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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확신
은혜로운 정서의 다섯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들의 확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은혜로운 정서의 표지들 중 하나다. 그러나 확신이 영적 지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 볼 때 “확신”도 종교적 정서의 표지라기보다는 그것의 원천이라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즉, 확신이 있는 영혼으로부터 거룩한 정서가 우러나온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은혜받은 사람들은 모두 복음의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확신”있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에드워즈는 믿음과 확신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즉, 참된 믿음이 있는 자는 확신이 있다.
이성적이면서 영적인 확신
에드워즈는 확신이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그것이 “이성적 확신”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는 그것은 “영적 확신”이어야 한다. 영적 확신은 “중생한 자들” 혹은 “영적인 사람들” 즉 자기들 속에 “생명의 원리”로 내주하는 성령을 가진 자들에게 고유한 것이다. 즉 복음의 사실성과 신성에 대한 확신은 이해력에 대한 성령의 조명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즉 확신은 “영적 시각” 혹은 “이해”를 가짐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에 나타난 것들의 “비길 데 없는 아름다움”을 보거나 감지하게 된 사람은 그 신성을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적 “영광”과 신적인 일들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그것들의 신성의 실재적 증거이며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적 일들의 아름다움이 우리 마음에 그것들의 신성을 확신시키는 것은 두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직접적으로요,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다.
직접적 방법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고 그것들 위에 높이 들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성한 “아름다움”에 의해서다. 그 속에 “하나님 같고 숭고하며 영광스러운 탁월성”은 인간적인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 때문에 그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신성을 확신하고 만족하게 된다. 즉 마음의 눈이 열려 신적인 것들의 “거룩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보게 되면 자연인에게는 그처럼 이상해 보이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많은 교리들이 진실임을 즉각 알게 된다. 복음의 교리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밝히 드러난다.
에드워즈는 복음에 대한 역사적 증거만 가지고 복음의 교리들을 확신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박식한 사람들이 복음의 진실성에 대해 들려 주는 모든 말을 들은 후에라도 어떤 커다란 시험을 만나면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소유를 팔고, 모든 것을 겁 없이 버리는 모험을 무릅쓰며, 세상을 초개처럼 여기고,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에게 소중한 전부를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으려면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증거 이상의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 즉 “내적 증거”다. 이것은 개신교가 전통적으로 말하는 성경의 “자증성”과 일치한다. 이 “내적 증거”가 있어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참된 구원 얻는 믿음, 혹은 영적 확신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적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복음의 신적 영광을 보는 “영적 시각”이라는 것이 있다. 영적 시각이 있는 사람은 성경 계시 안에 있는 내적 증거를 본다. “하나님의 복음은 증거를 구걸하러 다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체 안에 최고의, 그리고 가장 적합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 방식
에드워즈는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시켜 주는 간접적 방법으로 첫째, 신적 일들의 진실성에 대한 마음의 편견들을 제거하여, 제시된 논리의 힘에 정신이 열리게 함으로써다. 둘째, 단지 이성의 장애물들이 제거될 뿐 아니라 이성을 도와 사변적 인식을 더 활발히 하게 함으로써다.
6. 겸손
비로소 거룩한 정서의 표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시작된다. 에드워즈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성경은 중생하고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성품들을 언급한다. 온유, 유순, 자비, 긍휼, 동정심, 용서, 관용, 인내, 화평 등이 그것이다. 겸손은 그 중 하나다.
에드워즈는 겸손을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으로 나눈다. 전자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아직 은혜로운 정서가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후자는 오직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전자는 자연적 원리들을 돕는, 성령의 일반적 영향에서 비롯된다. 후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고 적용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자연적 완전, 즉 무서운 위엄 등에 대한 보다 큰 감각을 가지게 될 때 생기는 것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일들의 초월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율법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복음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게 된다. 전자 아래서는 인간이 제압당해 강제로 땅바닥까지 낮아지게 된다. 후자 아래에서 인간은 달콤하게 굴복하게 된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발 앞에 부복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에드워즈는 율법적 겸손은 복음적 겸손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기독교의 일들에 대한 일반적 지식이 영적 지식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수단인 것처럼 말이다.
복음적 겸비함의 진수는 그 자체로서 지극히 죄악 된 피조물에게 합당한 겸손에 있다. 그것은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인식, 즉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경멸할 만하며 가증스럽다는 인식이다. 그러한 인식에 동반되는 것은 자신을 높이려는 성향을 죽이고 자신의 영광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참 신앙에서 위대하고 아주 본질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복음적 겸손이 없는 자는 참 신앙이 없는 자라고까지 말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겸손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 먼저, 복음적 겸손은 기독교인의 커다란 임무인 자기 부인의 주된 부분이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자기 부인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는 세상적 성향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명예, 권력, 부, 쾌락, 정욕 등 세상적 목표들에 대한 욕심 내지 끌림을 버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타고난 자고함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버림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 부분은 가장 위대하면서 어려운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특징이 자신의 겸손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낮아짐에 대한 높은 평가로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가 있다. 그들의 겸손은 자신 있고 과시적이며 시끄럽고 주제넘고 마음이 부풀고 자만에 찬 겸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아주 교만하고 행동이 거만한데도 자신은 아주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놀란다. 인간 마음의 교활함이 이 영적 교만과 자기 의의 영역에서처럼 많이 드러나는 곳은 없다고 한다.
영적 교만이란 대개 커다란 겸손을 가장하고 나타나지만 두 가지 방식에 의해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영적 교만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던 바리새인이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교만과 허영의 증거이며, 만일 겸손한 영의 영향 아래 있었더라면, 자신의 종교적 성취가 그처럼 찬란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체험들을 진술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해 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을 성도 중에 낮은 자, “모든 성도들 중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긴다. 자기에게 합당한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라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에 관해서도 이들은, 큰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나 예레미야처럼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적임자라고 여긴다. 가르치는 것보다는 배우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듣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데 열심이다. 정말 뛰어난 성도들 즉 가장 탁월한 체험을 가지고 있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기에 은혜에 있어 어린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에드워즈의 죄론이 등장한다. 죄라는 것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한 청교도적 이해는 기독교의 가장 심오한 차원에 관련된 주제이다. 에드워즈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아마 죄에 대한 인식에 있어 교회사에서 가장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모든 죄는 그 안에 “무한한 결함과 가증스러움”을 안고 있다.
에드워즈는 무한의 개념을 즐겨 활용하고 있다.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이 영적 빛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사물들이 더욱 더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참된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자신의 선함과 거룩함이 그만큼 더 작아 보인다. 특별히 만물을 꿰뚫어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은 그러하다. 가장 탁월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은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겸손, 더 많은 감사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 가증한 교만과 배은망덕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모든 참된 영적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지각하게 한다.
영적 교만의 또 하나의 틀림없는 표지는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가짜 체험들은 대개 위조 겸손을 동반한다. 그리고 위조 겸손의 속성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뛰어나게 은혜로운 정서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획득한 겸손을 아주 작은 것으로 본다. 반면,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교만은 크고 아주 혐오스럽다고 여긴다. 참으로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열함과 혐오스러움”을 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낮아져도 자신이 마땅히 처해야 할 위치보다 더 낮아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그 자리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마땅히 처해야 하는 더 낮은 위치로 내려가고 싶어 한다.” 결국 겸손의 원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적다고 여기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크게 여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들의 행동에 나타나는 겸손을 평가함에 있어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하나는 그들이 실제로 소유한 존귀함의 정도요, 다른 하나는 자기를 낮추는 정도이다. 참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존귀함에 대해 아주 낮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는 모든 행위들이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처럼 비열하고 가난하고 비참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이 전혀 대단한 겸손이나 자기비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겸손의 정도는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 이유의 정도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참으로 겸손한 성도가 결코 자신의 겸손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낮아져야 하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커 보이는 데 반해 자기 마음가짐은 도무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즉, 자신의 겸손보다 교만이 훨씬 더 많이 발견된다. 이것은 죄에 대한 깨달음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영적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선언한다. “모든 참된 신령한 지식의 특징은 사람이 그것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탁월한 성도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탁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의 모든 은혜와 체험들은 그에게 비교적 작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신의 겸손이 그러하다. 참으로 경건한 자들은 자신의 겸손보다는 교만을 분별하는 데 천 배나 민첩하다. 그는 남의 교만보다는 자신의 교만을 보다 쉽게 탓한다. 성경은 침묵이 겸손에 동반되는 것으로 가르친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 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잠30:32).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의와 거룩함을 아주 낮게 평가하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면에서 가난한 자로 처신한다. 에드워즈는 거지와 같은 가난한 심령을 은혜로운 겸손이라 본다.
에드워즈는 인간이 겸손해야 할 이유들을 몇 가지 제시한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거리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나 인간은 열등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다. 에드워즈는 인간을 “벌레”로 묘사한다. 먼지 속의 벌레가 “최고의 존경과 겸손”으로 무한하신 위엄의 존재에게 접근하는 것은 특별한 겸손의 행위가 아니다. 에드워즈는 겸손은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벧전2:17).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악한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거짓 형제들과 박해자들까지 공경한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정서들을 마리아의 향유에 비유한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그 향유는 온 집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것은 옥합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옥합이 깨어질 때까지는 향유가 흘러나올 수 없었으며 그 향기를 발할 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은혜로운 정서들도 상한(깨어진) 심령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에게 달콤한 향기이며 기독교인의 영혼을 하늘의 달콤함과 향내로 가득 채우는 모든 은혜로운 감정들은 “상한 심령의 감정들”이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모든 은혜로운 정서가 겸손으로 채색된 것이라 주장한다. 참된 기독교적 사랑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 대한 것이든, “겸손한” 상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더 어린아이처럼 만들며 더 겸비한 처신으로 인도하는 경향을 가진다.
에드워즈는 지금까지 자신이 겸손에 대해 논한 것을 독자들이 가볍게 넘겨 버리지 말고 진지하게 적용해 볼 것을 권한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성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나쁜 신호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아주 엄격히 자신을 점검해 보라. 그러한 점검 후 “나 보다 더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다시 점검해 보라. 당신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겸손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7. 성품의 변화
에드워즈는 처음부터 성품의 변화, 즉 인격적 성화를 크게 중시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 같은 초자연적 선물보다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만일 그러한 인격적 변화가 없다면 은사나 능력이란 그가 보기에 거의 무의미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회심은 곧 성화를 낳는다고 보았다. 성화되지 않은 회심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은혜로운 정서들의 또 하나의 표지는 “본성의 변화”다. 그는 은혜로운 기독교 정서는 “성품의 변화”를 수반한다. 회심에 대해 묘사할 때 성경은 성품의 변화를 강력히 시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8. 온유, 유순, 화평, 용서, 자비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여덟 번째 표지는 일곱 번째 표지의 상술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기독교적 정서는 “어린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기질”을 동반한다. 참 은혜로운 정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었던 것과 같은 사랑, 온유, 조용함, 용서, 자비의 영을 자연스럽게 낳고 증진시킨다.” 에드워즈는 이것들을 “그리스도인 마음의 참되고 구별되는 성향들” 즉 “기독교적 영”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용기라고 말한다. 야수적 격렬함이나 불 같은 열정은 기독교적 용기가 아니다.
9. 부드러운 마음
에드워즈는 은혜로운 정서의 아홉 번째 요소로 ‘부드러운 마음’을 제시한다. “종교적 정서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영혼의 부드러움을 동반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마음의 부드러움’ 이란 온유한 성품이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죄에 민감한 마음이다. 즉, 예민한 죄의식과 민감한 양심이 에드워즈가 말하는 부드러운 마음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가짜 종교적 정서의 특징은 “과거와 현재의 죄에 대해 마음의 감각이 무디며 미래의 죄에 대해 덜 꼼꼼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들과 그의 섭리에 의한 징계에 대해 무덤덤하며, 자기들의 영적 상태나 자신들의 행동 방식과 경향에 대해 보다 부주의하다.” 에드워즈는 “딱딱한 마음”을 가진 신자들은 죄에 대한 혐오감이 없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은혜는 죄에 대한 양심의 깨달음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부드러운 영을 동반한다. 그리고 올바른 정서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부드러운 마음은 또 다른 면으로 어린아이들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어린아이들은 쉽게 감동을 받으며 마음이 쉽게 움직인다. 또한 그들은 동정심에 쉽게 영향을 받아 우는 자들로 함께 울기 쉽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잘 견딜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부드러운 마음도 동정심이 풍부하다.
10. 아름다운 대칭과 균형
거룩한 정서의 열 번째 요소를 에드워즈는 미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영은 은혜와 은혜로운 정서들을 아름다운 대칭과 비례 속에서 주시는 경향이 있다.” 거짓된 정서는 불균형과 비대칭성이 그 특징이라는 말이다. 에드워즈는 후자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첫째, 과거에는 죄를 애통해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은혜는 죄를 애통해 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애통해 하는 것이다(마5:4).
둘째, 인간은 사랑하나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든지 아니면 그 역이다.
셋째, 사람의 영혼은 사랑하는 척하나 육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없는 경우다.
넷째, 남의 결점에 대해서는 흥분하나 자신의 결함과 부패에 대해서는 덤덤하다.
다섯째, 덜 중요한 것에는 참지 못하고 열을 올리나 더 중요한 것, 즉 은밀한 기도와 찬양 중에 하나님 앞에 영혼을 쏟아 놓거나 하나님을 더 닮아 가는 일 등은 소홀히 한다.
여섯째, 어떤 특정한 죄에만 분개하고 자신의 죄에는 무덤덤하다. 죄악에 대한 가짜 미움은 단지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서만 반대한다. 이를 테면, 신성모독이나 사치스러운 의상에 대해 열을 올리는 자들이 자신의 탐욕, 정직성, 약속 위반, 신앙 퇴보 등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일곱째, 관심이 수시로 변하여 잠시 영적인 관심을 갖는 것 같다가는 금방 세상적 관심으로 옮아간다.
11. 영적 욕구와 갈망
참된 종교적 정서의 열한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것들은 미래지향적이다. 그것은 과거의 체험이나 현재 상태에 안주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은혜로운 정서는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영적 성취에 대한 영혼의 욕구와 갈망이 증가한다. 반면에, 거짓 정서는 스스로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 거룩한 정서를 더 많이 가질수록 영적 식욕이 더 강해지는 이유는 영적 입맛이 생긴 사람은 “거룩의 탁월성”을 감지하고 그 “신적 달콤함”을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거룩함에 대한 “내면의 불타는 욕구”가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거룩함으로 자라기 위해 “하나님의 영에 대한 거룩한 기갈”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어떤 은혜로운 감정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바른 태도라 보았다. 에드워즈는 성경이 성도들의 갈망, 소원, 그리고 염원의 대상을 언급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 “의와 하나님의 법”을 더 자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성도들이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에 의해 그들이 거룩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다.” 거룩함이야말로 영적 식욕의 대상이 되는 ‘고기와 음료’였다.
12. 기독교적 실천
참으로 거룩한 정서의 열두 번째 표지는 기독교적 실천이다. 에드워즈는 책 전체의 거의 1/4에 가까운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는데, 그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었다. 제1차 대각성을 즈음해서 정통을 자처하는 자들 사이에 새로이 대두된 위험은 반율법주의였다. 그것은 감정이라는 용어로 이해되는 특별한 체험이 확신의 ‘유일하고 참된’ 근거라는 주장이었다. 때로, 그들이 의존한 체험은 “회심”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경이 어떤 한 체험을 확신의 영구적 원천으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회심했다고 생각되는 때의 한 체험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과거의 체험에 근거해서 확신을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적이고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는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는 기독교적 실천으로 표현되고 열매 맺는다” 고 선언한다. 그는 은혜의 속성이 거룩한 행동과 실천을 낳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된 은혜는 비활동적이지 않다. 천하에 은혜보다 더 활동적인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 자체, 가장 활동적인 종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경건은 실천을 낳는다.” “기독교적 체험에 속하는 모든 은혜”는 거룩한 실천으로 연결된다.
기독교적 실천의 내용
첫째는 순종이다. 기독교적 실천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그는 “가장 사랑하는 죄”, “선천적으로 자신이 가장 유혹을 잘 느끼는 죄도 버려야” 한다. 그의 언행은 진지하고 종교적이며, 독실하고 겸손하며, 온유하고 관용하며, 화평하고 존중하며, 친절하고 공손하며, 선의, 자비, 사랑이 가득해야 한다.
둘째, 신앙생활에 아주 열성적이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아주 진지하고 근면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달려가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태만하고 해이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 반역이다. 그러한 ‘악한 종’은 바깥 어두운 데 던져질 것이다.
셋째는 견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생의 마지막까지” 모든 시험과 시련을 뚫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물론, 참 성도도 어떤 종류의 후퇴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후퇴하더라도 종교적인 일보다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될 정도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섬기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 삶이 될 만큼 타락하지는 않는다. 또한 비록 실족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신앙 생활을 계속적으로 싫어하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을 중지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적 실천은 “거룩한 삶”과 동의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경건의 진실성을 판단할 수 있는 ‘으뜸가는’, ‘최고의’ 척도다. 성경적 근거로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
교회원의 자격 요건
에드워즈는 기독교의 핵심을 고백하고 행하는 자가 참 신자이며 참 신자라야 교회의 정회원으로 인정되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독교의 핵심을 그는, 죄를 회개하고 모든 죄를 버리며, 자신의 죄성과 비참과 (구원에 있어) 무능, 자기 의의 불충분성, 그리고 완전히 멸망할 상태를 확실히 깨닫는 것,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아 완전한 버림을 당해 마땅함을 느끼는 것, 복음의 진리를 믿는 것, 즉 우리의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오직 전심으로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완전한 탁월성만을 의지하는 것, 다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자신의 완전하고 영원한 분깃으로 모시는 것, 그분을 위해 이 헛된 세상의 즐거움을 포함한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는 것, 그분에게 자기 마음과 자기 전부를 드려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그 분의 것이 되는 것, 전생을 바쳐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 하나님의 모든 계명, 심지어 가장 어렵고 자기부인적인 계명에도 순종하는 것, 인류에 대한 선의 등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인정 받으려면 바로 위에 언급된 것들을 포함하는 신앙고백과 그것에 상응하는 “가시적인 성결한 삶”이 있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생각했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의 기본적 진리들을 학습, 수락하고 외견상 큰 문제없는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일반적 기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은혜 체험의 순서와 방식 진술의 가치
여기서 에드워즈는 자기가 주장하는 바가 이전의 청교도들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 전의 청교도 신학자들은 교회 회원권 지망자들에게 그들의 특별한 회심 체험의 과정과 방식을 진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한 영혼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신 순서와 방식을 진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믿었다. 그는 신앙고백자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 체험의 결과, 즉 거룩한 삶이라는 열매가 더 결정적이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체험에 대한 간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증거들을 무시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형제들에게 어떤 종류의 체험 진술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에드워즈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 경우는, 어떤 신앙고백자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 교회원으로 영입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모종의 체험에 대한 진술을 요구하는 관행이었다. 에드워즈는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증거란 기독교 진리에 대한 견실한 지식, 그리고 신앙고백에 상응하는 삶,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참 성도라는 “최선의 증거”라는 것이었다.
가시적 거룩의 구체적 내용
그러면, 신앙고백에 상응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가시적 행동에 나타나는 거룩함의 증거들로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생활, 마태복음 5~7장, 로마서 12장, 그리고 신약의 많은 다른 부분들에 나타난 규칙들에 상당한 부분에 준하는 삶, 그리스도의 명령과 복음의 규칙들 및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에 나타난 의무들에 대한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 인간, 성도들, 적들에 대한 사랑, 온유와 용서, 자비와 자선,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 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는 것, 특정인들과 대중들의 영혼 및 육체에 선을 행하는 것, 절제와 육신을 죽이는 일, 겸손한 말씨, 혀를 재갈 먹여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 교회, 가정, 직장, 동네 등 모든 장소에서, 그리고 주일이든 주중이든 모든 때에, 모든 형편과 시험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행하는 것, 자기 부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신앙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것들에 비하면 다른 모든 체험들은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로 기독교적 행실은 체험의 진술보다 한 사람의 신앙고백의 진실성을 훨씬 더 잘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마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에드워즈가 제시한 그러한 증거들이 회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화에 관한 것이라 느낄 것이다. 또한 입교 지망자에게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생각하는 신앙고백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는 이렇게 많을 뿐 아니라 그 수준도 높았다. 물론 거룩한 가시적 행실이 한 사람의 신앙고백의 진실성에 대한 ‘최선의’ 증거이기는 하나 ‘무오한’ 증거는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했다. 그것이 ‘절대적’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성경적 근거
성경도 기독교적 행실을 은혜의 뚜렷하고 확실한 증거로 말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이를 테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 굳세게 하리로다”(요일3:18-19).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9-2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리라”. 이러한 성구들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행실이야말로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모든 증거들 가운데 “으뜸”이며 “죄의 깨달음, 회심에 있어서의 조명들과 위로들의 방법이나, 명상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어떤 내재적 발견들이나 은혜의 작용들보다 훨씬 더 선호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성경은 거룩한 행실을 은혜의 주된 증거로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을뿐 아니라 모든 증거들 중 으뜸으로 간주한다고 에드워즈는 이해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14:21-24). 거룩한 행실은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용될 커다란 증거라고 에드워즈는 강조한다. 그것은 마25:19-30의 양과 염소 비유, 계20:12, 고후5:10 등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선한 의도의 한계
행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에 에드워즈는 사람이 단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일에 마음이 있다는 증거는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며 행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선한 의도만을 가지고 있고 한 번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어떤 사람의 신앙고백의 진위를 구분하는 척도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라고 주장한다. “삶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다른 것들보다 실제로 하나님을 선호하는가를 입증해 주는 것들이야말로 그의 마음의 진실성과 올곧음에 대한 적합한 시금석”이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시종일관된 지론이었다. 신앙고백자들은 양자택일로 시험을 치른다.
신앙고백의 진실성에 대한 시험 방법
신앙고백자들은 ‘시련’에 의해 고백의 진실성을 시험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금 색깔과 모양을 가진 광석을 용광로에 집어넣음으로써 과연 그것이 금인지 아닌지를 시험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어려운 의무들, 즉 시험들은 신앙고백자들이 참 성도인지 아닌지 시험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만난 어려움들에 의해서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을 때 자신의 외아들을 바치는 어려운 명령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명령에 의해 신앙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사용하신 방법이었다고 한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런 다음에 와서 나를 따르라”고 부자 청년에게 시험했다.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들이 처음 싹이 날 때는 다 비슷해 보이나 타는 태양의 열기에 의해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고 예수는 교훈하셨다. 결론적으로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행실이야말로 어떤 신앙고백자가 참 은혜받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가장 고유한 증거”이며 은혜의 모든 표징들 중 “으뜸”이며, “표지들 중 표지”이며 “증거들 중 증거”로서 모든 다른 표지들을 인치고 관 씌우는 것이다. 행위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증거로서의 행위이다. 체험이 행위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체험이야말로 영적이고 신적인 것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한다.
제5장 에드워즈의 종교적 정서론 평가
「종교적 정서」에 나타난 에드워즈의 탁월성은 그의 체험적 신학에 있다.
1. 에드워즈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마음으로 혹은 영으로 이해하고 감지한 체험을 가진 신학자라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신학자로 자신의 남달리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언어로 형상화하여 후대에 남겨 주었다는 점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실상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본질이라 보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의 달콤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갖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에드워즈의 영성은 범인들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2. 이 책에 나타난 에드워즈의 주장들 중 애매한 점이 있다. 참된 종교적 정서의 유무가 한 사람의 회심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인지, 아니면 이미 회심한 자들이 은혜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관계된 것인지,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일반적인 이해와 차이가 없겠지만, 전자인 경우라면 에드워즈는 회심의 표준을 너무 높이 잡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주는 표준을 너무 높인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여러 면에서 표준을 낮추고 타협하는 것이 일반화된 현대 교회에서 그는 비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엘리트주의를 추구한다는 비난을 받을 위험성이 있다. 단지 현대 교회에서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진 집단으로 보이는 청교도 교회에서도 그의 기준은 너무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에드워즈의 그처럼 높은 기준은 결국 노샘프턴 교회 다수 교인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그의 목사직 해임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사건은 바로 그가 「종교적 정서」에서 주장했던 표준들을 실제 자기 교회의 교회 회원 자격 결정 기준으로 제안함으로 촉발되었다.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재세례파의 완전주의에 빠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진실한 신앙과 순수한 교회에 대한 청교도적 집착이 이러한 교과서적 기준을 만들게 하였고, 부패한 본성과 연약한 신앙을 가진 현세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3. 우리는 청교도적인 높은 표준에 감사하고 그 표준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채찍질할지언정 성경적인 표준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부흥 혹은 성령의 활동이라고 하는 것들의 80%이상이 에드워즈의 표준에서 보면 가짜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각성해야 할 일이다. 청교도 신앙을 본받고 참된 부흥에 대한 갈망을 새롭게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