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룡이의 노래
2) 둑새풀죽, 보리누룽지
새벽종이 울렸네. /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 새마을을 가꾸세.
새마을 노래가 골골마다 울렸다. 그 우렁찬 노래처럼 산과 들은 파랗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일룡이네 집에는 밥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 세상은 배부름이 휘날리는 새마을을 달려가는데, 일룡이네는 흙바람 덮인 보릿고개 중턱에 주저앉아 고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난 봄판엔 일룡이가 결석을 했다. 아침을 굶고 점심 도시락은 못 가져가도 결석은 하지 않던 일룡이었다.
전날 일룡이 새엄마가 부엌칼을 들고 나섰다. 아침과 점심을 내리 굶은 일룡이와 이복동생 봉이가 부엌문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남의 집 일을 해주고 돌아오는 엄마를 보며 봉이가 배를 쓸었다. 엄마는 오늘 밥을 얻어오지 못했다. 땅거미처럼 그늘진 엄마가 머리를 줘 박았다.
‘그지 같은 년. 너만 굶었냐? 느이 할매도 어빠도 죙일 굶었넌디.’
봉이가 으응 울음보를 터트렸다. 엄마는 개울 앞에 늘어선 다랑논으로 갔다. 논바닥에는 둑새풀들이 푸른 융단을 펼쳐놓고 있었다. 가운데손가락만큼씩 자라난 둑새풀을 새엄마는 칼로 베었다. 바구니 안에 풀잎들이 들어찼다. 다른 집들의 저녁연기를 바라보며 새엄마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아궁이의 불꽃이 붉게 타오를수록 어둠이 진해갔다. 솥 안에서는 오래도록 둑새풀들이 끓다가 파랗게 죽이 되었다. 그 봄밤에 일룡이와 봉이는 솥이 닳도록 숟가락질을 했다. 아주 조금만, 허기나 면해보라고 끓인 풀죽을 둘이는 배부르게 먹었다.
일룡이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아픔이 쏟아졌다. 배를 쓸고 가는 아픔이 엉덩이로 밀려 내렸다. 새벽부터 쏟아진 푸른 풀똥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배를 움켜쥐고 뒷간을 들락거렸다. 아침도 굶고 점심을 굶어도 쏟아지는 풀똥은 멎지 않았다.
‘에구, 그 독기 서린 풀죽을 그리 먹었다니.’
‘월매나 먹을 게 읎었으믄 그맀겄어? 그 죽이다 보리 한 주먹만 늤어두 저런 배탈은 면했을 건디.’
산골의 봄판엔 풀들이 지천이다. 그 풀들을 밥처럼 먹을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고 일룡이네 담벼락을 서성이던 바람들이 중얼거렸다. 논둑과 밭둑을 가득 메운 쑥들, 다른 집에서는 그 쑥을 뜯어다 밥에 넣기도 하고 떡을 해 먹었다. 쑥은 곡식을 절약해 주는 소중한 나물이었다. 그러나 쑥이 밥이 되진 않았다. 쌀이나 보리쌀에 섞일 때엔 쑥밥이 되고 쑥떡이 되지만, 쑥만으로 한 음식은 탈을 일으켰다. 둑새풀도 죽을 쑬 수는 있지만 곡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배탈을 불렀다.
풀이 지천인 만큼 음식을 대용할 수 있는 풀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람은 소가 아니고 염생이가 아니었다. 곡기가 들어가지 않은 풀만으로는 밥이 되지 않았다. 삘기를 뽑아먹고, 찔레순을 따먹고, 싱아를 꺾어 먹어도 그것은 늘 간식거리가 될 뿐이었다.
일룡이는 하루가 지나 학교에 갔다. 다른 날처럼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발짝 뒤쳐져 걸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마른 일룡이의 얼굴이 더 쪼그라졌다. 그런 일룡이의 손에는 누룽지 한 덩이가 들려 있었다. 검버섯 돋은 바위처럼 거무튀튀 보리누룽지였다.
‘저를 워쪄? 애덜이 핵겨두 뭇 가구 설사만 허구 있다넌디.’
‘보리쌀이래두 한 종구락 퍼다 줬으믄 똑 좋겄넌디.’
일룡이와 봉이가 학교를 가지 못하고 뒷간을 전전하던 그 날, 이웃들이 한둘씩 일룡이네 사립문을 밀었다. 식은 보리밥 한 식기며 보리밥누룽지가 일룡이네 부뚜막에 놓였다. 그것은 일룡이네 식구가 두어 끼니 상에 올릴 만큼이었다. 식은 밥은 데워지고 누룽지는 솥 안에서 죽이 되었다. 아침까지 그렇게 배를 채우고 일어선 일룡이 손엔 누룽지 한 덩이가 쥐어졌다. 그것은 일룡이의 점심 도시락이었다.
일룡이는 주머니에서 보리누룽지를 꺼내들었다. 혀를 내밀었다. 침을 듬뿍 발랐다. 이빨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누룽지를 뜯어냈다. 입안으로 굴러든 보리알갱이들은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일룡이의 침에 몸을 녹였다. 그 딱딱함들이 입안에서 풀어질 때면 일룡이의 얼굴에서는 달착지근한 미소 한 덩이가 피어올랐다.
‘날링아, 너 뭐 처먹냐?’
앞서가던 아이 하나가 돌아보았다. 우물거리던 일룡이 입이 문득 멈칫했다. 입을 향하던 오른손이 화들짝 엉덩이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첫댓글 저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