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 쿤달리니 사하스라르를 향해 상승하는 것은 삭티파트에 의해서만 가능합니까?
그래야만 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다른 사람을 통해 삼매를 얻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 존재계에는 한 면만 보고 쉽게 이해할 만큼 간단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망치로 문을 내리쳤을 때 문이 열렸다고 하자. 이 때 나는 망치로 내리쳤기 때문에 문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
망치로 내리치지 않았다면 문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망치 때문에 문이 열렸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똑같은 망치로 다른 문을 내리쳤을 때 망치만 부서지고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이때 우리의 지식에 다른 요인이 들어온다.
문이 열린 것은 전적으로 망치 때문이 아니었다. 문이 이미 열릴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이 열린 이 사건에는 망치뿐만 아니라 문의 상태도 그만큼 작용을 미친다.
한 경우에는 망치로 내리쳐서 문이 열렸지만 다른 경우에는 망치만 부러지고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삭티파트 안에서 해프닝(happening)이 일어날 때 그것은 전적으로 삭티파트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명상가가 이미 내적으로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그 일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삭티파트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았다면 명상가는 사하스라르에 도달하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사하스라르에 도달한 것은 오로지 삭티파트 때문만은 아니다.
삭티파트는 시간을 줄여 주었을 뿐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명상가는 이미 목적지에 도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망치로 문을 내리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이 문은 낡아서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무너질 상태였다.
설령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언젠가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이 왜, 어떻게 무너졌는지 설명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문은 항상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ikananda)는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의 곁에서 신을 일별하는 체험을 얻었다.
만일 이 일이 전적으로 라마크리슈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면 비베카난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라마크리슈나에게는 수백 명의 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 일이 전적으로 비베카난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벌써 오래 전에 이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라마크리슈나를 만나기 전에 많은 스승들을 찾아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일이 일어난 배경에는 비베카난다도 나름대로 준비가 되어 있었고,
라마크리슈나도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제자의 준비와 스승의 능력이 만날 때 시간이 단축된다.
비베카난다가 특정한 순간에 라마크리슈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해프닝은 1년 후나 2년 후, 그의 다음 생,
아니면 열 번쯤 환생한 후에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준비만 되어 있다면 조만간 해프닝이 일어날 것이다.
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시간은 허구며 꿈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별로 가치가 없다. 실제로 시간은 꿈과 같은 현상이다.
그대는 1분도 안 되는 동안 잠깐 졸면서 꿈을 꿀 수 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대는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을 꿈꿀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어난 다음에는 1분도 안 되는 동안에 그렇게 긴 꿈을 꾸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꿈속에서는 시간의 차원이 달라진다. 꿈 속의 시간은 짧은 동안에도 많은 사건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환상인 것이다.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 죽는 곤충이 있다. 우리는 이 곤충을 보고 '불쌍한 녀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곤충이 그 시간동안에 자신의 삶을 완전히 산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가 칠십 년 동안 경험하는 것을 그는 하루만에 경험한다. 거기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집을 짓고, 아내를 맞이하고, 아이를 낳고, 적들과 싸운다.
심지어 산야스(sannyas)의 상태까지 도달한다. 이 모든 것이 24시간만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시간 개념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그렇게 짧은 생을 부여받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24시간만에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70년이나 걸려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가 얼마나 멍청하겠는가?
시간은 마음에 달린 문제다. 시간은 심리적인 것이다. 시간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할 때는 시간이 짧아진다. 그러나 고통에 시달리거나 문제 상황에 빠져 있을 때는 시간이 아주 길어진다.
어떤 사람이 임종을 맞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대는 그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 밤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침해가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다.
슬픔은 시간을 길게 연장한다. 슬픔 속에서 그대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바람이 강할수록 시간은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시간은 항상 똑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위의 경험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진다.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녀가 너무 늦게 온다고 느낀다. 그녀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속도로 걷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그녀가 비행기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를 바란다.
이렇듯 슬픔 속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러나 행복할 때는 다르다.
절친한 친구나 애인을 만나서 밤새도록 정담을 나눌 때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새벽동이 틀 무렵 그대는 밤이 그토록 빨리 지나간 것에 대해 깜짝 놀란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한 순간과 슬픈 순간에 따라 다르다.
시간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외부의 대리인이 그대의 마음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시간적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몽둥이로 그대의 머리를 내리친다면 그대의 머리는 당연히 상처를 입을 것이다.
외부에서 그대의 육체를 때리는 것처럼 그대의 마음을 때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 타격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몸도 마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대는 자신을 몸과 마음으로 생각한다.
몸과 마음은 외부적으로 영향받는다.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줌으로써 시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천 년이 한순간이 될 수도 있고, 한 순간이 천년이 될 수도 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대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지금은 예수 이후로 2천년이 지났으며 크리슈나 이후로 5천년, 그리고 짜라투스트라와 모세 이후로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대는 깜짝 놀라며 '세상에! 저들도 지금 막 깨달았군!'하고 말할 것이다.
시간적인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다.
수천 년이라는 세월이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진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모든 이가 깨닫는다. 한순간의 차이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깨닫는 순간 그대는 붓다, 그리스도, 마하비라, 크리슈나와 동시대 사람이 된다.
그들 또한 방금 깨달은 것처럼 그대와 함께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한순간의 차이도 없다.
하나의 원을 그리고 원주에서부터 중심을 향해 여러 개의 선을 그린다고 하자.
원주에서는 두 선 사이의 거리가 가장 많이 떨어져 있다.
그러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두 선 사이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고, 중심에 닿는 순간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다.
중심에서 모든 선이 하나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깊은 경험의 중심에 도달했을 때는 원주에 존재했던 간격, 2천년 또는 5천년이라는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나 중심에 도달한 사람이 이런 경험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원주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 또한 원주에 속한다.
심각한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를 따르는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물었다.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말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마 제 말을 잘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저는 예수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
내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대가 내말을 잘 듣지 못했다.
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혼란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예수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그대는 예수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예수를 아는 순간, 그대와 예수 사이에는 아무 차이점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에 관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떤 화가가 라마크리슈나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가 라마크리슈나에게 초상화를 보여 주면서 물었다.
"이 그림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라마크리슈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초상화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 라마크리슈나가 무엇인가 착각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가 일깨워 주었다.
"이 그림은 당신의 초상화입니다."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이 인물은 말할 수 없이 깊은 삼매에 들었다.
그러니 이 그림이 어떻게 나의 초상화일 수 있겠는가? 삼매 안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삼매에 대해 엎드려 절한 것이다. 그대가 나를 상기시켜 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웃고 있었다.
원주의 언어와 중심의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
크리슈나는 '나는 라마(Rama)였다.'고 말했으며 예수는 '나는 전에도 와서 너희들에게 말했다.' 고 했다.
붓다는 '나는 다시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 그들은 중심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불교도들은 지금도 붓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이미 여러번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시 똑같은 형상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꿈과 같은 형상이다. 이제는 영원히 사라진 얼굴이다.
중심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없다. 그러나 그대의 시간적인 상태에 다양한 속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가능하다.
깨달음에 걸리는 시간을 가속화시키거나 늦추는 것은 가능하다. 삭티파트에 의해 속도를 한층 높일 수 있다.
이 질문의 말미에서 그대는 삼매에 다른 사람이 연루되는 문제에 관해 물었다.
타인이 타인으로 보이는 것은 그대가 자신의 에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베카난다는 그 해프닝이 라마크리슈나 덕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라마크리슈나가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라마크리슈나에게 있어서 그 해프닝은 전혀 다른 식으로 일어났다.
이것은 오른손이 상처를 입고 왼손이 약을 발라 주는 것과 같다.
이제, 오른손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치료해 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갖고 오른손은 감사를 표하거나 치료를 거부할 수도 있다.
오른손은 '나는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 나는 자립적인 존재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그는 오른손을 통해 작용하는 에너지와 왼손을 통해 작용하는 에너지가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한 사람이 타인에 의해 도움을 받을 때, 사실 그는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의 준비성(readiness) 자체가 그 자신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도움을 끌어 내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어떤 책에 이렇게 씌어 있다.
"스승을 찾지 말라. 그대가 준비되는 순간 그가 그대의 문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 책은 또 이렇게 말한다.
"설령 그를 찾으려 해도 그대가 어떻게 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를 알아볼 것인가?
스승을 알아볼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이미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스승이 제자를 알아본다. 항상 그렇다. 제자는 결코 스승을 알아 볼 수 없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 방법이 없다. 그대는 자기 내면의 존재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스승을 알아본다는 말인가?
그대가 준비되는 날 어떤 손이 그대를 돕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그 손은 그대 자신의 손이다.
그 손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보이는 것은 그대가 모르기 때문이다
앎에 도달하는 날, 그대는 감사를 표하려고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일본의 선원에는 한가지 풍습이 있다. 명상을 배우려고 선원에 오는 구도자는 항상 돗자리를 갖고 온다.
그는 땅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앉는다. 그는 날마다 돗자리 위에 앉아 명상한다.
그리고 명상이 완성되는 날 그는 돗자리를 걷어들고 그 곳을 떠난다.
이 때 스승은 구도자의 명상이 완성되었음을 안다. 스승은 감사의 인사를 기대하지 않는다.
감사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누가 누구에게 감사한단 말인가? 구도자는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난다.
구도자가 돗자리를 걷는 것을 보고 스승은 상황을 이해한다. 돗자리를 걷을 때가 되었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감사의 표현조차 필요 없다.
만일 구도자가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스승은 그를 몽둥이로 내리치고 다시 돗자리를 깔라고 명령할 것이다.
이 때는 구도자의 명상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타인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무지에서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이 어디에 있는가?
무수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수많은 길 위에 놓여 있다.
무수한 거울 속에 오로지 나 자신이 있다.
설령 우리가 거울 속에서 타인을 본다. 해도 그 거울 속에 있는 것은 적대적으로 나 자신이다.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다.
수피의 이야기가 있다.
개 한 마리가 어떤 방에서 길을 잃었다. 그 방은 벽과 천장이 온통 거울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개는 큰 어려움에 처했다.
보는 곳마다 온통 개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수많은 개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다. 문 또한 거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도 많은 개들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당황한 그가 짖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그는 자신의 두려움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 그가 맹렬하게 짖을수록 다른 개들 또한 더 큰 소리로 짖어댔다.
더욱 두려움에 쌓인 개는 그들과 싸우려고 여기저기 달려들었다. 그러자 다른 개들도 똑같이 달려들었다.
밤새도록 그는 거울 속의 개들을 향해 짖고 싸우면서 기진맥진 해 버렸다.
아침이 되었을 때 경비원에 의해 그는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덤벼들고, 짖고, 싸우면서 죽어 간 것이다
그가 죽자,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거울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쳤다.
이렇게 수많은 거울이 있다. 타인은 여러 가지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타인은 허구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관념은 환상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 또한 환상이다. 타인이라는 현상 자체가 환상이다.
일단 이것을 깨달으면 삶이 아주 단순해진다. 타인을 지향하는 모든 행동이 중단되다.
이 때는 타인을 위해 어떤 일 하건,그대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하건 오직 그대만 남는다.
그대는 타인을 도와 줄 때도 그를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도 그를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그대 자신이 있을 뿐이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도 그대는 자기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대를 돕는다면 그는 그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궁극적인 체험 후에나 가능하다. 그 전에 타인은 절대적으로 타인이다.
-OSHO-
|
첫댓글 정읍에 있는 동학혁명 기념관에 가보면 어떤 구조물이 있습니다. 사각형 구조물의 안쪽에 들어가면 위에 전구가 다섯개 켜져있고 구조물 안쪽에는 거울로 전부 발라져있습니다. 사방에 둘려쳐진 거울들이 서로 그 다섯개의 전구 빛을 반사시켜 마치 온 사방에 전구가 가득켜져 있는 듯이 보이는데 저는 그걸 보며 이것이 바로 우주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