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 계몽주의 시인 이해문
박 희 영
1
가난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 속에서 사상은 오만이요, 지식은 무지한 민중의 폭력이다. 어떠한 사상도 헐벗고 굶주린 민중을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따라서 새로운 문명으로부터 발달된 영농기술과 산업기술을 받아들여 현실의 고통으로 벗어날 수 있다면, 친일파인들 못하겠는가.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된 이해문의 수필 행복한 행복의 청산에 보면 ‘우리는 영웅도 성자도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신경한 우인이나 산 목내이(木乃伊)<미이라>가 되고 싶지도 물론 않다. 다만 평범하고 순진한 인생 오직 평화와 행복을 최고 이상으로 하는 순교도적 방념(芳念)의 소유자로서 인생의 전가(戰街)위에 하루바삐 몽환(夢幻)의 낙원을 건설하여보자는 간절한 기원의 소망을 지닌 무명의 여객(旅客)이 될 것뿐이다.’ ‘나는 역경에 미소 짓는 현실의 불행아, 그러나 갈구하는 빛난 이상을 지닌 용감한 사나이다.’ 라고 하였다.
이해문은 가난한 어린 시절 그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통신교육과정을 통한 고독한 독학의 길을 걸어 가야 했다. 지방의 면서기를 지내면서 비참한 농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일본의 영농기술을 받아들여 보급하고자 했던 그의 생각은 심훈의 생각과도 일치했으며 상록수에 등장하는 실제인물 심재형과도 교분을 갖고 있었다.
그의 시에서는 상당부문 어려운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여 간결한 문장을 만들기보다는 산문적 시를 통해 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공감을 얻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한 그의 경향에 대하여 이재인과 심원섭은 향토적이고 전원적인 작가라 칭했으나 배성우는 친일적인 시를 썼으며 시가 산만하여 완성도가 떨어진다. 라고 비평하였다. 이런 평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해문에 대한 연구가 이뤄진 후 결론이 내려질 것이지만, 현재 이해문은 문단에서 그리 높게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배성우는 그 시대의 어떤 시류에도 포함되지 못한 이해문의 태도를 지적하였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의 테두리에 빠져 오만과 편견 속에 오직 이상향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될 자세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시가 난해하지 않고 산문적이면 서사적 경향을 지니게 되는데, 지금의 평론가들 입장에서 보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나 당시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는 시로서 평가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신문에서 그의 작품을 자주 싣게 되는 것도 독자들의 평이 좋았기 때문이다.
2
이해문은 1911∼1950. 시인.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신. 아호(雅號) 또는 필명(筆名)으로 고산(孤山)과 금오산인(金烏山人)을 사용하고 있는데, 전자는 예산의 옛 지명이고 후자는 그가 다녔던 예산보통학교의 뒤에 위치한 산의 이름이다.
그는 예산보통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5학년 때 중퇴했다고 한다. 그가 학업을 중단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라고 하지만, 그 확실한 것은 확인되어 있지 않다. 이후 독학으로 한학(漢學)과 중등 과정을 통신강의록으로 학습하여 공무원 시험에 합격, 예산군 관내 면사무소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가 어떤 경로를 밟고 문학수업을 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193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본명 이외에 고산 또는 금오산인 등의 이름으로 지상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7년 6월에 창간된 시동인지 ≪시인춘추 詩人春秋≫와 1938년 6월 창간된 ≪맥≫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전자 ≪시인춘추≫는 이가종(李家鍾)·황백영(黃白影)·박노춘(朴魯春)·이해문 등 예산 및 그 인접의 지역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문은 그곳 관내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다가 1950년 6·25동란 때, 인민군에 의해 부르조와 반동으로 몰려 총살되었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고향인 대술면(大述面) 소재의 선영에 있다.
시집으로는 1939년 1월 시인춘추사에서 간행한 ≪바다의 묘망(渺茫)≫ 한 권이 있을 뿐이다. 이외에도 시와 수필 및 평론 등이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각 지상에 다수 발표되어 있으나 정리되지 않았던 것을 이재인.심원섭이 발굴하여 정리하여 고산 이해문 전집을 발간하였다.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인생이 예술을 낳는다”는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였듯이, 이는 바로 그의 시적 기조가 되기도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 곧 감상과 낭만성이 그의 시적 특색으로 되고 있다.
이해문의 첫 시집 바다의 묘망 [――渺茫]은 B6판. 326면. 1938년 1월 시인춘추사(詩人春秋社)에서 출간하였다. 이 시집의 머리에 〈서 序〉(朴八陽)·〈시고(詩稿)를 통독(通讀)하고〉(金華山)·〈한글 교열(校閱)에 관하여〉(金炳濟)·〈자서 自序〉·〈서시 序詩〉 등을 위시하여 발문으로 향우(鄕友)인 황백영(黃白影)의 〈발 跋〉이 실려 있다. 총 143편의 시작들을 유형화하여 편성하고 있다.
제1부 ‘황혼의 심정’에 6편, 제2부 ‘사색의 밀림’에 6편, 제3부 ‘영혼의 탄식’에 6편, 제4부 ‘그리운 추억’에 7편, 제5부 ‘봄의 기억’에 5편, 제6부 ‘나의 무한천변(無限川邊)’에 14편, 제7부 ‘춘소(春宵)의 비가(悲歌)’에 10편, 제8부 ‘정열의 폭우(暴雨)’에 10편, 제9부 ‘바다의 묘망(渺茫)’에 6편, 제10부 ‘동경(憧憬)의 포구(浦口)’에 6편, 제11부 ‘자연의 송가’에 10편, 제12부 ‘인생독본’에 11편, 제13부 ‘정서방가(情緖放歌)’에 20편, 제14부 ‘저녁의 왕궁’에 8편, 제15부 ‘영원한 비밀’에 7편, 제16부 ‘명랑한 비장(悲壯)’에 13편 등과 같다. 이들 중에서 제13부의 ‘정서방가’에는 시조작품을 모은 것이고, 제14부 ‘저녁의 왕궁’에는 산문시를 모은 것이다. 그리고 제16부 ‘명랑한 비장’은 부록으로 ‘적(敵)의 송가(頌歌)’를 부제로 달고 있는데, 이들 시편은 원래 제2시집을 기획하고 쓴 것이라고 한다. 이는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애상적 정열은 내 과거의 시상(詩想)이었다.……그러나 이제 내 길은 그것이 아닐 것을 깨달았다. 좀더 명랑, 웅건(雄健)한 길, 거기에 따르는 건전, 청랑(淸朗)한 보곡(譜曲)……운운”하고 있는 바, 제2시집부터 시적 전환을 의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내 생활의 모든 것을 포함한 새롭고 웅건한 멜로디와 하모니와 보표(譜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집의 수록한 시편 중에서 고향의 자연과 인정을 소재로 애수적 정감과 낭만을 기조로 한 것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이 작품이 실려있던 시인춘추 [詩人春秋]는 1937년에 창간되었던 시 중심의 문예지. A5판 50면 내외. 1937년 6월 창간되어 1938년 1월에 2호, 같은 해에 3호를 내고는 종간되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이인영(李仁永)이다. 황백영(黃白影)이 충청남도 예산에서 수집, 정리했고 서울의 시인춘추사에서 발행하였다. 어떤 주의나 경향을 내세우지 않고 기성시인들의 순수시를 모았다. 1호에는 이해문(李海文)의 〈서시 序詩〉, 박노춘(朴魯春)의 〈항해 航海〉, 조은호(趙殷鎬)의 〈산 山〉, 마명(馬鳴)의 〈사랑〉·〈심창 心窓〉, 이고려(李高麗)의 〈황혼 黃昏〉, 박노홍(朴魯洪)의 〈소곡 小曲〉, 김북원(金北原)의 〈대륙(大陸)의 소야곡(小夜曲)〉, 김광섭(金珖燮)의 〈가마귀〉 등의 시들과 잡조들이 실려 있으며, 2호에는 박세영(朴世永)·조벽암(趙碧岩)·유창선(劉昌宣)·신석정(辛夕汀)·윤곤강(尹崑崗)·오장환(吳章煥) 등의 시들과 잡조가 실렸다. 시문학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기성시인들의 독선적 태도를 초월하고 신시인군(新詩人群)의 근로(近路)를 명확히 할 것을 주장한 신인들 중심의 잡지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시인춘추는 제 4호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 제3호와 제4호는 찾아볼 수 없다.
3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평가되어야 되어지겠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작품의 평가를 꾀한 평론가는 없다. 단지 여기서 그가 왜 실용주의적 계몽주의 시인인가를 말하기 위해 작품 몇 개를 올려보기로 한다.
幻想
-都市에의眞言_
야가(夜歌)-어둠이 진을 친 골목골목의 침묵(沈黙)
이곳은 빛을 읽은 무리들이 처가(妻家)
그들은 지금 한가로운 숨결 꿈속에 안겨
그들 마음의 태양(太陽)을 그린다
쇠잔한 등불 아직도 가물거리는 밤 열한시
좁은 방 어지러운 속 옆에는 젊은 아내가 누어있다
바스락거리는 책장(冊帳)[강의록(講義錄)]
배워야하리 배워야하리 가슴 깊이 간직한 서원(誓願)을 지니고
호 - 하고 입김을 손에 뿜는 청년(靑年)
매일매일(每日每日) 우유차(牛乳車)를 끄는 그 청년(靑年)의 그림자 거리에 헤맨다
적은 문(門) - 톡톡, 흘러나오는 담뱃대 터는 소리
방안에는 나이 오십(五十)이 넘은 여인(女人)의 홀로 앉은 외로운 그림자
때때 이불을 헤앗는 십여세(十餘歲)된 소년(少年), 그 아들의 등위를 더듬는다
-심줄선 손, 다시 담배봉지를 끄당기며
[저것이 발서 돈버리, 나를 먹여주다니]-
늙은 여인(女人)의 서글픈 웃음-
소년(少年)의 옆에 눕은 십칠파(十七八)된 처녀(處女)의 몸에 어리운다
모두들 잠들은 이곳 신촌(新村)의 풍경(風景)
기름장사 숱장사, 생선장사, 목수, 판수, 두부장사-등등
집집문 굳게 닫힌 방안에는
다투어 낳아 놓은 새 희망(希望)들의 진열(陣烈)
그것들을 거느리고 생(生)의 애착(愛着)들을 지니고
그래도 대지(大地)위에 악쓰며 넘어지며 바각거리는 그들
아 - 거리, 거리 이땅을 장식하는 생령(生靈)들의 짜내놓은 지대(地帶)여 !
(바다의묘망, 시인춘추, 1938.)
산문적이라기 보다는 자유시에 서사적 요소를 지닌 성격의 시다. 신촌의 처갓집에서 바라다보는 도시의 한 장면 그 속에서 시인은 삶의 고달픈 속에서도 미래를 위해 배워야 한다 라고 하였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늙은 여인과 어린 소년과 방직공장에서 일했을 법한 젊은 처녀를 바라보는 모습은 희망적이다.
‘집집문 굳게 닫힌 방안에는
다투어 낳아 놓은 새 희망(希望)들의 진열(陣烈)
그것들을 거느리고 생(生)의 애착(愛着)들을 지니고
그래도 대지(大地)위에 악쓰며 넘어지며 바각거리는 그들
아 - 거리, 거리 이땅을 장식하는 생령(生靈)들의 짜내놓은 지대(地帶)여 !’
동시대의 이해문과 친분이 있었던 오장환의 병든 서울에서
‘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 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가슴속 울분을 삼키면 자조적인 모습을 보인데 비하야 이해문은
‘배워야하리 배워야하리 가슴 깊이 간직한 서원(誓願)을 지니고
호 - 하고 입김을 손에 뿜는 청년(靑年)
매일매일(每日每日) 우유차(牛乳車)를 끄는 그 청년(靑年)의 그림자 거리에 헤맨다.’
도시의 암울한 현실보다는 미래지향적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바라본 미래는 결과 우리나라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지금의 경제적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확하게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과 시각은 현재 시인들이 추구하여야 할 시창작의 귀감이 될 것이다.
중견시인론(시인춘추 2집)에서 시의 미래는 서사시라고 이해문은 주장하였다. 서양의 많은 서사시를 읽으면서 제대로 된 서사시 한편 없는 그 시대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신부터 서사시를 쓰려고 노력하였으며, 극단적인 의미의 함축은 오히려 시의 고립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 했다. 또한 이상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도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해문의 대중적이고 서사적인 시창작의 이러한 노력은 김동환의 국경의 밤(1925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해문의 환상(1938) 이어지며, 서정주의 질마재(1954)신화, 신동엽의 금강(1967) 고은의 백두산 (1987-1994)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술시라고 평가받는 “봄의 기억” 일부분이다
- 중략 -
그 밤에 길을 걷기 삼십리
울타리 안 살림 만의 당신이
달빛을 벗 삼아 신작로를 동무 삼아 남으로 남으로
행여 누구에게 들킬 세라 발도 재빠르게 숨도 가뿌게
가다가 사람 그림자 띄이면 길 옆에 숨고
못 숨겠으면 길을 서둘러 멀리 동망가듯 피해가고
밤새 걸어서 닫은 곳은 어느 온천장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기차에 올라
실려와 내린 곳이 p읍
- 중략 -
소설의 한 플롯(plot)이나 한 씬(scene)을 보는 듯한 시이다. 이것은 바로 서사시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본다. 완성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이러한 서사적 형태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시인은 많은 부분 지니고 있다. 구재기는 (이해문의시세계, 脈.人地相得, 1994.12.30, 예산문화원)에서 이해문에 대하여 ‘당시 식민지 시대 아래서의 특수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려니와 이에 따른 불확정적 이념에 대한 확신 및 시인 자신의 의식 작용에 의하여 현실 타파를 위한 강한 투지의 시작품에 반영시키게 된다’라고 하였다. 암흑적인 상황 아래서 암중모색의 몸부림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적 논리보다는 그의 이상향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념의 문제보다 우선하여 민중의 윤택한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진정한 인간애적인 관점에서 글을 썼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바다의 묘망(渺茫)
펄덕이는 심장(心臟) 바다 네 묘망한 가슴이여
내 오늘도 그리운 너의 회상(回想)에
두 눈썹 사르를 감아 보나니
오오 안고 싶구나 네 묘망한 자태여
귀범(歸軓) 돌아오는 기세(氣勢)가 기쁨에 넘치고
물결을 차는 흰 갈매기 날개 파도(波濤)위에 한가로울 때
연향(戀鄕) 애틋한 심정(心情)을 해맑은 남국(南國) 하늘에 붙이던
동양(東洋)의 나포리항(港 ) 그리운 네 품이 다시 아쉬웁구나
뭇에서 자라 뭇에서 크기 스물네해
얼마나 네 묘망한 가슴을 절은 연인(戀人) - 볼대기 같이 그리워했던고
지나간 가을 뜻 않고 지어진 항로(航路) 혜택(惠澤)에
항상 그리던 현해(玄海)며 태양(太洋) 내 소유(所有) 었느니만
어이하랴 악착(齷齪)한 생(生)은 뒤미쳐 내 말걸음을 고원(古園)에로 재촉했나니
지금에 그려지는 네 자태 안타까움이여
청춘(靑春) 날아간 새를 쓰린 눈물로 회억(回憶)하듯이
현해(玄海) 네 묘망한 가슴 펄럭이는 심장(心臟)이 한(限)없이 아쉽구나
그러면 바다 내 그러하는 아늑한 품이여
생(生)에 시달리는 혼(魂), 마을 고달플 때마다
연연(戀戀)한 네 영상(映像)에 새로운 용기(勇氣) 북돋는 찬쓰로 삼어보리니
부디 기다리라 방랑(放浪)의 사내 나의 발길 거듭되기를 ..........
- 바다 네 묘망한 가슴이여
내 오늘도 그리운 너의 회상(回想)에
두 눈썹 사르르 감아 보나니 -
(別府港의 回想)
<바다의 渺茫, 시인춘추사, 1938)
친일시라고 비판 받는 시 [바다의 묘망] 이해문은 왜 이시를 자신의 시집 표제로 삼았을까 ? 배성우의 논문에는 이해문은 생활인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민족의 고난 극복이라는 이상 사이에서 힘들어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는 이상에 대한 동경과 조절 젊은 시절의 고민과 반성, 방화의 흔적이 발견된다. 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책문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기를 전후로 그는 많은 부분에서 친일적 문장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데 배성우는 이것을 얕은 역사의식에서 나온 것이고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도 철저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가 친일을 하였는가 ?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감과 공무원이라는 신분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자조적이고 가벼운 평가이다. 그가 만일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그의 작품에서 단순하게 산업시찰과 일본의 명소인 벳브항을 그리워 한다 라고 평가내릴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내선일체를 지지찬동 한다라고 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에는 너무나 시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묘망”(넓고 넓어서 보기에 아득한)한 가슴’ ‘물결차는 흰갈매기’ 그 바다 곧 그런 바다는 미래지향적이고 앞으로 물결 차는 흰 갈매기 같은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다. ‘가슴을 절은 연인(戀人) - 볼대기 같이 그리워했던고’ 시인이 바라는 그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위해 현해를 넘어 태평양으로 그리고 그 너머 나폴리항까지 발달된 문명으로 선진화된 아름다운 도시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목표가 일본을 넘어서는 것이며 새로운 문명을 다 받아드릴 때까지 두 눈썹 사르르 감아본다고 생각만 하여도 감동스러움을 이해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재인, 심원섭, 배성우가 찾아낸 이해문의 작품은 시집 1권, 시 90편, 동요 17편, 수필 26편, 평론 14편, 논설 5편, 시조 7편, 민요 7편, 민담1, 외에도 공주고등학교 교가 외 농촌갱생에 대한 소고 등의 작품 등이 있으며,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작품도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해문의 실용적 계몽사상은 산문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소설 ‘향토화’에서 주인공 김찬영과 리순희 부부의 모습은 당신의 농촌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그대로 표현하였으며,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주인공 김찬영은 절대로 금비를 쓰지 않았으며 퇴비를 얻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인조견과 옥양목을 사지 않았으며 무명옷과 집신을 신었다라고 하였으며 농한기가 되면 언문강습회를 얼었고 그런 두 부부의 모습을 소설의 끝 부분에서 ‘그리하여 찬영은 착착 그 오개년 계획을 수행하야 그의 나희 이십칠세에 이르러는 아름다운 이상향의 형태를 일궜다’ 이렇게 말하였다. 얼핏 심훈의 상록수와 비슷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해문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작품은 1933년9월 금융조합(조문판) 현상모집소설 2등 작품이다. 1948년 백민이란 종합교양지에 자전적 수필 회향.길의 오뇌(懷鄕 길의 懊惱)에서 ‘효의 길과 나의 이상과 가족을 먹이는 부양의 방법과 민족적인 번뇌만이 나의 전신을 억매어 방황케 했던 것도 을유(乙酉)<해방>이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생각하면 나는 지나간 동안 아무 한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계몽의 일을 좀 했다고나 할까?’ ‘서울생활 수년에 고향이 그립고 늙은 부모가 뵈옵고 싶듯이 피로써 조국을 물 드려 새로운 것이 세워진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은 동포와 나의 친구들의 마음이 옛날의 동지로 혹은 8.15 감격의 악수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오직 나의 병약한 꿈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해방 후에도 고향을 떠난 있으면서도 오직 농촌 계몽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하였으며, 이해문 자신도 가난과 부양의 굴레에서 민족적인 번뇌를 내세우지 못한 많은 고뇌와 갈등을 안고 살았던 시인이다 라고 스스럼 없이 고백하고 있다. 또한 격동의 시기를 한탄 하면서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새롭고 폭넓은 계몽의 길을 가려는 자신을 격려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해방이후 이해문의 행적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공무원을 그만두면서 그 동안 못했던 공부와 자신의 실체의 모습을 찾고자 했다. 그를 시골의 공무원에 묶어 두었던 사슬을 풀어 버린 것이다. 가난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나 부모님에게 죄스럽던 마음도 던져 버릴 수 있었으며, 자아실현을 위해 상경하여 성신여학교 서무과, 한성신문 기자를 하면서 한독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한독당에서 김구선생님과 함께 활동하면서 이해문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대한 문제가 민족의 번영을 가로 막는 가장 큰 장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진정한 친일파였다면 김구로부터 내침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민족의식과 민중을 위하는 실용주의적 계몽사상은 김구의 생각과 일치하였을 것이다.
다음은 1969년 백범 김구 선생의 사망에 대한 슬픔으로 조시이다
鳴! 白凡先生
/ 이해문(李海文)
六月 二十六日 下午 一時 半
오오! 해와 달이 빗을 잃은 순간이여
온 겨레 슬픔에 뭇치운 이날 저녁이여
갈라진 강토 우,
아! 무슨 悲報인가
偉大한 조선의 깐디翁!
童子도 밑고잇는 그의 지조에
더러운 탄환이 말이 되느냐
무엇에 눈 어둔 이 겨레 모습인가
祖國을 갈르고 피를 째고
삶을 바라는 어리석은 슬품!
동포여
위대한 그는 드디어 갔고나!
꿈에 그리던 통일의 날
못 보고 떠나신 마음 오작 쓰렸스랴
큰 山 무게인 듯 깊이 모를 사랑
넓은 바다같이 한 없는 가슴속
그러나-
떨어진 巨星은 이제 말이 없고나
(六. 二六-눈물의 京橋莊에서)
(독립신문 1949.6.29)
이해문은 김구의 죽음이 민족의 분열과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보고 있다.
-중략-
폭력은 또 하나의 다른 폭력을 낳고
침략의 손 형제를 나눠
하나 하나 쪼아먹는 습성이 있음을
(평화신문 1948.2.22)
위와 같이 분단이 가져올 비극을 예측하였으며 김구 역시 그런 맥락에서 뜻을 함께하였을 것이다. 육이오전쟁 중 공산주의자들에 출두 요구를 받고 “내 잘못이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라고 하며 출두하여 죽음을 당하기까지 친일행위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아니라 이해문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적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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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의 이해문의 작품 활동은 침체기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는데, 당시의 상황은 조선문학건설본부 와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간의 갈등 그리고 조선문학가동맹과 중앙문화협회, 전국문필가협의회, 청년문학가협회, 조선문화단체연맹, 조선문화단체총연합회 등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단체들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은 이해문에게 어느편에 서있도록 만들지 못하였다. 자리싸움의 이전투구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이해문이 어는 잡지나 신문의 편향적 태도에 호응하지 못한 채 조용히 제 2의 시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손의 증언과 자료에 의해 이재인. 심원섭이 주장) 이해문의 시집 “바다의 묘망”은 당시 가격으로 일원사십전이다. 쌀 한가마 값과 맞먹는 고가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 당시 잡지 시인춘추는 20전, 시문학은 30전 일년 분 일원 육십 전인 것을 보면 자신의 시집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출판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직도 해방 후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의 문학에는 자리다툼과 소모적 논쟁으로 정제된 글 한편을 위해 땀 흘리며 고민하는 많은 문학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이해문은 그 시대의 어떤 시파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개화를 통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야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풍요로워 질 때, 사상과 문학이 올바른 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 이해문 시인이 살아있다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을 것이다.
이해문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평론가들이 등장하면서 지금도 이해문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그 동안 이해문의 작품을 찾으려 노력한 결과 사람들에 의해 상당수의 작품이 발굴되었지만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시인춘추 3집, 4집과 더불어 그가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의 연구 실적이나 업적 등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더욱 많은 후배 문인들에 의해 좀 더 많은 작품을 수집하고 후세의 문인들이 제2의 사후 시집을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또한 그가 바라던 민중의 행복한 삶을 위해 후배 문인들이 갖추어야 될 문학의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첫댓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을 하셨군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ㅎㅎ 바쁘신 중에도 함께 자료를 찾아 주셨던 이병헌(연기자 절대 아님 외모는 더 멋짐) 샘 감사해요 ㅋㅋ 부족한 점있으면 바로 지적해주세요
1. 읽기가 매우 힘드네요. 복잡해서이기도 하고... 편집이 보기 좋게 되지 못했다는 생각. 2. 몇 개의 문장이 바르지 못해서, 앞뒤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네요. !! 첨부파일의 글을 읽어볼것을..ㅠ. 나중에서야 알고 들어가 보았네요~
늦게서야 글을 완독했습니다. 참 어려운 작업을 하셨습니다. 이 글은 우리 예산문학회의 큰 재산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