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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찾기 스크랩 거창,배천, 강릉유씨 유전 시조 한반도 이주는 신라/당나라때인 782년도로 고증하다
솔잎하나 추천 0 조회 75 17.09.03 05: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본 고증문은 2013.12.2일 강릉유씨 대종회에 제출된 문건입입니다.

 

 

    유전 도시조 한반도 이주시기 고증 결과 보고

   (劉? 都始祖 韓半島 移住時機 考證 結果 報告)

 

 

                                                    劉  慶  相

                                                

그 동안 우리 문중에서 유전 도시조의 동도(東渡) 년도가 서기 1082년도로 기록되고 있으나 금번 중국 당나라 시대에 이미 이영전(邇英殿)이 존재했음이 밝혀짐에 따라 아래와 같은 고증 결과에 의하여 그 동도 년도는 5갑자 착오로 인한 300년 앞선 서기 782년으로 고증되어 집니다.

 

 

 

고증항목

 

 

劉? 都始祖가 서기 782년에 이주한

사실이 맞는가 여부를 규명한다.

 

 

.종보 제 4호 劉脈 제 53페이지 및 강릉유씨 대동보(大同譜) 수권(首卷) 제 258페이지에 수록된 墓誌銘 원문에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으로 명기되어 있다.건중병자 년도는 중국 唐나라 연호로써 서기 796년도이다.즉 고려조가 아닌 신라/당나라때맏아들 견규가 탄생했다고 지석문에 나와 있다.

 

 

묘지명 원문(原文)

 

 

 墓誌銘에는 建中丙子年(796년도)생임을 밝히고 있다

 宗報 제 4호 유맥(劉脈) 53페이지 수록되어 있음(유맥 제 4호:2012년 2월 강릉유씨 대종회 간행)

 

현재 족보상 堅規 생년은 1096년으로 되어있다.

 

 

 

 

 

세부적인 고증에 들어가 보자

 

 

고증1

 

東渡 八學士가 남긴 詩文을 보자.

 

 

팔학사는 바다를 건너 오시면서 각각 詩를 述懷했다.

 

 

1. 劉?:波濤闊矣兮,舟楫利逝

(파도는 넓음이여,뱃길이 편히 가도다)

 

2.林八及:八人浮海兮,桂棹蘭檣

(여덟 사람이 바다 건너옴이여,계수나무 돛대에 난초 삿 대로다.)

 

3.許董:吾徒東矣兮,可以免禍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화를 면할 수 있다네.)

 

4.宋奎:接淅而去兮,謝暗投明

(급히 가노니,암흑은 가고 광명으로)

 

5.權之奇:賢士出東兮,竭誠盡忠

(어진 선비 동쪽으로 가니,지극한 忠과 誠 모두 끝이라.)

 

6.孔德狩:見機而作兮,疎廣之徒

(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7. 薛仁敬: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잘 나가던 李氏朝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賢士들이 참소 를 당하는 도다.)

 

8.崔? ;李老入海兮,殷道衰亡

(李氏 시대는 저물고<老> 완전히 지니<入海>,

은도(殷道)도 쇠망하는도다.)

 

 

 

위의 薛仁敬과 崔?가 읊은 시에서

李氏王朝의 쇠망을 탄하고 있다.

 

宋代의 趙氏 왕조를 탄(嘆)한것이 아니다.

 

중국 당나라가 당태종(唐太宗)부터 서기 907년 멸망할때까지 모든 왕은 李氏였으며 따라서 劉? 도시조께서 팔학사와 동도해 오시던 서기 782년도의 당나라 왕은 당덕종(唐德宗) 이었으며 성명은 이괄(李适)로써 李氏였다.

 

 

만일 송나라때인 서기 1082년도에 동도해 오셨다고 한다면 이는

 이씨가 아닌 趙氏가 된다.

 

 서기 1082년도 宋나라 임금은 송신종(宋神宗) 조욱(趙頊) ...조씨

李씨가 아닌 趙씨였다.그러면 시문의 李씨와 다르게 된다.

 

 

위의 팔학사중 두분이 李氏王을 모시다가 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서기 780년대의 당나라 德宗李适 代宗李豫(李氏들)

 

宋나라 宋英宗趙曙(송영종 조서) 宋神宗趙頊(송신종 조욱)  송대는 趙씨 왕조

 

 

 

 

고증2

 

죽간일집(竹諫逸集) 시문은 신라시대 시문(詩文)으로써 고려시대 시문이 아님을 증명해 보자.

 

<2013년 10월 25일 발간된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 시문에서>

 

 

가.退朝 관련 시문들

 

108페이지 退朝歸路與諸公口號(퇴조하여 돌아가는 길에 읊다)

184페이지 和金翰林退朝(김한림의 퇴조시에 답하다)

198페이지 退朝後獨賦(퇴조후에 혼자 읊다)

 

퇴조는 궁궐을 퇴근하거나 떠남을 뜻한다.

 

 

신라시대의 궁궐은 경주(慶州)에 있었으며 고려시대 수도는 개경(開京)이었다.도시조님께서는 당시 경주지역에 사셨다.

 

 

나.중국 使臣을 맞으며 관련 시(詩)들

 

 

204페이지 逢上國星?故人( 중국에서 使臣으로온 친구를 만나다.이곳의 星?故人은 수레타고 온 즉 고위직 사절을 뜻한다.)

 

206페이지 送上國故人(중국의 옛친구를 전송하며)

당시 신라 서울 경주에 온 사신을 맞는 시문이다.

 

고려시대 시문이라고 한다면 왜 이 고급 사신이 개성으로 가지 않고 궁궐도 없는 고려시대 경주에 귀한 사신이 올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의 新羅와 唐나라간에는 수많은 문화적 교류가 빈번했다.

수많은 유학생과 승려가 왕래했다.백제를 무찌른 羅唐 연합군은 바로 新羅와 唐나라 연합군을 말한다.

 

 

다.客中寒食

 

(객지에서 맞는 한식)

 

"천년의 향기"294페이지 客中寒食(객지에서 맞는 한식)에서

 

 

長安寒食又今年

 

(올해도 또 장안에서 한식을 맞았나니).."천년향기"에서의 해석에 관하여

 

"천년의 향기"에서 해놓은 위의 해석은 아래와 같이 해석 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長安에서 지내던 寒食을 올해도 맞는구나!(懷古)

 

위의 "長安" 지금의 西安으로써 당나라의 首都이다.

 

이 시문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지금 우리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는 멀리 한반도 객지에

오셔서 한식을 맞으며 소슬(蕭瑟)한 심회(心懷)를 한 수 의 시로 ?고 있다.

혹시 "장안의 화제"할때에 쓰는 장안이 아닐것이다.당시 장안은 경주일텐데 장안 즉 경주에서 맞는 한식을 올해도 경주 장안에서 맞네,이것은 아닐것이다.제목이 "객중한식(客中寒食)"이다.客地아本國에 있을때의 寒食을 그리며 시를 읊은 것이다.

 

고증3.

 

묘지명(墓誌銘)

 

1.지석문(誌石文)을 보자.

 

中朝○○大夫行兵部尙書 劉公諱? 辛卯四月初八日生 壬寅 二月初七日卒 享年七十二 配?西李氏 ?辰??夫人 己未生 癸卯六月初七日卒 享年四十五 墓永陽郡北?山面花枝洞亥坐上下封

建中丙子三月十五日 子居陀君堅規生

 

建中丙子三月十五子居陀君堅規生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서기 796년 견규생)

 

 

이 지석문에 관해서는 종보 제 4호 53페이지 劉脈에도

올라 있지만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258페이지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이곳에는 종보 제 4호 유맥에서는 中朝○○大夫로 ○으로 처리한 부분이 강릉유씨 대동보에는 중조 정헌대부(中朝正憲大夫)로 올라있다.

 

이곳의 중조(中朝)란 중국의 왕조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의 중조는 唐나라가 되며 고려시대의 중조는 宋나라가 된다.

 

 

건중병자(서기 796년)에 아들 거타군 견규가 출생이라고 명기됨.

 

 

 

 

墓誌石文을 쓸때는 한자 한자에 영혼이 깃든 상태에서 기록됨을 알때에 建中丙子三月十五日(중국 당나라 서기 796년)주목하자.

 

 

이곳에서 꼭 서술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건중병자가 당나라 연호인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현행 족보에 기록하고 있는 1096년 堅規 탄생년도와 꼭 300년으로 맞아 떨어 지는가 .

 

 

이 대목이 바로 묘지명의"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이 기록이 아주 정확하다는 증거가 되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한번 족보에 나타난 견규탄생년도와 지석문의 년도를 비교해 보자

 

 

 

 

족보에는 이처럼 堅規는 서기 1096년생으로 되있다.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으로 명기되어 있다.건중병자 년도는 중국 唐나라 연호로써 서기 796년도이다.

 

 

1096년과 796년간에는 정확히 300년의 차이가 난다.

 

 

5개의 60갑자 착오가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틀림없이 건중병자년에 태어났다라는 증명이 이 묘지명(墓誌銘)으로 확증되는 것이다.견규탄생 서기 796년을 중심으로 환산한 도시조님의 연표는 아래와 같다.

 

 

劉? 都始祖 東渡年度 착오분 300년 환산

 

1.출생년도 AD 1051년(辛卯)->AD 751년 (辛卯)唐玄宗天?10年 劉? 탄생

 

2.東渡년도 현행 강릉유씨 족보에서는:고려 文宗 36년/중국 송나라 神宗 元豊5년 AD 1082년(壬戌)->한반도에 오셨다고 되어있음.

 

3.換算:AD 782년(壬戌) 唐德宗建中3年/

新羅宣德王3年에 오시다.

 

4.堅規 탄생: AD 1096년(丙子)->AD 796년(丙子)           

5.卒年度:AD 1122년(壬寅)->AD   822년(壬寅)

 

 

 

 

묘지명 [墓誌銘] 이란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묘지에 죽은 이의 덕이나 공로 따위를 새겨 넣은

글이며 한자 한자를 정성들여 기록한 조상의 영혼이자 숨결이다.

 

더욱이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조상이 새겨놓은 이 銘文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建中丙子(중국 당나라 서기 796년 丙子년)에 장남 堅規가

탄생했다고 이곳에서 銘文으로 새기어 놓았음에랴.

 

이제 무엇을 더 요청하리요.

 

 

 

잠시 우리나라의 족보에 관하여 살펴보자.

 

자칫 우리는 족보란 아주 초창기부터 현재의 족보가 고스란히 잘 기록 보존되어 온 문중의 역사를 틀림없이 기록한 고귀한 문서로 생각 하기 쉬우나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 세보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 유전 도시조 후손의 최초의

 

 

족보는 1761년 신사보(辛巳譜)가 아닐까 생각할때에 유전 도시조 할아버지가 이땅에 오신후 1000년의 긴나긴 세월 족보 기록없이 구전(口傳)으로 그 가문을 지켜오다가 이제 처음으로 족보를 설정하면서 5갑자의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우리 문중만의 일이 아니며 이땅에 사는 허다한 문중이 모두 대동소이 하다고 볼때에 크게 부끄럽게 숨길 일은 못될 것이다.

 

 

고증4

 

唐나라 邇英殿

 

당나라에 이미 이영전이 있었음이 일중 문화 교류사(日中文化交流史)에 의해 밝혀지다.

 

그럼 이영전"邇英殿"이란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보자.

이 어렵게 생긴 한자 이(邇) 이글자는 가까울"이"자이며 영(英) 즉 영재(英才)를 가까이 하다.라는 뜻이되어서 이영전(邇英殿) 또는 이영각(邇英閣)이라고도 쓴다.현대 중국어 간자체로는 이(邇)이 글자는 이(?)字로 표기된다.영재 교육기관 이었다.

 

송나라 인종(仁宗)때 세운 궁내 영재 교육기관으로 알고 있지만 이번 고증 과정에서 일중 문화교류사(日中文化交流史)에 나타난 史實에서 이미 唐朝에 이영전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번 발간한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 144페이지에서의

 

                     憶故國(고국을그리다)

昔?邇英席(황공하게도 지난날 邇英席에서)는 당나라 이영전에서 공부하다.가 되겠다.

 

 

위의 시문 구절은 이제 宋나라 이영전이 아니고 唐나라 이영전에서 공부한

사실로 결론 지어지게 되는데

 

그 것은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즉 건중병자 (서기 796년)의 銘文

묘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간일집의 많은 시문에서 신라의 退朝,使臣,

팔학사 시문에서 李氏 唐朝 王朝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는 저는 죽간일집의 시문을 읽다가 위의 고증에 관한 제반 정황이 한결같이 고려시대가 아니고 신라시대임을 알고 있던터에 고려조를 언뜻 상징하는 "邇英殿"의 대두로 즉시 이것은 상호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고증을 일시 중단함을 저의 운영하는 블로그에 2013.7.3일 글을 올린바 있다.

 

 

 

정말 다행이다.

이번 죽간일집 竹諫逸集 “천년의 향기”를 발간하면서 이 "邇英殿"에서 유전 도시조가 공부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려 때 동도 사실로 더욱 신빙성을 부여하는 듯하여 더욱 당나라 때의 이영전의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각국 인터넷망을 검색 하던 중 귀한 문건 일본 遣唐使(견당사)의 당나라 당시 임금 代宗 임금 알현을 기록한 "日中文化交流史"에서 중국 宋나라 외에도 이미 당나라에서 "이영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주 소중한 대목이다.

 

 

이러한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지 못했다면 우리 유전 도시조의 동도년도는 위와같은 많은 신라/당나라때 귀화의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구히 고려조 서기 1082년도로 잘못 고착화 할뻔했음을 생각할때에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지 모른다.

잠시 한 대목만 관련 기록을 옮겨 보겠다.

 

 

 

如?日?

http://www.rdkx.gov.cn/Newspapers_News.asp?id=25994

 

 

 

 

 

 

 

<日中文化交流史>에서 발견하다.

 

 

 

 

 

당나라 이영전(唐朝邇英殿)

 

 

 

 

 

 

 

 

 

 

日本木?泰彦《日中文化交流史》一??:

 

<日本木?泰彦의 일중문화교류사 제 일권에 기록됨>:

 

 

 

 

《日本??》??九年(778年)十月乙未??

 

最后在代行遣唐使大使??的副使石根的率?下,于??八年(777年)出?,抵?海陵

 

 

(如?),后到?州,准?去?安,然而“海陵?察使?少游言:寇?以后,??凋散,

 

得中??下牒,限二十??京,石根?加二十三人,?之。”??,其中有43人被批准?

 

?州出?到?安。“九年(778年),朝?代宗皇帝于宣政殿,?上元日也

 

逾月,??于?英殿”。

 

 

 

<번역문>

 

<니혼쇼키>호키 9년(778년) 10월 을미조에 기록되어 있다.

 

최후로 견당사 대사 직책의 부사 이시네의 영솔하에 호키8년

 

(777년)출발하다.

 

 

(??:즉 호키 이 일본 년대는 서기 770-780년사이의 연대임)

 

 

해릉(海陵)(지금 중국 강소성 南通 如東縣)에 도착후 ?州에 다달아 長安(당시 당나라

 

수도 지금의 西安)에 갈 준비를 하다.그런후에 해릉 관찰사 지소유가 말하기를:

 

왜구의 난후로는 역참조차 모두 쇠락해져 중수문의 첩문을 받은

 

스무명내의 인원이 입경하고

 

 

 

 

石根?加의 23명과 함께한 43인이 승인을 얻어 양주를 떠나 長安에 도착했으며

 

호키 9년(778년-즉 유전 도시조의 이주 782년의 불과 4년전임)에

 

代宗 임금을 선정전(宣政殿)에서알현했는데 이때가 정월 보름이었다.

 

 

 

달포후 이영전(邇英殿)에서 다시 또 알현하다.逾月??于?英殿

 

 

 

 

 

 

 

 

 

도시조 동도 시기에 대한 考證을 마치면서

 

종보 제 4호 劉脈에서 "중국 상계 찾기와 고증"이라는 글을 올리면서 그 방안조차 막막하던 차에 전임 劉 吉 鐘 회장님의 인솔 하에 우리 한반도 劉門 門中으로써는 처음으로 중국 강소성 패현에서 열리는 제 9회 劉邦文化祭 25명의 宗親이 성공리에 다녀 왔으며 이제 당나라 이영전(邇英殿)의 존재가 밝혀짐으로써

 

 

죽간일집 시문에 나오는 昔?邇英席(황공하게도 지난날 이영석에서)라는 대목을 통하여 도시조 할아버지의 옛날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고 위의 신라 시대의 정황들이 당나라 이영전으로 인하여 풀리게 됨은 천운과 같은 것이다.

 

 

이 당나라 이영전(邇英殿)을 찾아 낸 것이 천운인 것은 이 이영전을 찾아보기 위하여 중국의 인터넷망에 들어가 수많은 날들을 모냈다.그러던중 이제 마지막으로 미국야후

http://us.yahoo.com/검색어 "唐朝?英"을 넣었을때에 딱 한 문건의 일본 견당사(遣唐使)가 당나라 사절로 가서 당시 당나라 대종(代宗)임금을 알현하는 대목에서 당나라 이영전이 나온 것이다.

 

2013년 11월 27일 08시 당나라 이영전(唐朝邇英殿)의 존재했음을 발견하다.

 

잠시 정리해 보면

죽간일집의 시문과 팔학사 동도시에서 고려시대에 동도해 오심이 아님이 밝혀지고 서기 782년도에 동도해 오셨다는 사실로 결정되는 것은 지석문에 나와있는 대로 建中丙子年 맏아들 堅規가 3월 15일 탄생했다는 墓誌石 銘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도년도가 고려조가 아님이 죽간일지 시문과 팔학사 시에서 규명되고 지석묘의 연대와 현행 1082년 동도 주장과는 꼭 5갑자 300년의 오차가 발생하므로 당 덕종조/신라 宣德王 3년 서기 782년 동도 사실이 확실히 증명된다.

 

 

 

지금까지도 당나라 이영전을 검색했으나 더 이상의 다른 唐朝의 이영전(邇英殿)관련 문건은 한건도 더 찾을 없으니 어찌 천운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당나라 이영전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영원히 고려시대에 한반도에 이주한 시조로 기록이 계속 될 뿐했으니 이 어찌 문중의 도시조 동도 시기를 고증해 내는 과정에서의 귀중한 계기가 아닐 수있으랴.

 

 

 

우리 도시조는 중국의 병부상서를 지내시다가 한반도에 이주해오셔서 죽간일집이라는 귀한 문중의 역사 문헌집을 남기신 덕택에 또한 함께 오신 팔학사 분들이 남기신 시문에서 그 고증의 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음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족보없이 천년의 세월을 지내오다가 족보를 처음 설정하면서 오직 5갑자 300년 오차를 발생시켰으며 그외의 기록사항들은 죽간일집과 묘지석 명문에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며 천년의 세월을 이처럼 잘 지켜온 후손들의 노고가 눈물겹다.

 

인터넷 전자 시대를 맞이해서 이러한 조상님의 근원을 찾을 수있었음에 한없이 기쁜 마음을 금할 수없으며 이 考證文을 기쁜 마음으로 劉?都始祖님 靈前에  올립니다.

 

 

 

2013년 12월 2일

 

 

 

 

  

첨부

 

日中文化交流史

 출전 주소:아래

http://www.cnjpetr.org/html/zhongriwanglaimingrenlu/qiantangshi/2010/0817/24120.html

http://blog.163.com/yuanyei_999/blog/static/28134589201042322140803/

 

-唐나라 이영전(邇英殿)의 존재가 확인된 문서임-

중국 당나라때 일본의 견당사 중국 조정 방문 기록

 

아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중국에서 오신 유전(劉?) 도시조(都始祖)님께서는

그의 저서 죽간일집의 시문 憶故國(고국을그리다)에서

昔?邇英席(황공하게도 지난날 邇英席에서:공부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영전(邇英殿)아란 나라때

궁궐 교육기관으로만 알고있던 문중에서는 이 시문의 구절을 들어

 함께 같은 배로 오신 평택/나주 임씨  임팔급 林八及 시조님 및 남양송씨 송규 宋奎시조님들의

당나라/신라때 동도해 오심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들어

우리 강릉유씨 문중에서만은 송나라/고려조 동도해 오심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번 고증과정에서 이 일본의 당나라 견당사(遣唐使:당나라 일본의 중국 파견 사절단)

의 기록중  서기 778년도 중국 당나라 代宗 임금을 궁중의 이영전(邇英殿)

선정전(宣政殿)에서 만나는 대목에서 당나라때에도 이영전이 있었음이

확인되는 귀한 문서를 찾아낸것이다.따라서 송나라 이영전이아닌

唐나라 이영전(邇英殿)에서 공부하신 것이다.

 

 

 

??“遣唐使?如?”新探    (四)

 

□ ??坤

(接上期)  十  又一批遣唐使?的抵?和??

 

“在?史上,除了第十三次遣唐使到?如?外,?有?有其他批次的遣唐使?到??一

 

江海交?的唐寥角嘴??”?于?一??,不少人在苦苦地追索。??下面的一些?料

 

后,?定?有?喜的??,?然,也????留下无法??的疑?。

 

日本木?泰彦《日中文化交流史》一??:第十一次遣唐使“持?副使小野石根出使

 

?,于??八年(777年)六月二十四日出海,七月三日到??州海陵?。回??,第

 

三舶曾一度被逆?吹回,第二次出??,?向适宜,于??九年(778年)十月十六日

 

出?,同月二十三日到?肥田?松浦郡桔浦。”“回??程地点:第一舶,?州常熟?;

 

第二舶,同上;第三舶,?州海陵?;第四舶,楚州?城?。”“?由南路到?唐土的地

 

点和回???程的地点,?有?有些不同,但是大致是一?的。?些地点都在?州、?

 

州、明州、楚州等接近?子江口的地?。”回?的出????“第三舶,九月;第一、

 

 

 

 

二、四舶,十一月”。

 

《日本??》??九年(778年)十月乙未??

 

<일본속기:日本?? 호끼9년:778년도>10월 을미조에 나온다

 

 

 

日本光仁朝遣唐使回?后,“第三舶副

 

使小野滋野奏?”:到??州海陵?后,“臣等八十五人?州入京,…… 持?副使小野

 

朝臣石根……   等四十三人,正月十三日到?安城。”??九年十一月乙卯??,“第一

 

舶判官大伴?人等奏?”:?州府都督?察使兼?使?少游“只?放六十五人入京,十月

 

十六日?赴上都……  ?却人?,定二十人。正月十三日到?安。”

 

 

?史料中,我?可以?得??的推?:日本光仁朝??八年(777年)第十一次遣唐使

 

在持?副使小野石根的率?下,于六月二十四日入海,七月三日到??州海陵?。次年

 

回??的?程地点?,第一、二舶,?州常熟?;第三舶,?州海陵?;第四舶,楚州

 

?城?。其中,第三舶是九月九日??海陵?的。也就是?,公元777年日本第十一次

 

遣唐使入唐第一站?海陵?。次年回??,三?船在判官小野滋野的率?下于重???

 

海陵?入海。第三天遇逆?,船被吹上沙?而??,??修?,于一?月后的十月十六

 

日再次出海,七天后的十月二十三日到?日本肥前。

 

 

人?不禁要?:第十一次遣唐使“究竟到?海陵?的何??”“?海陵?的何?入海?”“三

 

?船在何?修理?”史料上未??。那?,如?有可能??回答是肯定的。

 

 

在唐?元二十一年(733年),分天下?15道,淮南道治于?州。唐至德元年(756

 

年),置淮南?度使,置?陵等13郡。次年,改?陵郡??州,下?江都、江?、六

 

合、海陵、高?、?子、天?7??。如??年?于海陵?。?仁的《行?》?:“午?

 

到江口,未?到?州海陵?白潮?桑田??梁?村(今如?曹埠)……留?僧等到守捉

 

?中季?宅停留。”“七月一日?……泛艇?海?行,??江口……其江稍?,下水手等

 

曳船而行……?芦人……答曰‘此是大唐?州海陵?淮南?大江口’……亦更向淮南?

 

去。?江口北行十五里?,?到?家,??等申云:‘更可?向于掘港庭’”。?里的

 

“?”、“守捉?”都是唐朝?的?防?事?位,通常“?”?大使和副使各一人???人

 

。掘港???在江口左近?。?第十一次遣唐使船?到??子江口的海陵??,??多

 

日海上??的遣唐使?必?登?休整,而后或者溯?江而上,或??河乘船去?州。

 

 

?年,如??今南通市?(??胡逗洲)之?隔着一??江。胡逗洲,在唐?元十年

 

(722年)??置?官,??州海陵?,?淮南道。不久,由于?事上的需要,狼山?

 

浙江西道?度使管?,狼山北的胡逗洲也就成?浙江西道常州地界了。《唐大和上?征

 

?》?述了唐天?七年(748年)??和?第五次?渡日本??“常州界狼山”的事。再

 

加上“唐乾符二年(875年),??狼山?,置??使,?浙江西道?度使?制。”

 

(《南通市志》)。由此可知,公元748??875年?,胡逗洲和狼山一?均?于常州

 

地界,而不?于?州海陵?界。而第十一次遣唐使是公元777年到?海陵?的。因此

 

,第十一次遣唐使不可能到??江以南常州界的胡逗洲、狼山一?,而只能到?位于?

 

江北的海陵?,如??掘港到?甸一?恰恰首?其?,具有?大的可能性。

 

 

再?,十一次遣唐使回???海陵?出?的第三舶,在如?出?的可能性也就更大了

 

。王芸生在《古代中日?系之追溯》一文?:?批遣唐使???安,“六月,?使?光

 

耀送至??。秋九月,?船各出?子江口,候??月……入海。”?第三舶在海陵?的

 

“?子江口,候??月”后入海,不在如?又?在?里??如果在如?以西的江北岸港口

 

入海,那?,?行程上推算,修理船舶的地点?可能在掘港到如?北面的沿海一?

 

?外,?仁等一行?到??,?非偶然,而是早有??的。他??次?南路入唐,其海

 

上航路和方向?度直指大江口一?,?仁《行?》上的“?帆指坤”一?,除了用帆方法

 

外?点出了航向;再有,船上有人?得??江海水色,遣唐使船接近大?,多次?水

 

色:“海色??”、“白、?”“至白水,其色如?泥,人?咸云,若是?州大江口流

 

水……”,船上新????“?道掘港??,今?逾白水,疑逾掘港??”?充分?明,在

 

?仁等一行之前,肯定有人到?掘港或者至少到?掘港附近的海域。因?日本第十二次

 

 

 

遣唐使在公元804年于福州附近登?,所以?不定?仁船上的新????掘港海域的了

 

解?自第十一次遣唐使船上的新???。?也??面印?了第十一次遣唐使完全可能在

 

掘港附近停留?,或者是登?,或者是?程回?,或者是修理船舶,也??三者都有可

 

能。

 

 

十一  唐使泛海?身 

 

 

公元770年,年?62?的日本光仁天皇?位,取年????,他于781年去世。他在位

 

的11 年里,曾??次派出遣唐使?。如前所述,其中于??八年(唐代宗大?十二

 

年,公元777年)派出的第十一次遣唐使?可能到?如?,更有可能?如??程回?,

 

?要早于?仁一行50多年。

 

 

?《日中文化交流史》所?:“光仁天皇??六年(775年)六月,最初任命正四位下佐

 

伯今毛人?大使、正五位上大伴益立、?五位下藤原?取?副使。但到次年十二月,?

 

免益立等,改任?五位小野石根、?五位下大神末足?副使。到了??八年(777年)

 

四月?出??,大使今毛人?病不?,朝廷因以石根?持?副使,行大使事。”“??七

 

年(776年)?八月,庚寅,先是遣唐使船到肥田?松浦郡合?田浦,?月余日,不得

 

信?,?入秋季,??水候,乃引?于博多大津,奏上曰:‘今?入于秋季,逆?日

 

扇,臣等望待?年夏月,庶得渡海。’是日?:‘后年?期,一??奏。’”和王芸生《古

 

代中日?系之追溯》一文所?:“帝御殿,授?刀,命之曰:‘卿等奉使,言?必和,?

 

患必?,毋生嫌隙,毋??激。判官以下,?者便宜?事!’乃各?御服。船?至肥前

 

松浦郡,阻?不能前,?博多,?待??。??益立,以中左辨小野石根、?中守大神

 

末足代之。八年春,令使者拜神祗于春日山下,行至?津,今毛人以病引?,令副使

 

持?服紫,假行大使事。燕?有差。”中,我?可以知道?批遣唐使?因大使佐伯今毛

 

人害?海上出事而“?病不?”,最后在代行遣唐使大使??的副使石根的率?下,于?

 

?八年(777年)出?,抵?海陵(如?),后到?州,准?去?安,然而“海陵?察使

 

?少游言:寇?以后,??凋散,得中??下牒,限二十??京,石根?加二十三人

 

,?之。”??,其中有43人被批准??州出?到?安。“九年(778年),朝?代宗皇

 

帝于宣政殿,?上元日也。逾月,??于?英殿”。

 

 

九年(778年)9년(AD 778년에)

代宗 임금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알현했는데 이때가 정월 보름이었다.달포 지나서 이영전(??于?英殿)에서 다시 알현하다.

 

 

 

 

 

四月,在他?准????安回?之?,唐代宗“遣中使??英?押送使”陪同他?回日

 

本,??英?任?侍省掖庭令,是一位宦官。而日本遣唐使持?副使石根考?到海上航

 

行???大,因此向唐代宗婉?曰:“海路渺茫,??无常,万一??,??盛意。”但

 

是,唐代宗告?他已?命人在?州?赴日使?打造船舶,“?仍?行”。六月,唐朝赴日

 

使?一行39人在大使??英、判官???等的率?下?日本遣唐使一行由?使?光耀陪

 

送至??。然而,他?到?州?????英乘的船??有造好,??朝廷批准,唐朝的

 

使者便搭上日本遣唐使船

 

于是,“秋九月,?船各出?子江,候??月”。 ??英坐第一舶,船上?坐着副使小

 

野石根、 判官大伴?人等一百六十多人。于十一月五日?常熟出?,??大海,八

 

日,在海上突然遇到强烈?暴。武安隆在《遣唐使》一?中?:“第十一次遣唐使第一

 

船,?途中,副使小野石根等三十八名日本人和唐使??英等二十五名中?人,都被卷

 

入海底。此后,?船被倒下的??打成?半,判官大伴?人和?老唐土的藤原?河的女

 

?喜娘等四十一人在船尾,?五十六人在船?……”。

 

 

?航?和航程推算,唐使??英等中日使?遇???在如?以?海域。

 

 

唐使??英等25名中?人和38名日本人?了增???人民的友?和加强文化交流,?出

 

了他???的生命。在古代中外交通史上,??英是第一位?于??奉皇帝之命出使?

 

?的宦官,可以?是?和的先?。同?,??英也是唐代?史上唯一以身殉?的遣日高

 

?使臣。

后?,中?使?的其他成?在日本受到十分?烈而隆重的?迎,日本天皇?且下令?他

 

?返唐??打造新船。同?任命?五位下布??直?送唐客使。据《?日本后?》?:

 

在?唐朝副使???等?行之?,日本天皇特?“???英?八十匹、?二百屯,以慰藉死者”。

??英,?位??捐?的唐朝赴日使者和曾?到?海陵(如?)的日本遣唐副使小野石

 

根的名字永??刻在中日友好交流的史?上。(未完待?)

 

 

 

 

 

 

 

중국 唐 德宗朝 연호의 변동

 

 

서기 779년(乙未) 당 德宗 취임                              신라 惠恭王 15年

서기 780년(庚申) 당 德宗 建中 1年                        신라 宣德王   1年

서기 781년(辛酉) 당 德宗 建中 2年                        신라 宣德王   2年

서기 782년(壬戌) 당 德宗 建中 3年                        신라 宣德王   3年<劉?始祖 한반도 오심>

서기 783년(癸亥) 당 德宗 建中 4年                        신라 宣德王   4年

서기 784년(甲子) 당 德宗 興元 1年                        신라 宣德王   5年

서기 785년(乙丑) 당 德宗 貞元 1年                        신라 元聖王   1年

서기 786년(丙寅) 당 德宗 貞元 2年                        신라 元聖王   2年

서기 787년(丁卯) 당 德宗 貞元 3年                        신라 元聖王   3年

서기 788년(戊辰) 당 德宗 貞元 4年                        신라 元聖王   4年

서기 789년(己巳) 당 德宗 貞元 5年                        신라 元聖王   5年

서기 790년(庚午) 당 德宗 貞元 6年                        신라 元聖王   6年

서기 791년(辛未) 당 德宗 貞元 7年                        신라 元聖王   7年

서기 792년(壬申) 당 德宗 貞元 8年                        신라 元聖王   8年

서기 793년(壬申) 당 德宗 貞元 9年                        신라 元聖王   9年

서기 794년(甲戌) 당 德宗 貞元 10年                      신라 元聖王   10年

서기 795년(乙亥) 당 德宗 貞元 11年                      신라 元聖王   11年

서기 796년(丙子) 唐 德宗 貞元 12年                      신라 元聖王   12年<丙子年 三月十五日 長子堅規 生>

 

AD 782년 唐德宗朝 건중 3년에 劉? 始祖께서 八學士의 일원으로 한반도 東渡해 오신 다음 다음해인

AD 784년에는 연호가 建中에서 興元으로 바뀌며 또 다시 이듬해인 AD 785년에는 다시 연호가 貞元으로 바뀐다.

멀리 일생일대의 개인적 대 변혁기인 한반도 이주후에 당시 교통도 통신도 없던 시절 고국의 연호가

바뀐것을 알지 못하고 그 머릿속 시계는 오직 오매불망 고국을 떠나올 당시의 임금과 연호만이 기억되고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에 이주하여 오신후 14년이 지나 ?西李氏(농서는 지금 경상북도 星州이다)와의 사이에서

맏아들을  建中丙子(새 연호로는 貞元丙子 해당)  3월 15일에 長子堅規를 얻었다고 墓誌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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