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강의 성리품 9장
성리가 있어야 원만한 도
요즈음 바다이야기로 세상이 뒤숭숭하다. 도박은 정신적 습관이 아니라 생리적 습관으로 진행되어 약물치료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고 한다. 도박뿐만이 아니라 게임중독증도 사회문제화 하고 있다. 게임에 빠져 PC방에서 밤을 새는 청소년이 많다.
도박이나 마약, 그리고 PC게임 등은 중독성이 매우 높다. 그로 인하여 경제적 시간적 손실은 물론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사회생활에 적응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그들 중독이 지닌 치명적인 공통점은 인간의 생명력을 흩어버리는 데에 있다. 흩어버림도 일종의 집중과 통한다. 그러나 그 집중은 내면으로 향하여 정신을 모으는 정신수양과는 정반대인 까닭에 심한 소모현상과 중독현상을 유발한다.
가상세계에 중독되면 현실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고 인간관계나 정신건강에 문제가 발생하여 피폐의 길로 들게 된다.
또한 물질, 명예, 인간 등 현상세계의 가치에 과도하게 빠져도 집착과 탐욕이라는 중생의 속성이 더욱 가속화되어 강급의 길로 들게 된다.
중생의 속성은 흩어버림과 집착에 있다. 이러한 집착과 흩어버림에 대한 대안은 오직 한 가지, 가상세계도 현상세계도 아닌 내면세계에 침잠하는 것이다.
대종사는 성리품 9장에서 말씀하시었다. “종교의 문에 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이는 원만한 도가 아니니 성리는 모든 법의 조종이 되고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되는 까닭이니라.”
성리가 모든 법의 조종이 되는 까닭은 그 근원에서 만법이 파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리가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되는 까닭은 내면세계의 최종점에 성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리가 없는 종교는 제대로 된 가르침일 수 없고, 성리에 바탕하지 않은 삶은 한계와 강급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이야기나 PC 중독을 법으로만 다스린다면 그들 욕구를 다른 방향으로 삐져 나가게 하는 풍선효과를 유발해 또 다른 종류의 도박과 가상세계가 머리를 들 뿐이다.
이들의 치료법은 단 한 가지, 내면세계로 시야를 돌려 정신적 풍요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 내면세계의 한가로움과 참된 자유로 향하는 그곳에 성리가 있는 것이다.
성리품 10장
만법귀일의 소식
대종사님이 봉래 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큰 비가 와서 사방 산골의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시며 “저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지금은 갈래가 다르나 마침내 한 곳으로 모아지리니 만법 귀일(萬法歸一)의 소식도 또한 이와 같다(성리10)”고 하시었다.
대종사님의 구도과정은 간화선의 수행내역과 퍽 닮은 데가 있다.
화두선에서 사용하는 여러 공안(公案) 중에서 만법귀일은 기본이다. 그래서인지, 대각 후 접하신 책 <선요>때문인지, 만법귀일은 대종사께서 즐기시던 화두였다. 총부시절 정기훈련이 끝날 무렵 성리문답에서 이 화두를 던져 제자들을 단련하곤 하셨다.
만약 봉래의 시냇물에 비유하신 만법귀일의 소식을 받들면서 우리도 덩달아 봉래구곡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영생토록 중생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개는 던진 흙덩이를 쫓고, 사자는 흙덩이를 든 손을 문다. 골짜기와 시내 따위의 사량을 내던진 곳에 만법귀일의 소식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사량을 던진 곳에만 진리가 있을까. 골짜기와 바다, 그리고 하늘에 이르도록 물이 있는 모든 곳에 만법 또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법은 은혜로 존재한다. 법신불의 세계를 삼라만상으로 풀어 주시고 다시 그 다양함을 은혜 하나로 꿰어주신 대종사의 뜻에도 만법귀일은 존재한다.
추상적이고 언어적인 사유를 구체적인 그림으로 끌어내 설명하는 것에 능한 것이 성인들의 공통점이다. 시냇물의 비유는 석존의 <니까야>에도 있다. “수행승들이여, 연기는 마치 빗방울이 산에 떨어져 계곡을 이루는 것과 같고, 다시 작은 강 큰 강을 거쳐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다” 이는 12연기의 인과적 설명으로써 무명의 빗방울이 생로병사의 바다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 석존의 탁월한 비유이다.
무명의 빗방울에서 생로병사를 창조하신 것이 석존이시라면, 여러 산골의 물방울에서 이 세상 모든 물을 다 보시고, 생활 속의 며느리에서 우주에 가득한 법신불의 은혜를 아신 것이 대종사님이시다.
시냇물의 흐름과 만법귀일의 소식은 모두 우리에게 부처를 보증하는 희망어린 속삼임이다.
성리품 11장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제자들에게 시 한 수를 주셨다. 변산 아홉 계곡 굽이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구나. 없고 없다 함도 또한 없고 없음이요, 아니고 아님도 또한 아니고 아님이라. (성리 11)
석립청수성의 당혹함은 발상을 바꾸라는 재촉이다. 일상에서 발칙함으로 그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선문답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절에 가면 일주문이 있는데 상식을 벗어난 이 건축의 의미는 ‘이 문에 들어오는 자 지해(知解)를 버리라’는 뜻이다.
중생의 발상에서 여래의 발상으로 모드전환을 하면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는 말은 ‘내가 돌이 되어서 물소리를 듣는다’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는 일상의 나가 아니다. 나와 돌이 둘 아닌 경지를 거치고서야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법이다.
그리 되면 단순하게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저변에 있는 근본 성품의 소식도 함께 듣는다. 그 ‘소리(sound)’에 사로잡히면 영원히 그 소리에서 헤어 나올 수 없기 마련이다.
도를 묻는 제자에게 조주는 이렇게 말한다. “차나 한잔 들고 가게” 이 법문을 들으면 사람들은 긴장을 시작한다. ‘천하의 조주가 차를 마시라 했으면 그 차는 보통차가 아닐 거야. 커피일까 녹차일까? 아니 마차나 자동차를 말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나 조주는 그저 다 놓고 차 한 잔 마시고 가기를 권했을 뿐이다. 긴장은 집착을 초래한다.
서 있는 돌에 집착함 또한 중생성의 한 단면이다. 봉래정사에 계셨으므로 봉래구곡의 돌이 소재가 되었을 뿐이다. 대종사께서는 그저 하늘과 물과 돌과 소리가 하나 된 천진(天眞)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싶으셨을 따름이었다.
만약 모드전환을 마친 순수한 도인과 함께였다면, 대종사께서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 따위의 어려운 한문 투 시를 읊으셨을까. 봉래구곡 맑은 물로 우려낸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파안미소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는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쉽게도 차 한 잔의 기회를 놓친 대종사께서는 덧붙이셨다.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
성리품 12장
윤선 타고 영산에서 변산으로
봉래정사 시절 대종사는 둘러친 산과 굽이치는 계곡에서 산중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영산에 다닐 때는, 육로를 통하는 것보다 곰소와 법성을 왕래하는 뱃길이 편하였다.
영산에 다녀온 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윤선(輪船)으로 이곳에 올 때 바다 물을 낱낱이 되어 보았으며, 고기 수도 낱낱이 헤어 보았다. 그대들도 혹 그 수를 알겠는가?” 제자들은 각각 자신의 답을 올렸다.
제자1 : ‘이 법문에 사람들은 엄청난 바닷물을 재고 물고기 숫자를 헤아릴 방도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바닷물은 한 되이며, 물고기는 한 마리에 불과합니다.’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네 말이 그럴듯하구나.’
제자2 : ‘성품에는 많다 적다의 구별이 없으니 어찌 숫자에 고정됨이 있겠습니까. 물고기 수는 한 마리라 해도 천 마리라 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관념에서 자유롭고 차별을 떠나야 합니다.’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네 말도 그럴듯하다.’
제자3 : ‘대종사께서는 윤선을 타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돛단배를 이용하다가 내연기관을 장착한 윤선을 타시고는 천지개벽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물질개벽이 일상에 파고 들어옴을 윤선으로 암시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종사 또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네 말도 그럴듯하다.’
제자4 : 바다를 주목해야 합니다. 물질개벽을 상징한 윤선에 타셨으나 수만 년을 변함없는 그 웅대한 바다를 보며,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인도정의의 대도를 떠올리셨던 것이 아닙니까?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네 말 또한 그럴듯하다.’
제자5 : 저는 대종사께서 바다 물과 물고기를 소재로 한 것은, 정신개벽을 통해 전 세계가 당신의 한 바다에 들어오며 일체중생이 당신의 한 그물에 들어오는 자긍심을 표현하신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종사 또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네 말도 그럴듯하다.’
한참 후에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성리가 규격에 떨어지면 진부함을 벗어나기 어렵고, 자유로 활공을 시작하면 그 본질을 여의기 쉽다. 규격과 자유가 자재해야 하나니, 저울이 있어 무게가 있는가? 무게가 있어 저울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