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의 노래 [La Chanson de Roland]
작자는 분명하지 않으며, 성립 연대는 1098년부터 110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어(中世語) 10음절 시구 4,002행으로 되었다.
12세기 후반의 옥스퍼드 고사본(古寫本)에 실제 노래로 불리던 이 시의 순수한 모습이 전한다. 그 내용은 778년 8월 15일 에스파냐 원정에서 돌아오던 샤를마뉴 대제(大帝)의 후위부대가 피레네 산속 롱스포에서 바스크인(人)의 기습으로 전멸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치밀한 구성과 기품 있고 힘찬 문체로 황제와 신에게 봉사하는 봉건 프랑스의 무사도(武士道)를 찬양하고, 대장 롤랑의 용감함, 막료(幕僚) 올리비에의 슬기, 간신(奸臣) 가늘롱의 원한을 대립시키면서 사라센 대군을 적군으로 설정, 회교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승리를 노래하였다.
한편 작자 ·연대 ·성립과정 ·구성요소 등에 관해서는 각국의 연구자들 사이에 아직도 이설이 많다.
<줄거리^^>
이것은 샤를르마뉴가 이베리아 반도의 사라센 제국을 토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샤를르마뉴의 원정군은 승승장구 하였는데 사라센 제국이 화친을 요청하고 샤를르마뉴로써도 완전히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결국 화평을 맺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12용사 중 최고의 용장 롤랑은 화평을 극구 반대하는데 사라센 제국의 뇌물을 받고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 가르농과 대립하였습니다
가르농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롤랑을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짰습니다 그것은 샤를마뉴가 회군할 때 안전을 위한 후위대를 남기는 데 지휘관으로 롤랑을 추천한 것이었습니다
자존심과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롤랑은 자신의 이름이 거명되었는데 피하는 사람이 못되었기에 샤를마뉴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롤랑과 12용사들은 후위대 2만을 지휘하게 되었고 가르농은 롤랑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라센 왕에게 그 사실을 몰래 알려주었습니다
마침내 샤를르마뉴가 본국으로 돌아갈때 샤를마뉴는 롤랑에게 뿔피리를 주며 위급할 때 이것을 불면 자신이 즉시 달려올 것이라고 하며 본대 10만을 프랑크 왕국으로 회군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이 사라센의 대군이 기습을 해왔고 롤랑의 친구이자 12용사 중 한명 올리비에는 뿔나팔을 부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지만 롤랑은 자신은 겁쟁이가 아니라며 사라센의 대군과 맞섰습니다 용감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고 자신때문에 전멸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후회하며 올리비에에게 '이제 뿔나팔을 부는것이 어떨까??'하고 묻자 영리한 올리비에는 뿔나팔을 불어도 이제는 샤를마뉴의 본대에까지 들리지 않을 것을 알고 '이제와서 그것을 부는 것은 비겁하니 그냥 싸우자'고 말했습니다 롤랑은 자신이 고집부린 것을 후회하며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뿔나팔을 불고는 사라센 적진 깊숙히 진격해 싸우다가 결국 전사했습니다
한편 그때 샤를르마뉴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 영내로 들어가는 중이었기에 뿔나팔 소리가 들릴리 만무했지만 어렴풋이나마 샤를마뉴의 귀에는 뿔나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저건 롤랑의 뿔나팔 소리가 아니냐?!'
하며 급히 본대를 되돌려 후위대 쪽으로 갔으나 있는건 12용사와 2만군사의 시체 뿐이었습니다 크게 슬퍼한 샤를마뉴는 가르농을 처형하고 사라센 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첫댓글 사라센제국을 멸망시켰습니까? 1400말까지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슬람 세력이 건재한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샤를마뉴대제는 사라센의 피레네산맥 이북진출을 막은 거 아닙니까?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봉사하는 봉건적 가치를 구현하는 십자군 운동의 정신을 미화하는 영웅적 희생의 시라고 합니다
조국애와 신앙을 결합한 최고 걸작이며 또한 카페 왕조의 정치적 통일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