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두 편의 영화 <스텔라 달라스 Stella Dallas>(1937, King Vidor)와 <스텔라 Stellla>(1990, John Erman)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1) 이들 영화는 올리브 히긴스 프라우티(Olive Higgins Prouty)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이 소설은 1925년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이들 영화는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이상적인 모성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모성 멜로드라마의 특성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희생으로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모성과 대립되는 여성의 욕망이 전경화되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된다. 또한 두 편의 영화는 계급, 히피/여피, 성, 뉴딜정책 등과 같은 이들이 각각 속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맥락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들에서는 지배적인 남성적 시선과 간헐적으로 개입하는 여성적 시선이 경합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남성과는 다른 여성관객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전복적인 독해의 가능성을 준다.
2. 여성의 욕망과 모성
두 영화는 모두 주인공 스텔라가 자신의 욕망과 모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두 주인공이 가지는 욕망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37년의 스텔라가 영화 속의 멋진 사람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 즉 물질과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90년의 스텔라는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1969년임을 감안하면 이는 명백히 히피적 감수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삽입된 음악 가운데 하나인 "California Dreaming"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영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욕망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소 차이를 보인다. 37년 작이 여성의 욕망에 대해 어느 정도 일관된 시선을 견지하는 것과는 달리, 90년 작은 불균질하다. 37년 작에서 스텔라의 욕망은 과잉되고 그로테스크 한 것으로 종종 재현된다.2) 반면, 90년 작에서는 스텔라가 플로리다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가 딸에게 좋지 않은 환경임을 깨닫는 순간까지, 그녀의 욕망은 긍정적으로 재현된다. 이는 이후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을 충분히 동기화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3)4)
이들의 욕망이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공통점을 가지는데, 이는 욕망이 모성과 대립되는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물론 이들의 삶에서 욕망과 모성은 평화롭게 공존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이를 공존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들의 욕망은 모성과 공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적 가족제도와도 공존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37년의 스텔라가 안정적인 부르조아 가족을 만들 것을 강력히 갈망하였던 것과는 달리, 90년의 스텔라는 이를 애초부터 원치 않는다. 그러나, 37년의 스텔라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그녀는 더 이상 가족을 구성할 수 없게 되며, 90년의 스텔라와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딸의 미래를 위해 그녀를 포기하는 시점에서, 두 스텔라는 자신의 욕망 또한 포기한다. 그리고 모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 굴복한다. 이 두 편의 영화가 견지하는 여성의 욕망과 모성에 대한 시선은 명백히 가부장제적 요구에 따른 것이다. 양자는 공존할 수 없으며, 후자는 전자의 희생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다. 마지막 결말은 이를 극대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 개별적인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실현되는 이상화된 숭고한 모성성.
3. 사회문화적 맥락들 - 계급, 성, 히피/여피, 뉴딜정책
두 편의 영화는 50년 이상의 차이를 두고 만들어졌다. 양자는 각각이 속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비교 분석하는 것은 이들이 속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지형을 비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편의 영화가 명백히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계급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다. 37년 작의 경우 지배적 가치는 상류계급의 그것에 맞춰져 있다. 상류계급의 절제, 친절, 배려, 우아함 등의 덕목은 이상적인 삶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스텔라는 이러한 덕목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모성성을 의심받는 것이기도 하다. 스텔라의 화려한 옷차림은 이러한 덕목(여기에는 경제적 능력도 포함된다)의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종의 물신이다.5) 이 영화는 이러한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교훈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류계급의 삶이 가지는 진정성은 물질적인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덕목에 있다는 것.
반면에, 90년 작은 이와는 다른 계급관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스테판이 무책임한 남성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반면에, 그와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인물인 에드는 주정뱅이에 문제투성이의 인간이지만, 자상하며 인간적이다(37년 작에서는 명백히 스테판이 에드보다 훌륭한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스텔라 자신이 계급상승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 90년 작의 계급관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녀는 건강한 노동계급 여성의 화신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50년의 시간 동안 노동계급의 재현 방식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37년 작이 노동운동이 철저히 탄압되고 있었던 20세기 전반기의 미국의 정치적 상황 - 이는 이후의 냉전과 매카시즘을 예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 을 드러낸다면, 90년 작은 60년대의 활발한 각종 사회운동을 거친 미국의 변화한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이에 덧붙여, 90년의 스텔라가 37년의 스텔라에 비해 훨씬 더 주체적으로 성격화되고 있는 것 또한 60년대 이후의 대표적인 사회운동인 페미니즘의 성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한 90년 작은 히피적 삶과 여피적 삶의 대비라는 컨텍스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는 후자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재현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여피적 삶에 대한 히피적 삶의 비참한 굴복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정신적인 측면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패배로 그려진다.6)
한편, 크리스티앙 비비앙니(Christian Viviani)는 37년 작을 당시 위기에 빠졌던 미국사회를 새롭게 재편하기 위해 등장했던 뉴딜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스텔라가 남편의 새 아내와 맺는 관계에 주목한다. 스텔라가 시골의 진실한 가치를 재현한다면, 새 아내는 문화와 문명의 가치를 재현한다. 둘은 그녀들의 공동-딸에게 농촌과 도시의 장점을 동시에 교육하고 있으며 이는 뉴딜정책의 이상을 보여준다. 이때 남편은 타락한 도시의 허위적 가치를 재현한다.7) 이는 같은 시기의 카프라 영화가 재현하는 인민주의적 이상과도 일치한다. 반면에 90년 작에서는 농촌-도시의 문제가 전혀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는 철저히 도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4. 시선과 여성 관객성의 문제
1) 경합하는 시선들(남성적/여성적 시선)
두 편의 영화들을 구축하고 있는 지배적 시선은 부르조아 남성 가부장의 그것이다. 37년 작에서 스텔라의 일탈이 불안한 것으로 구축되는 것은, 이를 가부장적 시선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는 스테판 달라스의 안정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매개된다.8) 90년 작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느낌이 줄어든다. 스테판의 시선은 37년 작에 비해 그 힘을 크게 상실한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에서도 ‘희생의 결말’을 통해 남성시선의 권력이 복원된다.
한편, 두 편 모두에서 남성시선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여성적 시선 또한 존재한다. 그 결과 여성의 욕망은, 비록 그것이 결말에 이르러서 철저히 부정됨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서사의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하게 된다. 즉 이 두 편의 영화에서 남성적 시선이 지배적인 것으로 존재한다면, 여성적 시선은 간헐적으로 끼어듦으로써 남성적 시선의 지배를 위협하고 있다.
90년 작의 첫 번째 씬은 이와 같은 남성적/여성적 시선 간에 이루어지는 경합을 잘 보여준다. 스텔라는 자신이 여급으로 일하는 술집에서 남성손님들의 요구에 의해 춤을 추게 된다. 강렬한 성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녀의 춤을 보면서 남성들은 열광한다. 이 장면은 멀비가 가부장적 남성시선에 의해 내러티브의 영화의 시각적 쾌락이 구축되는 양상으로 제시했던 것을 잘 보여준다. 멀비는 영화가 제공하는 시각 쾌락증의 형식이 여성이미지의 재현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여성이 유발하는 거세 공포는 이를 벗어나기 위한 특정한 방식을 시각적 쾌락의 구축 방식에 포함시켰는데 그중 한 가지가 여성 신체에 대한 물신화이다. 그녀는 남성 손님들에게 절시증적이고 관음증적인 쾌락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들 남성들의 시선은 이 영화를 보는 남성관객들의 그것을 매개한다. 또한 그녀는 강력하게 물신화되고 있는데, 그녀가 결여하는 부재한 남근은 명백히 그녀의 엉덩이(!)로 대체된다.
그러나 멀비가 주장했던 바와 같은 남성시선의 지배가 이 씬을 통해 전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 지배가 실패하는 지점은 바로 성공적이지 않은 물신화에 있다. 물신화는 남성으로 하여금 거세공포를 극복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며, 남성 주체를 안정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이다. 그러나 물신화된 스텔라의 육체는 이와 같은 남성의 안정적인 주체구성을 거부한다. 그것은 너무나 강력하게 물신화된 나머지, 남성들에게 새로운 위협을 제공한다. 그것은 남성적 욕망의 시선으로 통제 불가능한 것, 즉 여성의 욕망의 개입을 가리킨다. 이 씬에서 스텔라는 전적으로 대상화되지 않고 있으며, 자신의 욕망 또한 함께 드러낸다.
스텔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두 편의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시선의 경합은, 이 영화들을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절합하는 영화로 독해하는 방식이 유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또한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의 지배적인 힘 아래에서 제작된 여성 영화들-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여성들의 주된 관심사를 다루며, 여성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들 - 에 대해서 전복적인 독해가 가능함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영화들에 여성적 시선은 필연적으로 내재한다.
2) 여성 관객성의 문제 - 린다 윌리암스(Linda William)의 논의를 중심으로
멀비는 영화 내에 존재하는 시선을 세 가지로 나누어 정리한 바 있다: 영화적 사건을 기록하는 카메라의 시선; 완성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스크린의 환영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던지는 시선. 그는 주류 영화의 재현 관습이 허구적 리얼리티를 창출하기 위해 처음 두 시선을 부정하고 관객을 세 번째 시선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멀비는 이러한 주류 영화의 재현체계가, 관객의 위치를 내러티브가 제공하는 시선에 성공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유로운 관객의 위치를 불가능한 것으로 상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논의의 중심을 남성관객에 둠으로써 여성관객에 대한 고찰을 결여한다는 난점을 가진다.9)
즉, 영화가 구축하고자 하고자 하는 시선과 실제 관객들의 시선은 구분해서 탐구되어야 한다. 양자는 매번의 관람에 있어서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며 영화의 의미를 계속해서 새롭게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편의 영화는 지배적인 남성적 시선과 간헐적으로 개입하는 여성적 시선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을 보다 심도 있게 살펴보기 위해서, 이 부분에서는 ‘관객에 시선’으로 논의를 확장하고자 한다. 특히 이는 여성 관객이 가지는 영화보기의 특별한 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남성 관객의 그것과는 구분되며, 이 영화들의 전복적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10)
즉, 이 장에서의 논의의 중심은 두 편의 영화가 구축하고 있는 시선과 여성관객들이 이를 바라보는 방식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는 어떠한 의미들을 구성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이를 다루기 위해 린다 윌리암스의 여성관객성에 대한 논의에 의존하고자 한다. 그는 여성 관객성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스텔라 달라스>를 분석하고 있다.11) 그의 결론은 이 영화가 가부장제적인 모성담론을 강화하고 있다는 기존의 비판과는 달리 진보적이며, 이는 이 ‘여성에게 말거는 여성의 영화’가 구축하는 관람성의 특정한 형태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는 관객성에 대한 탐구가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멀비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관객성 논의가 가부장제적인 상징계 질서 속에서의 여성 재현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것을 비판하면서, 이보다는 여성 주체가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노력을 찾아내는 작업이 더욱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여성들의 매체-여성잡지, 연속극, 여성영화-등에서 제시되는 여성들의 이야기와 그것이 함의하는 독해의 위치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를 밝히기 위해 윌리암스는 여성 주체 구성의 특성에 대한 기존의 고찰로 우회한다. 먼저, 낸시 초도로프(Nancy Chodorow)의 남성과 여성의 주체구성 과정에서의 차이가 사회적 분업을 낳은 것으로 보는 입장을 검토하면서, 전-외디푸스적 단계에서의 동일화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여성이 가지는 관계의 연속성, 유동성 등과 같은 특성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루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가 여성 자신을 재현하기 위한 유토피아적 대안으로 제시한 여성 호모섹슈얼리티 공동체와, 이와 유사하게 레즈비아니즘에 대한 아드리안 리치(Adrienne Rich)의 주장에 주목한다. 리치는 레즈비안의 존재 자체가 남성 식민주의자들의 지배적 가치에 모성(mothering)과 유사한 양육적이고(nuturing) 감정이입적(empathic)인 관계로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전-상징계적인 감정적이고, 전-언어적이고, 모성적인 언어와 상징계적인 언어 사이의 변증법을 통해서 성차가 구축되는 과정을 드러내고자 했던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관점에도 주목하였다.
이러한 여성 정체성과 모성성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바탕으로 해서 <스텔라 달라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윌리암스가 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주목하는 지점은 크게 세 군데이다. 첫 번째는 물신화된 존재로서의 스텔라의 존재이다. 스텔라의 옷차림은 물신화된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녀는 여자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트리이다.” 그러나 이는 멀비가 거세공포의 부정을 위한 서사전략으로 설명했던 물신화와는 다른데, 무엇보다도 이는 여성 영화에서 여성에 대한 물신화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옷차림은 명백한 과잉으로 나타나며 이는 남성시선에 매개된 물신화의 뒤틀림이자 이에 대한 패러디이다. 두 번째는 스텔라와 딸의 시선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이는 여성들이 서로의 시선을 통해서 서로를 재현하는 지점이자, 여성 관객 특유의 다중적인 독해의 위치가 확보되는 지점이다. E. 앤 카플란(E. Ann Kaplan)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모성을 가장한 어머니에 대한 단죄, 혹은 잘못된 욕망을 가진 여성에 대한 단죄로 해석한다. 그녀는 에드와의 파티 이후 지배적인 시선이 스텔라에서 스테판으로 이동하며, 동시에 이상적인 모성성이 강조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나 윌리암스는 여성관객이 단일한 인물에 동일시하기 보다는 모순 자체에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또한 타니아 모들레스키(Tania Modleski)는 연속극의 여성시청자들이 여러 극중 인물들에 동일시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일종의 이상적인 어머니로서의 관객을 구성하며, 이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이는 마지막 장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스테판의 단일한 시점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은 가부장제가 보기를 요구한 것-자신의 위치를 포기하고 구경꾼이 된 어머니-과 감정이입적이고 동일화하는 여성관객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어머니를 잃은 딸, 딸을 잃은 어머니-사이의 모순을 본다. 이와 같은 이중의 시각은 여성 관객성에서 전형적이며, 이는 초도로프가 여성의 정체감이 어머니와의 감정 이입적이고, 동일화하는 관계의 연속성에 기초한다고 보았던 것과 연관된다. 남성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최초의 동일화 대상과 자신을 끊임없이 차별화해야 하는 남성과 달리, 다양한 주체의 위치에 동일화할 수 있는 여성은 서로 다른 다양한 종류의 관객이 된다.
요컨대 “여성관객이 이러한 피학증적 이미지의 나이브한 믿음에 전적으로 유혹되고, 영화가 여성인물들을 그들의 장소에 위치 짓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이미지들이 그녀들을 그녀의 장소에 위치 짓는 것을 허락해왔다고 보는 것은 여성관객에 대한 끔찍한 과소평가이다.”(320) 따라서 “<스테라 달라스>는 진보적인 영화인데, 이는 그것이 통일성과 폐쇄성에 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엔딩의 한정적인 닫혀짐이 관객들 사이에 평행하지 않은 통일성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화가 관객을 다른 여성 주체에 주로 동일시하도록 묶여있는 여성 주체의 장소에 위치시켰기 때문에, 관객이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독해를 영화에 부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한 여성 주체 위치의 텍스트 내 기입이 없었다면 자기 희생의 스테레오타입 어머니 캐릭터는 멜로드라마를 위한 그 많은 모성적 인물들의 모성적 특성으로 평면화되었을 것이다.”(319)
이러한 윌리암스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다면, 이 두 편의 영화는 그 표면적으로 강력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으로 독해 가능한 텍스트로 볼 수 있다. 이는 여성 주인공들이 서로의 시선을 통해서 서로를 재현하고, 여성관객들에 의해서 주로 관람되는 여성영화이기 때문이다. 여성 관객들은 단일한 위치를 점하지 않고, 다양한 위치를 옮겨 가면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관점을 성공적으로 피해간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 가운데 한 가지는 어머니와 딸과의 관계이다. 양자는 서로의 시선으로 서로를 재현함으로써, 유동적인 여성 관객이 여성의 시선을 통해서 재현된 복수의 여성 이미지를 관람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또한 가부장제 상징계의 질서를 벗어나기 위해 고안되었던 여성 호모 섹슈얼리티 사회, 혹은 레즈비어니즘적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는 애드리언 리치가 제안한 모성적인 태도를 전제로 하는 관계로, 37년 작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 또한 모성적이기 때문이다. 90년 작에서는 여기에 히피 공동체적 연대의식이 겹쳐진다. 이들이 구성하는 비정상적 가족은 히피적 형제애가 만들어 낸 의사가족의 형태와 유사하며, 이들이 함께 부르는 "California dreaming"은 이를 확증한다. 또한 두 편의 영화에서 스텔라가 딸의 새엄마와 맺는 관계도 주목할 만 하다. 이들 또한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극중에서 스텔라를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새엄마이다. 그녀는 스텔라가 딸에게 숨기고자 하는 진정성을 알고 있으며, 그녀를 위로한다.
5. 나오며
이상에서 스텔라를 주인공으로 한, 50년의 차이를 두는 두 편의 영화들이 각각 속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특성들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이 영화들이 지배적인 남성 시선에 구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지는 진보적인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텍스트 내에 구축되어 있는 여성적 시선과 여성관객의 유동적인 동일시를 밝혀냄으로써 가능했다. 이는 나아가서 이 영화들이 결말에서 모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적 욕망의 부각을 포함하는 것 또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
1. Stella Dallas의 주요 출연진은 Barbara Stanwyck, Anne Shirley, John Bole, Stellas는 Bette Middler, Trini Alvarado, Stephen Colins 등이다.
2. 플로리다 여행 시퀀스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녀의 옷차림의 과잉은 그로테스크해 보이며 관객에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 반면 90년 작은 과잉에도 불구하고 그런 느낌을 주지 않으며 그녀의 춤은 오히려 유쾌해 보인다.
3. 스텔라의 욕망은 ‘영화속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었으며, 자신이 이에 실패한 데 이어서 딸마저 실패할 상황에 놓이자, 그녀는 딸을 포기한다. 이는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반면, 90년의 스텔라가 딸에 대해서 바라는 삶은 자신의 욕망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상류계급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 적이 없다. 따라서, 그녀가 딸을 포기하기를 결심하는 대목은 낯설기까지 하다.
4. 이처럼 두 편의 영화가 스텔라의 욕망을 서로 다른 것으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각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를 분석함으로써 쉽게 확인된다. 서사의 초반부에서 두 영화는 각각 스텔라의 성격을 서로 다르게 설정하고 있다. 37년 작에서 스텔라는 높은 신분의 남자를 만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치장한다. 스테판이 지나갈 때 책을 펴 드는 모습과 동생의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의도적으로 스테판에게 접근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 여기에서 그녀는 모성을 가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남성 욕망의 구현물(모성의 화신)이 된다. 반면, 90년 작에서 스텔라의 성격은 그녀의 춤으로 표현된다. 이 춤은 남성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에 종속된 것은 아니며, 스텔라의 욕망 또한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녀가 스테판의 구애를 냉정히 거절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며,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삶을 바꾸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두 스텔라의 욕망은 서로 다른 것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명백히 90년의 스텔라는 37년의 스텔라에 비해 도덕적으로 옳아 보인다 - 즉 그들의 욕망에 대한 시선 또한 다르다.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도 이러한 점은 유사하게 발견된다. 37년의 스텔라가 꿈에 그리던 결혼에 성공하는 것과 달리, 90년의 스텔라는 결혼을 강력히 거부한다. 그리고 37년 작에서 스테판이 홀로 떠나는 것은 스텔라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정당화되지만, 90년작에서 스테판의 행동은 비겁해 보인다.
<표> 첫 번째 시퀀스 비교 <스텔라 달라스> <스텔라>
거리(공간설정) 거리(공간설정)
식당 (스텔라의 춤) 집 (스텔라가 스테판을 보고 책 읽는 척 함.
계획적으로 동생의 도시락을 준비.)
집(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는 스텔라. 하지만 그녀의 밝은 성격을 드러냄) 공장사무실(스텔라의 계획적인 접근)
식당2(스테판의 구애, 이를 냉정히 거절하다 결국 승낙해 줌) 데이트(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속의 사람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냄)
극장(데이트) 결혼
집(임신 사실을 알게 됨) 임신, 아기를 낳음
집(청혼을 거절하는 스텔라) 파티
거리(에드와의 산책, 초콜릿을 먹는 만삭의 스텔라) 집(스테판과의 언쟁, 그가 뉴욕으로 떠남)
5. LInda Williams, 'Something Else Besides a Mother', Home is Where The heart Is, (ed.)Christian Gledhill(BIF Publishing, 1987), p. 311
6. 90년 작의 마지막 씬의 배경음악은 37년작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 씬에서 더 이상 California Dream을 들을 수는 없다.
7. Christian Viviani, 'Who Is Without Sin?', Home is Where The heart Is, (ed.)Christian Gledhill(BIF Publishing, 1987), p. 93.
8. 로라 멀비(Laura Mulvey)는, 주류 재현관습에 따라 생산된 영화적 내러티브의 쾌락이, 여성을 수동적인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남성 주인공의 시선이 전체 내러티브를 지배하는 것을 통해 창출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남성 관객은 그의 시선에 동일시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여성의 이미지를 성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다. 이는 37년 작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남성 주인공의 시선은 극 전체를 지배한다. 비록 그는 멀리 떨어진 뉴욕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녀의 행동은 항상 그의 시선을 통해 재현된다. 비록 극의 표면에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시선은 사실상 스텔라를 항상 감시하고 있으며, 그는 불시에 스텔라를 방문해서 그녀의 실수를 목격하곤 한다. 그리고 그가 부재하는 동안, 그의 시선은 스텔라의 천박한 행동을 비웃는 소도시의 고상한 주민들에 의해 매개된다. 따라서 남편의 시선에 동일시하는 관객들은 항상 스텔라의 행동에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로라 멀비,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서인숙 역, 『페미니즘, 영화, 여성』, 여성사, 1993, pp. 50-66(이하 멀비의 논의에 대해서는 주 생략)
9. 영화 장치에 대한 보드리의 분석에서부터 시작되어 멀비의 라깡적 남성 관객성 분석에까지 이어진 관객성 연구는, 관객을 영화가 구축하는 시선에 포박된 존재로 설정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멀비의 연구는 내러티브가 구축하는 시선과 그것이 창출하는 쾌락을 남성적인 것으로 한정함으로써 여성 관객성에 대한 논의를 애초부터 포기하는 난점을 보였다. 그 결과 이후의 연구들은 실제의 관객들이 가지는 ‘차이’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10.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특성에 대한 관심으로서, 여성관객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에까지는 주목하지 못하였다. 이는 보다 심화된 탐구의 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11. Linda Williams, 'Something Else Besides a Mo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