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8일 용두산타워에서 부산대 김동철교수의 왜관, 아카데미가 있었습니다. '지역사와 교류사로서의 왜관'인데 강의 노트를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부산초량왜관연구회' 홈피에 있는 자료실에서 부산의 왜관변천과 유지(번역) '에 대한 글을 가져왔습니다. 작성 시점이 일제 강점기이기는 하나 참고가 될 듯하여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釜山의 倭館變遷과 遺址 2 (朝鮮史學同考會 發行) 小田省吾(京城帝大豫科部長) 大正15년(1925년) 3월15일 두모포 왜관은 조선이 임진왜란 후 국력의 피폐가 극에 달한 때 건축하였으므로 매우 조잡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그 위치가 나쁘고 바깥 도로에서 내부가 들여다보였으며 또한 이때에는 이미 동서양관(東西兩館) 모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고 이관등록(移館謄錄)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실제 옮겨야 할 필요에 쫓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우씨(宗氏)의 요구에 대해 조선 측에서는 건물과 선창 수리에는 응했으나 왜관의 이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수리는 하였으나 충분히 일본 측을 만족시킬 수 없었고, 그런 가운데 소우씨(宗氏)는 마침내 사신을 동래에 파견하여 이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어떤 문서에는 지금까지 조선에서 건너와야 할 약속된 쌀이 여러 해 연체되어 환불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고 왜관이전의 요구는 오히려 부차적이었다고 말하지만 어쨌든 왜관이전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쌍방 간에 십 수 년의 현안이 되었다. 그동안 두모포 왜관은 여러 차례 화재로 손실되어 1671(寬文11)년 12월3일에는 이전교섭의 임무를 띠고 쓰노에 효고노스케(津江兵庫助成太)가 동래객사에서 병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후 강경하게 교섭한 결과 마침내 2년 후인 1673년(延寶원년)에 쌍방이 합의를 이루었다.
이로써 소우씨(宗氏)는 최초 요구에서 한 발 물러나 이관은 꼭 부산진이 아니라도 다른 적당한 곳도 좋다. 조선 측은 부산성과 낙동강 서쪽은 결코 허락할 수 없으며 부산진 이남의 다대포, 초량항 및 절영도 세 곳 중에서 한 곳을 허락한다고 타협하였다. 그리하여 이 중대한 교섭의 책임을 맡았던 마지막 소우케(宗家)의 사신은 정사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平成令) 부사 후루가와(古川太次兵衛:平成親) 이며, 조선 측 관리는 접위관 조사석(趙師錫)과 동래부사 이하(李夏) 두 사람이 결정되었다. 스기무라 우네메는 위 세 곳 중 초량항을 선택하여 이곳에 표목을 세우고 부지를 살펴본 후 같은 해 즉시 귀국하였다. 다음 해 1674년 소우씨(宗氏)는 다시 사신을 보내 이전문제의 해결에 대한 사례와 함께 지형을 살펴보았다. 지형문제에도 쌍방 당사자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나 결국 전번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平成令)가 예정했던 지역의 동서 폭을 다소 줄이기로 합의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제4차 왜관은 드디어 옛날 초량항, 즉 지금의 부산시가지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에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초량왜관은 1676년(연보4, 숙종2) 초에 공사를 시작하여 1678년 봄에 준공, 동년 4월 관수이하 450여 명이 처음으로 두모포에서 초량의 신왜관으로 이전하였다. 이는 실로 지금부터 249년 전의 일이다. 왜관의 이전과 함께 그 경영은 오늘날 부산부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문제 교섭에 전력을 다한 쓰노에 효고노스케(津江兵庫助成太)에 대해 1879년(명치12) 부산거류민이 초혼비(招魂碑)를 고관 뒤편 산위에 세웠는데 지금의 수정동 공원에 있다. 이와 별도로 쓰노에 효고노스케(津江兵庫助成太)의 묘가 남아 있다. 쓰노에 효고노스케(津江兵庫助成太) 유해는 사후 대마도로 옮겼으므로 묘갈(墓碣)은 후일 기념을 위해 세운 것이다. 초량왜관이 대마번의 관할로 된 것은 1678년(延寶6년)부터 명치유신에 이르기까지 190여 년인데 하루아침에 판적봉환(版籍奉還)과 함께 이 시설물은 전부 일본외무성에 인계되고, 업무역시 외무성 소관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의 관계는 1876년(明治9) 일ㆍ한 양국정부에서 처음 체결한 수호조규 제4관에,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일본공관이 있는데 수년 내로 두 나라 국민의 통상지역이되므로 지금부터 종전의 관례 및 세견선의 업무를 개혁하여 새로 만든 조규에 준거하여 무역 사무를 전담한다고 규정을 완전히 바꾸었다. 위와 같이 부산과 왜관의 변천을 약술하였는데 마지막으로 초량왜관의 유적에 대해 좀 상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왜관의 소재지는 위와 같이 살펴볼 수 있는데 그 규모는 쉽게 알 수 없다. 제1차 부산포 왜관의 건설에 대해서는 전혀 이를 짐작할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제2차 절영도왜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에 대하여는 앞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제3차 두모포 왜관에 대해서는 왜관이건등록과 조선고문서에 의해 조금은 가능하다. 즉 왜관의 부지는 현재의 부산시가에서 북쪽10리 정도의 수정동인데, 앞에는 바다이고 뒤에는 산이 둘러싸였으며(이 산에 쓰노에 효고노스케의 비가 세워져 있다) 좌우 3면은 높이 6척의 돌담을 쌓았고 전면 해안에는 선창을 만들어 수책(水柵)이 설치되었다. 부지 면적은 동서126보, 남북250보로 초량왜관의 약4분의 1정도인데, 평수는 약3만평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주된 건물은 동관, 서관, 연향청으로 이루어졌다. 이 왜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임진ㆍ정유 왜란 후 만들어져 매우 엉성하였으며, 부지 한쪽으로 치우쳐 습기가 많고 관사 역시 조잡하였다. 담장바깥에는 왜관부지보다 높은 도로가 있어 행인들이 안쪽을 기웃거려 편하지 않다. 라고 쓰여 있으며, 더구나 공간이 협소하여 자주 화재가 발생하는 등이 왜관 이전문제의 원인이 된 것이다. 제4차 초량왜관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중에서도 조선의 통문관지(通文館志)와 부산갑인회 편찬의 일선통교사(日鮮通交史)는 가장 참고가 되는 것이다. 이들 기사에서 왜관의 유적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고 유익한 일이라고 믿으면서 나는 1921년(大正10) 봄 친구 가등권각(加藤灌覺)씨와 함께 실지답사를 하여 당시 기록을 번역하고 또 그 후에 얻은 사료를 추가하여 실지답사의 대요를 기술하려고 한다. 우선 첫째로 초량왜관의 지형에 대해 설명한다. 이 왜관의 지형은 반듯하지 않은 장방형을 이루어 공식적인 칸수는 동서 450칸, 남북 250칸(6척5촌을 1칸으로) 으로, 평수는 약11만2천5백 평인데 지금의 평수로 환산하면 12만2천여 평이 된다.(高橋章之助씨에 의거) 두모포 왜관의 약4배정도 면적에 해당하는데 지금의 부산시가에 비교하면 대청정(大廳町) 동서 통로는 이 부지의 북변이 되고 혼마치(本町) 3丁目과 2丁目에서 해안으로 나와 호기(呼崎)에 이르기까지의 선은 동변을 이루고, 서정(西町)4丁目 대하수(大下水)를 따라 도로는 서변을 이루며, 남빈정(南濱町) 1丁目에서 3丁目에 이르는 가로는 그 남변을 이루며, 용두산은 이 지역의 약간 동쪽에 치우쳐 위치한다. 이로써 대략 왜관부지의 윤곽을 알 수 있다. 이 부지의 주위에는 높이 6척의 돌담을 두르고 북ㆍ서 두 변은 돌담 안쪽을 따라 소나무를 줄지어 심었는데 지금의 대청정(大廳町) 거리에 남아있는 고송은 그 일부이다. 이 소나무는 대마도에서 갖고 왔다고 하며, 이 돌담은 지금은 전부 무너져버렸으나 서정(西町) 4丁目 大下水에 이르는 도로는 돌담의 기초이므로 한 단 높다.(大下水는 후일 만든 것으로 그 하류에는 경계다리를 설치) 남빈정(南濱町) 3丁目 주변 가로는 가옥이 기초보다 높은 것은 마찬가지로 돌담의 기초였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남빈정(南濱町) 3丁目에서 행정(幸町) 2丁目을 돌아 모퉁이 가까운 어느 가옥입구에 약간의 옛 돌담흔적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남변 돌담 바깥은 호기(呼崎)에 이르기까지 일대가 자갈밭이고, 호기(呼崎)의 남쪽 아래에서 북서로 들어가 지금의 변천정(辨天町) 3丁目 주변까지 하나의 굴강(掘江)이 있는데 이를 중천(中川)이라 하였다. 갈대가 무성하고 간만의 차가 클 때에는 바닷물이 이 하천으로 올라온다고 하였다. 이 하천 끝을 따라 북쪽 통로를 나와테(繩手)거리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와전되어 나가테(長手)거리라고 하며, 지금은 나가테(長手)거리를 오오이케(大池)씨에 의하면 백삼십은행(百三十銀行) 앞에서 구부러져 남쪽으로 통하는 지하수로가 있다. 아마 이는 굴강(掘江)의 잔존물로서 호기(呼崎) 주변에 이르면 하천 둑 위에 인가가 보인다. 남빈정(南濱町) 1丁目 동쪽 끝은 그 입구에 해당된다. 동변의 돌담은 오늘날 본정(本町) 2丁目 하자마(迫間)씨 저택에서 끝나고, 남호기(南呼崎)에 이르는 중간에는 선창이 있으며 지금도 그 형태를 남기고 있는 선창의 내부는 동서78칸 반, 남북122칸, 입구34척이며, 제방은 높이 약 30칸, 하부 바닥 폭 약25칸으로 아주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현재 방파제 위에 다시 쌓아 올렸다고 한다.) 왜관 건설 중에 가장 많은 인부가 소요된 것은 사방의 돌담과 선창이었다고 한다. 본정(本町) 2丁目, 3丁目 주변은 돌담 바깥에 약간의 도로가 남아있고, 그 아래 일대는 해안이었다. 혼마치(本町) 2丁目, 3丁目 동쪽 가옥의 뒤편은 모두 한 단 높게 돌을 쌓아올렸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신마치(新町) 등 명칭에서도 혼마치(本町) 거리의 동편은 새로운 매립지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구입한 1875년(명치8) 정묘함(丁卯艦)이 실측하여 해군 수로료(水路寮)에서 발행한 해도에 의하면 부산역은 물론, 영정(榮町), 안본정(岸本町), 나카노마치(仲の町), 대창정(大倉町), 매립신정(埋立新町), 이케노마치(池の町) 등과 지금의 철도선로는 당시 모두 해안이었던 것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다음에 용두산은 동래부지에「초량 小山은 신초량 왜관 내에 있다」라고 하는데 용두산은 훗날 명칭으로 이를 일선통교사(日鮮通交史)에 송현산(松峴山)으로 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동 부지(府誌)에 송현산은 초량 신객사의 앞에 있다고 하는데, 객사는 지금의 부산공립보통학교에 해당하고, 용두산에 대하여 왜관의 동남 해안에 돌출한 작은 산을 용미산이라고 한다. 이 산은 조선의 고지도에는 흔히 동산(東山)으로 되어있다. 용미산도 용두산에 대해 훗날의 명칭일 것이다. 일본인이 이를 호기(呼崎) 라고 한 것은 용미의 조선음 ヨンミ에서 유래하였을 것인데 용두산에서 옛날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이곳에는 수목이 울창하였다. 또 이 산의 북쪽에 복병산 기슭이 이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절개하여 대청정(大廳町)의 도로가 되었다. 복병산에는 옛날 일본인의 묘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서쪽의 아미산공동묘지로 옮겼다. 1678년(연보6) 초량왜관의 이전이 성립된 것은 대마도 소우씨(宗氏) 제24대 요시자네(義眞) 때였는데 그는 해상항로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왜관의 중앙 높은 곳에 바다의 전망이 좋은 정상에 돌로 만든 작은 신사(神社) 금도비라 대권현(金刀比羅大權現)을 세웠다. 이것이 용두산 신사의 시초라고 한다. 그 후 스미요시(住吉) 대신(大神) 외 칠신(七神)을 합사하였으나 신사건물이 지금처럼 훌륭하게 된 것은 1899년(명치32) 무렵부터이다. 이 용두산 신사 외 별도로 그 옆에 변천신사(辨天神社)가 있다. 옛날에는 이곳이 훌륭하였다고 한다. 다음에는 왜관의 주된 건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설물 쪽에서 보면 초량왜관의 주요부분은 용두산 서쪽에 있었다. 즉 지금의 서정(西町) 1丁目, 2丁目, 행정(幸町) 1丁目이다. 이 지역에는 동관, 중관, 서관의 3관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줄지어 있었다. 각 관마다 대청(30칸) 동헌(53칸) 서헌(39칸)으로 이루고, 각 관에 동랑, 서랑(각85칸)으로 불렀으며 2동씩 부속건물(長屋)이 설치되었다. 이들 각 관은 도주 소우씨(宗氏) 또는 가신으로부터 파견된 사절과 일행의 거소로 충당되었다. 사절의 자격에 따라 동관을 특송옥, 중관을 참판옥, 서관을 부특옥이라 하였다. 동관의 위치는 지금의 상업회의소, 중관은 동본원사(東本願寺), 서관은 후쿠다(福田)주점에 해당된다. 이에 부속된 동서행랑 2동의 건물(長屋)은 각 관의 서쪽 방향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오늘날 동본원사 쪽에 구 건물(長屋)의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동, 중, 서 3관의 구역은 도랑으로 둘러싸고 이 도랑은 중천(中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쪽 즉 서정(西町) 3丁目, 4丁目은 일대가 소나무 숲이었다. 다음에 용두산 동쪽 중턱 지금의 부산부청 자리에 관수옥인 관수의 저택이 있었다. 관수는 왜관내외의 모든 업무를 관리하고 있었다. 1637년(관영14) 초량왜관으로 옮기기 전에 처음 설치되어 왜관 내에 상주하였는데, 수년마다 교체되어 1873년(명치6)까지 계속되었다. 용두산 동편 오르막입구 북쪽 지금의 혼마치(本町) 3丁目에 재판옥이 있었다. 재판은 외교관의 명칭으로 임시로 와서 머물렀는데 기한은 정해지지 않고 조선 관리와 교섭 또는 조선통신사의 송영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다음에 재판옥의 남쪽, 지금의 부산경찰서 주변에 개시대청이 있었다. 개시대청은 왜관내의 시장으로 매월 3과8의 날에 열리고 임시로 개시일은 관의 허가를 받은 조선상인 등이 동래부에서 받은 표찰을 지참하고 물자를 갖고 수문(守門)으로 들어와 이곳에서 거래를 하였다. 이 시장에서는 양국관리가 나와 이를 감독하였다. 지금의 부산부청 정원 앞에 옮겨놓은 돌에 새겨진 왜관제찰(倭館制札)에 “개시(開市) 때 각 방에 잠입하여 몰래 상거래를 하는 자는 쌍방 모두 사형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보아 얼마나 단속이 엄격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일용품은 새벽시장이라고 해서 매일 아침 조선의 상인이 시장에 와서 조선과 일본 관리의 감독아래 상거래를 하여 관내의 수요를 충당하였다.
왜관주위의 돌담에는 세 개의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쪽문은 수문(守門), 북쪽 문을 연석문(宴席門), 남쪽 문을 부정문(不淨門)이라 했다. 또 연석문에 가까운 곳에 연향대청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를 개략적으로 설명하면 수문은 왜관의 통용문으로 그 내부는 일본 측, 외부는 조선에서 지키고, 출입자에게는 표찰을 주어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문 양쪽에는 조선인 통사(通詞)의 방이 있고 문 앞에는 초소를 설치하여 군관, 개시감독 등을 두었으며 마구간까지 갖추어졌다. 관내의 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왜관제찰의 비석이 있고 다음에 오카치메쓰케(御徒目付) 건물이 있고, 오요코메쓰케(御橫目付) 건물이 있는데, 문과 관내의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확인이 어려운데 이를 지도와 古老의 기억을 더듬으면 틀림없이 혼마치(本町) 1丁目 제일은행지점의 사환숙소 자리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된다. 용두산 동쪽 기슭과 이어진 돌담은 이곳에 이르러 해안으로 연결되어 직각으로 구부러지는데 그곳에서 북쪽으로 이 문이 세워졌고 문 바깥의 도로는 돌담과 병행하여 해안을 따라 혼마치(本町) 4丁目 및 5丁目의 높은 지대의 도로로 통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혼마치(本町) 2,3丁目 동편의 가옥은 이 도로와 돌담의 기초부분에 세워진 것이다. 연석문은 앞서 언급한 서관(부특옥)의 서북에 세워져 이 문을 나오면 도로를 가로질러 곧장 연향대청으로 통했다. 즉 일본 사절을 대청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이와 같이 불렀다. 이 문이 있는 부분은 관의 안쪽을 바라보고 더욱 돌담을 돌출시켜 옹문(甕門)을 만들고 내부에서는 이 옹문을 통하여 정문을 나오도록 이중으로 만들었다. 이것 역시 경계를 엄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문의 위치는 아마 대청정(大廳町) 3丁目과 서정(西町) 1丁目의 곡각인 쿠라바시(倉橋) 다다미 집(疊屋) 및 그와 인접한 가옥의 주변에 해당된다. 연향대청은 조선의 관리가 일본사절을 접대하는 곳으로 양국 외교관의 회견장이다. 오늘의 대청정(大廳町) 4丁目 제일초등학교가 있는 곳에 위치하였다. 연석문을 나와 약간 오른 쪽에 있는 도로를 건너면 바로 이곳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대청은 대청정(大廳町)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종래 왜관과 달리 왜관울타리 바깥에 있었다. 실제로 본 사람에 의하면 이 대청은 훌륭한 건물은 아니지만 꽤 장대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정면에 연대청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겸제(謙齊)의 그림을 보면 건물 정면을 따라 향연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부정문(不淨門)은 지금의 빈정(濱町) 3丁目의 바닷가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다. 이 문은 관내에서 죽은 사람의 유해를 갖고 나와 서쪽 돌담 바깥을 돌아 복병산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문정연간(文政:1818~1830)에 이르러 서쪽의 돌담에 책문(柵門:성 입구의 문)을 설치하여 이로부터 관내의 사람들은 서쪽 초량원(草梁原:일명 佐須黨原)에 나가 산책을 시도하였으나 훗날 왜관 고지도에는 이 문이 기록되지 않았다. 초량원(草梁原)은 지금의 부평정(富平町)에 이르고 토성정(土城町)에는 옛날 큰 토성이 있었다고 한다. 왜관의 경비는 엄중하였는데, 문 바깥의 돌담 주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복병막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감시소로서 그 숫자는 동ㆍ서ㆍ남 세 방향에 각 2개소, 합계 6개소였는데 고지도에는 서쪽에 3개소, 북쪽에 2개소만 보인다. 동쪽 및 남쪽은 바다이므로 설치하지 않았다. 다만 숫자에 있어 고지도에는 1개소가 적은데 누락시켰거나 훗날 증설했을 것이다. 대청정(大廳町) 뒤에 있는 복병산은 복병막이 그 중턱에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또한 서쪽 부평정(富平町) 주변에도 복병막이 있었는데 부평(富平)은 아마 복병의 조선음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대관옥(代官屋)ㆍ東向寺(동향사) 및 기타 위에 기술한 왜관의 돌담, 선창, 삼관(三館), 여러 문에서 연대청에 이르기까지 건축물은 어느 것이나 조선 측의 경비로 운영되었다고는 하나, 왜관 전체의 공사설계는 대마도에서 파견된 운영사절 사지모쿠 자에몽(佐治?佐衛門)이 고심 끝에 이루어진 것인데, 경비의 대부분은 조선에서 지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위에 기술한 주요 건물 외 직접 소우씨(宗氏)에 의해 세워진 것도 적지 않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왜인 스스로 다이칸(代官)ㆍ서승(書僧) 이하의 거소를 짓고 집 내부구조를 빠짐없이 기록하라」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왜관 고도(古圖)에 의하면 용두산 동쪽 기슭, 즉 관수옥(館守屋) 아래쪽에 해당되는 지금의 금평정(琴平町)에는 대관옥(代官屋)이라는 8구(區)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대관(代官)의 저택으로 이 주변을 다이칸마치(代官町)라 했다. 대관이란 관수 감독아래 공ㆍ사무역(公私貿易)을 전담하고 겸하여 문서 등의 업무를 취급했던 사무원이다. 대관의 정원은 처음 24명, 후일 인원이 축소되어 16명이 되었다. 지금 이 거리에 있는 미쓰이(三井)물산회사의 파출소가 있던 주변은 대관옥의 일부로 보이며, 그 뒤편에 당시 건물로 보이는 한 동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지도에 의하면 이 대관옥은 앞서 언급한 시장에 인접했던 것이다. 다음에는 재판옥(裁判屋)과 개시대청(開市大廳)의 중간, 즉 혼마치(本町) 1丁目 서쪽에 해당하는 통사옥(通詞屋)이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역관(譯官)의 관사이다. 관내에서 조선에 관한 업무가 발생하면 먼저 이를 수문(守門)의 조선역관에게 통보한다. 그러면 조선통사는 즉시 달려 훈도와 별차에게 알린다. 그들은 말을 타고 관내의 통사옥(通詞屋)에 들어가 대청, 즉 응접실에서 일본 통사와 담판했던 것이다.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 대청에는 명신청(明信廳) 이라는 괴목(槐木)으로 만든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지금 그 편액(米菴筆)이 용두산의 변천사(辯天社)내에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기념으로 영구보존하고 싶다. 재판옥 북쪽에 명칭과 같이 동쪽 해안을 바라보고 세워진 동향사(東向寺)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 즉 용두산 동북기슭 혼마치(本町) 3丁目에서 대청정(大廳町)에 드나드는 주변 가까운 곳에 정확하게 사카타(坂田)상회의 건너 편 마주보는 방향이다. 이 절에는 서승(書僧) 한 사람이 있어 왕복문서를 전담하였다. 동향사 북쪽 즉 대청정의 모퉁이에는 염색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혼마치 1丁目 부근에는 구 선창이 있고, 앞이 지면도 낮고 돌담도 없이 미곡창고 해안초소가 있어 붐비고 있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돌아 호기(呼崎)의 서쪽 변천정(辯天町) 1丁目 주변에는 창고와 함께 수부(水夫)건물이 있고, 동 1丁目 및 2丁目에는 술집, 두부집이 있으며, 동 2丁目 및 3丁目에는 도자기제조소가 있었다. 고지도에는 도자기 제조소(御茶碗造所) 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소위 왜관야키(倭館?き) 제조소로 대주번(對州藩)에서 도공을 보내 이것을 굽도록 한 것이다. 그 도자기 가마는 지금의 부립병원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도공 중에는 무삼(茂三), 미평태(彌平太)와 같이 명공(名工)도 있었고, 이들 고급도자기는 많은 다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미평태(彌平太)의 묘가 구 복병산 묘지에서 아미산 공동묘지로 옮긴 것을 듣고 이를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발견하지 못했다. 고지도에 의하면 이 도자기 가마 옆에 아라진자(荒神社)가 있었으나 가마의 폐지와 함께 철거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설문(設門) 지금까지 초량왜관에 대한 개요를 설명하였는데 다음에는 왜관바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처음 왜관이 설립되자 피아(彼我)가 입회하여 관 바깥의 일정구역을 경계로 표목(標木)을 세우고 거류민은 아무도 이 경계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부산부청 앞에 현존하는 왜관제찰(倭館制札) 제1조에도 「금표 경계 바깥은 대소사를 막론하고 임의로 나가는 위반을 한 때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이 금표 범위는『日鮮通交史』에 「사카노시타(坂の下)는 민가가 있는 곳까지, 초량항(草梁項)은 민가까지, 해안가는 초량항의 개울 하류까지」로 한다. 사카노시타는 즉 부산에서 동래로 가는 도로에 해당하는 지금의 영주동인 부산공립보통학교의 주변에서 초량동까지를 총칭한 것이다. 이 보통학교는 즉 옛날 객사이며, 그 주변이 경계였다. 교린지(交隣志)에 동쪽은 객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틀림없이 일치한다. 초량항은 즉 왜관 서쪽이 되는 초량들판(草梁原)을 가리키는데 교린지에 서쪽은 서산(西山)에 이른다고 되어있다. 서산이란 지금의 대청정(大廳町) 3丁目 서북의 산을 말하며, 다음에 초량항의 개울 하류 끝이라고 하는 것은 부산시가의 서쪽을 흐르는 보수천을 말한 것이다. 즉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는 범위를 이 하구로 한정하고, 그리고 앞의 기록과 같이 혼마치(本町) 동쪽 중간에 동래로 가는 도로를 따라 철도선로는 당시 모두 해안이었으므로 동쪽에는 금표를 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 보영(寶永) 7년(숙종 36)에 신초량동 방면에 새로이 설문이라는 문을 세워 더욱 일본인의 출입을 엄중히 단속하였다. 동래읍지에「설문 숙종 경인(庚寅) 부사 권이진이 상청(狀請)하여 새로 창건, 또 성을 쌓아 왜인의 왕래를 금하고 문 안의 민가를 성 바깥으로 이전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고, 성(城)에는 설문에 연결된 돌담을 말하는데, 그러나 시중에서는 가끔 이 문을 왜관주위에 설치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큰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정도 새로운 설문의 위치와 구조 등을 알 수 있는 확실한 세 가지 자료를 구했다. 이를 소개하면, 첫째 지금부터 150~160년 전 유명한 조선화가 겸재(謙齋)의 그림에 전일 내가 조선총독부 고적(古蹟)조사과장으로 있을 때 동부(同府)박물관에서 구입한 조선고화로서 가치는 물론, 역사상 참고가 될 만한 것이다. 그림은 동래부사의 행렬이 동래부를 출발하여 부산진, 개운진, 두모진을 통과하여 선두가 신초량에 있는 설문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이 그림에 의하면 설문은 높고 주홍색을 칠한 사주문(四柱門)으로 신초량의 극히 가까운 바닷가에 세워졌고 문 양쪽에 초병의 방이 있다. 또 그 양쪽에 연결된 돌담이 있는데 한 쪽은 해안으로 연결되고 다른 쪽은 높은 서쪽 산위로 뻗어있다. 동래 쪽에서 이 문을 들어서면 큰 건물이 있는데 문에 공해문(控海門)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로써 이 건물이 초량객사임을 알 수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대청에서 조선 측의 관리가 왜사(倭使)를 접대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두 번째 자료는 앞서 기술한 명치(明治) 8년, 일본해군 정묘함(丁卯艦)에 의해 측량하여 동 수로료(水路寮)에서 발행한 부산항 해도이다. 이 해도에는 당시 해안에 있던 왜관과 설문과 함께 부속된 돌담 등이 명확하게 기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문 바로 가까이에는 대동관(大東館)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대동관이란 즉 초량객사이다. 객사와 설문의 관계와 함께 돌담의 위치 등은 모두 겸제의 그림과 일치한다. 세 번째 자료는 명치 8년 강화도 사건 때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구로다(黑田) 특명전권변리대신 일행의 기록인데 이는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기록에서 독자는 앞서 기술해 온 것과 얼마나 잘 일치하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구분으로 석벽(石壁)이 높은 산꼭대기에 이른다. 도중에 문을 마련해 검문하고 이곳에서 안으로 일본인 출입을 금한다. 이것을 설문이라고 한다. 다만 춘추피안(春秋彼岸) 및 중원절만(中元節)에만 넘어가 고관 묘지에 가서 성묘를 할 수 있다. 설문 바깥의 한 마을을 사카노시타(坂の下)라고 하며, 조금 떨어진 같은 바닷가 마을을 고관이라 한다.」앞서 산꼭대기라고 하는 것은 명치 8년 해도에 의하면 엄광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설문 위치는 현재의 어느 지점인가를 단정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전년 실지답사를 했을 때. 이를 고로(古老)에게 물어보았는데, 초량동 부근을 탐사한 결과 우리 일행은 지금의 초량동 화교마을 571호 중화요리점 이흥호(怡興號)부지 옆에서 설문의 초석(礎石)으로 보이는 두 개를 발견하였다. 그 중 하나는 원형이고, 다른 하나는 사각으로 모두 직경이 2尺 남짓이었다.(지금은 불행하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장소를 부산 1만분의 1지도에 맞추었던바 영정(榮町) 6丁目과 7丁目의 경계를 이루는 동서 통로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이 통로 서쪽에 해당하는 엄광산 중턱에는 당시 옛날 돌담으로 믿을 만한 돌무더기(石堆)가 길게 연속적으로 존재한 것을 확인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단순히 산꼭대기에 약간만 남아 있다. 따라서 오른 쪽 지점을 설문의 옛 위치로 가정해 두었다. 그 후 앞서 기술한 3개의 새로운 자료를 구해 이 가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인용한 기록에 의해 명치8년 설문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설문과 함께 돌담이 확실하게, 같은 해 정부발행의 해도에 기입되어 한층 분명해졌고, 또 그 위치가 사카노시타 즉 초량동 입구의 바닷가인 것이 확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에 의해 당시 일본거류지의 가장 북쪽경계라고 해야 할 설문위치를 알고 또 매우 정밀한 옛 그림에 의해 그 광경을 되새기게 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사카노시타에 세워진 금표 위치는 지금 이를 아는데 이유야 어떻든 이 위치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지금 이 주변을 실지답사 한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 고로(古老)의 직접이야기를 참고로 다음과 같이 옮겨본다. 첫째 당시 65세로 35년 전부터 고관에 사는 어느 조선인의 이야기이다. 「그가 설문에 대해 가장 먼저 기억에 떠오르는 것이 문 앞에 큰 나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문의 자리에는 지금의 중화거리의 중간쯤이었을까! 중국영사관에서는 약간 남쪽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동래감리서로 된 객사 쪽에서 말하면 일본의 1정반(町半) 이상이나 중국인 거리 쪽에 치우쳤고, 그리고 그 문 부근에는 아무런 인가도 없었습니다. 돌담은 돌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고 갯돌과 산돌을 5~6척의 높이로 쌓아올린 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 15~6년 전에는 산위에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인가가 들어서고 매립이 시작되어 흔적도 없이 되었습니다. 일본인은 그 문 주변을 총칭하여 사카노시타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당시 76세 문구(文久) 3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지금 부산부에 거주하는 어느 대마도 사람의 이야기이다. 「부산 사람들이 혼마치(本町)거리를 북쪽으로 가서 상업학교와 보통학교가 있는 긴 언덕을 내려가는 곳을 사카노시타라고 합니다. 즉 지금의 중화거리가 된 주변을 말하는데 중국 영사관이 있는 주변까지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설문은 지금의 중화거리의 중간 정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신문(新門)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말하면 동래감리서가 된 객사 쪽에서 흘러오는 작은 개울을 징검다리로 건너, 다시 하나의 작은 개울을 이것도 징검다리로 건너 그로부터 1정(町) 남짓 간 곳에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은 사주문(四柱門)으로 양쪽에 초병(哨兵)의 방이 있는 훌륭한 문이었습니다. 둥근기둥(丸柱)으로 된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초병이 있는 곳은 앞이 마루이고 안쪽이 온돌로 되어 있었습니다. 돌담은 문 양쪽에 있었는데 한쪽은 바로 해안에 접했고 다른 쪽은 서쪽 산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돌담은 갯돌과 골짜기의 돌을 크고 작은 것을 섞어 쌓아 올렸는데 그 높이는 6척이나 되었습니다.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중화거리의 중간 쯤 중국영사관의 이쪽에 그 문의 둥근기둥(丸柱)의 초석이나 초병의 방 초석(礎石)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었습니다. 지난번에도 그곳에 들러 2~3개의 기둥 돌(柱石)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이상 기록에 의하면 조선과 일본의 두 고로(古老)의 이야기가 일치될 뿐만 아니라 그 문의 제작방법, 돌담의 모양 등은 겸제의 옛 그림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설문에 대하여는 이 해 10월 조선총독부 발행 잡지 조선 제125호 시정 15주년 기념호의 졸고를 참조바람) 大東館 및 誠信堂 등 다음 대동관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동래부에서 초량왜관으로 오는 데는 부산진, 개운진, 두모진을 지나 초량동에 들어와 사카노시타의 설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설문을 들어서면 바로 객사가 있었다. 이 객사 이름을 대동관이라 했다. 즉 소우씨(宗氏)의 사절이 와서 숙배식을 했던 곳이다. 숙배식은 경장14년 소우 요시토시(宗義智)가 야나가와 토모나가(柳川智永) 및 승려 겐소(玄蘇)를 국교회복 후 최초의 사절로 파견하였으나 이때부터 조선은 종래처럼 사절의 상경을 허락하지 않고 부산성내(부산진)의 객사에서 숙배로 국왕접견을 대신하게 하였다. 숙배는 뜰에 앉아 전패를 향해 사배(四拜)의 예를 행하는 것이다. 이 무렵에는 임시로 왜관을 절영도에 둔 무렵인데 두모포로 왜관을 이전한 뒤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보(延寶)원년 초량왜관 이관이 결정되어 객사를 왜관 가까운 이곳에 중건하게 되었다. 마침 연보(延寶) 4년으로 왜관 낙성에 앞선 2년인 초량왜관 설립 후에는 대마도의 사절은 모두 설문의 객사에 와서 숙배식을 거행하였다. 흔히 왜관이 인접한 연대청을 내대청(內大廳)이라 하고, 이에 대해 대동관을 대청(大廳)이라고 하였다. 이 객사는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으나 영원(寧遠), 공해(控海)의 삼루문(三樓門)과 함께 양무(兩?)가 있어 꽤 웅장하였다. 이 객사는 명치 29년(조선 건양 원년) 감리서가 설치되었을 때 동래 감리서가 되었다. 감리서는 외부에 속하고 개항 내 일체의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거류 외국인에게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소이다. 감리서는 명치39년(광무10) 통감부 설치 후 이를 폐지하고 그 사무는 부윤(府尹)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이후 이 객사의 건물은 부산공립보통학교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명치42년(융희3)으로 기억하고 있다. 객사의 서쪽 약 1町 남짓, 영주동 고지대에 성신당이 있었다. 보통 이것을 임소(任所)라 하였다. 즉 훈도가 머물던 곳이다. 훈도는 동래부의 관리로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그 건물을 성신당이라 한 것은 교린의 길은 성신이 앞서야 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훈도는 중종 때 삼포왜란 후 일본에 대한 경계를 엄격히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성신당은 4~5동의 부속건물과 함께 돌담으로 주위를 둘렀는데 그 돌담은 지금 일부 남아있고 또 가까운 곳에 느릅나무(楡) 고목은 옛날 성신당 구내에 있었으므로 확실히 기념이 된다. 또 우리가 전년 부산공립보통학교를 방문했을 때 성신당에 걸려있었다고 하는 수신당(受信堂:權東壽筆)이라는 편액이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임소 동편에 빈일헌이 있었다. 이 건물의 부지는 현 부산공립보통학교의 소유로 공지로 남겨져있다. 빈일헌은 훈도ㆍ별차가 있는 곳이다. 훈도ㆍ별차는 훈도 견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훈도와 함께 왜관과 동래부의 사이에서 일ㆍ한 통교의 중간역할을 한 것이다.
다음에 빈일헌 동쪽에 해당하는 보통학교의 뒤편에 통사청이 있었다. 이는 조선인의 일본어 통사가 있었던 곳이다. 요컨대 빈일헌ㆍ통사청은 객사와 성신당과의 사이에 있었으므로 그 외 하인이 있는 사령청(使令廳) 및 마구간 등도 각기 그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명치8년 구로다(黑田)전권대사 일행의 기록에 해안을 따라 수문을 나가 동북 20町 남짓 거리에 시탄고가 있고 쌍악(雙嶽)이 있는데 조ㆍ일 양국의 죄인을 처형하는 곳(小田는 옛날에는 혼마치 5丁目과 영주동의 사이, 바로 서쪽 산에서 오는 두 개의 돌출부분이 있었는데 이를 쌍악<二つ嶽>이라 했고 그 하나는 형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두 개 모두 절개되었다고 한다.) 길 왼쪽에 기와집 여러 동이 있는데 훈도ㆍ별차의 임소이고 마주보는 건물 한 구역을 대동관이라 하며 소우씨(宗氏)의 가신이 숙배를 하던 곳이다. 중문양무(重門兩?)가 있고 영원문(寧遠門)ㆍ공해문(控海門)이라 하는데 근래 많은 손질을 하여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옛날 이곳의 풍광을 엿볼 수 있다. 유래도시ㆍ항만ㆍ도로 등 문명시설발달과 유적유물의 보존과는 양립이 어려운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산 왜관의 유적은 조ㆍ일 외교사상 가장 기념해야할 일이고 또 일본이 대륙진출에 오랜 세월 각고의 경영을 말해주는 유물이므로 적당한 범위에서 이 유적을 보존하는 표식을 하고 싶다. 지금 한 차례의 조사만으로는 극히 불충분하며, 또 시간이 없기 때문에 조사 후 시간을 경과한 것은 유감이지만 이에 대요를 기술하여 부산일보 지상에 연재하여 독자에게 일독을 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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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나무 원문보기 글쓴이: 이성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