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이서 강의 / 이근호 목사 07. 05. 25
요한일서 2:22 /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등장의 의미성 -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찼다.
그리스도의 등장만이 세상의 정체를 드러내야 할 만큼 세상은 그정도로 악으로 가득차다.
이 세상은 자기 정당화(비정상인데도 불구하고 정상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현실)의 현실이다. “이웃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자” 왜? 이웃을 모방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이기에. 이웃을 통해서 나를 파악하는 식으로 자기를 파악하고 그렇게 파악된 자기를 옳다고 하기에.
리꾀르)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나를 해석한다. 홀로 있으면 내가 누군지 몰라서 힘들다. 고독의 문제.
창세기 3장의 현실 죽음 - 창세기 6장의 심판 - 신약의 십자가의 저주로 확장.
즉 소급해서 정리한다면, 선악과 따먹으면 저주받아라. 그 배후 세력을 추적으로 여자의 후손이 나오고 뱀의 후손이 등장하고 그 양자간의 전투양상으로 저주의 해소가 결정남.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준 언약적 비밀이다.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남는 것은 위 아더 워드만 남고 나는 잘났어 만 남는다.
요한일서의 전제 - 선악과의 결론은 죽음이다. 사는 의미성은 없음. 우리를 만드신 분이 말하는 것이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말씀)를 온몸으로 알리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 = 생명. 세상 = 죽음.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죽음이다.
(로마서 8장 2절의 해석 )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는 의미 - 세상은 죄와 사망의 법에 갇혀 있다. 죽음이다.
무엇이 죽음인지 삶인지도 모른다.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다. 한국교회전부다 사기꾼. 사기집단.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는 사기꾼이다.
죄와 사망의 법가운데 있었던 사례들을 고백할수 있는 사람만이 거기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오는 증상들은 이런것이라고 감히 말할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것. 내가 죄와 사망의 법을 평생 느끼면서 산다는 것.
율법을 준 이유? 죄와 사망의 법에 갇혀 있다는 그 죄성이 뭔지를 알리는 것.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
십자가는 죄의 저주에 대한 확정이다. 마태복음 10장 28절의 해석. 예수님이 어떤 입장에서 그 말씀을 하는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입장에서 하는 것이다. 잔소리가 아니다. 버림받는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갈 2:20절에서 성경전체가 보인다. 비로서 이해가 된다.
말씀에서 십자가를 찾아내지 아니하면 성경해석은 엉터리다.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는 사람의 특징이란? 십자가의 현실을 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것. 십자가에 못박힌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 죄인이면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고 자기가 잘났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사망의 법을 아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공로로 빠져나왔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요한일서) 예수님이 생명으로 왔기에 이세상은 자동으로 죽음이 되고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을 어떤 식으로 확산시켜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말씀.
죄사함.
사랑,
화목제물,
성령
이와같은 요한일서의 용어들의 해석 -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능력이 전개되는 능력과 업적들. 새까만 종이에 힌물감을 던질때 그것이 생명이고 사랑이고 화목제물이고. 바로 이 복음을 증거하는 이 것이 바로 그런 작업 자체가 바로 심판과정이다. 그 작업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생명은 취소될수 없다.
믿음이란? 어떤 조건도 불필요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것. 믿음이 온 것으로 충족되는 것이 믿음이고 생명이다.
사도요한의 요한일서의 특징 - 자신이 타락할까봐서 걱정하는 것이 없다는 점. 겁나는 것이 없다. 할까 말까 주저가 없다. 생명이 왔기에.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바울의 특징 - 거침이 없다. 사도바울의 글들에 거침이 없다. 그냥 밀어 부친다. 사도바울이 주저하는 것이 없다.
이근호의 고백 - 세상적인 것으로 인해 고민이 올때 생각한다. 내가 왜 세상에서 사는가? 나는 복음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복음을 거쳐서 고민해 본적 있나? 항상 복음을 위해서 라는 명제를 거쳐서 생각하라는 것. 왜 광주분들을 만나게 했을까? 복음을 위해서. 왜 어떤 사람을 헤어지게 하는가?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면 무엇이 남는가? 나를 위해서가된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에서 뱀의 후손편에 서겠다는 고집밖에 안된다. 이 양편에 이근호는 없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라는 양편뿐이다. 이것이 창세기의 기본틀이다. 이 중간에 내 생각을 집어 넣는 것은 반칙이다.
중간단계가 따로 없다. 즉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반칙이라는 뜻이 된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증거하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살지?라는 이것은 반칙이다. 이런 때는 복음을 위해서 내가 뭘 해야지? 라는 식으로 복음을 거쳐서 나를 돌아볼때 나는 없어지고 둘중에 하나 속해지면서 흡수통합된다. 그것이 문제해결이다.
나라는 노선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적이 없다. 복음을 위해서 를 거쳐서 자기존재를 둘중 어느 편에 예속시키라는 것이다. 이때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제일 큰 고민거리가 자기자신이다.
아프리카 근해에서 해적들에게 잡힌 어부들 때문에 고민하는 4천800만중 몇 명될까? 내 아들이 그 속에 있다 할때 그게 고민이 되지. 그때는 환장하지. 사람의 모든 고민과 외로움은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보기에 일어나는 현싱이다.
나를 괴롭히는 인간이 나라고. 나를 없애버리는 방식. 나를 예수께 속해 버리면 내것은 내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 되고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된다. 내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된다. 주님의 일이 되면 자식이 문제일으킬때 복음을 위해서 를 집어 넣어서 해석할 때 복음을 위해서 자식을 초달하라고 있구나 라고 해석이 내려진다는 것. 소속한다는 것은 노는 것이 아니다.
소속이란 취직이지 백수가 아니다. 주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주께서 나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 내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려운 가운데서 주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주의 뜻만 알면 된다. 고민은 실패할까봐서 두려워한다. 제일 무서운 것이 남의 비난이다. 혼자 있을때는 아무일도 없으면서. 혼자 있을때는 내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다. 누군가 등장하면 나 라는 감이 오면서 바빠진다. 타인의 등장으로 나는 나로서 규정이 된다. 그 타인이 예수로 등장하면서 나는 새롭게 정의된다.
(요한 2서에서)
1절의 택하심의 의미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이 내 앞에 계시다. 나를 마주오고 계시다는 것. 내 운명을 내 선에서 처리 결정 못한다는 것이다. 내 결심은 오래 가지 않는다. 사람의 자기결심은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오래 못간다.
어려운 이야기) 사람이 결심한다는 뜻은 자기 팔을 내미는 것과 같다. 고무줄 댕겨보는 것과 같다. 그 고무줄 놓으면 자기에게 돌아와 버린다. 자기결심은 자신을 확장시켜 보는 것에 불과하지 자신과 결별하지 못한다. 사랑도 같은 원리다. 스파이더맨과 같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쪽으로 당겨오는 전략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너는 내 소유다 라는 표현.
사랑의 실상. 내 식대로의 삶의 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
연애시절과 결혼시절의 차이성.
연애시절 - 상대방에게 구미맞추어 주는 시기. 짧은 기간에 인내심으로 가능한 시기. 여자들은 결혼날짜 잡아 놓고도 주저하는 속성 발휘. 더 좋은 남자가 없나? 팔자가 확정되는 것이기에. 심지어 결혼행진하면서도 그런다.
결혼뒤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여자는 남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의탁한다. 내 사는 법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상황이 사랑이다. 즉 내 영역의 확장이다. 치열한 싸움이다. 양쪽 영역이 자존심에 의해서 싸움을 벌이다가 나름대로의 습관과 버릇과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산다. 조정국면에 들어간다. 일종의 법(계약)이 형성된다. 한쪽이 계약을 위반하면 파토나는 식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다.평생 자기조정국면으로 서로 봐준다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런 상황속에서 어떤 가장이 내가 너를 택했다고 나온다면 그 택함받은 자는 택함받음으로
써 갑자기 그중에서 속하지 않는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예수님은 세상의 조정국면에 동조하지 않고 나는 너를 택했다고 나온다.
1절에서) 장로의 뜻 - 복음을 아는 계시를 맡은 자.
택하심의 내막 - 요한일서의 주제는 생명인데 예수님이 생명이고 이세상은 죽음이다. 생명속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말은 죽음이 순수한 죽음덩어리는 아니고 여기에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생명의 택함받은 자가 이미 있었다는 뜻이다. 성경보고 점차 착해지고 점차 인간된다고 성경을 보면 그것은 불경보는것과 같다. 내가 미처 몰랐던 내 운명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고 정체가 드러난다. 나는 저 세상 사람들처럼 살 운명이 아니었다는 감을 점차 점차 잡는다. 나는 세상 사람들 처럼 내가 알아서 내 영생 내 구원 책임지는 그것이 아니었고 내가 예수 믿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런 요소가 튀어 나오도록 윤곽이 드러나도록 배후에서 작용하시는 분이 나를 내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라고 그렇게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진흙에 묻혀 있는 고고학적 유물찾는 발굴과도 같다. 여자들 눈썹 그리는 솔을 가지고도 작업을 한다. 우리보고 개과천선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일이서란 사망과 죄의 법에 파묻혀 있는 생명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귀한 택한 백성이라는 것. 생명이 파묻혀 있는 그것을 주께서 작업을 개시해서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성경의 뜻이다. 뱀의 후손 따로 있고 여자의 후손이 따로 있다. 뱀의 후손에 가리워져 있던 생명의 자녀를 주께서 이 지상에 내 백성이 있다는 것을 공개하고 싶어서 주께서 작업을 하시는 것이다.
* 두 번째 시간
전시간 요약) 선택이란 주께서 천사를 동원해서 발굴의 작업을 통해서 생명을 찾아내는 것.
사도바울의 로마행 - 로마로 가라 가 아니라 로마로 가게 된다. 로마시민이라는 이유로 인해서 재판받으러 로마로 가게 된다. 그 사실을 통해서 로마로 가야하는 주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에베소 같은 경우에는 이 도성에 내 백성이 많다 했다. 사도바울에게 본인의 인생이 없다.
다만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에게 그의 정체를 밝히는 발굴작업을 위해서 사도바울을 투입시킨다. 복음 듣고 진리를 알고 세상을 달리 보면서 잠자는 영혼처럼 죽음에서 깨어난다. 이 모든 능력이 주께서 시켜서 그리 되었다고 한다. 깨어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또 다시 치고 치고 또 치는 것처럼 계속 치고 나온다. 이 치고 나오는 모든 전략과 원리는 성경속에 있다. 이단들도 이런 소리를 하겠지만 맞는 이야기인가 하는 것은 성경에 부합해야 한다.
요한일서라는 편지의이유? 구원받기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발굴하는 작업으로서의 편지
2절) 진리를 인함이로다.
주체가 진리다. 택함을 입은자가 아니면 진리를 안받아들이기에 진리안에 거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쉽게 하면 사도의 말이 내가 진리를 전하는데 내가 전한 진리에 동참하는 경우란 택하심을 입은 경우에 한한다. 택하심외에는 진리는 거부하게 되어 있다. 선택받지 못한 자가 들을때는 순환논리가 되어서 모순된다.
리꾀르의 해석학에 나오는 순환논리.
미장원은 어디 있나 수퍼옆에 수퍼는 이발소 이발소 옆에 미장원 돌고 도는 폐쇄성. 강강수월래 같다. 도는데 움직이는데 백날 돌아도 그 자리다.
누가 선택했나? 주님이
믿나? 그러면 선택된 것이다.
믿으면 다 선택인가? 아니다.
선택했기에 믿는다.
선택의 폐쇄성이란? 선택받지 못한자를 선택밖으로 밀어내는 방식은 이방법밖에 없다.
(마태복음 11장 25-27절)
이 대목을 불신자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못할점이
1. 슬기있고 지혜있는 자에게는 숨기신다는 사실 : 사람은 자기 지혜를 총 동원해서 믿는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숨는 식으로 하신다. 그렇게 믿을까봐서 도망친다. 인간은 슬기와 지혜를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구원은 오직 아버지와 예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선택에 있음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 어떤 남자의 결혼조건. 저 여자가 절대로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특징은? 생각하지 않은 일만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우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협조하고 관여 했음을 전면 차단시키는 식은 그것뿐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욥이다. 욥은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적이 없다. 욥의 최후 모습은 욥의 기도에 없는 내용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몽땅 은혜가 된다. 하나님의 공로가 된다. 내가 똑똑해서 된다는 것. 자기가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2. 어린아이의 특징 - 어른이 제공하는대로만 받는다. 어린아이에게 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이 구원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폐쇄성인데 진짜 주님앞에서 선택되어서 구원된 사람의 특징은 주님앞에서 슬기를 자랑하고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어린아이 였다고 고백하게 된다. 어린아이는 책임질것이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린아이의 특징 발굴작업에 의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구원받았다.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되고 선택되어 윤곽이 드러내고 내 자랑은 없고 그리스도만 자랑할것만 있고 건져내고 지켜내고 버리지 않는 것이 전부다 주님의 공로.
3.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노동이라는 부담을 갖지 말것. 그 방법은 자아의 가치를인정하지 않는것.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다.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다.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순전히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전부다 받는 것이다. 용서 받았기에 용서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용서 받았다는 뜻이다. 간음하다 잡힌 용서 받은 여자가 당연히 남을 용서한다. 사랑많이 받은 사람이 당연히 남을 사랑한다. 강요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십자가에 매달고 뭘 하든지 해라
헌금이든 성경보든 전도하든 해야 그것이 자기 공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만드신다. 발굴작업 뒤에 보면 우리 속에 십자가라는 문신이 새겨진다. 그게 작동해서 죽을 우리 몸도 그게 작동해서 살리신다. 로마서 8장 10절
성경을 안보고 세상살이 하다보면 이것이 다 잊어 버리고, 내가 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쌓아 간다. 완벽해야 하고 실수하면 안되고 라는 이런 식의 슬기와 지혜를 불러 모은다. 성경을 보는 시간들이 수천년의 진흙더미를 들어 낸다.
주님께서 우리를 심하게 떠민다고 여겨질때. 실망은 우리가운데 어떤 예상이 있었기에 그것이 실망과 더불어서 튀어나온다. 우리는 고고학발굴현장에 있다. 공장에 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진리가운데서 만난다.
3절 은혜와 긍휼과 평강
사도들의 표현은 상투적이 아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공통점은 인간이 만들어 내지 못한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행복의 길을 찾기 위해서 사서 불행의 길로 접어드는 인간군상. 나는 불행해도 좋다고 한다면 이미 행복의 길인데 나는 행복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게 늘 불행이 된다. 우리는 행복할 자격이 없다. 불행해도 괜찮다. 그런 마음을 주실 때 그것이 은혜고 긍휼이고 평강이다.
은혜(선물) -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을 안받는다. 교회의 딱한 모습. 하나님이 안받는 것을 자랑하는 것. 하나님은 사랑 믿음과 소망 곧 하나님께서 주신것만 있으면 된다. 자기가 공들여 만든것을 들이대면 사람취급 안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지옥간것이 아니고 공들여 만들어 놓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대치했기에 지옥간다. 우리를 대신한분이 있기에 구원받는다. 우리는 어린양을 따라간다. 예수님안에 천국문이 열린다. 다윗의 자손으로 인해서 천국문이 열리게 되어 있다.
긍휼(용서) - 우리는 죄인이다.
평강(두려움의 해소) - 우리는 불안이다.
즉 인간의 현실은 자기행함과 죄인임과 불안뿐이다.
진리로 인해서 모였다는 것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고마워서 함께 모였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 최종적으로 다 나타난 것
요한1서 3장 23절 서로 사랑
복음을 아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것. 복음을 매개로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이를 형제라고 알 때. 복음이 영원하기에 그 관계만 영원한 관계가 된다. 철이 들어오면 철인된다. 복음이 들어오면 복음인이 된다. 인간의 성깔대로 사랑하면 오래 못간다. 영원한 은혜 긍휼 평강이 있다면 그것이 영원한 사랑이고 일괄적으로 마무리해서 준 계명이 사랑이다. 사랑이 오면 계명은 없다. 사랑이 와 버리면 개인적인 것은 없다. 사랑안에 있다.
부녀여 처음부터 가진바라
이미 받은 것을 내놓으라는 것. 너희로 하여금 너희 되게 한 그 무엇이 사랑이라는 소리.
화투의비유. 받은 것 중에 내놓으라는 것. 받은 사랑이 있으면 내놓으라는 것. 나는 이렇게 해서 죄인이고 간음한자고 이웃을 미워한 자고 그래서 긍휼이고 평강이고 은혜라는 것을 내놓으라는것.
(고린도 후서 5장 19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주의 심판을 안돌리는 긍휼을 입었으면 사랑하지 않을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죄인이었다. 교회란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를 무시한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는 것은 교회가 아니고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찾는 것은 하나님이 준 사랑이 있는가를 본다. 교단 교파 직분 목사 장로 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본다고 할때 삐져서 나가는 사람은 선택된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사도요한의 순환논리이다.
사도요한의 이 말을 교회에서 그대로 했다면 목사는 교회에서 쫒겨난다. 교회부흥안되는 소리라는 것. 한국교회의 교회 사랑 곧 자기 사랑 곧 구원을 자기가 방해한다. 좋은 것이 좋다고 넘어가면 안된다. 사도요한은 복음을 그대로 전한다.
7절)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미혹 곧 유혹. 유혹이란 말의 성립은
1) 한쪽이 자기정체를 감추고.
2) 저쪽은 미혹쪽에 속하지 않았다는 조건.
창세기 3장의 뱀이 여자를 유혹했고 여자는 남자를 유혹해서 모두 에덴밖으로 추방된다. 창세기 3장은 한마디로 “나가”다 간단하다. 에덴동산에 살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추방된 자의 집합이기에 이 세상은 무슨 짓을 해도 추방될 짓거리만 한다. 유혹이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기에 마귀가 아는 것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마귀가 안다. 그점이 중요하다. 이미 미혹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이미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미혹을 늘상 받고 있어야 그 사람이 성도이다.
미혹을 안받고 있다고 느끼면 그는 성도가 아니다. 이미 마귀의 편에 있는 사람은 미혹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미혹받아야 하고 유혹받아야 한다.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의 예언속에 그것이 나온다. 마태복음 10장 15절 끝에. 16절. 내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 이것을 성도들이 모른다. 이웃집 아저씨는 신사라고. 본받는다고. 착하다고. 그래서 교회 안다녀도 천당간다고. 사람이 이리로 안보이는 것이 문제다. 성도를 늑대 사이로 보낸다. 그런데 성령이 없으면 안보인다. 양의 탈을 썼기에 양으로 보이는 것이 문제다. 케이블 방송 목사들 딱 보면 이리다.
가라지는 숫자와 상관없다. 가라지는 복음을 전하면 튕구면 다 가라지다. 복음을 전할 때 반응이 거부하면 천명이든 만명이든 못간다. 복음에 반대하면 적그리스도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못받고 죄인이며 두려움뿐이다. 미혹했다는 말은 우리를 이런 처지속에서 살게 하신다. 적그리스도에서 나오는 것은 다 자기연민이고 자기자랑이다. 자기를 스스로 가치있게 보는 것이다. 궁극적인 것은 자기가치다.
“뱀같이 지혜 비둘기 같이 순결” - 정신차리라는 말.
너와 다른 사람은 질이 다르다는 소리.
천사는 사람에게 기죽지 않는다. 훨훨 날아다니는데 기죽을 일이 없다. 천사가 감옥을 겁내든가? 천사가 바울의 감옥문을 열어준다. 천사는 겁이 없다. 우리는 천사보다 더 자유로와야 할 사람들. 사도바울은 발목에 착고가 채워졌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다. 천사도 흠모한다고. 예수님께서 천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를 사랑해서 죽으셨다는 것 때문에 부러워 한다고. 천사도 부러워. 자기 백성을 위해서 흘린 피 그 사랑이 들어 있으면 죄용서 받았으면 겁날것이 없다. 남들이 죄인이라고 해도 두려워 할 필요 없다. 우리는 주님의 빌라다. 주님의 빌라 주님의 별장이 하꼬방을 겁내서야 되겠는가?
주님이 사람보고 들어오지 않고 그냥 들어오시면 그냥 계신곳이다. 삭개오는 세리. 네집에 구원이 이르리라. 찾아 오심이 그냥 천국되는 것이다. 내 주 예수 모신곳이 하늘나라
미혹이 두종류
1) 꼬셔서 되는 미혹
2) 협박하는 미혹
마귀는 둘다 사용한다. 꼬시고 협박하고. 마태복음의 이경우에는 협박이다. 당근과 채찍. 이때 염려말라고 한다. 우리몸이 우리것이 아니다.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몸이다. 내 인생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는 것. 내가 아니고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하신다. 이럴때 성도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모델이다.
정리)
1) 일부러 마귀의 미혹속에 살게 하신다.
2)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려고
어떤 시련이 있어도 거뜬하게 구원해 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언니들이 동생을 갖고 놀면서 그네태우기와 같다. 무서워. 무서워. 재미있지? 재미있지? 애는 새파랗게 가는데 그만 태우라고 무섭다고 하는데 그래도 계속 밀어 낸다. 우리는 바짝 언다. 돈없으면 못산다는게 우리인데, 돈없어도 살수 있지? 그러면서 밀어 부친다. 재미있지? 재미있지? 고린도후서. 우리를 환란가운데 몰아 넣어서 환란가운데서도 그리스도가 주는 큰 기쁨을 얻게 하려고 한다. 환란속에 놓여 봐야 주님의 능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수 없다고 할때 기대 없을때, 성도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성경말씀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교회와서 내 축복받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어떻게 좁은 길을 가라는 것이 곧이 듣긴다는 이것이 주의 능력이다. 우리가 대단한것이 아니고 주님이 대단한다는 것이다. 도저히 안되는 것을 되게 한다는 것. 죽은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그것을 감탄하게 된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니 돈 안된다고 복음 버리는데
나는 돈 안나와도 너보다 가난해도 복음이 감사한다고 반박했다.
복음은 오직 믿게 되어서 천국갈 사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게 되어 있다. 이것을 미혹의 세계속에서 혹독하게 느껴야 한다. 평생토록.
안믿는 것은 정상이다. 자식도 예수믿을거라고 너무 기대 말라고.
다가면 천국인가? 천국 갈사람만 천국답고 기적이다.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실감난다. 아직 죽이지는 않았다. 여유가 좀 있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싫다고 수정될 사항이 아니다. 그냥 이대로 간다. 하지만 결국은 뒤에 보면 나온다.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말고. 따라서 목사는 설교단에서 지옥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진짜 가짜가 결판난다.
교회일이 복음대로 되어야 한다. 다수결이 아니다 다수가 싫어해도 복음대로 이야기할수밖에 없다. 무안화평교회같은 경우는 소수한테 다수가 미움받았다. 희한한---
미혹과 그리스도의 육체와의 관련성을 보는 사람이 성도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육신의 죽음이다. 죽어야 할 육신으로 예수님이 오신것을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냐와 연관을 못시키면 이것이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세상을 볼때 어떤 관점에서 보라? 예수님을 몰매 주면서 죽이라고 죽이라고 외치는 세상으로 볼줄 알면 세상을 제대로 본것이고,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런 헤프닝까지 벌였나 예수님이 너무 오버했다. 그냥 좋은 소리 하면 다 순종할것을 가지고. 사람을 왜 부정적으로 몰아가는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세상의 건전성을 양쪽 다 쥐려고 하면 이것이 안되는 것이다.
세상의 건전하다는 생각 - 세상이 건전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는 없다. 건전한 사람 다 나와! 이러면 되는 것이지. 괜찮게 사는 사람 천국보내면 될것을. 예수의 죽으심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원수다.
로마서 3장 21절 무척 좋아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안된다. 하나님이 안받는다. 뭘 해도 안받는다. 영광되는 것은 예수님의 화목제물 뿐이다. 우리는 그 화목제물 앞장세워서 천당가는 것이다. 알아서 기라면 그냥 기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인함이라. 우리 행위는 의가 나올수 없다는 뜻이다. 사도는 말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사도는 자기를 잘난 사람으로 봤다.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 십자가를 아십니까 그 책을 보고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고. 점잖은 분이 왜 분노할까? 서로 개성을 인정하면 되는데 왜 분노하나? 그게 자기의 다른 부분 미처 모르던 부분을 건드리니까 그것이 점화되어서 분노로 나온다. 그가 알것은 나도 분노할줄 아는 인간임을 알아야 한다. 나도 이렇게 대단히 성질 부리는 이런 인간임을 알아채야 한다. 자기에 대해서 잘못된 예상을 하고 있다.
육체로 오신 예수. 육체로 이루어진 모든일 십자가와 부활만이 이루는 일. 육신이 아니면 성취할수 없는 일. 그 결과에 대해서 부인하는자는 미혹하는자요 적그리스도.
온전한 상 - 이미 주님께서 다 마련하신 상이라는 의미다.
(쉬는 시간에 한 이야기 - 목사가 목회 망하는 길이 목사의 살길이다. 일단 성공한 화평교회 목사??? 웃음)
* 세 번째 시간
9절에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없다는 말
이것처럼 획기적인 이야기가 없다. 사람마다 신을 믿는다. 신을 인정하는 모든 인간. 구체적으로는 인격신이냐 뭐냐 하는 것을 따지는데 일단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범주 절대적인 목표에 대해서 경외성을 느끼면서 다가가려고 한다 이것이 신이다. 아는 범위에서만 체계를 잡지만 우발적인 것을 다 수용 못한다. 펀드 매니저가 이자율을 보장한다고 해도 성공률은 100퍼센트가 아니다. 그 예상 못한 폭만큼은 불안하다. 이것을 하이데거가 염려라고 했다. 불안. 불안에서 시작해서 불안으로 끝난다.
(하이데거의 염려분석)
인간은 세계내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를 자기 밖에 있다고 여기면서 세계를 보기에 대상으로 보면서 자기를 보기에 불안하다. 여자들은 가정을 먼저 생각한다. 남자는 가정이 밖의 대상으로 남는다. 가정이 나를 힘들게 하면 가정을 끊어버릴수도 있다. 물론 여성은 남성화 되어서 가정마저 선택사항으로 본다.
그래도 세상의 압박을 받으니까 불안하다. 그래서 신을 찾는다. 중도 하나님찾는다. 우주와 나와의 갭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한국축구 8강 올라갈 때 기도하는 군중들. 알수 없는 불안이 지배한다.
육의 구조는 확정적이다. 육위 구조에서 예수가 들어온다는 말은 이 구조안에 첨가물이 새로 들어온다는 소리다. 즉 신과 나 사이에 예수가 들어온다. 이런 구조가 상식인데 성경은 그리스도안에 아버지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는 이 구조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유발시켰다고 그것이 죄라고 규정할 경우에만 이 잘못된 구조가 깨어지게 되어 있다.
내가 하나님을 좋아한것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유대인이 믿던 하나님이었구나
하나님하고 나 사이에 예수가 추가 되어서 믿는 것이 지옥갈 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국교회는 다 이렇게 믿는다. 예수 믿고 나서 다 예수를 버린다. 원죄 해결보고 예수는 버린다. 그리고 하나님보고 복달라고 한다. 그러니 예수가 와서 나를 빛내고.
사도는 갈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물귀신이다. 같이 죽자고 왔다.
사도는 하나님을 너무 잘믿어서 예수를 죽이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그런 사도바울을 껴않고 죽어버렸다.
사도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런 틀 자체가 뭉개져야 한다. 나라는 인간이 믿는 신은 우상이 되고 악마를 믿는 것이 된다. 내가 믿는 신은 나의 욕망의 화신이었다고. 내가 부리고 조정되는 허수아비같은 신이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참된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이다. 참된 하나님 우리 앞에서 고꾸라져서 피흘리는 하나님. 나는 너를 위해서 피흘린다. 피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부채표 없는것은 할명수 아님.
요한일서 피와 성령과 물이 진짜 하나님증거.
예수님안에 계신 하나님. 이것이 사도바울을 돌게 만들었다. 십자가달린 분이 하나님인데. 내가 믿은 하나님은 상상속의 하나님이다. 십계명 지키면 복주는 하나님. 예수님이 그것을 지켜서 그 공로로 구원받는다. 그 공로를 우리에게 나눠주서 일한것도 없이 의를 받아서 구원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아들의 나라로. 하나님도 아들의 나라만 사모한다. 그것이 목적이다.
예수이름만 높인다. 예수다. 여호와 아니다. 예수다. 예수님이 여호와였다. 예수님은 성인이 아니다 하나님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진짜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예수 고백하지 않으면 아버지 없다.
(요일 5:12)
아들 있으면 생명 있고, 아들이 없으면 생명 없다.
대한 예수교. 예수중심.
예수님을 앞장세우는 분이 하나님이다.
12,13) 시작도 택함 끝도 택함
발굴이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보석같은 국보같은 존재를 발굴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만이 비로서 자기 백성들을 깨어나게 할수 있다.
기도
저희들이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다 아시고 정한자 부르시고 부르신자 찾아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일관된 작업에 의해서 백성으로 드러났습니다 험악한 세상 살더라도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고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세상을 내다 보게 하옵소서. 아멘.
첫댓글 아.있었군요.ㅋㅋ 성격이 급해서 없는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