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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대
('마산고등학교 60년사'집필위원. 31회. 경남대 국문과 교수)
1. 글 머리에
이 글은, 우리 모교가 개교한 이후부터 휴전 협정이 맺어진 무렵까지 약 20년 동안을 중심으로 하여 모교의 중요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다. 제목이 '마산고등학교 60년의 발자취' 로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반기 20년 간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술하게 된 데는 한 가지 큰 까 닭이 있어서이다.
그것은 일제 시대는 물론이고 해방에서 휴전 무렵까지의 기간은 자료의 부족으로
그 동안 많은 사실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다 해도 잘못 전해지고 있는 부분이 많아
이를 가능한 한 사실에 맞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휴전 이후인 1950년대 중반부터 오늘날까지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료가 남아 있어 역사 정리에 그다지 어렵지 않은 시기인 까닭에,
한정된 지면을 마산고등학교의 근,현대사에 할애하는 것보다는 고대사, 중세사에 할애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이전까지에 대한 모교 연혁부 기록은 매우 소략할 뿐만 아니라
더러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기술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처음부터 잘못 기록되어 있는 사례도 있다.
'마산고등학교 60년사' 집필위원들은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가능하면 그것을 자세하게 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그것을 없애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자
노력해 왔고, 그 한 작은 결실로 <간추린 마산고등학교 역사>를 지난 개교 60주년 기념식 때 선보인 바 있다
.
물론 이 책은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완성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편년체로 된 <간추린 마산고등학교 역사>에 있는, 초창기부터 20년 동안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다시 서술한 것이다.
모자라는 부분과 잘못된 부분이 발견될 때는 앞으로 보완해 나갈 것을 기약하면서, 자문에 응해 주시고
많은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초창기 선배님들께와 모교 박상규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들께 고마움을 표한다.
2. 일제시대
(1) 설립에 얽힌 이야기
마산고등학교의 역사는 1936년 3월 16일에 '마산공립중학교(馬山公立中學校)' 라는 이름으로 설립 인가가 남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의 중학교는 지금으로 치면 대체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아우르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수업 연한 5년,
한 학년당 2학급씩, 한 학급당 정원 55명(입학 정원 110명), 한 학년도는 4월 1일부터 이듬해 3월 31일까지이고,
한 학년도는 3개 학기 제도라는 외형 을 갖추고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틀은 9기생이 입학하던 1944학년도 까지는 거의 변함없이 지켜졌다.
마산공립중학교 설립의 의의는 이 땅에 새로운 중학교가 하나 더 들어섰다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인도 일본인과 함께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된 최초의 학교가 마산공립중학교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암담한 일제 식민지 통치기여서 한국인은 여러 모로 차별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교육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당시의 중학교는 일본인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와 한국인들만 다니는 학교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 이름도 달랐다.
일본인 학교는 'XX공립중학교'(부산공립중학교 등)와 같은 이름을 썼고,
한국인 학교는 몇 가지 분류에 따라 'XX고등보통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 등),
'XX공립상업/공업/농업 학교'(창신학교 등)라는 등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여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이름은 '마산고등여학교'와 같이 '여학교'를 붙임으로써 또 다른 명칭으로 부르게 되어 있었다.
당시 마산에는 한국인을 위한 인문계 공립 중학교가 없어서, 뜻 있는 지역 인사들은 동래고등보통학교와 같은 민족주의 정신에
입각한 고보(高普)를 설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마산에는 일본인 남학생을 위한 중학교도 없었기 때문에, 마산 거주 일본인들은 교육 관계자(일본인)들과 협의하여 부산공립중학교와 같은 중학교를 이 곳에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마산공립중학교는 고보 설립을 추진하려는 한국인의 요구와 중학교를 세우려는
일본인의 요구가 절충된 결과로 출범하게 된 학교였던 것이다. 그러나 차별은 여전한 것이어서,
우리 한국인은 모집 정원의 40%인 44명만이 입학할 수 있었고 나머지 60%인 66명은 일본인들의 차지였다.
(2) 21대 1의 경쟁률을 보였던 1기생 선발 고사
일제 시대 모교의 신입생은 학과 시험, 면접 고사 그리고 신체 검사를 거쳐 선발되었다.
아직 본교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마산고등여학교(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서 선발 고사를 치렀는데,
그때 마산고녀(馬山高女)는 지금의 신마산 월포 삼익 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학과 시험은 일본어, 산술, 일본어 작문 등이었고 면접 시험에서는 지원 동기와 졸업 후의 진로 등을 물었다고 한다.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66명 모집에 350명이 지원하여 5.3대 1의 경쟁률을 보인 데 그쳤지만,
한국인의 경우는 44명 모집에 920명이 지원하여 무려 21대 1의 경쟁률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쟁률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뒤에도 계 속되었다.
일제시대, 배움에 목말라 있던 마산을 중심으로 한 경남 일원의 수재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마산공립중학교 문전으로 너나없이 모여 들었던 것이다.
(3) 1기생 입학식과 개교식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학제는 한 학년도의 시작을 4월 1일로, 마감을 3월 말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1936년 4월 1일은 마산공립중학교 역사상 첫 학년도가 시작되는 뜻있는 날이었다.
새 학기 시작 하루 앞날인 3월 31일자로 초대 사까다(坂田政次郞) 교장과 몇몇 교유(敎諭=교사)가 부임하여
학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4월 11일에는 1기생 110명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적인 입학식이 지금의 완월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었고,
4월 24일에는 대망의 개교식이 같은 자리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중요한 두 행사를 본교가 아닌 인근 초등학교에서 갖게 된 것은,
당시 우리의 모교는 아직 건물도 운동장도 없는 상태였다는 데 있었다.
현재의 교정은 1938년 9월에 준공되었기 때문에, 초창기 동문들은 완월초등학교 교실과 운동장을 빌려서 공부를 해야 했다.
1936년 당시 완월초등학교에는 주건물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건물에는 세 개의 교실이 있었다고 한다.
가운데 교실은 교무실, 교장실, 서무실 겸용 공간이었고, 그 좌우 교실은 1기생 두 학급의 교실로 쓰였다.
1937년에 2기생이 입학하자 자연히 교실이 모자라게 되었다. 완월교 교실 뒤쪽에 천막으로 임시 교실을 만들어
2학년은 천막에서, 1학년은 본건물 교실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천막 교실의 가장자리에 앉은 학생은 교복이 비에 젖기 마련이었고,
본교 운동장 정지 작업장으로부터는 간단 없는 다이너마이트 폭발 소리로 칠판이 파르르 떨곤 하던 시절이었다.
1기생 입학식을 치르고 난 13일 뒤에, 예의 완월교 운동장에서는 역사적인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순서로 보면, 개교식이 먼저 있고 다음에 입학식이 있어야 했거나 개교식과 입학식이 동시에 치러졌어야 했겠지만,
설립 인가가 늦게 나는 바람에 모든 일정이 늦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개교식 기념 사진을 보면,
군복이나 양복 차림에 머리를 짧게 깎은 교사들, 빡빡머리의 학생들, 한복, 양복 차림의 학부형들, 관계 공무원들,
지방 유지들로하여 식장은 꽤 거들먹하게 보인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비중 있는 행사였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
지금 우리들의 모교 마산고등학교는 개교 기념일을 1기생이 입학한 날짜인 4월 11로 잡고 있지 만,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그것은 4월 24일이 되어야 함을 참고삼아 적어 둔다.
일제 시대에는 '遠足=소풍)' 등 굵직굵직한 행사를 개교를 기념하는 행사로 4월 24일에 치렀는데,
이는 당시의 교지인 '정기(正氣)' 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4) 당시의 학과목 및 학기 제도
당시의 학과목과 학기 제도는 우리나라 전체의 교육 방침(조선총독부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네 차례에 걸친 '교육령' 이 잇었는데, 개교 당시에는 '제2차 교육령' 이 시행되고 있던 때였다.
제2차 교육령은 1922년부터 1938년까지였고, 1938년 3월부터 1943년 4월까지는 제3차 교육령 시기였으며,
1943년 4월 이후 일제 패망 때까지는 제4차 교육령 시기였다.
각 교육령 시행기 때마다 다소의 학과목 변동이 있었으나,
그 경향은 한국적인 것 격하 내지 소멸, 일본적인 것 강화, 영어 등 구미 관련 학과 배격,
중국어 등 아시아 관련 학과 중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일제의 대동아 전쟁 수행과 깊은 관련을 맺는 것이었다.
제2차 교육령 시행 당시의 구체적인 교과목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수신(修身), 공민과(公民科), 일한(日漢),
영어, 역사, 지리, 수학, 이과, 실업, 도화(圖畵), 음악, 체조 등 12개 과목.
여기에서 '일한'은 일본어와 한문을 가리키는 것인데, 한국어(당시 표현으로는 '조선어') 강좌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위 과목 중 특히 수신, 공민과, 일한, 역사, 지리, 체조 등은 일제의 전략적인 학과였다.
수신의 교수 요지인 "수신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하며 도덕상의 사상과 정조(情操)를 양성하여
중등 이상 사회의 자녀에게 필요한 품격을 갖추게 하고 실천 궁행을 장려하는 것을 요지로 한다."를 보면,
일제의 궁극적인 교육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알수 있다.
'중등 이상 사회의 자녀'는,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충량(忠良)한 황국 신민(皇國臣民)'이 될 자질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일본인들은 당연히 그렇고 한국인 중에서도 소위 엘리트 계층을 일본화시켜 그들의 통치에 찬동하는 사람들로 만들겠다는
저의를 짙에 깔아 놓았던 것이다. 수신 과목을 교장이 직접 가르쳤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체조에는 '체조, 무도(武道), 교련' 등이 포함 되어 있다.
일제는 중학교 학생들에게 신체적으로도 강건한 사람이기를 요구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장기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한 학년도는 3학기로 나누어졌는데, 구체적인 학기 구분은 다음과 같다.
-제1학기 : 4월 1일 ~ 8월 31일
여름방학은 1학기에 속했는데, 7월 21일에서 8월 31일까지였다.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2학기 : 9월 1일 ~ 다음해 1월 8일
2학기에는 겨울방학이 있었다. 12월 25일에서 이듬해 1월 8일까지였으니,
보름 남짓한 동안이었다.
-제3학기 : 1월 9일 ~ 3월 31일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기간이긴 하지만, 3월 26일부터 3월 31일까지는 봄방학 기간이었다.
오늘날에도 초,충등학교에서는 2월 24일을 전후로 시작하여 2월 말일에 끝나는 봄방학이 있다.
(5) 당시 학교의 1년 동안의 운영 모습
당시의 모교는 1년 동안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때의 교지인 '정기'에 기록된 사항을 참조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1939년 8월에 나온 '정기' 3호(1938학년도의 기록)만을 입수한 상태이지만,
여기의 내용으로 당시를 상상해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월
새 학년도가 시작되면서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된다. 입학식은 5일이나 6일에 주로 거행되었다.
(전입학생이 있을 경우, 신입생 입학식 며칠 앞에 전입생 입학식을 가졌다.)
1,2기 입학생들은 아직 모교 교정이 완공되기 전에 입학했기 때문에 완월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가졌으나,
3기생들은 새 교정에서 첫 입학식을 치를 수 있었다. 1938년 4월 6일의 일이었다.
모교 준공은 이해 9월에 이루어졌지만, 운동장 등이 거의 제모습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4일에는 개교 기념 행사로 소풍 등을 실시했는데, 24일이 일요일이면 23일로 날짜를 당겨서 행사를 가졌다.
-5월
초순에 전학년을 대상으로하여 신체 검사를 실시한다. 개교 후 첫 신체 검사가 실시된 것은 1936년 7월 1일이었으나,
1937학년도부터는 대체로 5월로 날짜를 고정시켰다. 1936학년도에는 발육(키, 몸무게, 가슴둘레),
영양, 척추, 시력 등에 대한 측정이나 검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1937학년부터는 검사 항목이 대폭 늘어나,
앉은키, 흉곽, 색맹, 청력, 인두, 이빨 등에 대한 측정 또는 검사가 추가되었던 것이다.
중순에는 1학기 가정 방문이 있었다.
-6월
1일부터 하복을 착용한다. 초순에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는데, 주로 4일에 걸쳐 실시되었다.
-7월
초순에 4일 간에 걸쳐 1학기 기말고사를 시행하고는 20일에 1학기 종업식을 갖는다. 종업식때 '근로 보국대' 결단식도 함께 갖는데, 이는 방학을 이용하여 시행되는 근로 봉사 활동의 하나였다.
-8월
여름방학이 끝나기 열흘 전부터 '보습 수업(補習授業)'이 시행되었다.
-9월
1일에 제2학기 시업식을 거행하고 초순경에 간단한 체육 행사가 연례적으로 열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1938학년도의 경우, 이 달 8일에 "운동일을 맞아 학급 대항 이어달리기 경주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10월
기록의 부족으로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11월
초순경에 운동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8학년도의 경우, 교사 낙성 기념 행사의 하나로 5일에 운동회를 개최했는데,
그 명칭이 '제1회 운동회'로어 있다. 이로 보아 그 이후에도 운동회는 연례적으로 개최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단, 그 날짜는 10월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운동회 종목으로는 각종 체조, 여러 종류의 달리기
(100m, 200m, 400m, 800m, 1,500m, 장애물 경주 등), 전쟁 관련 경기(포탄 운반, 분열, 구호 경주, 함께 돌격 등등),
그 밖의 경기 등이 있었다.
12일을 전후하여 제2학기 중간고사가 실시되고, 하순에는 당시 중요 과목이었던 일한(日漢), 영어, 수학을
대상으로 하는 실력 고사가 있었다. 하순에는 1주일에 걸친 2학기 가정 방문이 실시 되었다.
-12월
14일을 전후하여 제2학기 기말고사가 치러지고, 24일에 2학기 종업식을 갖는다.
-다음해 1월
중순경에 특정 학년(주로 고학년이었는 듯)을 대상으로하여 과외 교수가 실시되었다.
-2월
1938학년도의 경우, 1939년 2월 11일에 학예회가 개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연례화된 행사였는지의 여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내용에 내해서도 현재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18일을 전후하여 제3학기 중간고사가 4일 동안 실시되었다.
-3월
2일을 전후하여 졸업식이 거행되었다((7)항 참조). 초순에 학년말 고사가 있고, 중순에 4~5일에 걸쳐 신입생 선발고사를 실시한다.
25일에 종업식을 거행하고 0일에 전입학 시험을 실시하는데, 전입학 시험이 해마다 거르지 않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그 밖
부정기적으로 단체 영화 관람도 있었다. 주로 마산극장을 이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영화 내용은 일본군의 대동아 전쟁 수행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관련된 의례적인 행사, 예컨대 신사 참배, 궁성 요배, 일본 국경일 기념 등의 행사가 일정한 시기에
거행되었고, 정신 무장을 위한 특강 등이 수시로 개최되었으며, 노력 동원 등도 자주 있었다.
학생들의 노력 동원은 1943년 3월 8일에 있은 '제4차 교육령'공포 이후 훨씬 강조 높게 시행되었는데,
그것은 이 무렵의 교육은 전시 체제(戰時體制)에 맞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는 교육다운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기였다.
(6) 마산공립중학교 낙성식(落成式)
1936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마산공립중학교 신축 공사는 2년 5개여 월의 공정 끝에
1938년 9월 17일에 준공되기에 이른다.
총부지 평수는 13,517평이고 건물 평수는 1,280여 평이었다.
그 당시 건물은 교사(본관), 기숙사, 무도장(武道場), 총기고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교사는 2층이었고 일부 지하실이 있었다. 본관 건물이 오늘날과 같이 3층으로 된 것은 1979년 10월 이후의 일이다.
무도장은 현재 강당 겸 체육관 자리에 있었는데, 일부 지하를 가진 1층 건물로 규모는 213평 크기였다.
무도장은 말 그대로 유도, 검도 등 일본식 무도를 가르치던 곳이었지만, 전체 학생을 모아 놓고
각종 의식을 진행할 수 있는 실내 공간이기도 했다.
이 무도장은, 체육관 겸 강당으로 사용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위해 1994년 1월에 헐릴 때까지
56년 동안 모교의 명소의 하나로 기억되었다. (새 건물 준공식은 1994년 9월 10일에 있었다.)
초기 건물 중에서 잊지 못할 또 하나의 건물은 기숙사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기숙사는 무도장 뒤 도랑 건너편인 지금의 경남과학관 자리에
단층 건물로 아담하게 들어서 있었다. 210평 규모였다.
'지성(至誠)'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기숙사는 일제 패망과 더불어 문을 닫게 되었지만(?),
6.25 때 교실이 국군 병원의 병실로 이용됨에 따라, 당시 재학생들의 임시 교사 역할을 하기도 했고,
1951년 9월 1일자 학제 변경에 따라 모교가 마산서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로 나누어진 뒤에는
마산서중학교(뒤에는 마산중학교)의 도서관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제시대, 밤 12시만 되면 귀신이 나타나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는 유명한 전설이 간직된 곳도 바로 이 기숙사였다
.
마산공립중학교 낙성식은 준공일로부터 18일 뒤인 1938년 11월 4일에 성대히 거행되었다.
당시 기념 식장에서 축사를 한 사람은 마산 부윤(지금으로 치면 마산 시장)을 비롯하여
자그마치 열 사람이나 되었고(모두 일본인), 축전을 보낸 사람은 경남 도지사를 비롯하여 45명에 이르렀다.
축전을 보낸 학교장을 보면, 부산,통영,진주 등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평양,원산,신의주 등 북녘에 소재한 학교의 교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낙성식이 있은 뒤에는 낙성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뒤따랐는데,
11월 4일~6일에 있었던 학예품 전람회, 11월 5일에 개최된 제1회 운동회, 11월 6일의 무도 대회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학예품 전람회에 전시된 작품은 도화 작품, 습자 작품, 채집한 곤충, 물리학 관계 공작품, 그림류 등이었다.
운동회의 종목은 체조, 달리기, 전쟁 관련 경기가 주종인 반면, 오늘날과 같은 구기 종목이 눈에 띄지 않는 점이 특기할 만하고,
소학교 아동과 내빈을 초청하여 경주를 벌인 점도 인상적인 것이었다.
무도 대회는 무도장에서 열렸는데, 유도와 검도가 그 종목이었다.
마산을 비롯한 부산,진주,진해 등등 경남 일원의 고수들이 대거 참여하여 마산 미증유(未曾有)의 대회로 기록되게 되었다고
'정기' 3호는 전하고 있다.
(7) 졸업과 관련된 이야기
일제 시대에 졸업식은 모두 다섯 번 있었는데, 졸업한 기수는 1기에서 6기까지라서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것은 1945년 3월 23일에 있었던 다섯 번째 졸업식을 통해 5,6기생이 함께 졸업을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6기생은 5년제로 입학을 했으나, 1943년의 학제 변경(제4차 교육령)의 영향으로 4년 동안만 수학하고 졸업하게 되었는데,
일제 시대에 4년제로 졸업한 기수는 6기생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4년에 졸업식은 1946년 6월 22일에 7기생을 대상으로하여 거행된 제 6회 졸업식이 한 번 더 있었다.)
1945년도의 졸업식만 ㅃ고 나면 나머지 네 차례의 졸업식은 3월 2일이거나(1~3기), 3월 1일(4기)이었다.
최초의 졸업식은 1941년 3월 2일에 있었는데, 모두 95명(한국인 34명, 일본인 61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110명 정원에서 보면 15명이 줄어든 셈인데, 95명 중 11명은 전입학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마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사람은 84명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머지 입학생들은 전퇴학, 휴학, 낙제 등과 관련되었던 것이다.
졸업식 때는 도지사상(1명), 우등상(약간명), 교무정려상(敎務精勵賞=일종의 모범 학생상. 약간명),
5개년 개근상, 5개년 정근상, 본 학년간 개근상, 본 학년간 정근상 등이 수여되었는데,
졸업 최우수상인 도지사상은 언제나 일본인이 타게금 교묘하게 성적이 조작되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생활 기록부 표지 이면에는 졸업생 이동 상황, 수상 내역 외에도 졸업생 주소, 무도 유단자 내역,
졸업생 지망 등을 정리하여 등사한 종이가 붙어 있는데, 이는 일본인 교사들의 세심한 배려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생활 기록부에 대한 꼼꼼한 기재, 교지 및 졸업 기념 사진첩의 편집 등에서 일본인 교사들의 투철한 교육자적 자세를
엿볼 수 있는데, 이런 세심함은 우리가 배울 점이 아닌가 한다.)
그 무렵 졸업생들은 고등학교(일본에 있는), 대학 예과, 고등사범/공업/상업/농림/수산학교, 의학/약학/법학전문학교 등
상급 교육 기관에로 진학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육해군 관련 여러 학교와 같은 군 계통 학교로 진로를 정하거나,
아니면 관리 양성소 등 실무계 쪽으로 나아갈 길을 결정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당시는 관립(지금으로 치면, 국,공립) 상급 학교에 얼마나 많은 학생을 진학시키느냐로 명문 학교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했기 때문에, 마산공립중학교의 교장은 어떻게든 다수의 학생을 관립 학교에로 진학시키고자 교사와 학생들을 독려했고,
학생들은 또 그 기대에 부응했다고 졸업생들은 회고하고 있다.
참고로 일제 시대 졸업생 총수를 기수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는 한국인 대 일본인의 숫자). -1기 : 95명(34명 대 61명)
-2기 : 93명(38명 대 55명)
-3기 : 94명(38명 대 56명)
-4기 : 90명(33명 대 57명)
-5기 : 71명(36명 대 35명)
-6기 : 108명(48명 대 60명)
-모두 : 551명(227명 대 324명)
한편, 1941년 3월에는 제1회 졸업 기념 사진첩이 발간되었는데, 이것이 졸업 기념 사진첩으로서는 최초의 것이었다.
가로21cm, 세로 30cm, 총 30 쪽 크기이다.
(8) 그 밖의 사항
I) 교사와 한국어 사용 문제
교사는 모두 일본인이었고, 한국어는 공식적으로 가르쳐지지 않았다. 일제 말기에는 창씨 개명이 강요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에게는 가혹한 체별이 가해지기도 했다.
일제의 식민지 차별 교육에 항거하다 제적된 한국인 동문들이 다수 있었는데,
해방 이후 재입학하여 1946년 6월 22일에 졸업한 6기생 2명이 있었는가 하면,
1966년 4월 11일에 있은 4기생 3명, 5기생 2명에 대한 추가 졸업 인정 등은 이런 대목을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II) 지금과는 다른 용어
지금 쓰는 용어와는 다른 용어가 일제 시대에 사용되었다. 당시는 중학교 생활을 '학도(學徒)'로, 교사를 '고유(敎諭)'로,
학급 임원을 '총대(總代)'로, 성명을 '씨명(氏名)' 으로 불렀다.
오늘날의 '담임(擔任)'에 해당하는 말은 1942학년도까지는 '주임(主任)'이었고,
1943학년도부터 '담임'이라는 용어가 학적부에 사용되었다.
꼭 같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대체로 말하면 오늘날 교감과 같은 직위를 '교두(敎頭)'라는 용어로써 나타냈는데,
그 의미는 '교유의 우두머리'였다.
III) 모표, 교가, 교기
일제 시대 모표와 교가도 지금의 그것들과 달랐다. 모표는 다섯 장의 벚꽃 가운데에 '中'자가 있는 형태였다.
일제 시대 교가는 1938년 10월 13일에 제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교유였던 兒玉三鶴(아옥삼학) 선생이 작사하고
그 무렵 경성 제국대학 어느 교수가 보정(補訂)한, 4절로 된 것이었다.
모표가 달랐던 만큼, 교기도 지금의 그것과 달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기는 붉은색 바탕 중앙에 모표를 새기고
그 아래에 가로로 '馬山公立中學敎' 라는 흰색 글자를 배치한 모습이었다.
가로 100cm, 세로 72cm의 이 교기는 일제의 패망 후 일본 동창회에서 보관하다가 1995년 11월 18일에 한국으로 돌아와,
1996년 4월 20일에 있은 모교 개교 60돌 기념식 이후 모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IV) 교복과 그 밖의 착용물
교복으로는 지금과 같이 동복과 하복이 있었으나, 제1기부터 제4기까지와 제5기부터 제10기까지가 색깔 면에서 서로 달랐다.
1기~4기의 동복은 검은색깔의 면으로 된 것이었고, 하복은 상강면복 (霜降綿服)이었다.
웃옷의 깃은 갈고리(hook)를 걸 수 있는 수직의 것이었고, 뒤쪽 좌우는 타진 형태였다.
5기~10기의 경우는 동,하복을 막론하고 국방색이었다.
동복은 안쪽에다 포근한 천을 더 대어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하복과 다른 점이었다.
일제 시대 전 기수에 걸쳐 가죽으로 된, 군대용과 비슷한 배낭식 가방과 혁대를 매었고, 국방색 각반을 둘렀으며,
가죽으로 된 검은색의 편상화(編上靴)를 신었다. 소년 시절부터 군대에 대한 거부감을 없앰으로써 유사시에
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국주의 일본다운 발상에서 나온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V) 교사들의 발령
요즘 공립학교 교사들의 인사 발령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일괄적으로나
학기 도중에 다른 학교로 이동하는 예는 없지만, 일제 시대나 해방 이후 상당 기간 동안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발령이 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경향은 이임보다는 부임의 경우에 더 현저하여 어떤 과목 전공 교사가 없으면,
유사 과목 담당 교사가 그것을 맡곤 했다. 교사 수급이 오늘날과는 달리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해방에서 휴전까지
해방에서 휴전까지는 참으로 격변에 격변을 거듭한 시기였다.
일제의 패거(敗去), 미군의 진주, 6.25의 발발 및 휴전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
새로운 여러 학제의 부침(浮沈) 등 교육사적인 굵직굵직한 사실들이 이 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1) 해방 직후의 모습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모교의 경우, 8월 17일 조회 때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등교하지 않아도 좋다."는
兒玉三鶴 교두(敎頭)의 말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그로부터 열흘 쯤 뒤에 당시 길기(吉崎) 교장이 7,8,9기생들에게 교육은 중단될 수 없는 것이라며
각각 4년, 3년, 2년 수료증을 써 준 데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일 관계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일본의 침략 때문에 운명적으로 만나야 했던,
본래 다른 국적의 초창기 입학생들은 그러나 두 줄로 마주서서 옷소매를 눈물로 흠뻑 적시며 헤어졌다고 한다.
9월 8일부터 미군이 주둔하면서 우리나라는 미군정 통치기로 접어들었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미국인 락카드(Lockard) 대위가 문교 책임자로 되어, 군정 학무국을 개청하고 한국교육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교육 재개를 위해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해방 후 휴교 상태에 있었던 학교의 문을 다시 여는 일이었는데,
드디어 10월 1일을 기해 관,공립학교는 개교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모교에서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5대 안인묵(安仁默) 교장이 9월 28 일자로 부임했다.
10월 1일에 한국인 학생 193명을 대상으로하여 교육은 재개되었으나, 교사도 부족하고 교재도 없어서
교육을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시 중학교 교과 편제는 공민, 국어, 지리,역사, 수학, 물리,화학, 영어,
체육, 음악, 습자, 도화, 실업의 11분야 13개학과였고, 주당 수업 시수는 1,2학년 각 32시간, 3학년 34시간, 4학년 33시간이었다.
부족한 학생을 채우기 위해 대대적인 전입학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1월 5일에 61명의 학생이 대거 전입학해 온 것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소규모의 전입학이 이루어졌다.
(2) 새 학제가 정착될 때까지
해방 이후 오늘날과 같은 학제가 마련될 때까지는 네 차례에 걸친 학제 변경이 있었는데, 이를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I) 첫 번째 학제(1946년 9월 1일 시행)
해방 후 처음 선보인 학제는, 당시의 한국교육심의회에서 마련한 것이었는데, 이 학제는 1946년 9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교육심의회란, 앞서 언급한 한국교육위원회와 함께 군정 학무국장 산하의 자문 기관 이름인데,
1945년 11월에 조직되었다. 교육계와 학계의 지도자 100여 명으로 구성된 이 심의회는 모두 10개 분과 위원회를 두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교육 이념이 나온 것도 이 심의회(제1분과)를 통해서였고, 새 학제를 마련한 것도
이 심의회(제2분과)를 거쳐서였다.
이 새 학제의 특징은 초등 6년, 중등 6년, 고등 4년이라는 이른바 6-6-4제를 위주로 하고 부수적으로 6-3-3-4(초등 6년, 초급중 3년, 고급중 3년, 고등 4년)제를 두는 것이었다.
중등 교육을 6년제 중학교로 운영할 수도 있고, 3년제 초급 중학교와 3년제 고급 중학교로 운영할 수 이, 도시 지역 인문학교는
앞의 것을, 주로 읍,면 지역의 학교는 뒤의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시골에서 중등 과정 6년을 한꺼번에 이수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우리 모교는 당연히 6년제 중학교로 운영되었는데, 이름은 일제 시대의 그것과 다름없는 '마산공립중학교'였다.
이런 중학교는 '고등 중학교'로 불리기도 했고, 전기 3년을 중등과로, 후기 3년을 고등과로 불러 구별하기도 했다.
새 학제는 이런 변화 말고도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더 보여 주고 있는데, 학년도를 9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로 한 것도
큰 변화의 하나였다.
이는 미국식 교육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는데, 종래의 3학기제로 바꾼 것도 외형상의 큰 변화의 하나였다.
II) 두 번째 학제(1949년 12월 31일 제정. 시행하지 못함)
두 번째 학제는 1949년 12월 31일에 제정, 공포된 '교육법'에 따라 중등 교육 학제를 4년제 중학교와
2년제 또는 4년제 고등학교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학제는 여러 문제점으로 말미암아 시행도 하지 못한 채 제1차 개정 교육법에 의해 수정이 가해졌다.
III) 세 번째 학제(1950년 6월 1일 시행)
세 번째 학제는 1950년 3월 10일에 제정된 제1차 개정 교육법에 따라
중등 교육을 4년에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나누는 것이었다.
중학교의 경우 3년을 수료하면 고등학교와 사범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아울러 4년제 중학교 졸업자를 위한 2년제 초급대학 신설도 가능하게 한 것도 주요 내용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개정안도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어 1년 뒤에 재2차 교육법 개정과 더불어 새 학제가 마련되게 되는데,
이 제2차 개정 교육법에 의한 학제가 지금도 적용되는 6-3-3-4제이다.
IV) 네 번째 학제(1951년 9월 1일 시행)
네 번째 학제는 1951년 3월 20일에 있었던 제 2차 개정 교육법 공포 때 마련된 것이다.
제2차 개정 교육법은 중등 교육을 오늘날과 같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확정했는데,
그 시행은 1951학년도가 시작되는 9월 1일부터였다.
(3) 1년에 3개 기수 졸업식이 있었다니?
갖가지 어려움으로 점철된 해방 이후의 여건, 잦은 학제의 변경, 6.25의 발발 등으로 말미암아 해방 이후
10여 년 간은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 졌다고 보기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 졸업식이었다.
해방 후 첫 졸업식은 1946년 6월 22일에 7기생을 대상으로 한 제6회 졸업식이었는데,
7기생 졸업은 부분적으로 새 제도의 영향을 받고 치러진 것이었다.
앞서 살펴 본 바대로, 일제 말기에 중학교의 수업 연한은 4년으로 단축되었기 때문에,
1942년 4월에 입학한 7기생들은 4년을 수료한 후 졸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7기생은 해방이 되던 1945년에 4학년 졸업반이었으므로, 정상적인 4년제 졸업으로 치면
1946년 3월에 졸업식을 갖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3달이나 늦은 1946년 6월에 졸업식을 치렀던 것이다.
해방 후의 첫 번재 학제는,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모교와 같이 도시에 있는 인문계 중학교의 수업 연한은
6년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8기생부터는 새 학제에 따라 공부를 하게 되어 있었다.
1946년 9월 1일 현재 4학년인 8기생, 3학년인 9기생, 2학년인 10기생은 해방 이전에 입학한 기수였는데,
새 학제가 일관성 있게 운영만 되었더라면, 이 기수들은 4년제 중학교로 입학하여
6년제 중학교로 졸업하게 되었다고 간단하게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새 학제는 몇 번의 개정을 거치게 되었기 때문에,
1951년 7월에는 10기, 12기, 13기 등 3기수를 대상으로 한 무려 세 번의 졸업식을 갖는 해프닝이 벌어지게 된다.
이 세 번의 졸업 중 12기, 13기의 졸업식은 당연히 '수료식'으로 고쳐져야 할 성질의 것이었지만,
모교의 학적부상으로는 엄연히 '졸업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12기, 13기생 다수는 이때 한 번 졸업식(실제로는 수료식)을 치른 뒤, '마산고등학교'에 자동으로 진학하여
각각 1953년과 1954년에 다시 한 번 졸업식을 갖게 되어, 이름바 '이중 졸업'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중 졸업의 사례는 이보다 먼저, 7기생의 경우에서도 발견된다.
일본인 학생이 물러가고 한국인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첫 졸업식이 7기를 대상으로 한 졸업식 인데,
7기 졸업생 숫자는 53명에 지나지 않았다. (3년 이상 마산공립중학교를 다닌 일본인 7기생들의 숫자는 모두 84명이었다.)
그런데 모교 학적부를 꼼꼼히 살펴보면, 7기 졸업생 53명 중 6명은 2년 뒤에 새 제도인 6년제로 다시 졸업을 했음을 알게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유를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7기생 일부는
4년제 졸업과 6년제 졸업이라는 "두 번의 졸업을 한" 첫 경우에 해당한다는 점은 모교 역사상 중요한 사실로 기록되지 않을 수 없다. 졸업 대장 번호와 실제 졸업생 숫자가 일치하지 않는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중 졸업과 관련되는 또 다른 기수는 12기와 13기이다. 7기생이 4년제로 졸업하고 학제는 6년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말하면, 1947년도와 1948년도는 졸업식이 없어야 하는 해이지 만, 실제로는 1947년도만이 졸업식이 없는 유일한 해였다. 1948년도에는 이색적인 것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졸업식이 6월 11일에 있었다.
이 졸업식은 제7회 졸업식에 해당하는 것인데, 졸업생 총수는 18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모교 역사상 가장 적은 숫자로써 치러진 졸업식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대로, 18명 중 6명은 1946년 6월에 정상적으로 졸업한 7기생이고,
나머지 12명은 다른 학교에 입학했다가 마산공립중학교에 5학년으로 전입학한 뒤 졸업한 학생이었다는 점이다.
제8회 졸업식은 1949년 6월 13일에 제8기생을 대상으로하여 실시되었다.
졸업생 숫자는 56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로써 한국인 졸업생 총수는 354명이 되어
처음으로 일본인 졸업생 총수 324명보다 숫자적으로 많게 되었다.
8기생의 경우도, 해방 이후 다수의 전입학이 이루어져 숫자가 많았는데도 졸업생 수가 56명에 불과한 것은,
이 기수의 경우는 1946년 7월 20일에 3학년으로 '수료' 한 학생이 118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3년 수료는, 1946년 9월 1일부터 시행되는 새 교육제도((2)의 I) 참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6년제 중학교 과정 중 초급중 3년 과정을 마친자에게 3년 과정의 사범학교나 다른 고급 중학교
(3년 과정)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118명 중 상당수는 다시 모교인 마산공립중학교 고급 과정에 들어가 1949년 6월 13일에 6년제 중학교 졸업자가 되기도 했다.
9기생을 대상으로 한 제9회 졸업식은 1950년 5월 3일에 잇었다. 총 70명이 졸업했다.
(모교 연혁부에는 74명이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70명의 잘못이다.)
제10기생을 대상으로 한 제10회 졸업식은 1951년 7월 3일에 마산 강남극장에서 있었다.
6.25 전란으로 모교가 병동으로 사용되었기 ㄸ문이다. 졸업생 총수는 159명이었다.
한편, 이 해 7월 25일에는 제12기생 187명에 대한 4년 수료식과 13기생 207명에 대한 3년 수료식이 잇었는데,
그 까닭은 1951년 9월 1일부터 중등학교를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으로 가르는 새 학제가 시행된 데 있었다.
그런데 이 수료식을 학교에서는 졸업식으로 처리하여 1951년에는 무려 3개 기수에 대한 졸업식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졸업식으로 처리한 것은 여러 모로 맞지 않는 처사였다. 그 때 11기생들은 중학교 5년이었는데,
이들 기수에 대한 소위 졸업식은 없었다는 것과, 12,13기생들 상당수는 새 학제에 따라 자동으로 '마산고등학교' 제2학년과
1학년에 진학하여 각각 1953년과 1954년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12,13기 수료생 중에서 마산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하게 되는 숫자는 각각 187명 중 132명과 207명 중 158명이었는데,
187명과 207명을 합친 394명에다 7기생 이중 졸업생 6명을 보탠 충 400명은 마산고등학교 실제 졸업생 수에서 빠져야 할 숫자이다.
만약 12,13기생에 대한 위의 수료식을 당시의 기록대로 졸업이라고 한다 해도,
이중 졸업에 해당하는 297명(7기생 6명+12기생 132명+13기생 158명)은 실제 졸업생 숫자에서 빠져야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해방에서 휴전까지의 졸업식 또는 수료식과 관련된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는 수료식이라는 뜻임.)
연 월 일 졸업 횟수 대상 기수 졸업생 숫자 학적부상
졸업생 총수 실제 졸업생
총수 비 고
1946. 6. 22. 6 7 53 604 604 일본인 졸업생 324명 포함
(1946.7.20.) (8) (118) 604 604 8기생의 3년 수료식
1948. 6. 11. 7 7 18 622 616 6명은 이중 졸업자
1949. 6. 13. 8 8 56 678 672
1950. 5. 3. 9 9 70 748 742 모교 연혁부에는 74명 졸업으로 잘못 기록
1951. 7. 3. 10 10 159 907 901
(1951.
7. 25.) (12)
(13) (187)
(207) 1,094
1,301 901
901 12기의 4년 수료식과 13기의 3년 수료식을 졸업식으로 처리. 이후 실제 졸업생수와 학적부상 졸업생수 사이에
400명의 차이가 나기 시작함.
1952. 3. 25. 11 11 170 1,471 1,071 신제 고등학교 1회 졸업식
1953. 3. 20. 12 12 249 1,720 1,320 1951.7.25.에 수료한 187명 중 132명 졸업
(4) 교실은 국군 병원 병실로 이용되고
6.25의 발발로 모교는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침략군에게 밀린 국군이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삼고, 실지(失地) 회복을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1950년 7월 중순 어느날 오전에 정부는 "마산중학교는 휴교 중인 완월국민학교로 이동하라." 는
명령을 하달하게 된다. (그때 모교의 명칭은 '공립'이 빠진 '마산중학교'였다.)
교실을 부상병을 수용할 병동으로 사용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완월국민학교에 짐을 채 정리하기도 전인 그 날 오후에는 다시 "완월국민학교에서도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교사용 책걸상은 각자 집에서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시 가져 오라."는 명령도 떨어진 절박한 순간이었다.
(교장, 교감, 교무주임 등의 책상은 당시 마산여고 앞에 있던 마중 교장 관사 다락방으로 옮겼다.)
당시 모교의 김 아무개 교감은 사상 문제(보도 연맹 사무국장)와 관련하여 행방 불명이 된 상태 였고,
이상철(李相喆) 교장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은신중이어서 학교의 운영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학적부를 보존하는 일이었다. 각종 실험,실습 기구, 비품 등 웬만한 물건은 본관 지하실에 넣어 두게 하고
학적부가 든 캐비넷만은 교장 관사(마산여고 앞)에 속한 밭을 파서 보관하기로 했다.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 일은 당시 이상환(李相煥) 교무주임(1기 졸업생), 신현부(申鉉芙) 학생주임이 허필무(許弼武),
조무원(助務員. 속칭 허 생원)의 도움을 받아 수행했다.
시중에서 기름종이와 가마니를 사서 겹겹이 캐비넷을 싼 다음 밭을 파서 캐비넷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은 급하고 땅은 잘 파지지 않아 캐비넷을 완전히 땅 속에다 묻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급한 대로 어느 정도 땅 속에 다 묻고는 그 위에 무덤을 만들 듯이 흙은 덮었다. 영락없는 무덤 하나가 생긴 꼴이었다.
"직격탄을 맞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학적부는 살아 남아 우리의 역사를 증언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세 사람은 손에 손을 맞잡고 굵은 눈물을 흘렸다.
모교 학적부는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무사하게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학적부는 이 해 가을이 되어서야 다시 햇볕을 보게 되었다.)
국군과 연합군이 힘을 모아 서울을 수복하고 침략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는 등 분위기가 호전되자 교육은 재개되었다.
당시의 교육은 운동장 남쪽에 설치된 천막 가교실(마산서중학교 학생)과 일제 때 사용된 기숙사 건물을
개조한 교실(마산고등학교 학생)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다.
교실은 여전히 병실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3기생과 14기생들은 교등학교 3년 동안 교실에서
한 번도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본관 및 신관 교실에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1955년 7월 16일이었다.
(5) '제2의 마산고등학교'를 아시나요?
'제2의 마산고등학교'란, 우리의 모교가 아직 6년제 '마산중학교'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1950년 6월 29일에
마산시 자산동(지금의 경남은행 자산동 지점 옆 '지구촌 노래방' 자리)에서 입학식을 거행했던,
우리의 모교 속으로 흡수된 학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교 연혁부에 "1950년 6월 15일 : 고등학교령에 의하여
수업 연한 3년 이과(理科), 상과(商科) 각 1학급 인가"로 나오는 그 대목은 바로 이 제2의 마산고등학교와 관련되는 것인데,
공식 명칭이 '마산고등학교'였기 때문에 명칭에 관한 한 그 학교가 먼저 '마산고등학교'를 사용한 셈이다.
(우리 모교가 '마산고등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3-3제가 실시된 1951년 9월 1일 이후였다.
제2의 마산고등학교는 1950년 3월 10일에 있었던 제1차 개정 교육법의 공포와 관련해서 설립된 학교였지만,
1년 뒤에 있은 제2차 개정 교육법으로 존재 의의를 잃게 되어 우리의 모교 속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던 것이다.
(6) 교명 변경 과정과 3-3제 분리 때의 교원 인사 이동
우리 모교의 이름은 5년제 '마산공립중학교'에서 출발하여,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와 6년제 '마산중학교'를 거쳐,
3년제 '마산고등학교'로 정착되었는데, 그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년제 '마산공립중학교' : 1936년 3월 16일 ~ 1946년 8월 3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 : 1946년 9월 1일 ~ 1950년 4월 30일 -6년제 '마산중학교' : 1950년 5월 1일 ~ 1951년 8월 31일 -3년제 '마산고등학교' : 1951년 9월 1일 ~ 현재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에서 6년제 '마산중학교'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50년 5월 1일자인데,
이는 학교 이름에 '공립'이니 '사립'이니 하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한 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1951년 9월 1일자로 6년제 중학교가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나눠짐에 따라,
1951년 8월 31일에는 당시 모교 재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다음과 같은 대폭적인 인사 발령이 있었다.
-마산고등학교 발령 : 5명 -마산서중학교 발령 : 17명 -두 학교 겸임 발령(근무는 고등학교) : 9명 -다른 학교로 발령 : 2명
(7) 3-3제 분리 이후의 입학식 및 입학 정원
모교가 오늘날과 같은 3년제 고등학교로 운영되던 초창기의 입학식과 입학 정원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1951. 9. 19. : 고등학교 제2회 입학식, 고등학교 제2학년 및 3학년 편입학식이 있었다. 1학년 입학 정원은,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 13기로 입학(1948. 9. 1.)하여 3년 간의 과정을 마친 학생 중 마산고 진학을 희망한 학생(76% 정도 진학),
다른 중학교 졸업자 및 그와 동등한 자격이 있는 학생이었다. 13기생들은 자동으로 입학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선발 고사를 치르고 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학년은 5학급이었다.
2학년 편입생 내역은 다음과 같다. 6년제 ㅏ산공립중학교 12기로 입학(1947. 9. 1.)하여
4년 간의 과정을 마친 학생 중 마산고 진학 희망자(71% 정도 진학),
그리고 소정의 자격이 있는 다른 중학교 출신자. 전자는 자동으로 편입학했고,
후자는 소정의 시험을 거쳐 편입학했고, 후자는 소정의 시험을 거쳐 편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6학급으로 편성되었다.
3학년 편입생 내역은 다음과 같다.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 11기로 입학(1946. 9. 16)하여 5년 간의 과정을 수료한 학생 및
그와 동등한 자격이 있는 다른 중학교 출신자. 편입 과정은 2학년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5학급으로 편성되었다.
-1952. 4. 22. : 고등학교 제2회(통산 14회) 입학식이 있었다.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 제14기 입학자(1949. 9. 1.) 중 마산서중에서 3년을 수료하고 마산고 진학을 희망한 자가 주류를 이루고
(무시험), 그 밖의 다른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 일부가 시험을 거쳐 입학했다. 5학급 300여명이 입학했다.
-1953. 4. 7. : 고등학교 제3회(통산 15회) 입학식이 있었다. 6년제 마산중학교의 15기로 입학 (1950. 6. 1.)한 사람 중
마산서중에서 3년 간을 수업하고 마산고 진학을 희망한 사람과 다른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로 짜여 있었다.
몇 년 동안 마산(공립)중학교 입학자들은 이른바 잔존 학급(殘存學級)으로 처리되어 마산고등학교 입학 시험이 면제되었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마지막 기수가 15기였다. 그리하여 1954학년도부터는 자유 경쟁에 의해 입학생이 선발되었다.
(8) 학년도의 변경
이 시기의 학년도는 여섯 번에 걸친 변화가 있었다. 8년 기간에 비해 꽤 다양한 학년도를 선보인 것이 특징이었는데,
일제 시대와 휴전 이후의 것도 포함하여 학년도의 변경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 1일 ~ 이듬해 3월 31일(12개월) : 1936학년도~1944학년도(9번),
1952학년도~1960학년도(9번) <모두 18번>
-4월 1일 ~ 이듬해 8월 31일(17개월) : 1945학년도(1번)
-9월 1일 ~ 이듬해 8월 31일(12개월) : 1946학년도~1948학년도(3번)
-9월 1일 ~ 이듬해 5월 31일(9개월) : 1949학년도(1번)
-6월 1일 ~ 이듬해 8월 31일(15개월) : 1950학년도(1번)
-9월 1일 ~ 이듬해 3월 31일(7개월) : 1951학년도(1번)
-4월 1일 ~ 이듬해 2월 28일(11개월) : 1961학년도(1번)
-3월 1일 ~ 이듬해 2월 28일(12개월) : 1962학년도~현재(35번)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가장 긴 학년도는 1945학년도로서 17개월이나 계속되었고, 가장 짧은 학년도는
1951학년도로서 7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밖에 시험적으로 9개월, 11개월, 15개월짜리 학년도가 선을 보였으나,
그 다섯 경우를 뺀 나머지는 정상적인 12개월짜리였다. 오늘날과 같이 3월 1일에서
이듬해 2월 말일까지를 한 학년도로 잡은 것은 5.16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였고,
4월 1일 ~ 이듬해 3월 말일인 학년도는 일제 시대 외에도 1952학년도 ~ 1960학년도에도 적용되어 모두 18번에 이르는 것이었다.
4. 글을 맺으면서
부족한 글을 맺으면서, 재학생 후배 여러분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 모교는 60년의 역사에 걸맞게
명문 마산고등학교라는 전통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학교다.
연합고사와 관련하여 고교 배정 문제가 있을 때, 나느 많은 학부형들이 "우리 아이가 이왕이면 마고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다.
학부형들이 왜 이런 말을 할까를 여러분들은 한 번 곰곰히 생각해 주기 바란다.
모교와 졸업생은 상관적인 관계로 존재한다.
여러분의 모교 '마산고등학교'라는 이름은 여러분들한테 자긍심을 심어 주는 원천의 하나이고,
여러분들이 민주 사회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 된다면, 여러분들로 해서 모교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선배들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가는 멋진 후배들로 성장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첫댓글 다모아님! 글자그대로 모교의 소중한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게 해주셔서 아주 감사합니다!!!
오전 내 내 읽어..
모교의 뿌리는 1936년 3월 16일.
파란만장한 모교의 역사입니다..일암..!! 모교 사랑하는 마음..!! 감사합니다.
모교로 인해 우리의 위상이 높아지고, 우리로 인해 모교의 위상이 높아집니다.
김문근님 ! 은산! banbek님 !
우리가 마산고를 졸업하면서
우리가 우리 학교의 역사를 모르고
어떻게 남에게 마고의 긍지를
떳떳하게 졸업 했다 말 할수있을 까!
싶어서 편집 해 보았습니다!
이 곡은 김귀자 선생님이 1993년부터 5년간 근무했었던
마산고등학교에 대한 추억을 합창으로 만든 '학림동산'입니다.
잘 감상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육십년 지기 사랑의 뜰 젊은이 고뇌속에 함께있네
하늘이 있고 땅이 있어 그 속에 예술이 피어난다.
꿈을 갖는 자들아 두 팔을 벌려라
떨리는 가슴을 안고서 달려나가자
아 아 사랑의 학림동산아 불을 밝혀라
지지 않을 사랑의 불꽃으로 길을 밝히리
가슴이 뭉클하다.
마산고 학림동산.
장엄한 음악과 모교의 역사를 보니
내뿌리를 보는것 같아
가슴이 시큰하다
아 그렇구나
그렇게 우리가 태어 났구나
얼마나 궁금 했던가--- 뿌리의 역사-
이란 좋은 자료제공해주신 다보아 학형 - 정멀 감사하고 감사하다
우리가 다녔던 그 학교
그때 그당시를 기억하는 ==-- 이젠 신화가 되었지만
우리의 역사도 이젠 신화다
1936년 근 백년이 되어 가구나
그 터전서 거쳐간 먼저간 선배남들도 죽을때 까지 가슴에 간직타 갔을거다
아 마산고 등학교 !! 내모교 영원하라--
위 사진상의 연못은 본관 좌측에 있었다..여기서 마산 최경수 동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지금도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