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30년에 진나라 군대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부터 221년에 제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한, 조, 위, 초, 연, 제 6개국이 잇달아 진나라에게 무너졌다. 평균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한 나라씩. 이들 나라가 수백 년 동안 할거해 왔음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역시 기록에는 전하지 않는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기록으로만 볼 때 우선 진나라가 중국의 서쪽 외곽에 떨어져서 험준한 지형에 의존해 외침을 잘 받지 않으며 오랫동안 실력을 키웠던 점, 진효공 시절 상앙의 변법(變法)을 비롯한 과감하고 실용주의적인 개혁이 미친 부국강병의 효과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진시황이라는 지도자가 보여준 리더십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됨이 몹시 잔인하고 냉혹했다고 한다. 그를 폄하하기 위한 역사왜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도, 모든 기록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점이라 실제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헛된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으며, 실수를 했다고 깨달으면 체면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시정했다. 운하 건설을 책임지고 있던 정국이라는 사람이 한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자 국내에 머물던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도록 했지만, 후일 승상이 되어 천하통일의 일등공신 역할을 할 이사(李斯)가 “진나라는 대대로 외국인들을 우대하여 발전해왔다”고 반론을 올리자 곧바로 취소하며 전보다 더 외국의 인재를 중시했다. 한비자의 경우 그 한 사람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고도 한다. 또 장군 왕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좌천시켰다가, 왕전의 말이 맞았음을 알고는 곧바로 몸소 왕전의 거처로 달려가 용서를 빌고는 재기용했다고 한다.
진시황(진왕 정)은 이처럼 여러 국보급 인재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시켰고, 병사들에게도 전공을 세울 경우 최대한의 혜택을 보장함으로써 용맹하게 싸우게끔 부추겼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정치에 은밀히 공작을 해서 안으로 내분에 휩싸이게 하고, 밖으로 여러 나라가 단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 번에 한 나라씩, 전력을 기울여 단번에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방법으로 무너뜨려갔다. 또 자료를 잘 살펴보면 진시황이 잔인무도하다는 점에서 폭군이라는 비방은 숱하게 있지만, 사치향락을 일삼았다는 쪽의 비방은 별로 없다(적어도 통일 이전까지는 그랬고, 이후에도 죽기 직전까지는). 주지육림이나 삼천궁녀 같은 이야기는 전설로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반면 도무지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이 일을 잘하나 계속 감시하므로 괴롭다는 푸념이 많이 보이고, 스스로는 죽간으로 지어진 공문서를 매일 120근씩 처리하지 않고는 먹지도 쉬지도 않았다고 하니, ‘일 중독자’로서 부하들을 매섭게 다그치는 ‘호랑이 같은 관리자’였으되 자기 개인의 쾌락을 위해 국가와 국민을 희생시키는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고, 때로 비정한 결단도 숱하게 내려야 하는 정복-통일 군주에게는 적합한 성격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런 진시황과 진나라를 막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 공동 대응하는 합종(合縱)은 과거에 진나라의 야심을 저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241년에 마지막으로 연나라를 제외한 5개국이 진나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후로 다시 합종이 성사되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단숨에 진나라의 중추를 파괴하는 방법, 즉 암살이었다. 227년에 연나라의 형가(荊軻)가 암살에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며 연나라의 멸망만 가져온다.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은 천하통일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전설의 성군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황제’라고 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