씁쓸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김대환 이야기는 그만하고요,
러시아가 세계 예술사에서 자랑할만한 창조적 성과는 오로지 단 하나, 춤(발레)입니다. 발레는 원래 16세기에 이탈리아가 창조한 것인데, 이것이 프랑스 부르봉왕조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베르사유궁전을 건축한 루이 14세(1638~1715)가 1661년 왕립무용학교(Académie Royale de Dance)를 설립하면서, 유럽에서 발레는 가장 고상한 예술이 됩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후 프랑스에서 시들해지자, 잽싸게 이를 재발견한 나라가 바로 러시아입니다. 스스로 유럽 헌병임을 자처하며 억압적 보수 정치를 펼쳤던 니콜라이1세[Nikolai I, 1796~1855 재위 1825~55]는 교육기관을 늘리면서도, 철저히 농노들의 초등교육은 방해했는데, 그러나 100년 이상 로마노프왕가가 장려한 발레를 획기적으로 융성시키는데는 투자를 많이 합니다.
이 니콜라이1세의 후원 아래, 멀리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을 떠돌던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9~1910)를 1847년 전격적으로 모셔와서, 성 페테르부르크 왕립극장의 수석무용수를 맡깁니다. 프티파는 프랑스에서 출생했으며, 부모도 모두 프랑스인으로 아버지는 유능한 무용수 겸 발레 교사였습니다. 부모가 벨기에에 정착했을 무렵인 7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발레를 배웠습니다.
프티파는 러시아에 정착한 바로 그해에 “파라오의 딸”이라는 발레극을 안무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907년 손을 놓기 전까지, 무려 76개의 작품을 안무하였는데, 이 60년 동안 나온 발레곡은 고전발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호두까기 인형 등을 모두 혼자 안무했습니다.(약간의 반론도 존재) - 프티파는 기존의 긴 치마를 무릎 위까지 끌어올리는 등 발레 복식의 개혁도 추진함.
*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9~1910)이렇게 고전발레는 프랑스의 프티파가 아닌 러시아의 프티파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그럼 근대발레는 바로 이러한 프티파의 러시아에서 성공에 힘입어 육성된 한 불운하고 기괴한 천재 폴란드계 러시아인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zhinskii, 1890~1950)”가 발명한 것입니다. 그는 1920년대에서 사망까지 30년간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습니다.
나진스키 전의 고전발레는 여자가 주연이고, 남자는 보조역할만 했습니다. 그러나 니진스키가 안무한 “목신의 오후(1912년)”는 남자가 주역으로, 본인이 환상적인 도약과 아주 야한 몸짓으로 야유와 함께 경탄을 이끌어 냅니다. 그는 단신(162cm)에 짧고 굵은 다리를 가졌임에도 놀라운 도약력으로 발레에 남성적인 매력을 첨가합니다. 그는 동성애자였습니다.
*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zhinskii, 1890~1950)이차 대전이 끝난 후 20년간 파리의 노천카페에서는 2가지 주제 탓에 자주 육박전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테발디(Renata Tebaldi, 1922~2004)와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 누가 더 노래를 잘하나와 니진스키의 발레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등으로 자주 싸움이 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전발레와 근대발레를 모두 러시아가 발견하여, 발레하면 러시아고, 혁명하면 러시아가 되었습니다. 로마노프왕족이 모두 처형당한 이후 들어선 볼셰비키정권도 발레를 부르조아문화라도 배격하지 않고, 오히려 계급해방과 이데올로기 선전을 위한 훌륭한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러한 활동에서 나온 최고의 걸작이 1968년 초연된 “스타르타쿠스(Spartacus)”입니다. 이 스타르타쿠스는 거의 모두가 남자무용무가 나오며, 그들의 위한 발레입니다. 이 발레극의 핵심은 ‘계급해방’이란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 2007년 7월 런던에서, 영국 로열발레단의 ‘스타르타쿠스’에서 스타르타쿠스로 출연중인, 쿠바가 낳은 세계적 발레리노 ‘카를로스 아코스타(Carlos Acosta 1973~)’. 그는 흑인으로 분류됨. 그는 망명하지 않고 계속 쿠바인으로 남아있음. 쿠바는 정상급 발레리노는 많지만, 흑인이 출연할 수 있는 발레극이 한정되어, 세계 진출이 어려움.이렇게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발레는, 프랑스가 발전시켰고, 이를 러시아가 ‘발견/육성’하면서 러시아 슬라브민족주의 가장 중요한 방패이자 창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주류세력은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입니다. 이것은 몹시 중대한 역사한 사실로, 우리는 너무 그들을 모릅니다. 슬라브 민족주의자와 러시아 혁명 주도세력하고 전혀 다른 집단입니다. 두 집단은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이해 없이 근현대 러시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각설하고, 백인들이 클래식으로, 러시아가 춤(발레)을 가지고 ‘자랑’할 때, 세상 어떤 나라도 명함 내밀기가 어렵습니다. 막강 역사의 중국도 꼬랑지를 내립니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의 춤, 음악 그 어떤 것도 발레와 클래식이 가진 역사적 기원을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유일하게 한민족은 ‘아악’, 일무[佾舞 또는 정재(呈才)]로 도전장을 던질 수 있고, 아니 저들이 우리에게 도전장을 던져야 합니다!
공자의 핵심사상을 담은 책 논어(論語 : 한나라 때인 BC 2 ~ BC 1세기경 만들어짐)는 총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셋째편이 바로 일무편(佾舞編)으로, 당당히 존재하는데, 이 일무라는 춤을 제목으로 하여 26개장의 공자어록으로 있습니다.
일무편의 제1번째 장을 보면,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孰不可忍也!" 공자위계씨 팔일무어정 시가인야 숙불가인야 (풀이 : 도올 김용옥)
공자께서 계씨를 일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여덟 줄로 뜰에서 춤추게 하니, 내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참으리오!"
춤 하나가 언급되고 있는데, 바로 “일무(佾舞)”입니다. 8일무는 천자(天子)일 경우에 추며 1줄에 8명씩 8줄로 64명이 추며, 6일무는 제후(왕)에게 해당되며, 1줄에 6명씩 6줄로 총 36명이 추고, 4일무는 대부(大夫)일 경우에 추는데 1줄에 4명씩 4줄로 16명이, 사(士)일 경우 2명씩 2줄로 4명이 춥니다. 그런데 계씨는 대부임에도 4일무가 아닌, 팔일무는 추자, 공자가 흥분해서 그것은 예(禮)가 아니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공자는 일무를 주나라 때의 표준으로 언급하되, 그 주나라는 바로 요순시대를 태평성대를 표현하기 위해, 하나라, 은나라의 존재하던 일무의 좋은 요소만을 종합하여 다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무는 결국 저 요순시대까지 올라가는 춤인 것입니다. 대체 몇 천 년의 역사입니까? 이 춤의 전통은 한나라를 거쳐 당나라 때에 완벽하게 정립되어, 다시 송나라로 이어집니다. 당나라 때 정립, 이것이 중요합니다. 당악(唐樂 아래 후술함)이 곧 중국음악사의 최고봉의 위치이며, 사실상 중국예술은 전부 당나라가 그 수원지(水源池)입니다. 당나라때 시인 명수와 그 시의 수준, 그 분량은 그 외 전체 중국역대 국가의 총량보다 더 많습니다.
중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화가로 인정받되 무능한 황제로 낙인찍힌 송의 휘종(徽宗 1082~1135) 때, 고려에서 ‘당나라 궁중음악(송나라 궁중음악)’을 배우기 위해 사신들을 보냈습니다. 고려사신들이 와서 궁중 악인들을 만나고 그냥 돌아가려는데, 휘종이 특별히 고려에게 조서(詔書)를 내려보냈는데, 그 글 속에서 휘종은 고려를 비하하면서 잘난 체 하기를,
“멀리 떨어져 있는 너희 나라는 동해(東海)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하리(下吏)에게 청명(請命)하느라고 사신을 조정에까지 보내왔으니 …(후략)… 지금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내리노라.” - 신대철(강릉대 교수) ‘고려의 당악과 아악의 수용’ 논문 중에서 인용
대성아악은 휘종4년(1105년)에 휘종이, 역대 왕조의 궁중악을 참조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때 고려 예종(睿宗 1079~1122)이 비굴함까지 감수하는 용의주도한 준비를 통해 1116년 대성아악을 한반도에 들어옵니다. 고려 의종(毅宗, 1127~73)이 예종이 들어온 대성아악을 제도적으로 완벽하게 정착시킵니다.
이 1116년 들어온 대성아악이,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악이 됩니다. 더불어 40여전인 고려 문종 1073년, 연등회와 팔관회에 총4종의 당악정재(唐樂 呈才 : 정재는 ‘재주를 바친다는 뜻’의 궁중 춤)를 행했는데, 4가지 춤(정재)중에 오직 단 한가지 정재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포구락(抛毬樂)입니다. - 이 1073년, 1116년은 바로 ‘고려사’라는 제1차사료에 명백하게 기술된 연대입니다.
* 1073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춤, 포구락. 두 번째 줄의 무희가 공을 포구락틀의 구멍에 넣으면서 추는 춤. 도판만 보아도 그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느껴짐. 본 그림은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담긴 그림임. 이 의궤는 인류가 만든 1차사료(국가 공식기록) 중에 가장 세밀하고 치밀한 기록이며,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이 담긴 인류의 지적 보물이다. 보통 정리의궤로 통칭함. 정리의궤에는 헌선도, 검무, 선유락, 연화대 등의 다른 정재 그림도 존재함.
중국은 명나라 태조 때 ‘아악’을 다시 정립하나 시들해지고, 17세기 청나라 이후는 사실상 소멸합니다. 아! 중국은 궁중음악 아악과 궁중 춤인 정재, 단 한 개를 오늘날 존속시키지 못했습니다! 창조자인 중국의 아악(정재포함)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휘종의 비웃음을 산 고려 예종이었고, 이 고려 예종의 빛나는 ‘심미안’을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세종, 세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종이 완성하여서 조선 내내 이어졌고, 식민지에 의한 단절의 위기 순간, 바로 다나베(아래 후술)가 목숨줄을 살려주었습니다.
특히 세종은 대성아악에 조선의 향토음악(향악)을 넣는데, 그 유명한 박연((朴堧, 1378~1458)이 결사반대합니다. 박연은 대성아악의 최고 권위자로 세종의 명으로 고려의 대성아악을 총정리했는데, 세종이 여기에 우리 조선음악을 넣고자 하자, 박연이 반대를 하는 겁니다. 세종은 한글창제와 마찬가지로, 박연의 반대를 물리치고, 2개의 음악을 창작하여 아악에 넣습니다. 이것이 왕조실록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 29(1447년) 정대업(定大業 - 文舞)과 보태평(保太平 - 武舞)을 창작하였고, 이를 2년 후인 1449년에 정대업 정재 15성, 보태평 정재 11성을 정식으로 종묘(宗廟)·조회(朝會)·공연(公宴) 등에 사용하도록 결정합니다.
이 정대업과 보태평의 가사는 왕조실록 부록으로 전해졌으며, 지금까지 관련 의식에서 어떻게 행하여 졌는지 여러 왕조실록 기사가 존재하며, 이왕직아악부를 거쳐 국립국악원으로 지금까지 잘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1차 사료에 존재하는 춤과 음악이 현재까지 존속하는 것으로 겨룬다면 단연코 한민족이 1등입니다! - 중국이 아니고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가 아닙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놀라운 음악과 춤의 역사적 전통의 가치를 알아본 자는 바로 음향학자이자 음악사가요, 당시 일본 황실 관리책임부서인 궁내성의 촉탁 공무원으로 파견된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 1883~1985? 백수를 누렸다함)입니다.
조선왕조의 음악과 춤을 담당하던 장악원(掌樂院)은 거의 세습악사가 대다수였는데, 조선왕조가 기울자, ‘이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라는 형태로 독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삼일운동 이후 이왕직아악부의 폐원이 대두되자, 이를 최종 결정하기 위한 전단계로, 일본왕실 궁내성에서 다나베 히사오를 이왕직 아악부에 파견하게 됩니다.
그가 1921년 3월 동경에서 출발하여 경성에 옵니다. 그는 약 13일간 체류하면서, 평양의 기성권번(평양의 기생학교)까지 방문하면서, 전체 조선음악을 훑고 다닙니다. 그후 그의 결론은 이왕직아악부를 존속이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18년 후에, 일본을 위해 사용되는데, 그가 1939년 만주국을 방문하여, 국가의식음악으로 조선의 아악을 참고하도록 권유합니다.
만주국 방문한 1939년 전인 18년간 그는 대동아공영권의 문화건설에 입각한 대동아음악연구의 일환으로 연구한 “대동아 음악』(大東亞の音楽)”이란 저서를 쓰는 등 이른바 5족협화(5族協和 : 중국/만주/몽고/조선/일본의 융합. 후일 러시아를 포함하여 6족 협화로 확장됨)를 위한 지식인 전사로 활동을 했습니다. - 중앙대 교수 노동은 “滿洲音樂硏究 1 - 만주국의 음악정책 전개” 2007년 논문에서 인용
하여간 고려/조선음악과 춤, 더 나아가 하, 은, 주, 당, 송의 음악과 춤이라는 인류의 보석이 사라지지 않은 사연 속에는 다나베 히사오의 ‘심모원려(深謀遠慮)’한 결론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절도범에게 목숨을 해치지 않았다고 그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다나베 히사오를 역사에서 쏙 빼는 것도 치졸합니다. 그저 다나베 히사오의 ‘결론’, 더 좋게 표현하여 ‘노력’으로 명맥이 끊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라고 기록해도 전혀 창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음악/무용 부문에서는 ‘승자’이기에 넓은 아량으로 그 정도는 포용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 대만은 완전히 잃어버린 석전대제(공자 제사)를 잇기 위해, 대만은 1968년 이후, 중국은 1989년 이후 공자제(孔子祭)를 하고 있습니다. 대만은 남한에서 종묘/문묘제례악에서 하는 일무와 아악을 배워가지고 갔습니다. 이 때 주역이 바로 국악사양성 1기생 출신이 조창훈입니다. 그는 종묘제례악 이수자인데, 대금과 단소의 대가로, 대금의 청송곡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단소스승도 했는데, 그가 대만 가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이 제례악을 교습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필자가 조창훈 선생에게서 직접 대화를 통해 확인인 내용입니다.
* 2007년 2월 대만의 공묘(孔廟)에서 행한 일무 모습대만과 중국의 공자제는 명나라의 것을 재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것은 송나라 때 것입니다. 연대로 보아 약 300년간의 차이가 납니다. 최근 유림들의 중심체인 성균관을 중심으로 기존의 석존대제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석존대제를 열려고 하는데, 그 본을 대만과 중국에서 습득하려 하고 있다고 김영숙(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일무 전수조교) 등이 활발하게 이것의 부당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성균관의 입장과 주장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김영숙 등의 주장만으로 사리분석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현재 성균관은 기존의 석존대제의 거행일 문제와 일무에 대한 원형성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들의 석존대제를 지내려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석존대제의 유림들의 행사가 아닌 국가행사로 쭉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의 종교행사라기 보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아주 핵심적 위치이기에 함부로 날짜를 변경하거나, 기존 원형성의 훼손들은 시간을 갖고 찬찬히 풀어볼 과제이기 때문입다. 한국유림들이 일제시대에 가장 친일에 앞장서고, 그에 대한 반성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앞서는 모습에 매우 걱정이 됩니다.
여기서 종묘제례악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고, 문묘제례악(공자제 : 석존대제)는 후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중국과 대만, 일본을 제치고 전세계가 이 두가지의 원형성과 역사성, 그리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온 전통성을 모두가 인정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의식에 사용되는 음악과 춤을 모두 그냥 “당악(唐樂)”이라고 합니다. 위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당악이 곧 중국음악의 정수이자 전부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음악과 춤은 이 당악연구로 귀결되는데, 당악의 세계 최고 권위자이자, 가장 선구자는 일본의 기시베 시게오(岸邊成雄1912~2005)입니다. 남한에서도 당악을 연구하는데, 기시베 시게오의 저작을 빼고는 아예 연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특히 대만은 기시베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여, 자신들의 고전음악연구의 은인으로까지 생각합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방대하고 치밀한 ‘당악’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동아시아 음악의 가장 중요한 학자로 손꼽힙니다. 아무도 그를 따라갈 학자가 전무합니다.
* 기시베 시게오(岸邊成雄1912~2005)의 91세 때 모습. 훨체어는 부인, 우측은 차녀.그는 1912년 동경 출생하여, 1936년 동경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61년 동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학사원 회원이 되었으며, 동경대 교수를 거쳐 1973년 동경대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동아시아 음악에 관한 연구성과는, 3권의 저서와 논문 137편, 보고서 및 해설, 감수서가 167편에 달했습니다. 그의 사망 때에는 대만 학계가 아주 떠들썩했습니다.
그런데, 남한학자들도 잘 모르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기시베 시게오의 동경대 박사학위의 지도교수가 바로 다나베 히사오라는 점입니다!
결국 이 사제가 남한의 문묘악과 종묘악이 당악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적통자임을 증명해준 것입니다. 기시베 시게오가 그렇게 필생에 걸친 ‘당악(唐樂)’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음악 연구를 하면서, 그 ‘당악’ 원형을 맛보려면 바로 조선땅에 와야 했던 것입니다. 손 안대고 우리는 코푼 셈입니다. 그러고도 이 사제들에게 전혀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고요^^ 단, 남한에 이들을 뛰어넘을 뛰어난 음악사학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솔직히’ 창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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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지는군요...
결론은 ‘발견하라!’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조선의 강토에 맞게 창의적으로 승화 발전시켜 전달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이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면, 다른 놈들이 먼저 발견하여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내부의 적들이 저 외세들에게 ‘봉헌’할 수도 있습니다.
르네쌍스는 재탄생이 아니라, 재발견을 의미합니다.
르네쌍스의 결과가 바로 산업혁명이며, 이것이 결국 백인들이 지구를 지배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르네쌍스는 대체 무엇을 재발견했는가?
필자는 단 하나를 찍습니다.
음악도 미술, 신학, 과학도 아니고 그것은 건축!
그리스의 위대한 건축을,
1. 로마의 비투르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 BC 80-70 출생 ~ BC 15년경 사망)가 바로 그리스의 건축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리스건축을 기초로 로마건축을 합하여 기둥(오더)를 설정합니다.
* 1487년경 그려진 다빈치의 비투르비우시안 맨(Vitruviusian Man). 이것은 비투르비우스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2. 이어 15세기 이탈리아의 건축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가 비투르비우스를 발견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알베르티의 동상3. 다시 16세기에 비투르비우스를 재발견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1554?)입니다. 그가 1540년 ‘건축론’이 세상에 나오면서, 드디오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비트루비우스가 재발견됩니다. 세를리오가 비투르비우스가 정립한 오더를 바탕으로 바로 서양건축의 핵심 중에 핵심인 도리아식, 이오니아 등으로 잘 아는 5개의 오더[Order : 기둥과 다름. 기둥과 그 위의 얹힌 부재(엔타블레이춰)까지 포함한 개념]를 재정립합니다. 이 건축론 책은 총 6권(현재는 8권으로 알려짐)인데, 2권은 이탈리아에서, 나머지 4권은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와1세(1494~1547)의 초청으로 거기서 출판합니다. 세를리오는 프랑스에서 사망.
* 세를리오가 정리한 5개의 오더 그림 (왼쪽부터 토스카, 도릭, 이오닉, 코린트, 콤포지트 오더)그리스와 비투르비우스의 건축은 예수 탄생 전에 확립된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이 세를리오의 5개의 오더는 지금까지 건축학 학생이 반드시 그리면서 달달 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를리오가 비투르비우스가 정립한 오더를 중심으로 재정립한 5개의 오더가 결국 르네쌍스의 씨앗이자 열매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세를리오의 5개 오더의 지식을 잽싸게 받아들인 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이고, 이어서 영국과 독일, 스페인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너무 늦어서 5개의 오더가 사용된 훌륭한 건축물 남기지 못했습니다. 세를리오를 발견한 유럽의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은 결국 제국주의의 악독한 승자로 세계사에 등장했습니다. 피식민지인들을 시각적으로 압도할 그 무엇을 세를리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를리오를 ‘발견’한 프랑스는 자랑스럽게 ‘절대불변의 5개오더’에, ‘프렌치 오더(French Order)’를 16세기 말부터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6개 오더가 됩니다. 17세는 바로 프랑스의 전성시대가 되었습니다. - 프렌치오더는 정확히 1567년 필리베르 드 롬므(Philibert de l'Orme)의 책에 처음 등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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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강조드리지만,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문화유산과 지적 전통을 우리는 발견하여야 합니다. 결국 제국주의와 싸울 방패와 창은 결국 거기에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상이 준 문화유산과 지적전통이 부족한 나라들이 겪는 저 극심한 착취와 빈곤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왜놈과 백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핵심은 ‘너희 조상들은 엿 같다!’라는 말 한마디입니다.
조상이 엿 같아 보이는 순간, 우리는 끝장 난 것입니다.
가난하고 초라해 보이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거친 손을 잡고서, 그 손에서 전해오는 수 천 년의 지혜와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용병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도살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얻어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도 영혼은 쉬지 못할 것입니다.
첫댓글나그네 꽤, 쓸만하고 맘에 드는 글이군요. *^^* 결국, 내가 "택견"하는 이유랑 같네요 이 글을 읽으면서, 되돌아보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실히, 제가 살면서, 그때 그 순간에, "택견"을 발견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큰 선생님도 그러셨을 거예요.. 발견하는 것의 그 강렬한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그런 의미에서 제목을 우주적 가치라기 보다, "발견"에 초점이 맞춰줫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언젠가 인간극장인가 어딘가에서 김대환의 삶에 관한 프로가 방영된 적이 잇었는데, 그 프로를 본 적이 잇었어요. 그때 나이가 엄청 많았음에도, 하루도 쉬지않고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드럼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인상에 남았고, 깊은 감동을 받았었는데..어느새 돌아가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